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02 18:49

미인의 고민/유영희

조회 수 415 추천 수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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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의 고민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데 나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아침나절 절친한 친구들에게 내가 보낸 문자 메시지이다. 당장 한 친구로부터 답장이 왔다. "앞으로 다섯 번 정도 벽에다 o칠을 하며 살 테니 걱정하지 마라." 잠시 후 또 다른 친구가 답을 보내왔다. 내 미모는 향후 500년 정도는 살 미모란다. 모두들 내가 미인이라 내세우자 거센 항의를 하고 나왔다. 평소에도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식의 장난이 심한지라 문자를 받은 친구나 답을 받은 사람이나 웃자는 의도임을 익히 알고 있다. 답이 없는 친구를 향해 또 한번 문자를 보냈다. "미인박명 면하려고 세수 안 했다. 빨리 와서 얼굴에 숯 검댕 칠해 주라." 저문 오후에 전화를 건 이 친구, 말도 꺼내기 전 혼자 웃음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박명할 미모는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웃음을 깨물고 겨우 말을 마치는데 꽤나 힘들어했다.

느닷없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은 TV의 무슨 프로그램에선지 잠깐 스치는 단어를 듣고 나서부터이다. 누워 책을 보는 남편에게 미인박명이라는데 어쩌자고 나처럼 예쁜 여자를 각시로 두어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하느냐고 말을 꺼냈었다. 책에서 눈도 떼지 않던 남편이 혼잣말을 한다. "우리 집 벽이 튼튼한지 모르겠네." "미인박명이라는데 웬 벽 타령?" 미인과 벽의 상관 관계를 묻는 아내를 향해 남편은 두말없이 일어나 벽에 뭔 칠을 하는 흉내를 낸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미처 깨닫지를 못한 채 멍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벽에 바르고 또 바르면 아무래도 벽 시공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한다. 그때서야 의미를 깨달은 아둔한 자칭 미인.

주변에서는 거센 항의가 속출하건만 내 넉살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내가 먼저 가더라도 너무 가슴 아파 하지마. 죄라면 미인으로 태어난 게 죄지." 마치 내일 당장 미모 탓에 숨이 멎을 사람처럼 미리 마음을 다잡아주려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가 막힌 듯 할 말을 못 찾는데, 말에 탁월한 재치가 있는 어떤 친구는 자기는 이미 죽었어야 할 미모인데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주위에서 절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미인을 자청하며 주말 하루를 웃음으로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지난 날 겪었던 험한 고비들로 인해 내 입에서 들먹이는 죽음이란 말에 너무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글이 조금이라도 비관적이다 싶으면 속이 상해 이제는 아픔의 멍에에서 벗어나 제발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글을 쓰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참으로 고마운 벗들이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지켜봐 주는 좋은 사람들의 깊은 애정에서 내가 힘을 얻는 건 분명하다. 글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읽어주며 행복이든 불행이든 더불어 가려하는 친구가 있음은 참으로 큰복이지 싶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고 아픔에서 탈피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내게 간절한 염원이다. 하지만 섣부른 탈피를 일부러 시도하지는 않는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의도가 건강을 잃어버리며 포기해야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절망과 상한 마음을 토하고 싶어서였다. 토하고, 또 토하다 보면 그 자리엔 새로운 맑은 물이 고일 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삭혔던 20년의 세월만큼을 토해내면 그 작업은 끝이 나려나? 하긴 아직도 날마다 투병과의 동행인데 토해낸다고 다시 고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죽음이란 말을 서슴없이 썼건만 아무도 예전 같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내가 자칭 미인으로 나서는 것에 견딜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참으로 미인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누구나 인정할 미모였다면 아침에 보낸 문자나 끝내 우겨대는 미인박명은 모두에게 또 다른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잘난 얼굴에 대한 교만으로 비쳤을 것이다. 거울 속의 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결코 미인 측에 낄만한 미모는 아니다. 심심하면 친정 부모님께 이왕 만드는 딸, 꼼꼼히 잘 좀 만들어 주지 왜 대충 만들었느냐고 항의를 하곤 하였다. 하지만 못난 얼굴을 들이밀고 오만 소리를 하여도 다들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성격 자체가 외적인 치장에 워낙 둔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점점 개성을 소유한 미인은 사라지고 성형미인이 판을 치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 너나 할 것 없이 천편일률적인 미인만 사는 세상이라면 어느 땐가는 나처럼 못 생긴 개성의 얼굴이 주목받는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코가 작다고 가끔 코를 세워 보라는 권유를 받지만 한번도 그 말에 마음을 빼앗겨 본적은 없다. 수술이라면 지겨운 팔자인 탓도 있지만 외모를 바꾸고 싶은 욕심 자체가 없는 까닭이다. 보여지는 얼굴의 성형보다는 마음을 가꾸고 싶음이 더 큰바람이다. 특별한 재주는 아니지만 내가 쓰는 글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낼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보태어 본다. "미안해. 어쩌자고 미인으로 태어나 너희들에게  빈자리를 보게 하는지. 나도 너무나 가슴이 아파." 하루 내내 거부반응을 보이던 아들녀석은 내일 당장 성형외과에 가서 추녀로 뜯어고치란다. 보나마나 외계인 '이티'의 얼굴일 것이라고 한다. 자칭 미인은 자판을 두드리며 좋은 글을 위해 여전히 고민에 빠져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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