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ed>삼월, 그대에게</font>

2005.03.18 09:38

미문이 조회 수:1353 추천:16

[에세이] 삼월, 그대에게-이향아



'3월'이라는 말은 '2월'이라는 말보다 엄숙함이 덜해서 좋다.
3월의 이미지는 2월이 주는 이미지보다 강렬하거나 냉정하지 않아서 좋다.
'3월'이라고 말할 때, 나는 언제나 '2월'이라고 말할 때보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기분에 잠기는 것 같다.
어떤 시의 마지막 연에서던가. '수선화 새 순 같은 三月生, 저 애는 돌맞이 앞니같이 밝은 三月生'이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싯구절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깊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하여 '三月生'이라는 것에 턱없이 아름다운 환상을 키워가고 있었나 보다.
2월생인 나는 3월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곤 했었다.
겨우 열흘 남짓한 사이인데 어머니가 진통을 좀 참아 두었다가 3월에 나를 태어나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마치 '삼월생' 별자리의 신비한 마법이 내 철없는 꿈과 허튼 소망까지도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만일 2월이 아닌 3월에 태어났다면, 내 운명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찬란해졌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나의 성격 중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만스러운 점들이 많다.
이를테면 나는 정확한 성격이라는 말을 꽤 많이 듣는 편인데, 이 말이 아무래도 칭찬의 말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정확한 성격에는 여분이 없고 숨통이 막힐 듯 철저한 면도 있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큰 결점이 아닐 수 없다.
진실해 보인다는 말도 부담스럽다. 진실해 보인다는 칭찬은 나에게 끊임없이 진실할 것을 요구할 것만 같아서 걱정이 된다. 삼백육십오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실해 보이기만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다.
흔히 진실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다. 그러나 얼마나 고루하고 융통성이 없던가?
나는 내 성격이 우유부단하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어쩌지 못하는 우유부단성, 이것은 줏대가 없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신념이 강한 것보다는 우유부단한 것이 좋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신념 하나로 성공한 역사상의 어떤 인물들을 생각하면 신념이란 얼마나 무서운 독선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들을 남들이 지적해 줄 때마다 마치 그것이, 내가 삼월에 태어나지 않고 이월에 태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은근히 책임을 밀어버리는 버릇이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삼월 첫딸을 낳았을 때, 나는 그래서 기했다. 벼슬이라도 하고 난 사람처럼, 나는 삼월에 딸을 낳은 사실로 으스대고 싶었다.
그러나, 해마다 삼월이 돌아와도 나는 완전한 행복에 잠길 수가 없다.
완전한 행복이라니, 어림도 없다.
나는 오히려 삼월이 되면 더 쓸쓸하고 외롭다.
나는 삼월이 되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아, 삼월이구나. 나는 삼월이라는 말에 취해서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지만 삼월은 언제나 아직 도착해 있지 않는 것 같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뽀얀 하늘을 쳐다보면서, 봄일까? 정말 봄이지? 믿기지 않는 듯 내 마음은 지평선을 서성이는 것이다.
나는 삼월이 되면 지난 겨울에도 몰랐던 추위를 느낀다. 그리고 지난 겨울에도 앓지 않았던 지독한 감기에 시달린다. 입춘이 지난 지도 한 달이나 되었으므로 나는 들떠서 껴입었던 방한복을 너무 일찍 벗었던 것이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로 시작되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나는 삼월이라는 이름에 지레 취해서 미리 봄의 한복판에 와 있었던 것이다.
삼월에는 사방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검은 나뭇가지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시냇가에서, 꿈 속처럼 안개에 싸인 먼 산자락에서, 낮은 안단테의 옥타브로 오르내리는 소리.
그것은 오랜 침묵을 깨고 나무들이 움트는 소리이며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리는 소리일 것이다. 땅 속의 벌레와 산새와 짐승들이 기지개를 펴고 살아 있음의 희열을 누리는 소리일 것이다.
삼월의 소리는 오보에 소리다. 흐느끼는 듯 구슬픈 현악기소리도 아니고, 튀는 듯 영롱한 타악기 소리도 아니다.
삼월은 낮고 부드러운 목관악기 오보에 소리인 것이다.
삼월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 소생하는 기억들, 지난 가을 떠나간 사람들의 추억과, 웅크리고 지내던 겨울날 단하나 희망으로 내걸었던 약속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이라고 우리들은 약속했었음을.
삼월에 색깔이 있다면 우유빛일 것이다.
바람은 스산하게 불고, 가슴이 아린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하여 문득 거리에 나서면, 황사 가루 묻어 있는 삼월의 들녘 끝에는 우유빛 안개처럼 피어나는 그리움이 있다.
풀리는 시냇물은 은회색 띠처럼 빛나고, 제비는 날마다 남쪽 나라의 연두색 소식을 물어온다. 그러나 삼월은 알에서 새로 깨어나는 병아리의 연노랑색이기도 하다.
아니다. 어쩌면 삼월은 바이올렛색일 것이다. 속으로 꽃잎을 품은 봉오리들이 아직은 준비중이라고 기다리고 있을 때, 터질 듯 터질 듯 참고 있는 웃음의 색깔이다. 3월은‥‥
삼월에는 어디로 눈을 두든지 경이로운 색깔로 차 있다. 산도 들도 새로운 의상을 두르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인들은 무겁고 우중충하던 외투를 벗어던졌다. 여인들은 밝은 얼굴 화사한 옷 빛깔로 광채나는 그들의 삶을 이 봄에 다시 창조해낼 것 같다.
삼월은 나이로 치면 막 열일곱 살이다. 아직 어리다고 하지만 청춘을 자부하고 싶은 열일곱 살. 생각해 보면 열일곱 살에 나는 가장 건방지고 당돌했었다. 건방지다는 것은 그나름의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건방질 수 있는 열일곱 살을 사랑하고 싶다.
평생의 어지럼증을 다 합한다 해도 열일곱의 어지럼증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없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나이, 사랑을 신앙하고 사랑을 사랑하는 나이.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미완성의 나이, 열일곱 살의 을씨년스러움과 3월의 을씨년스러움은 많이 닮아 있다.
삼월을 향기로 치자면 옅은 박하향이다. 박하향처럼 신선하고 투명한 삼월인 것이다.
삼월은 비누세수를 하고 나온 얼굴처럼 밝은 안색을 하고 있다. 삼월에서는 물 냄새가 난다. 냉수처럼 청량한 삼월인 것이다.
그러나 삼월은 생각하는 것만큼 부드럽고 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삼월은 그 품 속 깊숙히 도전과 투쟁의 무기를 숨겨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얼어 붙은 땅을 깨고 어린 싹을 밀어올릴 수가 있겠는가?
영어로는 삼월을 마취(March)라고 하는데, March라는 이름의 어원을 따져보면, 로마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Mars)라는 군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또 March라는 말에는 분쟁이 잘 일어나는 '국경지방'이나 중요한 '경계'라늣 뜻도 들어 있다.
꽃 피는 삼월과 싸우는 군인, 그리고 삼월과 분쟁의 국경, 이 두 말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삼월은 분쟁의 달임이 확실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추위와 싸워야지만 비로소 완전한 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까.
겨울의 어둠 속에 구속되었던 봄이, 그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겨울과의 분쟁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니까.
그래서 그럴 것이다. 삼월에 부는 바람에 살갗이 아리는 노여움이 숨어 있는 것은.
그래서 그럴 것이다. 꽃을 피우는 바람이 칼끝처럼 매서운 것은.
그런데 이 마취라는 말에는 또 '행진하다' '전진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웨딩 마취 (Wedding March)에서처럼 '행진곡'이란 뜻도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삼월은 행진을 시작해야 하는 달이다. 어디로 행진할 것인가? 결실의 가을을 향하여, 올림프스 산정을 향하여, 인생의 절정을 향하여 우리는 각자의 이상을 향하여 행진을 해야 한다.
가을로 가기 위하여는, 천둥과 번개로 요동치는 왕성한 생명의 여름을 무성하게 살아내야 할 것이다.
올림프스 산정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계곡과 나무덩굴과 험한 벼랑을 낙오하지 말고 기어올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절정을 향해 행진하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근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리를 옹호하면서 인내와 슬기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해마다 삼월은 나를 새로운 결심으로 떨게 한다. 'Play again!' 다시 시작하라고, 지금은 삼월이라고, 행진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삼월이 속삭이고 있다.
새로 입사한 직장의 동료와 처음 만나고, 새로 입학한 학교의 클라스메이트와도 부푼 기대로 사귀기 시작하는 만남의 달이기도 한 삼월.
이런 삼월에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시집가는 처녀들은 행복할 것이다. 부디 그들에게 신의 끝없는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삼월에 새로 태어나는 아가들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나는 아무런 이유도 바램도 없이 기도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삼월이니까…
나는 오늘밤 일기장에 삼월, March!라고 굵게 쓰겠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2017 문학축제 김종회 교수 강의 원고 미주문협 2017.08.24 254
공지 미주문학 USC 데어터베이스 자료입니다. 미주문협 2017.08.14 234
94 김광수 / 시조의 존재 이유는 형식 미문이 2004.07.29 435
93 위트와 유모어의 문학/수필 미문이 2005.01.14 784
92 신춘문예 詩 가작 시각장애인 손병걸 씨/부산일보 미문이 2005.01.18 501
91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심사평 미문이 2005.01.18 436
90 아버지와 딸 2대째 '이상문학상' / 경향신문 미문이 2005.01.18 496
89 러시아어로 출판되는 신동엽·김춘수·고은 시인의 시 미문이 2005.01.22 1176
88 정현종 시인의 육필 수제본 시선집 미문이 2005.01.22 514
87 ‘가장 따뜻한 책’… “아무렴,사람보다 꽃이 아름다울까” / 국민일보 미문이 2005.03.03 330
86 술이 없다면 詩人도 없다? /경향신문 미문이 2005.03.03 269
85 『05년 조선일보 당선작』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김승해 미문이 2005.03.14 307
84 『05년 동아일보 당선작』단단한 뼈.. 이영옥 미문이 2005.03.14 894
83 『05년 한국일보 당선작』나무도마..신기섭 미문이 2005.03.14 1033
82 『05년 문화일보 당선작』즐거운 제사.. 박지웅 미문이 2005.03.14 1091
81 『05년 서울신문 당선작』흔한 풍경.. 김미령 미문이 2005.03.14 982
» <font color=red>삼월, 그대에게</font> 미문이 2005.03.18 1353
79 <font color=blue>좋은시의 조건 </font> 미문이 2005.04.05 1046
78 페미니즘(feminism)문학이란 무엇인가?/이승하 미문이 2005.04.05 1353
77 문인이 뽑은 가장 좋은시! 가재미/문태준 미문이 2005.05.04 1357
76 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들 / 도종환 미문이 2005.05.04 1502
75 詩的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미문이 2005.05.04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