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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옛날 군생활얘기, 작은글의 향수

by 강창오 posted Jul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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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군대얘기를 하는 사람을 별로 재미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던것으로 안다. 허지만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선 군생활중 글과 관련된 두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나 적어본다. 그당시의 군생활중 특히 훈련소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것을 한가지 꼽으라면 강도높은 훈련도 아니요 군기도 아닌 배고픔이었다. 어설프게 얹혀진 보리밥 한그릇과 멀건국 한그릇이 삼시식사였다. 모두가 입소한 첫날은 이미 메주뜬것 같은 국밥냄새에 질려 한두숫갈 입에대보고 버렸지만 다음날부터 실제로 긴장된 훈련과 함께 체력소모가 시작되면서 식사에 온신경이 집중됐다. 돌덩이도 소화시킨다는 그 젊은나이에 하루종일 고도로 뛰고 움직이는데 그 부실한 세끼의 밥은 흔히 말하는 새발의 피였을뿐이다. 군기에 잡혀있으면서 허기에 시달리다보니 훈련병들이 거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돌아가는 기막힌 현상을 보고 테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본질을 배우게되었다

하루는 장거리 훈련날이었다. 아침시간부터 불과 3-5분정도의 식사를 마치고 집합해서 훈련장까지 뛰어갔다 점심시간에 맞춰 다시 본대로 뛰어돌아왔다. 중대 기수를 했던 나는 규칙대로 점심식사 해산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중대본부로 달려가 기를 놓고 소대로 달려가니 이미 소대원들은 식사를 마치고 집합장소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아뿔사,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본부로 달려가 기를 가지고 뛰어나와야만 했던 절박한심정. 그런 점심을 먹었어도 기별이 안갈텐데 공복에 다시 기를 잡고 중대맨앞에서 뛰어야했고 오후 훈련에 참가하는것은 그야말로 생고통이었다. 거기다 오후훈련은 극기훈련으로 벽돌을 가득히 안고 100m정도높이의 야산을 뛰어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속도가 늦으면 가차없이 당하는 체벌에 그야말로 빈속을 저주하며 죽지못해 기계처럼 움직여야만했던 악몽의 날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토요일아침이어서 소대원들이 부대 여기저기 사역에 배치받아 나가는중에 훈련소 취사반장인 병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여기 누구 글 쓸줄 아는사람 나와봐” 하는것이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우리 소대 향도가 그 병장을 향해 나를 손으로 가리키는것이었다. 물론 그 향도와 나는 훈련소에서 처음 만났을뿐 서로 전혀모르는 사이였다. 아무튼 얼떨결에 그 병장을 따라 취사반으로 들어갔다. 취사전담을 맡은 사병이여서 그런지 그의 개인내무반은 제법 가정용 독방처럼 꾸며져있어 오랫만에 안방의 푸근함을 느낄 정도였다. 조금후 그 병장이 종이와 펜을 주면서 자기 여자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쓰라는것이었다. 한마디로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것인데 내가 그병장의 입장이 되어 그 앞에서 그의 사적인 연애 편지를 쓴다는게 쉽지 않았고 그 대신 연정의 글을 짓는다는것이 참으로 이상야릇한 감정을 동반했다. 나름대로 다 쓴다음 그 병장에게 건네주니 그는 단숨에 그글을 읽어보고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거기 앉아있어 하며 나가는것이었다. 어리벙벙하며 앉아있자 잠시후 누군가가 개인밥상을  들어다 내앞에 놓고는 실컷먹어 하며 나가는 것이었다. 그 밥상에는 가득이 퍼올린 쌀밥, 뜨끈한 명태국하며 여러가지 반찬으로 그득했다. 그토록 배고팠던 훈련병에게 당시 그 밥상은 현실같지 않게 느껴졌고 평생에 지울수없는 근사한 임금님의 밥상이었다. 그날은 불어터진 라면 토요일 점심에 목매지 않아도 되었고 다른 훈련병들은 꿈도 못꾸는 혼자 그런 포식(?)을 하면서 당시에 느꼈던 기분은 그야말로 왕이었다. 너무나 상반된 어제요 오늘이었다. 나는 지금 이순간도 그 향도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지목했는지 의아스럽기만하다.

두번째 경우는 군생활을 어느정도 했던 자대에서의 일이다. 우리 군부대 얼마떨어진곳에 화전민촌이 있었다. 자대로 편입된후 저녁이면 화전민촌의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직책을 맡게되었다.  군용도로를 따라 산속 굽이굽이 언덕진길을 거이 한시간가량 걸어야하는 거리였다.  매일저녁이면 똑같은길을 걸으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해 바껴지는 산과들의 정취에 잠겨들곤 했다. 부대밖의 잠시나마 주어진 해방감을 느끼며 걸음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풀한포기 돌덩어리하나가 그렇게 의미있고 정겨워 그런 낭만감이 들때마다 조그만 노트에 산문을 엮어나갔다.

부 대내에서 조금 가깝게 지내던 강화 x 이라는 동료가 있었다. 충남 연기군/조치원출신으로 몇달 고참이었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그는 틈있을때마다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허지만 입대이후 한번도 답장을 받은적이 없다고 가끔 내게 토로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갑자기싱글벙글하며 여자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흔들며 좋아라했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을건넨후 지나치는말로 물었다.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돌릴수 있었느냐고… 내가 묻는말에 그는 처음에 조금 겸연쩍게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지 최근에 너의 산문집을 베껴서 보냈거든… 물론 나는 그가 내 산문집을 베꼈는지 내산문집에 관심이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다. 너무 뜻밖의 답변에 피식하고 웃을수밖에… 허지만 누군가 내글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답장을 했다는 사실과 답장을 받은 그 동료를 그토록 흐뭇하게 할수있다는데서 약간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가 몇달 먼저 제대해 나가면서 하는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 늘 기억날거야”.

앞서 훈련소의 배고팠던 고통을 얘기하다보니 우연이지만 그곳을 통해 이어진 인연관계가 생각나 적어본다. 국민학교 4학년때 우리반에 돼지별명을 가진 두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최진x 이라는 산돼지와 진용x이라는 양돼지였다. 나는 딱이 그들에게 왜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다들 못먹고 살던시절이라 그둘은 그나마 다른 아이들에 비해 살이 좀 붙어있어 그 별명이 지어진 모양이다. 아무튼 양돼지와는 몇주정도 짝을 했기도 했지만 두 돼지다 한반일뿐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서로가 다른 중학교로 간이후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훈련소에 입소해서 보니 그 두 돼지가 있었고 급기야 같은 소대에 배치되었다. 참으로 인연이 되려니까 남자만 거이 500여명에 가까웠던 한 국민학교에서 4학년때 한반이었던 두명의 돼지가 같은훈련소 같은소대가 될줄이야. 산돼지는 의의로 키가 작고 옛날 돼지의 흔적이 전혀 없었지만 집안이 웬만큼 산다고 들었던 양돼지는 그때문인지 옛날처럼 체격도 제법 컸고 살집이 있었다. 물론 훈련소 6주간을 걸치면서 우리는 한번도 서로간에 마주쳐 지난시절을 얘기해본적이 없기때문에 그들도 나와같은 기억을 가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번은 어쩌다 훈련중에 마주친 산돼지가 안면있는 어조로 나에게 한마디했던 기억이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훈련병 모두가 배고파 허덕였지만 우리 소대에서 특히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던 양돼지가 두드러지게 고통을 받고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배고픔에 밥알하나를 남기지 않았던터에 그래도 소대밖에 놓인 뜨물통에는 식사 찌거기가 모여 몇개의 밥알정도가 뜨곤했다. 그런데 하루는 점심식사후 다들 식기를 닦아가지도 내무반으로 들어오는데 갑자기 향도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나를 연애편지 작가(?)로 선출해준 그 향도였다. 모두가 영문을 모르고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인즉슨 그 향도가 내무반장에게 양돼지가 방금 뜨물을 건져먹었다고 흥분해서 보고하는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내무반장은 당장에 그를 호출해 엄청난 기합을 주었고 양돼지는 공포와 창피에 질려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한참이나 기합을 받았다. 그 에피소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친후 모두가 부대배정을 받고 떠나던날 점심식사때였다. 소대원모두가 배식을 받자 갑자기 내무반장이 배식병에게 진용X에게 밥한그릇을 더 갖다주라고 명령했다. 사실 우리는 훈련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서로가 다른 부대로 헤어져야한다는 서운함과  기대감또는 긴장감으로 축제아닌 축제분위기에 들떠 배고픔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튼 밥한그릇을 더받은 양돼지에게 우리의 시선이 모여졌고 이내 가슴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양돼지는 그 밥그릇을 보면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엉엉울어버린 것이었다. 우리모두는 그를 바라보면서 묘한감정에 휩싸여 말없이 동정의 미소를 보낼뿐이었다.


아울러 과연 그 수많은 군출신들이 몇명이나 그 웬수(?) 같은 훈련소 내무반장의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그이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전남 고흥출신의 박승X 병장이었다. 그렇게 모질고 엄했지만 나는 그의 다른 인간미를 보았다. 가끔 그가 기타를 들고 줄을 튕기면서 배우려는 모습을 보고 알고있는 기타코드 몇가지를 가르쳐주자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고마워하던 모습. 내가 오른쪽발에 부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자 나의 퉁퉁부은 발의 고름을 짜내며 동정어린 눈으로 치료해주던 모습. 더우기 훈련소 말기에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다음기로 좌천되었을것이다. 이유인즉슨 내가 장신에다 발이 크기때문에 내 훈련화(통일화)는 그중 가장큰 사이즈였다. 헌데 한번은 누가 내통일화를 신고 작은 통일화를 놔두고 간것이었다. 모든것이 주어진대로 응해야만 하는 환경이라 그 작은 통일화를 신고 계속 훈련에 임하는것은 물론 중대기수로써 계속 앞에서 뛰어야했기 때문에 오른발 뒷꿈치가 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겨울 추위에 발뒷꿈치가 퉁퉁붓기 시작했다. 얼마간은 참고 견디었지만 고통보다는 더이상 발이 말을듣지않아 훈련중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내무반장이 내발의 부상을 발견한것이다. 다시 돌아가, 퇴소자격 시험에서 필기시험은 치룰수 있었지만 발의 부상으로 동작시험에는 응할수가 없게되자 내무반장은 내가 퇴소하지 못할까봐 여기저기 시험관들에게 뛰어다니며 나의 퇴소자격를 당부했고 그 결과로 일단 모든시험에서의 탈락은 모면하게되었다. 허지만 한가지 마지막조건은 나에게 달려있다는것이다. 퇴소열병식때는 사단장등 고위 장교들이 지켜보는데 만일의 하나 내가 대열에서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면 자동으로 퇴소탈락이라는것이다. 열병식이 다가왔고 새 군복과 군화가 주어졌을때 나는 절대 절룩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에 다짐을 할수밖에. 아직도 상처가 무성한 부은발을 새군화에 억지로 밀어놓고 열병식에 참여했고 누가 눈치챌새라 이를 악물고 정상적인 행군을 해야했다. 그당시 새군화를 신은 오른쪽발 부상에서 오는 고통은 정말로 까무라칠정도였지만 어쩌랴 사뭇 아주 태연하게 열병을 마쳤고 결과적으로 더이상 퇴소에 문제가 없게된것이다. 그 발의 부상은 자대에 들어간후 2-3달후에 아물었고 지금도 오른쪽발 뒤꿈치에 검은자국으로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서로가 다른 부대로 떠난 그 이후로 누군가가 양돼지의 소식을 얼핏 전해주었다. 어느부대 취사반에서 근무잘하고 있다고. 그 소식을 듣는순간 우리는 계속 배고틈의 연속인데 양돼지는 적어도 더이상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겠구나하는 나름대로 그에대한 안도감을 가져봤다. 아무튼 사람이 인연이 닿으려니까, 제대후 모두가 한창 가정들을 꾸리고 바쁘게 살때였다. 한번은 우연이 어떤 거리를 지나다가 커다란 수산물상점앞에 서있는 풍채좋은 얼굴이 눈에잡혔는데 한눈에 즉각 양돼지임을 알아차렸다. 반가움과 놀라움에 진용X하고 부르니 나를 알아보는지 아닌지하는 말투로 “이거 내상점이야” 하는 한마디를 던지는것 뿐이었다. 국민학교때나 훈련소에서나 친한 관계가 아니다보니 우연이 잠시만나 다시헤어질때 그에대한 어떤 미련이 없었지만 다만 속으로 그의 사업이 잘 되가고 있다는 인상을 가진채 새삼 훈련소에서의 그를 머리속에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