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원형적 모습에 대한 향수

by 박영호 posted Mar 0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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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학 12호에서 (2007겨울)>

- 지난 해의 미주 시작품들에 나타난 -
자연과 인간의 원형적 모습에 대한 향수                                                                                                                                                                                                                                                                                                                                                      (시인  평론가)  박영호

  미주에서 발표된 지난 해의 시작품은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자연의 근원적인 모습과 인간의 원형적 모습에 대한 회귀를 다룬 작품이 가장 많고, 다음으론 이민시를 포함한 현실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나 생의 가치와 그 지혜를 주로 표현한 일종의 생명시와 생활시에 속하는 작품들을 볼 수 있고, 그리고 사물의 현상이나 존재가치 등 일종의 관념세계나 담론 등을 표현한 시들, 이렇게 크게 세 부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주로 시의 내용에 관한 구분인데, 여기에서는 주로 첫 번째로 거론된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모습에 대한 향수를 다룬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면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이 기영주의 '사라스와티 강을 지나며'’이다.
  시인은 기원 훨씬 이전에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황량한 땅 위를 지나면서, 지금 현대에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 속의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일찍이 계속 흘러오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시라스와티 강이라는 고대 원시사회에 흐르고 있었을 그 강물과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순박한 옛 인류의 모습이 그립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까지 잘못 흘러왔고 지금도 계속 잘못 흘러가고 있는 현대 인류문명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순박했으리란 고대 인류사회의 원시적 인류 모습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현대 사회는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되어 왔지만, 무언가 우리의 이상과는 크게 다른 모습으로  흘러왔고, 지금도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히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일종의 문명에 대한 사색의 세계를 사라스와티 강이라는 사라진 강물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처럼 방대한 인류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비판을 단 몇 행의 언어로, 그것도 보다 가치 있는 미학적 세계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라고 하는 언어예술의 특별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이 바로 시인이 사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멀고 먼
그리고 아주 오래된
강바닥
목선 하나
떠나지 못하고 있다

대 홍수가 나기 전에
사람들은 알았을까
계급사회의 부도덕을
먼 훗날의 자본주의를
모반과 폭력의 세계를
판독할 수 없는 문자로 쓰여있는
인장
증서는 하나도 없다
                      기영주  '사와스오티 강을 지나며' 의 일부(미주문학 2007 여름호)

시인은 잘못 흘러오고 있는 강인  현대라고 하는 인류의 문명과 고대사회의 인류 모습을 지닌 고대의 강물을 넘나들면서 우리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깊은 바회의에 잠긴다. 그리고 그릇된 현대 사회의 인류의 양심을 비판하고 옛 시오스오티 강가에서 풍족한 삶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을 고대사회 인간의 원형적인 모습에 대한 회귀를 부르짖는다.
원래 고대 인도 사막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인더스 강과 그리고 일찍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사와스오티 강이다.
사와스오티 강이 흐르고 있었을 기원전의 고대 인류사회는 다시없이 풍족하고 부도덕과 계급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였지만, 그 강이 사라지면서 우리 인류는 전쟁과 모반과 폭력을 일삼는 인류사회로 타락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두 강물은 인류의 고대와 현대 원시와 문명 그리고 인류의 선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와스오티 강은 이미 에덴동산처럼 사라져버렸다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강인 인더스 강은 지금도 흐르고 있는 현대라는 문명의 강으로 잘못 발전되어 온 인류의 의식 구조와 함께 현대 물질문명 의 병폐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현대 인류의 의식과 문명사회가 무언가 인류의 원형으로부터 크게 잘못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인류가 원래 지니고 있었던 고대나 원시 사회의 순박한 형태로 회귀해야 한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떠나오지 못한 오래된 목선 하나,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는 바의 인류의 순박한 참된 모습이고,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인류의 지혜다. 결국 그 목선은 사와스오티 강과 함께 사라져버린 인류의 바른 꿈과 이상을 실은 배라고 할 수 있고, 그 강물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래도 인류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듯이 그 목선은 강바닥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인류사회의 모습에 대한 대 변혁을 상징하고, 그래서 시인은 이제 강바닥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목선이 떠날 수 있는 그런 노아의 홍수와도 같은 또 다른 대홍수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목선 하나 떠나지 못하고 있다'

위의 표현은 결국 그 배가 떠날 수 있고, 그리고 떠나야만 한다는 변혁을 필연적이고 의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인간의 원형적인 고대 인류와 다름이 없는 순박한 인간의 원형적 모습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원죄 의식이나 인간의 토착적인 일종의 토테미즘적인 의식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인간과의 관계와 자연물로서의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극히 토착적이고 원시적인 관능의 세계를 하나의 설화나 우화적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표현은 결국 하나의 신화나 설화 같은 자연 속의 극히 토착적이고 원시적인 관능세계를 생물의 각기 다른 본능적인 욕망을 지닌 동물이나 식물을 통해서 인간과 동물이나 인간과의 신 사이의 관계 같은 보다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표현해서 관념과 이성으로 짓눌리고 변형된 현대 인간으로부터의 탈출과 원시와 원형적인 본능적 세계에 대한 향수와 그 회귀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 지류인 베니강에서
인디오들이 요행으로 큰 구렁이를 잡았다.
만삭의 아낙 같은 모습이어서
배를 가르니 어린 소녀 하나 잠들어 있었다
구렁이가 제 자식을 배지 않고
사람을 배고 있었다
한 마리 용이 되어 승천하는 화려한 꿈을 접고
지상의 아름다운 사람 하나
기어이 잉태하고 싶었으리
곰도 원시의 동굴에서 백일 동안만
마늘과 쑥을 먹고 기도하면
우리 같은 사람이 된다는데
바람과 해일을 자주 부리던
저 구렁이의 꿈인들 얼마나 절절했으리
                                       배정웅 '베니강에서' 일부 (미주시인 2006년 여름)

  뱀의 꿈을 우리가 생각하는 승천하는 용의 꿈이 아닌 지상의 영물인 인간이 되고파 한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실제 뱀은 인간의 원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인간의 죄악을 연상하게 하는 상징적 존재인데, 시인은 뱀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신이 아닌 인간 쪽을 택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를 배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서로 넘나들 수 있는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우리 고대사회의 원시 신앙이나 모든 생물에겐 똑 같이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애니미즘(animism)사상의 표현으로, 원시사회에서는 동물과 인간이 동질의 생물로 서로 교접하며 살아왔다는 것은 많은 고대 신화나 설화에 잘 나타나 있고, 실제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건국신화가 인간과 동물의 수간(獸姦)에 의해서 인물이 창조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점에서 잘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실제 진화이전의 원시 사회에서는 동물과 인간이 쉽게 교접했으리란 추리가 가능하고, 이는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진화나 돌연변이를 통해 인류가 출현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보면, 우리 인간과 동물의 수간은 고대 원시 사회에서 보다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갓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인의 인간 심리에 수성(獸性)이라고 하는 본능적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성(性)의 심리다. 이러한 성심리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야성(野性)이라고 하는 수성(獸性)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성적 행위를 통해서 수성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억압당한 본성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의 핵인 감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성의 표현은 결국 인간이 현대의 이성적 인간에 대한 하나의 반항 같은 것이고, 아울러 멀리 떠나온 원시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향수와 그 회귀의 꿈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물적인 수성은 야성이고 야성은 원시의 상징이다. 따라서 인간은 부단히 신에게 다가가는 문화 창조를 꿈꾸면서도 원시에 대한 회귀의 꿈을 함께 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인간과 신의 관계처럼 동물과 인간의 관계 또한 동일한 현상으로 보고, 인간과 동물 모두가 이 자연 속에서 미완의 꿈을 꿈꾸고 살아가는 존재적 가치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어디선가 멀리 이 세상 목숨 있는 것들의 /미완의 꿈처럼 창창 으르릉 /아마존의 우뢰가 한참 울었다 "

원시나 다름없는 미지의 땅을 통해서 장엄한 자연의 경이로운 모습과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원시의 존재적 가치로서의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이 함께 꿈꾸는 원시적 관능적 세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결국 이 작품은 이와 유사한 시인의 또 다른 작품  '어떤 풍속' 과 함께 남미의 토착적이고 향토적인 배경을 통해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또 다른 외로움과 관능을 원시적인 에니미즘적 영혼세계를 통해서 원시 자연에로의 회귀를 표현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인간과 동물의 근원적 야성을 통해서 동물적인 영혼에까지 연민의 정을 표현하여 그러한 야성적 원시성에 대한 향수와 그러한 야성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슬픔을 표현한 이창윤의 '늑대와의 시간’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서 늑대가 느끼고 있을 동물로서의 외로움이나 그 슬픔에 대한 연민을 표현 한 것으로, 이 역시 인간으로서도 인간의 원형보다 더 근원적인 생물학적 동물로서의 원형 같은 야성(野性)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인간 스스로가 자연과 신을 거역하고 스스로 뒤집어 놓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릇된 질서를 비판하고 있고, 이에 대한 치유를 바라고 있다. 결국 치유될 질서는 신과 자연이 마련한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자연과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야성에 대한 그리움이고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늑대는 그 야성에 갇혀 인간을 닮을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있고, 우리 인간은 그 야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어두운 밤 지칠 줄 모르는 눈바람 소리가
에워싸면 우리 집은
화씨 68도의 성스러운 공간이 되는 것이다
잠의 문턱을 넘어서가 전, 불현듯
지난 여름 풀어놓은 여덟 마리의 늑대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 지는 것이다
노루의 내장과 살을 뜯어 배를 채우고
인간의 눈길이 닿은 적이 없는 어느 산 기슭
눈바람에 등을 돌리고
서로 부등켜 안고 잠들어 있을까
인간들이 뒤집어놓은 야생의 질서
그 상처받은 힘은 인간의 늦은 깨달음으로
치유될 희망이 보이는가

내일 아침도 나는 그와 함께
눈길을 걷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길들어져 있다기보다
내가 그에게 잘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대답이다
저만치 앞서 가다가 돌아서서
나를 기다리는 야생의 눈, 그 그늘에 갇혀있는
헤어날 수 없는 슬픔
나는 아직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이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고 없는 나의 늑대
                   이 창윤의 '늑대와의 시간' 일부      <해외 문학 11호 2007년 >

시인은 이제 겨울 밤 눈을 감고 눈 덮인 산기슭에서 잠들고 있을 늑대무리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들이 뒤집어 놓은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에 대한 사색에 잠긴다. 동물이나 자연 애호가들에게는 그들이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늑대라고 하는 알레고리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뒤집어 놓은 그릇된 자연 질서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뒤집어 놓기 이전의 원형적인 자연 질서를 순수한 자연에 대한 향수와 그에 대한 귀의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야생의 눈 그 그늘에 갇혀있는 /헤어날 수 없는 그 슬픔도 보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야성을 사랑한 나머지 연민으로까지 느끼고 그들이 결코 야성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그들의 슬픔까지도 슬퍼하는 것은, 우리 인간 스스로도 그 야성을 사랑하고 그 야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야성으로 상징되는 늑대라는 동물은 고대 설화 속에서 그 기원이 변신의 명수 뱀파이어(Vempiir)와 같은 괴물로서 언제나 인간의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동물로, 고대사회로부터 이에 따른 많은 전설과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늑대가 이러한 인간으로 가깝게 변신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은 그들에게 그러한 야성과 함께 상대적으로 개처럼 온순하고 사람을 가까이 따르는 인간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늑대인간이란 표현이 나타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의 습성이 무리 지어 살고, 늑대는 다른 동물과 달리 결코 어미와 아기 곁을 떠나지 않고 먹이를 구해 가족을 돌보는 습성이 있다는 점도 연유가 되었으리라 보지만,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는 늑대는 어디까지나 야성으로서의 늑대를 상징한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야생의 눈, 그 그늘에 갇혀있는 /
헤어날 수 없는 슬픔 /나는 아직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
이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지금은 가고 없는 나의 늑대'

이처럼 시인은 야성의 그늘에 갇혀있는 늑대의 눈을 슬픔으로 보고, 인간인 시인도 그 야생의 늑대를 사랑하고, 인간의 근원인 야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까지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야성에 대한 시인의 지극한 사랑은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동물적 본성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 유봉희의 '다야불로에서 만난 여우'가 있는데, 이 작품은 자연 속의 순수 영혼의 세계와 함께 토색적인 설화적 세계에 대한 탐색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어서 다음은 순수한 원시적 자연 속의 경이로움과 함께, 우리가 그르쳐 온 자연 파괴로 나타나는 자연의 아픔을 표현하고, 다시 순수한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내용을 묵시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환하게 드러난 햇살 길의 눈부신,, 눈부신 숲 속에
길게 누워있는 거목의 장엄 또한 그리워서
차마 그 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인데
밤새도록 산 전체를 감아 도는 저 긴-긴- 여운에
우리는 그만 두 귀 모두 산 속에 놓아두고 돌아왔던 것이다

천 년도 더 서 있었을 나무가
어느 날 제 스스로 벼락 치듯 천둥 치듯 드러눕는 소리는
후진하던 컨테이너에 받히는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 한낮 소리엔 가시가 돋아있다 피가 배어있다.
                           이윤홍 '소리' 일부 (미주시인 2007)

이 작품은 시인이 깊은 산행에서 느끼는 자연의 경이와 그 신비를, 그리고 자연의 소리라고 하는 감각적인 세계를 통해 자연의 원형적인 모습과, 자연의 장엄한 역사(役使 )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서정시다.
  우선 시의 전반부에서 표현되는 것은 자연의 현실적 모습으로 나무가 컨테이너에 받히는 산을 흔드는 소리다. 그 소리는 다시 없이 크고 깊고, 또한 다시없이 부드러운 소리라는 점에서 우리는 산의 깊이와 나무의 육중한 세월의 무게와 그리고 시인의 사색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소리는 자연의 아픔의 표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자연 훼손의 죄악에 대한 충격과 경고의 소리이며 인간의 양심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아픔의 소리와 함께 표현되는 또 다른 소리는 어느 날 나무가 제 스스로 벼락치듯 드러눕는 소리로, 이는 자연이 내는 생명의 소리이고, 수 천 년을 두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서 하늘을 향해 자라 오르다가, 이제는 미완의 꿈을 버리고 다시 자연의 침묵 속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한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시인은 '오늘 한낮 소리엔 가시가 돋아있다. 피가 배여 있다' 라고 나무가 내는 한의 소리를 아픔과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고, 이는 이 지상에 존재했던 나무가 끝내 하늘에 가 닿지 못한 그 미완의 꿈을 하나의 한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는 결국 자연 속의 한 그루의 나무를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우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연이 내는 각기 다른 소리를 통해서 자연의 경이와 장엄함을, 그리고 우리 인간의 자연에 대한 해악과 그 아픔을 표현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순수한 자연으로의 복원과 회귀를 바라는 심미적이고 사색적인, 그리고 생태적인 아름다운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시 역시 소리라고 하는 감각적인 세계를 통해서 자연과 사물 속에 존재하는 무한의 세계를 연기적인 상상과 사색적 감각을 통해서 하나의 이메이지 시로 형상화 시킨 아름다운 작품이다.

눈 먼 새인가
시각이 멀면 청각이 밝아진다지
벽 속에 숨겨진 나무 숨소리를 듣나 보다
잠자고 있던 집안의 가구들을 깨워
그들이 먼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소리를 듣나 보다

저것 보세요
책상 나무 무늬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창틀에서 푸른 나뭇가지가 피어난다
어떤 나무 가지는 벌써 하늘을 가릴 만큼 커져간다
빨간 모자 쓴 딱따구리가 휙 날아간다
나무 창틀이 솟아올린 숲으로
                     유봉희  '나이테의 소리가 들리나요' 일부(미주문학 2007 봄호)

  시인의 전령사나 다름없는 한 마리의 딱따구리 통해서 사물의 세계를 사색적 세계와 감각적 세계의 조화를 통해서 생과 사를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하지 않는 무한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장자 사상에서 두 개의 현상이 전연 별개가 아니고 하나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일종의 합일주의(萬物齎同, holism,)의 현상과 같이 생물과 무생물이나 그리고 생과 사를 전연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세계가 표현된 것이고, 그래서 순수 자연을 하나의 살아 숨쉬는 자연의 생명력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자연이 변질된 현실의 모습인 가구로서의 재목이 보일 뿐이지만 눈을 감고 본연의 자연세계로 돌아가면, 모든 가구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처음에는 '듣나 보다.'라는 화법을 통해서 안개가 걷히어오는 듯한 불확실하게 살아나는 감각의 세계가 상징적으로 표현 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처음 청각에서 시작된 감각이 다음에는 나무의 냄새가 엉겨있는 송진내 라는 보다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후각적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이어서 창틀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시각적 윤곽과 숲이라고 하는 생명체로 살아난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리의 날아가는 새를 본다는 생동감으로 표현된다.
결국 벽 속에 갇혀 있는 무생(無生)의 재목이 숲과 새라고 하는 유생의 생명체로 살아나는 과정을 하나의 감각과 사색의 점층적이고 연상(聯想)적인 구성으로 형상화 시키는 기법이 가히 특출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빨간 모자를 쓴 딱따구리가 휙 날아간다.' 라는 선명하고도 생명력 있는 표현으로 회화적인 감각의 세계를 생동감 있는 유동적 유희적인 시적 감흥 세계로 조화 시키고 있는 점이 특색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딱따구리가 쪼아대는 콩크리트 벽 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표현은 변조된 현실적 자연의 모습에 대한 고발이 표현된 것일 수도 있어서, 이는 어쩌면 자연을 막아서는 인간의 그릇된 모습일 수도 있고, 시인이 그려내는 숲과 새는 시인이 바라는 바의 우리 인간이나 자연의 원형에 대한 향수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김희주의 '간 밤엔 고요테 일엔 무슨 일이' (미주문학 2007년 봄)라는 작품은 인간의 원형에서 멀리 떠나온 오늘날의 그릇된 인간성과 현실적 모순을 비교적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문인귀의  '어째야 한다니'(미주문학 2007봄) 박경호의 '들꽃' (미주문학 2007 여름)이 윤홍 '안개도시'(미주문학 2007 여름)등은 하나의 생태시들로 비교적 직설적으로 자연 훼손이나 인간성 상실을 비판하고 있다.

어둠과 반죽된 알코올, 니코틴, 환각제 등
쏟아지는 별빛아래 맞닥뜨린 본능들
마시고, 피우고, 던지고, 깨뜨리고
낄낄거리고, 시부렁거리고 줄줄 싸고
황홀한 향연 끝에 나동그라져
둥글게 구부러진 등 위로 내려오는
빛의 직진엔 거부반응, 어디론가 떠난다
밤새 지켜보고 있던 선인장의 몸통엔
차마 삭이지 못한 아픔이
독침으로 돋아나 있다
간밤의 그 자리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구겨진 휴지 조각으로 뒹굴고
마지막 남은 양심은
퀴퀴한 담요조각에 둘둘 말린 채
역겨운 악취만 풍기고 있다
                      김희주  '간밤에 고요테 일엔 무슨 일이' 의 일부 (미주문학 2007년 봄)

고요테라는 동물은 야행과 음모 범죄 같은 비교적 그릇된 일이나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통해서 인간들의 그릇된 현실적 모순을 상징적이고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고요테란 북미에서 쓰이는 동양의 이리나 늑대와 같은 상징물이다. 따라서 불법이민자 운반책 같은 무엇인가 범죄를 행하고 음모를 꿈꾸는 인간들을 상징하는데, 시인이 말하는 바의 고요테란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그늘진 생활인들을 지칭한 것으로, 그릇된 현대 물질문명이나 병든 정신문명에 대한 비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일종의 순수 인간성이나 인류의 바른 정신 문명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인간들의 욕망과 그릇된 삶의 현실적 모습을 나뒹구는 휴지조각과 담요에 말려있는 악취로 실낱 하게 비판하고 있고, 이에 대한 문제 제시와 함께 관심유발을  '간밤에 고요테 일엔 무슨 일이' 라는 표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결국 이러한 현실적 비판도 궁극적으로는 순수 자연과 순수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에로의 회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김병현의 'Lost Sea'(외지 2007년)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억 년 이전의 밀봉된 지하의 암흑 속의 장님처럼 주위의 가치를 살필 필요조차 없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았을 원시 동물들과도 같은 원시 직립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정상적인 시력을 지니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릇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사회적 고민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들 역시 일종의 자연시들로서 순수 자연에로의 회귀나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자연의 순수한 가치와 함께 그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시인의 소목장
무엇이 되어 살려 했던가 우리
한 사람 돌아가 소나무로 선 것 보네
산비탈 소나무 숲에 가 서서
정령이 하늘 쓸면
가지 채우는 까치떼 날아 올까
한적한 오후에 솔 숲으로 돌아가
소나무로 서서 하늘을 쓸고 또 쓰는 것 보네
잔가지 사이로 잔바람 타고 내리는 햇살
엉겅퀴 덮이는 땅에도 씨를 틔울 것이네
이제는 바람 소리 예사롭지 않을 것이네  
                      김신웅 '돌아와 나무로 서다' 전문 (미주문학 2007 여름)

시인은 소나무 숲이라고 하는 순수자연으로 돌아가 정령으로 하늘을 쓸고 싶다고 말한다. 이처럼 시인은 어느 시인이 숲 속에 묻히는 수목장(樹木葬)에서 자신도 순수 자연에로의 회귀를 열망하고, 순수 자연 속의 그 특별한 가치를 '이제는 바람 소리 예사롭지 않을 것이네' 라고 현실의 세계와는 다르리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시인이 바라는 것은 수목장을 통한 순수자연으로의 회귀이고 그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소나무로 서서 하늘을 쓸고 또 쓰는 것 보네 ' 라는 표현은 가히 회화적인 아름다운 표현이고,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쓸고 쓴다는 자연 정화의 현실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바람소리 예사롭지 않을 것이네.'라는 표현 역시 시인은 자연을 위한 정화와 그 순수 자연에로의 회귀를 통해서 나타나게 될 자연의 새로운 힘과 그 가치를 의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무는 내 어릴 적 요람이었지
팔을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게 하고 온갖 벌레 떼를 불러들이는
가지는 높았으나 꽃을 꺾고 열매를 따게
그래도 나무는 행복하다고 말했네
내가 자라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춤을 출 때에도
집을 원하면 굵은 나뭇가지를 주었고
밥을 지으려고 땔감을 원했을 때
나무는 가을날 옷을 벗고 낙엽을 내어 주었지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밤
내 마음 속에서 이상한 소리 들렸다

"나는 다 이루었다 "
                     조윤호 '고목' 의 전문  (해외문학 11호 2006년)

자연이 인간을 위해 베푸는 천혜의 혜택과 그 덕을 고목이라는 하나의 상징적 자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고, 아울러 남을 위한 절대적 사랑과 헌신의 정신이 바로 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정신이라는 점을 밝혀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고목은 바로 자연이고 의인화 되어 의식이 깃든 고목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생물들에게 신의 뜻인 사랑과 헌신을 실행하여 모든 것을 베푼다. 이러한 신과 자연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을 행사하는 고목은 결국 그가 바라는 바의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적인 사랑의 정신에는 이처럼 고목의 정신과 같은 자연의 근원적인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이상적인 꿈은 그의 꿈속에서 나타난다.

'나는 다 이루었다.'

  위의 표현은 물론 고목의 표현이지만, 한편으론 시인의 개인적인 꿈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그루의 고목이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베풀듯이 우리 인간도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교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 이 시의 의미가 있고, 결국 이 시의 야기는 우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자연 사랑의 정신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고개를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가라!
당신의 뿌리가
넓고 무한한 수맥에 닿아 있는 한
기쁨도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이듯
지금의 좌절 또한 잠깐인 것을

전전긍긍하는 그대여 보라.
한 그루의 나무가
얼마나 많은 잔가지들로 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바람의 숨결을
맛보게 하는가를….
                                         배미순 '바람의 숨결' 일부 (해외문학2007년)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있는 것은 역시 자연의 힘이다.  그 자연의 힘은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 힘이겠지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힘은 바로 뿌리에게 물을 공급해주는 수맥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무가 살아 있다는 외형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은 일정하지 않는 바람과 같은 생의 변화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 생에도 기쁨도 있지만 고통과 좌절 등의 바람과 같은 외형적인 변화도 있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 만, 수맥과 뿌리가 있는 한 나무는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생의 의지를 밝히 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바람은 나뭇가지가 꺾이기도 하고 나뭇잎을 팔랑거리게도 하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생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근원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바람의 숨결과 같은 변화로 인해서 우리가 보 다 참된 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삶의 자체 도 근원적으로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오랜 가뭄 탓일까
마음의 샘물도 말라간다
막힌 담 헐듯이
답답한 마음의 둑을 툭 터트리면
시원스런 물줄기라도 쏟아지려나
하늘만 바라보고 한숨만 쉬느니
차라리 낚싯대 메고 강으로 바다로 쏘다니다가
은빛 찬란한 고기로 월척이라도
하면 꿈속이라도 그 이상 바랄 게 없겠지
                                                 김옥배 '갈증' 전문(해외문학2007년)

  위의 시 역시 시인이 권태롭고 답답할 때 생각하는 것은 물줄기나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이다. 결국 시인의 삶에 대한 회의나 고통을 하나의 갈증으로 표현해서, 이에 대한 해갈을 자연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어서, 이는 생에 대한 고통과 함께 그에 대한 극복도 모두 자연을 통해서만 경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역시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모든 것이 자연과 상관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은빛 찬란한 놈으로 월척' 에 대한 꿈은 바로 그의 자연과 생의 활력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자연의 원형적인 한 모습인 모성을 통해서 우리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가치와 생명의 가치와 그리고 새로운 자아 발견을 통해서 모천에로의 회귀를 표현하고 있는 시들이 있다.
우선 우리의 존재적 가치인 생명의 근원에 대한 표현은 바로 모성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모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연이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나 영혼과 직결 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성의 원천인 자궁을 멀리 떠나왔어도 여전히 우리 육신에는 모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도 모성이 흐르고 우리를 영원히 지배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성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연 속의 또 다른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성에 대한 향수와 그 회귀 정신을 표현한 작품들은 김병현의 '유언 블랙박스'를 비롯해서 최석봉의 '석어'(미주시인 2007) 배정웅의 '모성'(해외문학 2007), 강학희의 '골무'(외지 2007 여름) 석정희의 '어머니의 유산'(미주시인,2007) 최 연홍의 '사슴'(외지 2007)등이 있다 .

밥상과 술상의 인기 식단들
저들의 피와 살만 먹는 걸까
저들의 유언 불랙박스까지 함께 먹는다.

우리들의 살 속에 섞여, 피 속에 빠져서도
따로 떠돌고 있을 저 한의 블랙박스.
개봉하면 쏟아져 나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저들의 목청으로 대신 울부짖어야 한다.
                          김병현 '유언 블랙박스'의 일부 (미주문학 2006년 겨울)

우선 이러한 모성에 대한 회귀 정신을 보다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생각해 보려는 작품이 바로 위의 김병현의 '유언 블랙박스 '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성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극히 생물학적인 광의의 모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물의 모성은 곧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고, 그 자연과 모성의 근원은 생명인데 이 지상의 모든 생명의 핵은 바로 유전인자라는 것이다.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그 모성의 근원이 되는 바로 유전자인데,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블랙박스에 들어있는 유전인자들의 모성에 대한 그리움인 회귀의 부르짖음이다.
블랙박스를 열면 바로 튀어나올 수많은 생들이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남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라는 부르짖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모성에 대한 향수와 그 회귀를 품고 있고 이를 나타낸 것이어서, 모든 생명체가 한결같이 대자연을 향한 모성에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간이 자연과 모성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음을 물리적으로 밝히고 있고, 아울러 모성의 본질과 그 의미를 생물의 본능이라는 하나의 자연의 섭리로 설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그의 또 다른 시 Lost Sea(외지 2007년)에서는 기억 년 이전의 밀봉된 지하의 암흑 속의 장님처럼 주위의 가치를 살필 필요조차 없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았을 원시 동물들과도 같은 원시 직립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정상적인 시력을 지니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릇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사회적 고민을 비판하고 있어서, 이 또한 우리 인간의 원시에로의 회귀를 밝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들은 모성의 본질인 사랑과 그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사랑과 그리움의 정신을 극히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모성의 본질을 사랑의 절대성과 영원성으로 승화 시켜 서정적 미학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에라 산에 올랐다가
계곡 자갈 사이에서 낮잠 자고 있던
석어 한 마리 잡아
벽난로 옆에 두었더니
온 집안에 집 안에 물 너울이 인다

여 나무 살 적
어머니가 소금에 절여준 석어
유달산 바위에
널어 말리는데
하늘이 푸르디 푸르러
석어랑 함께 둥둥 떠 다니다가 깨어보니
반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는 낮잠만 자다 온 나를 쓰다듬어 주시며
열 마리나 도망쳤구나 하셨는데
그 때 멀리 가버린
꿈에 날던 석어 한 마리
벽난로 옆에서
어머니랑 웃고 있다
                       최석봉 '석어' 전문(미주시인 2007년 여름)

깊은 산 계곡 자갈밭에서 잡아 왔다는 석어, 분명 돌로 된 석어이지만 그 석어는 돌이 아닌 살아있는 석어다. 먼 옛날 그곳이 바다였을 때 그곳에서 살았던 석어이고, 시인의 어린 시절 바닷가 집 뜰에 누워있었던 석어이고, 지금은 온 집안을 헤엄쳐 다니고 있는 석어다. 또한 그 석어는 시인의 의식의 바다에도 살아서 돌아다닌다. 이처럼 석어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시인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에나 살아서 존재한다. 이처럼 모성을 상징하는 이 석어는 시인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이다.
석어라는 한 점의 돌(수석)이 살아남으로 해서 온 집안에 물결이 일렁이고 모든 움직임이 살아난다. 이것이 바로 모성의 영원한 생명력이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모성이다. 따라서 모성은 늘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고 이 생명의 본질인 모성이 바로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어서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시의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시의 율동과 리듬을 통해서 더욱 살아난다.
아무튼 어린 시절의 짤막한 하나의 서사를 이렇게 리듬감 있게 회화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 기교가 놀랍다. 더구나 서민적이고 향토색 짙은 이야기이라서 더욱 우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포구에 만선의 어선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온 도시에 고기가 넘쳐나,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석어들을 사다 소금에 절여 말린다. 그래서 포구에서 자란 사람들게는 어린 시절 석어에 대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지만, 유별나게 이 시인의 석어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모성의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 석어에 대한 기억은 바로 살아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은 어머니도 없고 석어도 없고 단지 돌로 된 석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석어는 이제 코를 찌르는 비린내도 없고, 들끓던 파리떼도 없고 앙상한 이빨도 없다. 그러나 그 석어는 분명 살아있다.  그리고 이재 이 석어는 말리지 않아도 영원히 썩지 않는 영원 불멸의 석어다. 그것은 석어가 상징하는 어머니라는 모성은 영원히 죽지 않고 시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어린 시절 사라져 버린 석에 한 마리가 수십 년도 지난 지금, 바다 건너 멀고 먼 이역 땅 산 계곡에서도 살고 있었고, 집에서도 살고 있다. 그래서 그 석어는 온 집안을 헤엄쳐 다니며 시인을 즐겁게 한다. 이처럼 석어는 모성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유년의 서정이 모성의 절대성과 영원성으로 승화되어 나타난 아름다운 사모곡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도 결국은 인간의 원천적인 자연에 대한 향수를 모성이라고 하는 근원을 통해서 원천 세계에 대한 향수와 그 회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붕은 날아가면 안 된다고
야근하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을
어린 것들 젖어서는 안 된다고
얼굴을 후려치는 비바람 속에서
펄럭이는 비닐 자락을 온 몸으로 누르며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오, 저지 저
말라 비틀어진 호박 밑 둥지
땅 속에서까지 죽어도 자식들 손 못 놓는
내 어머니
함께 젖고 있었습니다.
         김행자 늙은 호박 '일부 (미주시인 2006년 여름)

이 작품 역시 자연 속의 모든 생명의 근원을 모성이라고 하는 원천 세계로 표현하고, 그 모성이 바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고, 그래서 비바람과도 같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생명이 살아갈 수 있고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생명의 근원은 모성이고, 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생명의 힘도 모성이라는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 지붕 위의 비닐 자락을 누르고 있는 힘은 자식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모성의 힘을 상징한다.
작자인 시인 자신도 그의 시작품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대표적인 힘은 바로 이 모성의 힘이라고 밝히고 있고,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세계에 모성이 세계가 나타난다. 그래서 필자가 이 시인에 대한 다른 표현을 붙인다면 바로 '모성의 시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밤 잠결에 듣는 어머님의 기도소리
마음 환하게 밝히는 꿈 주시고
젖은 손으로 아이를 어르시던 눈빛
가슴 채워 사랑 가득 물려 주셨네

지금은 어미 되어 부르는 어머니
손 이끄시고 등 토닥이시며
함께 가시는 임으로 계시어
두렴 없는 길 가게 하시네
           (석정희 '어머니의 유산' 일부 (미주시인 2007년 여름)

이 작품 역시 모성을 바탕으로 해서 그 모성의 사랑의 정신을 사랑의 절대성과 영원성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작품이다. 우선 모성의 구체적 사랑의 행적이 비교적 상징적으로 안정감 있게 표현된 점이 모성의 깊이와 가치를 살리고 있고, 잘 다듬어진 언어 리듬의 표현이 모성이라는 내용의 시적 느낌을 아주 잘 살려낸 작품이다.

함께 가시는 임으로 계시어 / 두렴 없는 길 가게 하시네
  
이는 결국 우리가 바라는 하늘의 임은 신성(神性)인 하나님이시지만, 이 지상에서 우리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는 바로 언제나 함께 가시는 임이신 우리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시의 핵심 내용으로 모성을 임이라고 하는 나에 대한 절대자로서의 절대성과 영원성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 시의 또 다른 가치라고 할 수 있고, 이 점이 바로 시인의 모성에 대한 남다른 시적 발상을 돋보이게 하는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 지상에서 우리를 지키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등불과 같은 힘의 근원은 바로 지상의 신과 같은 존재인 모성이라는 것이다.

반짇고리에서 또르륵 굴러 떨어진
가족골무, 이미 바짝 마르고 뻣뻣해도
여전히 어멈 냄새 나는 엄마의 검지다.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검지 뒤쪽으로 엄마가 지나간 행로
해적도 비밀 부호처럼 희미하게 그려있다.
아이처럼 뒤뚱뒤뚱 천천히
한 걸음씩 흔적 따라 걸음을 떼고 멈추어 서면
고즈넉한 풍경 속 슬픔은
먼지와 바람으로 흩어지고
실핏줄처럼 퍼져 가는 섬세한 엄마의 손놀림.
내 생애 속 아직도 늙지 않은 엄마는
새파란 시간의 그늘을 곱게 짜 작은 생처럼,제
물려 입을 배냇저고리 하나 깁고 있다.
엄마의 가죽골무, 나의 태궁이 따뜻하다.
               강학희 엄마의 골무' 전문  (외지2007년)

골무라고 하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그곳에 고여 있는 모든 모성의 행적과 사랑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시다. 손끝에 끼우는 그 작은 상징물 속에 그 긴 세월과 그 기쁨과 고통을, 그리고 그 많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이미 바짝 마른 옛 골무를 들고 엄마가 가르키는 곳을 따라 비밀 부호처럼 희미한 옛 행로를 따라 어린 시절과 배냇저고리를 지나. 끝내 찾아간 곳이 바로 어머니의 따뜻한 태궁 속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로 돌아간 자연에 대한 귀소본능의 세계가 표현된 것이다.

'엄마의 가죽골무, 나의 태궁이 따뜻하다.'

따뜻하다는 표현이 바로 태궁이라는 모성의 상징이고, 그래서 모성의 본질은 사랑이고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성에 대한 탐색은 자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에 대한 회귀를 열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상의 모든 생물의 근원은 모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성에 대한 사색은 결국 우리 인간 자
신의 근원적인 원천 세계에 대한 하나의 회귀본능 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자연의 순리다. 그럼으로 이러한 모성에 대한 표현이나 이에 대한 탐색 역시 우리 자신
의 근원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에 대한 그리움인 동시에 자연과 자연 자체와 그 원천세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