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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첫 출근
수필가, 행촌수필문학회회원 김재훈

프로농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 선수들의 세대가 교체되면 새 선수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의 플레이는 역동적이며 풋풋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아들아이는 이제 막 프로팀에 입단한 신인 선수라고나 할까.

며칠 동안 아이도 나도 분주했다. 자신의 전공인 전자전기공학을 대학원에서 더 공부하던 아이는 우리가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하는 바람에 그 동안 학교 앞에서 따로 방을 얻어 혼자 살았다. 그런데 벌써 2년이 흘러 다음달에 졸업을 하게 되었으므로 며칠 전엔 그가 살던 집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실어 나르고, 어제는 또 학교 연구실에 있던 책과 소지품 등을 나와 함께 날라 왔다. 18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마지막 배움의 현장을 정리하는 감회가 아이도 나처럼 깊었으리라. 이제 온실 속을 떠나 저 홀로 눈비 오는 세상을 걸어가려면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오늘은 아이가 학생 신분을 벗고 직장인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다. 회사가 안양에 있다하여 나도 지리를 알아둘 겸 아이를 차에 태우고 집을 나섰다. 나 역시 그 지역을 잘 모르지만, 아이에게 지리를 잘 익히도록 자주 주의를 상기시키면서 찾아갔다. 거리가 이렇게 먼 것도 새삼 걱정되고, 직장에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자꾸 염려가 되었다. 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아빠가 미끄럼틀이라며 내 어깨 위로 올라가서는 가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깔깔대던 것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옆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니 내가 처음 출근하던 때가 생각났다. 아마 아이도 그때의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회로의 첫 출발에 대한 설렘도 있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얼마나 서먹서먹하고 어설펐던가. 돌아보면 꿈같은 세월 저편의 기억이다. 근 30년을 한 직장에 몸담으면서 애환도 많았다. 직장은 내게 가족을 부양하게 해준 수입원(收入源)이기도 했지만, 삶의 의미를 깨우쳐나가는 학습의 장(場)이기도 했다. 나는 직장의 일이라면 무엇보다 우선시 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직장을 몇 달 전 퇴직했다. 직장을 그만 둘 때는 아쉽긴 했어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온 탓인지 비교적 담담했다. 다만, 앞으로는 시간에 그리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울 것이므로 생활의 변화는 크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와 보니 변화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상생활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이 내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그게 아니다. 그만큼 내 역할이 줄어든 것이다.

의료보험 카드만 해도 그렇다. 전에는 내가 직장인이었으니 우리 식구는 내 직장 의료보험조합에 자동 가입되어, 회사가 보험료의 일부를 부담하면서 내가 피보험자가 되고, 가족들은 나의 피부양자로 등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퇴직으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혜택이 없는 지역 의료보험으로 바꿔야 했다. 아들이 취업했으니 이제부터는 나를 비롯한 우리가족은 아들의 의료보험 카드에 피부양자로 등재될 것이다.

내가 아이의 피부양자라니! 탱탱하던 공의 바람이 갑자기 스르르 빠져버리는 것만 같다. 아무리 내 육신이 아직도 건재하다한들 인생이란, 마차의 바퀴가 돌면서 착지점(着地点)이 달라지듯, 때가 되면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적극적 삶의 역할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인가 보다. 벌써 이렇게 역할의 변화를 느껴야 한다니 왠지 쓸쓸해진다. 그래도 아직 어딘가에 내 역할이 있지 않을까. 지난 세월과는 다르겠지만 다시 내 역할을 찾는 것은 이제부터 또 다른 내 몫이다.

아이가 다닐 회사가 점점 가까워온다. 나는 다소 긴장돼 보이는 아이를 보며 무언의 주문을 하고 있다. "잘 하거라. 성심 성의껏 열심히 일하고, 직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직장을 다니다 보면 좋은 일만 있지는 않는 법, 때론 갈등도 있고 시련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하는 동안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앞으로 직장 생활에선 함께 일하는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를 벗어나서 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문제가 있을 때는 슬기롭게 헤쳐 나가거라. 학창 생활이 삶의 아마추어였다면 이제 너는 프로 선수가 되어야 한다. 너의 신선하고 화려한 플레이를 지켜보마,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아이를 직장 앞에 내려주고 돌아서 오려니 어쩐지 자꾸만 콧등이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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