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스물일곱에 신선이 된 여자

2006.05.12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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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평전- 허난설헌 그림 《앙간비금도》 나이 겨우 22 살에 5년만 더 살기로 결심한 여자, 그런 여자가 과연 있을까. 1551년(명종 1년), 허엽(許曄)의 세째 딸로 태어나 1589년 (선조 22년)에 병사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떻게 해서 그녀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단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 까닭은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동생인 허균(許筠)이 그녀의 시 한 귀절을 근 거로 내세우고 있을 따름이다. 그녀가 22살에 쓴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 山詩序)'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푸른 물결 선녀의 못에 물들이고 파란 난새는 각색 난새와 어울려라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분홍빛 사라지니 달빛은 서리로 추워. 난설헌은 이 시를 쓰기 전날 밤, 꿈속에서 서왕모(西王母)의 사자인 난새에 게서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고 그녀가 원래 살던 세계로 신선이 되 어 떠났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허균은 이 싯귀에 주(註)를 달아, 그녀가 스물 일곱 송이의 연꽃과 맞추어 자살하였다고 암시한 것이다. 허나 허균이 그 배 경이나 연유를 달리 내세우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의 시인기질이 안타까운 누이의 죽음을 미화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동생인 허균, 오빠 허성(許筬),허봉(許蓬)과 함께 난설 헌은 조선조 최고의 문장 4남매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난설 헌은 이미 5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커가면서도 오빠,동생과 함께 시를 겨 루되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한다. 당대의 풍습으로 보아 여자아이들에겐 현모 양처의 교육이 고작이었다. 허나 난설헌의 출중한 천분과 문장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의 시 공부는 억제되지 않았다. 우리 문학사로는 다행스러운 일 이나 그녀 개인으로서 비극적 삶의 실마리가 마련되 셈이다. 1577년, 나이 15세에 그녀는 시집을 갔다. 남편은 16세의 김성립(金成立) 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백면서생이었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 을 떨치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운 조숙한 여류 천재시인과 백면서생의 결 합은 처음부터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김성립은 결혼과 동시에 필생의 과제인 과거시험에 몰두해야 했다. 더구나 어린 나이였으므로 천재의 예술성 을 포용할 능력이 없었으리라. 김성립은 자연히 공부를 핑계로 한강변의 독서 당으로 나가 지내는 날이 많게 되었다. 난설헌은 그 공방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키움으로써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 기로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지아비와 살면서 꿈속의 남자를 그리워하는 상 황이었다. 그 꿈속에서 난설헌은 오직 김성립의 변신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그 희망이 현실화할 가망이 엷어지면서부터 그녀는 상상력의 또다른 한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신선이었던 그녀는 잠시 죄를 입어 이 세상으 로 쫓기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잠시동 안의 머뭄이지만, 이쪽 세상에서의 삶이 불쾌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스로 돌아갈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연단을 만들어 복용함으로써 신 선이 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진함으로써 죽어서 신선세계로 옮겨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연단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단 제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 그녀의 삶에 부가가치를 주고 있던 아들과 딸이 해를 이어 세상을 떠나는 참척을 겪어야 했다. 그녀의 시 '곡자(哭子)'를 읽어보자. 지난 해 어여쁜 딸을 잃었고 이해엔 귀염둥이 아들이 갔다. 서러워 서러워 광ざ? 두 무덤 서로 마주보네 쓸쓸하구나 백양나무 바람 도깨비불은 소나무 사이를 밝혀주네 지전을 살라 너희를 부르다. 맹물 한 잔 네 무덤에 부어놓을 뿐이네. 알겠네 아우며 형의 넋이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니는 걸 (하략) 아마도 아이를 잃은 슬픔의 시로는 난설헌의 '곡자'를 능가할 작품이 몇 없 을 것이다.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 갈래를 차분히 짚어나가는 난설헌 의 소리없는 통곡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다. 뿐만 아니라 난설헌은 개인적 불행은 출가 이후에 줄줄이 이어 찾아 왔다. 결혼 3년만에 아버지 허엽의 상을 입었고 다시 3년 뒤에는 동복 오빠인 하곡 (荷谷) 허봉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인의 선봉장 노릇을 하다가 함경도 벽 지로 유배됐다. 하곡은 특히 난설헌과 다정했다. 그 오빠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갑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때 난설헌은 그녀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먼 귀양길 갑산으로 떠나시네 함경도땅 가는 모습 눈에 흐리네 신하의 입장은 가태부와 같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희왕이겠소 몸길은 가을 언덕에 닿았고 외진 구름은 저녁해를 다루는데 서리바람 일어 기러기를 쫓으니 기러기떼 흩어져 동강났구료 가태부는 초희왕에게 간언을 하다 귀양간 대신이었으므로 하곡 오빠는 충신 에 비겼으나, 지금의 임금인 선조를 무도한 초희왕에 견주지 않았던 그녀의 재치 또한 뛰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곡은 그 2년 뒤 재기용되었으나 관직 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람하다 1589년 37살의 젊은 나이로 금강산에서 운명하 고 말았다. 난설헌이 죽기 바로 전해였다. 하곡은 뒷날 아우인 교산(蛟山) 허균이 엮은 '하곡시초(荷谷詩抄)'로 미루 어 대체로 신선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난설헌과 교산은 하곡의 영향 을 짙게 받았으니 난설헌의 '유선시(遊仙詩)'와 교산의 '홍길동전(洪吉童 傳)'을 들 수 있다. 난설헌의 '유선시'는 특히 그녀의 비극적 일생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로서, 87수에 이르는 장편서사시다. 유선시는 중국에서도 많이 창작되었으나 곽박 (郭璞)의 것이 유명하다. 허나 그녀의 시는 중국의 유선시와는 입지가 다르 다. 이종은(李鍾殷)에 의하면 중국측의 경우는 현세인의 선계를 동경해 만들 어낸 환상이지만, 난설헌의 경우는 신선의 입장에서 그들의 세계를 노래하였 다는 것이다. 장진(張眞)은 '하루아침에 지어진 작품이라기보다는 날마다 꿈 에서 노닌 사단을 시화(詩化)하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난설헌은 고부간의 불화와 부부간의 불편함으로 얼룩진 현실을 살면서 머리 속으로는 그녀만의 세계에서 노닐고 있었던 셈이다. 그 상상세계에서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꿈을 그려나간 것이 바로 '유선시'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낮과 밤의 두 세계를 동시에 산 여자, 그러나 그 두 세계의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을까. 그 갈등과 고통을 그녀는 스스로 예정한 27살을 기년으로 마무리지었던 것이 아닐까. 마침내 27살이 되자 그 여자는 죽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 한 사실은 다만 그녀의 죽음뿐이다. 그녀의 동생 허균이 방약무인한 태도로 세상을 농락하며 살았다면, 그녀는 스스로의 세계를 독력으로 건설해, 그 세계의 여왕으로 대관하였던 셈이니 참 으로 남다른 천재 남매의 삶이 아닐 수 없다. 난설헌이 죽던 해, 김성립은 그때서야 문과에 급제했고, 그 이듬해 재혼하였 으나 1년뒤 발발한 임진왜란에 의병(義兵)으로 참전, 전사하고 말았다. '난설헌집'은 때마침 교산과 교우가 있었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 쪽에 널리 소개되어 여러 사화집에 수록되었다. 일본 쪽에도 널리 읽히다가 1711년에는 새로 판본이 꾸며질 정도였다. 난설헌의 문명이 중국,일본에 널리 퍼짐과 아울러 우리 땅에서도 그녀에 대 한 칭송과 비난이 일었다. 조선조 사대부 가(家)의 부인이 기녀처럼 상사의 시를 지었다는 식의 비난이 있는가 하면 그 작품의 뛰어난 수준으로 보아 오빠인 하곡이나 동생인 교산의 위작일 거라는 깎아내림이었다. 드높은 명성을 획득한 여류에 대해 반발과 열 등심밖에 가질 수 없는 자들의 억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1900년대에서 따지자면 불과 4백년 전의 이 땅에 살고 있 던 한 여자, 여자라기보다 선구적인 한 예술가의 생애와 시를 읽으면서 필자 는 문득문득 가슴에 들끓는 갖가지 감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삶에서 필자는 사람의 삶이란 대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매월당(梅月堂)의 말마따나 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선 택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삶을 버린 것은 결코 미화시키거나 칭하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 고통과 갈등을 극복함으 로써 '삶의 예술가'라는 빛나는 초상을 우리에게 남겨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 다. 그녀의 시 또한, 삶의 전형(典型)이라는 면에서는 실망치 않을 수 없다. 그 녀는 신선이 되어 신선세계를 노닐기 보다는, 인간이 되어 신선세계를 인간의 것으로 바꾸어야 온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나 시가 부정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 나름대로의 최선의 삶과 최고의 시를 보여주려는 노력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의 태도가 옳다는 것인가. 필자는 그 모순의 그물에서 벗어나고자 그녀의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런 어느날 밤, 밤하늘에서 문득 내 쪽으로 은색광선을 날리며 떨어져 오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별빛에서 필자는 환히 웃고 있는 난설헌의 얼굴을 본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다. 동양의 사고(思考)란 예로부터 물이 돌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상상세계란 바로 현실세계의 변용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신 선이 되지 않으면 그 세계를 쟁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함으로써 그 녀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새로이 만들어 낸 현실세계를 우리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현실을 스스로의 죽음과 맞바꾸었던 것이니 참으로 비싼 교환이 아 닐 수 없다. (박제천) 허난설헌 시비( 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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