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 시조의 존재 이유는 형식

2004.07.29 17:52

미문이 조회 수:435 추천:37



사무친 한을 삭혀꽃은 웃어 피었는가/외로운 눈물 남아 자


규는 흐느끼니/앞 강물 뒷 산에 숨어 눈시울 붉은 열세 살꽃


/반천년 전 수양님 대궐에서 눈 높으실 때/조카는 열 쯤의 적


막을 엮어 내며/청령포 허리에 두르고 봄을 보내며 울었네/역


사의 그리움은 영월에서 시작되고/ 오늘의 시인은 유배지를


그리워하니/넋끼리 짝을 이루는 반가움의 진달래.





- 金京子「청령포 진달래」전문(이하, 『월간문학』7월호)




화자는 청령포에서 진달래꽃을 마난고 자규 소리를 듣는다. 진달래꽃과 자규 소리는 화자의 주관적 정서에 의해 사무친 한을 삭혀 웃는 꽃과, 외로운 눈물이 남아 있어 흐느끼는 소리로 이미지화되어 화자의 가슴에 처연히 도사려 앉는다. 서정적 자아는 모진 풍설을 이겨낸 생명의 강인한 소생이 충만해 오는 자연의 경관에 심취하기보다는 사무친 비사의 현장 청령포의 역사적 사실에 깊이 침잠해 있다.


따라서 진달래꽃은 봄날 이산 저산에 아무렇게나 지천으로 피었다가 의미 없이 지고 마는 무심한 꽃이 아니라, 원과 한이 사무쳐 눈시울 붉어진 열세 살의 어린이로 환치되어 있다. 이러한 환유적 표현 기법에 의해서 진달래꽃은 곧 나이 어린 인격체의 상징임이 분명해진다.


소재를 역사적 사건에서 인유하고 있음도 청령포라는 지명의 특성에서 인지할 수 있는데, 눈시울 붉은 열세 살 꽃의 본의는 비운의 주인공 단종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수양과 조카라는 대칭 시어(둘째수)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서정적 자아는 어린 나이에 비명으로 생을 마감한 단종에 대한 애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정서는 단종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아픔을 연민의 정사로 인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왕위도 왕위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에 더한 가치를 두어 어린 나이를 동정하고 애석해하는 심정이 절절하게 베어 있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투영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정적 자아는 시구에 묻어 있는 리듬을 마치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시력(詩歷), 그 명상에 어울리지 안흔 ㄴ시작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다. 좀더 신중히, 그리고 차분히 감회를 다스렸어야 했다. 실로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첫 수 초장의 후구 '꽃은 웃어 피었는가'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무친 한을 삭혀 꽃은 피어 웃고 있나, 라고 표현했어도 이처럼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수 종장 '앞 강물 뒷산에 숨어 눈시울 붉은 열세 살 꽃'도 애매성을 면할 수가 없다. 이 종장만을 따로 떼어서 보면, 앞 강물은 주어 역할을 한다.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로 볼 때, 앞 강물의 뒷산에 숨어 눈시울 붉은 열세 살 꽃이 된다. 앞 강물, 뒷산을 병렬한 것으로 보왔을 때는, 진달래꽃이 앞 상물에도 숨고 뒷산에도 숨은 뜻이 된다. 이것은 앞 강물과 뒷산이라는 명사들을 바꾸어 '앞집 뒷집에 숨어'로 만들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에서 숫자는 상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나, 여기에 나타난 열세 살의 의미는 둘째 수에서 보이는 '반천년 전'이라는 상징적 의미와는 다르게 쓰여지고 있음이다. 단종의 실제 나이를 직시한 것으로 보이나 청령포와 단종의 열세 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어리다는 의미의 상징적 표현이라면 굳이 열세 살이 아닌 열한 살, 열두 살도 무방한 것이다. 독자들이 당시의 단종을 열세 살로 오해할 수 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된 때도, 사약을 받은 해도 1457년이며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둘째 쑤에서 '수양님'과 '조카'를 대유로 놓고 있는데, 이것도 실은 격에 맞지 안는 대칭이다. 수양은 사회적 계급에 의한 호칭이고, 조카는 천륜을 기본으로 한 윤리적 호칭이다. 여기에서 수양님은 폄하된 세조이고, 조카는 억울하고 원통하게 귀양살이하는 상감 마마이다. 이런 경우 숙질간이거나 군신간의 대칭이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단종을 조카라고 하면 당연히 수양은 숙부여야 하고, 세조를 폄허하여 수양이라 한다면 조카는 오히려 받들어 상왕이라야 제격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그 어느것도 합당하다고 볼 수가 없다. 진달래꽃과 대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종을 진달래꽃으로 환유하였으면 수양도 이에 상응하는 대유로 놓아야 제격이 되는 까닭이다.




밧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피맺힌 말편자/유목민의 고단한


살 끄기로운 日記를 보았다 /물 없는 사막의 길에서 정


신 속 물의 솟구침을 보았다.


- 金京子의 「길」둘째 수




앞의 작품과 함께 발표한 동인의 「길」 둘째 수이다. 「- 광주 비엔날레」라는 부재가 붙어 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보았다'는 과거형 시제를 쓰고 있는 점이다. 서정시는 본래 자기 중심적이며, 현재 시제를 쓴다는 것이 정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면 세계의 말편자(초장)는 유목민의 일기장(중장)이며, 정신 속에 솟구치는 물(종장)로 환치되어 있다. 중첩된 은유로 표현한 말편자와 일기장과 치솟는 물은 유릐(보조관념)이고, 본의(원관념)는 끈질긴 삶이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수법은 치환 은우적 구성 방법으로서 바람직한 기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시조는 의미 중심의 내면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제약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내용이 아무리 시적이라 해도 기본 형식에서 너무 떨어져 있으면 시조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3장 6구라는 기본형이 공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조의 존재 이유는 형식에 있고, 그 가치는 내용에 있는 것이다.


종장은 '물 업슨 ㄴ사막의 길에서 정신 속 물의 솟구침을 보았다'로 구성되어 있다. 자수율, 음보율은 차치하고 의미율로만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산문의 서술형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무시하고, 이를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해도, 누군가가 시조 종장의 자수율을 묻는다면, 3 : 5 : 4 :3이 아니라 3 : 3 : 3 : 2 : 4 : 3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조 종장은 이렇다고 강변할 수 없으니, 이것이 문제이다.




손으로 흙을 파 보면/해와 별이 살고 있다/말로는 할 수


없는/영혼의 언어로/물 소리 흙 소리 챙겨/씨앗들을 깨운다


/깨우면 깨어나는/마음의 무늬든지/해와 별을 내품는/흙덩이


는 생명이다./죽음도 아름다운/빛 줄기 모두어서/제 안에 짓


무르게 피는/올곧은 길이다.


- 윤발선의 「흙」전문




세 수로 된 이 작품에서 흙은 서정적 자아에 의해 해와 별이 살고 있는 흙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인간의 근원적 삶의 본질과 생성의 이치를 심도있게 헤아려 본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손으로 흙을 파 보면'에서는 인간 생활 영위의 기본 수단인 원초적 노동 행위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으며, '해와 별이 살고 있다'에서는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삶의 풍요와 윤택, 안정과 행복을 추상할 수 있다.


흙은 온갖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장소와 영양을 제공하는 자연물이며, 인간도 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생물의 하나이지만, 흙의 소중함을 거의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느 ㄴ게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산소의 소중함을 알고 살 듯이, 흙이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자각이다. 여긱에 제시된 서정적 자아는 흙을 파는 행위(노동)로부터 자신의 소망과 꿈을 실현하려는 미래 지향적 삶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상은 우연히 노출된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한 바에 의해서 표출되는 것이며, 사색과 관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이 흙은 비록 개인적인 상상의 창조물이라 해도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아마 여기에 제시된 서정적 자아는 손으로 흙을 파는 행위(노동)를 통해서 인간 생활의 근본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물 소리 흙 소리 챙겨 씨앗들을 깨운다'에서는 매우 희망찬 미래에 대한 확신을 예감할 수 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영혼의 언어',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말보다는 실펀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채득한 신념의 언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씨앗이 깨어난다는 것은 활기찬 생명이 약동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씨앗은 움을 틔운다. 움은 잎과 줄기를 거느리고 성장하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태초에 주어진 약속이며 진리이기도 하다. 씨앗에서부터 농익은 열매를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은 인간 생존의 도정과 별로 다름이 없다. 따라서 풍성한 삶을 향유하고 보람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흙을 파는 일(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노동이 선행되지 않은 행복 추구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가치관과 생ㅊ활 신조를 반영하야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에 제시된 흙은 곧 생명이며, 인간이 가야 할 바른 삶의 방향이다. '해와 별을 내품는/흙덩이는 생명이다', '올곧은 길이다'(셋째수)가 그것을 확신케 한다. 따라서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생활 철학이며, 신앙과 같은 시인의 올곧은 정신 자세와 희망 어린 모습을 자율처럼 투사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작품의 둘째 수는 그냥 간과할 수가 없다. '마음의 무늬든지', '버려진 혼이든지', '잃어버린 노래든지', '숨죽인 불씨든지', 이 시구들에서 '-든지'가 조사와 어미로 혼합되어 있고, '등등(等等)'의 의미로도 쓰여지고 있는데, 결구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이든, 저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어 적절치 않다. 시상(詩想)은 정제되어야 하고, 시어(市語)는 적재적소에 놓여야 한다. 아무 생각이나 얽어 놓아도 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발상의 초기에나 가져 볼 생각이지, 시의 본문에 표현할 소재로는 적절치 않다. 씨앗의 의미를 좀더 세밀히 묘사하려는 의도로 보이나 오히려 작품의 이미지를 약화시켜 놓았을 뿐이다. 배제하거나, 아니면, 흔히 자유시에서 본문에 나타낼 수도, 그렇다고 묻어 두기에도 아쉬운 시상을 괄호 안에 묶어 놓는 것처럼, 이 둘째 수도 괄호 안에 묶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시조 작품에서는 아직 그런 예가 없지만.




여수 앞바다보다 넒은/님의 마음 봅니다//해를 안고 달을


업고/한 점 구름으로 와서//당신 손 꼭 잡은 듯이/땀을 쥐


고 내려옵니다.


- 이지연의 「향일암에서」전문




「- 원효 대사를 생각하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에서 화자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향일암을 찾아와서는 정작, 향일암은 보지 않고 '님의 마음'을 보고 땀을 죄다.


속인이 향일암을 찾았다면, 그리고 시를 쓴다면, 향일암에 있는 칠성각이거나 독서당, 취성루와 같은 연원 깊은 유물들을 소재로 삼거나, 금오신의 기암 절벽 사이에 뿌리내린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풍광을 노래할 것이다. 아니면, 아침 바다 물결을 차고 장엄하게 치솟는 일출 광경에 감탄하거나,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거북등처럼 생긴 바위들의 신기함에 환호하거나, 확 트인 수평선에서 안겨 오는 상쾌한 기분을 서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착상은 남다르고 범상치 않다. 단수로 쓰여진 이 짦은 시행에다 심장한 의미를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님'은 원효 대사임을 알 수 있지만, 님의 마음을 보는 눈에 대해서는 주상을 할 수바꺼에 없다.


영현(靈現)앞에 서 있어도 사바 세계 속인의 안목으로는 보아도 보이지 안흔 ㄴ법, 더구나 감각 기관으로서의 눈은 사물이나 현상을 볼 수는 있어도 남의 마음을 볼 수는 업사. 때문에 님의 마음을 보는 화자의 눈은 감각 기관이 아니라 심오한 사유의 눈이요, 심안에 투시되는 영묘한 감응일 것이라는 짐작만을 하게 되지만, 님의 마음을 본다는 의미는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한 점 구름으로 와서/의 이미지는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남을 은유한 것이다. '生이란 한 점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 서산대사의 계송을 연상케 되는데, 인생을 뜬구름에 비유하면 '해를 안고 달을 업고'의 의미는 사고팔고의 고통과 번뇌를 안고 지고 살아야 하는 속인의 업보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볼 때, 화자는 해를 안고 달을 업고 한 점 구름으로 향일암을 찾은 것이 아니라, 번뇌와 업보를 안고 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라는 의미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은유로 암시한 님의 마음, 그 구체적 실상이 무엇인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 놓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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