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없다면 詩人도 없다? /경향신문

2005.03.03 03:55

미문이 조회 수:269 추천:9

술이 없다면 詩人도 없다? 문인들을 왕창 만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서울 인사동 밤거리에 나가는 것이다. 골목을 누비며 왁자한 술판을 벌이는 문인들의 낯설지 않은 풍경이 이곳에 있다. 술은 그들의 굿거리다. 마실 때의 행복감과 깨어날 때의 황폐함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 희열과 고통으로 글을 얻는다. 술은 소설보다는 시를 짓는 사람들과 좀더 친밀하다는 인상이 짙다. 가깝게는 고은 때문일 수도 있고, 멀리는 보들레르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 고은 시인은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이라고 했다.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문학세계사) 올해 봄호는 ‘시인과 술’을 특집으로 다뤘다. 문학평론가 정규웅씨 등은 주당(酒黨)들이 시 한편을 얻기 위해 어떻게 ‘술품’을 팔았는지 뒷얘기를 쏟아낸다. 그 일화들을 잠깐 들춰보면, 고인이 된 시인 박정만은 1987년 한해 동안 무려 1,000여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하루에 3병꼴을 마신 셈이다. 그는 술병으로 세상을 뜨기 얼마전 “술만 마셨다 하면 시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더라”고 지인에게 신기한 듯 털어놓았다. 역시 일찍 세상을 뜬 천재 시인 기형도는 한창 무더울 때 20여일간 소주만 100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00여편의 시를 썼다고 스스로 토로한 바 있다. 이렇듯 주당 시인들은 술을 태워 시를 짓는 에너지를 얻었다. 시 한편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몸은 터무니없이 ‘감가상각’되었다. 박재삼, 박용래 시인이 각각 64세, 50세로 명을 다한 것을 두고 ‘술 탓’이라는 뒷말들이 많았다. 귀가하다 고속 질주하던 차량에 받혀 목숨을 잃은 김수영, 채광석 시인은 당시 술에 취해 있지 않았던들 명을 좀더 오래 붙들어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술에 관한 전설은 고은이 압권이다. 고 시인은 어느날 종로구 청진동에서 황동규, 김현 등 몇몇 문인들과 술을 마시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 모친상 소식을 전해들었다. 곧장 달려가 문상을 끝낸 다음 그는 그 자리에서 젓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로 어지간히 취했을 텐데도 그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주당 세계의 지존(至尊)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조지훈 시인은 일찍이 ‘주성(酒聖)’으로 불렸다. 그는 술꾼의 단수를 바둑처럼 18단계로 나눠 내로라 하는 술꾼들에게 한사람씩 급을 매겼다. 만만찮은 주량을 자랑하던 후배 시인 김관식도 그 앞에서는 오금을 못폈다 한다. 조지훈은 술버릇이 고약한 김관식의 뺨을 올려붙이며 겨우 ‘3단’을 부여했다. 그는 ‘술은 인정이라’라는 자신의 수필에서 “1·4후퇴 당시 기차를 타고 4박5일 만에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플랫폼 한 귀퉁이에서 약주 한사발을 얻어 먹은 일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적었다. 어디 이뿐이랴. 거리에서 아는 사람만 만나면 돈을 달라고 해서 무조건 술집으로 달려가곤 하던 천상병 시인, ‘바카스 주신(酒神)’이 심심해서 불러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밤낮없이 술을 즐겼던 조태일 시인, 직장의 책상 서랍에 항상 술병을 넣어두고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꺼내 마셨던 김광협 시인…. 문인과 술이 ‘바늘과 실’의 관계인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술에 탐닉했던 보들레르의 시 한구절로 갈음하자. ‘모두가 너만 못하다, 오 그윽한 술병이여,/갈증 난 가슴 지닌 경건한 시인을 위해/네 넉넉한 뱃속에 간직하여 둔 그 향기 높은 술만은./…’(고독자의 술)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