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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최석봉 제2시집 「하얀 강」


과거와 현재를 잇는 메타포의 세월, 그 정체

                                                            문인귀/시인


   아리스토 텔레스는 “시는 가능성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가능성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형상으로 드러나고, 지나가버린 과거가 현실 세계에서 재현(再現)되기도 하며 다가올 미래 또한 현실에서 체감(體感)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시가 가지고 있는 재생능력(再生能力)은 이러한 일들, 즉 우리들의 기억 속에 축적되어있는 이미지(image)를 현실세계에 현현(顯現)시키고 형상화(形象化)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맥락으로 이번 최석봉 시인의 제2시집 「하얀 강」을 보면서 그는 우리로 더불어 그만이 가지고 있던 옹골진 체험의 세월을 함께 음미하게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5년 전, 최석봉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그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그의 시심에 떨어진 모든 씨앗들을 ‘향수(鄕愁)’라는 품종(品種)으로 개종(改種)해놓은 결실들 같았다.
  이민 25년이란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고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럴까 싶었지만 자칫 감상에 젖은 창작활동에 머문다면 안 되겠다 싶어  향후 1년은 고국이다, 고향이다, 친척, 친구를 피한 소재로만 시를 써야할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물론 그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로부터 최시인은 새롭게 터득한 기법을 통해 이미 시심의 염색체가 되어 있는 향수의 요소 하나하나를 세월이라는 긴 실타래로 엮는 일을 했고 곧 그것을 통해 시(時)와 공(空)을, 과거와 현재를 자유로이 오가며 자아(自我)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보다 면밀히 추적(追跡)하는 일을 하고 있다.


      후드득 후드득
      비 오는 소리
      창 열고 보니
      벌거벗은 나무
      비에 젖고 있었네

      사랑이 그립던 시절
      양철지붕 두들기던 겨울비 소리
      밖에선
      그리움이 젖고 있었네
  
      아! 로스앤젤레스 겨울밤
      세차게 뿌리는 빗소리
      창 열고 보니
      세월이었네
      비에 젖고 있는 것은.

           -겨울비- 전문

  40년 전, 혹은 50년 전쯤에 들었던 빗소리가 오늘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유독 비 돋는 소리가 컸던 양철지붕 때문만은 아니리라.
  비가 오면 활동의 공간이 제약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젊은 화자(話者)는 이것을 그리움의 대상을 위한 여백으로 삼았고 젊은 날의 고뇌를, 또한 내일을 향한 설계의 공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잉태하는 너른 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그의 추억 속에는 비에 젖고 있는 양철지붕이나 벌거벗은 나무 같은 것이 빽빽하다. 최시인은 그 원물(原物)들, 과거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흔적과 충격을 현실에 살고 있는 자아의 가치관으로 재현(再現)해 내고 있다. 따라서 비에 젖고 있는 것은 양철지붕도 아니고 벌거벗은 나무도 아니고 사랑이 그립던 시절의 그리움도 아니고 세월마저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비에 젖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월이야말로 자아의 탯줄이기에 창밖에 젖고 있는 것은 세월이라는 메타포(metaphor)를 입은 그 자신인 것이다.


      시에라 산에 올랐다가
      계곡 자갈 사이에서 낮잠 자고 있던
      석어 한 마리 잡아
      벽난로 옆에 두었더니
      온 집안에 잔잔한 물너울이 인다

                 -석어- 중에서

  위의 시는 「석어」의 첫 연이다. 石魚는 조기를 이르는 말인데 어렸을 때 어머니의 팔다 남은 조기를 유달산 바위에다 널어 말리면서 깜박 조는 바람에 석어 몇 마리를 도둑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미국의 시에라 산 건천(乾川)에서 꼭 석어처럼 생긴 돌(수석)을 발견한 것이다. 이 석어는 50여 년 동안 온 세상, 혹은 저 세상까지도 오가며 삶을 즐기다가 필경은 낮잠에 빠져 옛 주인인 최 시인에게 붙잡혔으리라.
   화자는 이 돌덩이를 벽난로 옆에 갖다 두고 바라보고 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 집안에는 조용히 물너울이 일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웃음이 잔잔히 차오르고 있으니, 얼마나 감동적인가. 이와 같이 최 시인의 과거와 현재의 연결수법은 탁월하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에서 이와 같은 시도와 해결,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불종대 아래 / 지게 품팔이 / 손 구루마는 / 종일 서성거리다 어둠에 밀리며 / 가만가만     흥얼거리고 있었다 // 올림픽 거리 김스전기 앞 / 히스페닉들은 / 서툰 영어로 하루를 팔     고 / 비 오는 날 / 함께 내리는 진한 향수 / 와이퍼가 부지런히 지우고 있다.
                                                                   -향수 . 2- 중에서

  과거, 목포의 불종대 아래 모여 섰던 날품팔이나 오늘의 올림픽 거리 김스전기 앞에    모여 하루의 노동을 팔려고 애쓰는 히스페닉의 모습은 우리들의 암울했던 과거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리얼한 광경이다. 마침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목격된 과거와 오늘의 현실에서 그는 손등(와이퍼)으로 아려오는 가슴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지금도 나는
      산 아래 사는데
      밤새 비 내리더니
      하얗게 눈 덮인 시에라 산정,
      거실에 들어앉아
      졸고 있다.

          -산 아래 산다- 중에서

  간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에라 산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더니 그 산정이 집안에 들어와 졸고 있다고 말한다. 세월인 것이다. 분명 거실에 들어앉아 졸고 있는 것은 하얀 머리와 하얀 콧수염을 한 최석봉 시인, 그 자신인 것이다. 그는 이제 음미의 세월이며 꿈을 털어버린 표백의 세월 속에서 그저 하얗고 맑은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그 하얗고 맑은 존재로서의 꿈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갈망하는 것으로 그의 시 「거꾸로 가기」에서처럼 “나는 뒷걸음질로 / 스무 나무 살 적 비 오는 날 / 군대 가는 열차에 올랐다.” 모든 것과 함께 만남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순수한 욕망인 것이다. 그 욕망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 함께 뒷걸음질로 과거를 향해 떠나려는 열차에 오르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기억에 남아있는 원물(元物)을 따라 유형을 달리하며 보다 구체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밀착을 제시하는 동시 자신(自身)을 다음과 같이 확인시키고 있다.

  “지칠 대로 지친 할머니의/가느다란 팔다리 주물러 드리는데/할아버지는 대나무 숲을 지나/서쪽 모퉁이를 돌아가고 계셨어요//누워계시는 할머니는/본 체 만 체/뒷짐 지고 혼자서 가시었어요/어디로 가시는 것일까//폰타나 하늘에는/별들이 하얗게 빛이 나고/대나무 밭에서 소란 떨던 그 바람/할아버지 생각 더 나게 해/할머니 팔뚝같이 가늘어진 아내의 팔뚝/주물러 줬지요.”   -할아버지 생각- 중에서

  “시월에/토랜스 프라자 델 아모 스트릿/메이플 트리 아래를 지나는데/외포리 갈대는 여전히/내 앞에서 흔들거립니다//세월은 갔어도/반쯤 물에 잠긴 갈대의 조용한 흔들림/그 순수,//빨간 엄지 발 꽃게가/구멍에서 나오다 멎던 것은/갈대밭에 이는 바람 탓만 아니었습니다//사랑은 그런 것 아니라고/정복하는 게 아니라고/생머리 누님의 귓속말은 잉잉거리는데/허연 머리카락은/왜 이렇게 내 눈썹을 살랑거리는지/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외포리 하얀 갈대밭- 전문

  “LA 봄소식은/돌배 꽃이다//토랜스 불르바드 도로변/1월 마지막 날/꽃 몽우리 머금는 듯 하더니/2월 초순/온통 하얗게 뒤집어썼다//배꽃 같던 누님/충청도로 시집간 누님/앞가슴이 너무 커/옥양목 띠로 칭칭 동이다가/뭘 보느냐고 눈 흘기던 누님/지금은 허연 누님//올해도 /돌배 꽃 쳐다보는데/뭘 보냐고 눈 흘기신다.    -돌배 꽃- 전문


  할아버지
  책상엔
  붓과 벼루

  아버지
  책상엔
  명심보감과 회초리

  내
  책상엔
  컴퓨터와 디비디(DVD)
  
  아들
  책상엔
  시계만 달랑

  초침 가는 소리
  늘 급한 소리.”  

       -사대- 전문

  최석봉 시인은 그의 세월을 자신의 일생 하나로 국한시키지 않고 할아버지, 아버지, 자기, 그리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키를 쥔 아들과 더불어 시간의 무한성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초침이 가고 있는 소리, 늘 급한 소리에 부닥뜨린다. 물론 그의 세월을 이어놓고 있는 사대(四大)에 걸친 변천의 모습에서 급박히 돌아가는 현대의 가치관을 엿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오늘을 있게 한 확고부동한 과거에 비해 오늘을 바탕으로 한 미래에로의 이어짐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생기는 불안이다. 30세가 넘은 세 아들이 아직 아무도 결혼하지 않은 채 총각으로 있는 것에 대한 최석봉 시인의 급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이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공동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최 시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세월의 타래 속에 자아를 부식시키고 그 정체성으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노리고 있다. 팜트리를 바라보며 자식들을 걱정하는 부정(父情)에서, 할아버지의 병간으로 지쳐있던 할머니의 팔뚝을 주물러 주던 기억에서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을, 이북에 넘어가있는 태길이의 삶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자신, 이러한 그의 작업이 본인 자신의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그의 시를 읽는 이들 모두가 함께 충분한 감동과 공감대를 이루게 하고 있다.
  

  최석봉 시인이 사용하는 매체는 물론 향수에 있다. 그리고 그가 노래하는 향수의 근원은 사모(思母)에서 비롯되고 있다. 생선장사 어머니로부터 시작해서 전쟁과 어머니, 간이역에서 치맛자락 날리는 어머니, 꽁꽁 언 땅 말죽거리로 가신 어머니, 이제는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는 미소에 석어(石魚)의 유영을 띄우시는 어머니, 잡은 이무기를 놓아주고 얻은 덜 여문 초록빛 여의주까지 들고 앉아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과거를 끌어내다놓고 나누는 이야기 같은 단편적인 목적에 의해 창작되고 있지 않다. 또한 과거를 확대해서 보다 깊은 노스탈지어(nostalgia)를 부식시키거나 미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어떤 사물(사건 포함)이라 할지라도 그가 개간(開墾)하고 있는 시심이라는 밭에 끼어들면 그것들은 현재의, 또는 미래의 것으로 의인화(擬人化)되어 ‘가능성의 세계’에서 ‘현실성의 세계’를 도래시키고 있는 것이다.
  목포 유달산과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산,  오크랜드에서 프레스노 간의 기차 여행과 대전에서 목포 간의 기차여행,  외포리 갯벌에 찍어놓은 발자국과 시에라 산자락에 올라 지우는 발자국,  그랜드 캐년과 싸릿골 가시내의 음부,  소년시절 측간지붕의 둥그런 하얀 박과 지금의 라스베가스에 뜬 만월,  흔들거리는 버들잎과 휘날리는 색종이,  외포리 갈대와 토랜스 델 아모 스트릿의 가을 잎,  LA 돌배꽃과 시집간 허연 누이,  할머니 팔뚝과 가늘어진 아내의 팔뚝,  불종대 아래의 지게품팔이들과 올림픽 김스전기 옆에 서성이는 히스페닉 노동자들,  어머니의 이무기와 Bad Water에서 잡은 최석봉의 이무기,  이 외에도 수많은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사물은 단순 원소적(元素的) 매체(媒體)로 남아있지 않고 맑은 빗방울마저 질기고 끈적끈적한 매체가 되어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 하는 수법으로 존재의 가치를 더욱 절실하게 들어내고 있다.
  
  그의 시들은 무리하지 않은 언어의 선택과 구사로 구수한 정서의 결정체를 이루어 보다 쉽고 친근한 미소로 우리들 가슴에 파고든다. 분명, 그의 순박한 이미지가 이 「하얀 강」을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참고: 이 글은 재미시협 간행 <미주 시세계> 창간호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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