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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피터 !

2007.11.01 01:05

이 상옥 조회 수:575 추천:61



지난 토요일,
도서관엘 가려고 서두르는 내게
전화가 따르르릉 왔다.
" 대디, 난데 지금 집에 가는중이니 기다려 주세요. "
" 알았다 피터 ! "
조금 후 차소리와 차고 열리는 소리
그리고는 차고쪽 방문이 열리며
뭘 한보따리든 피터가 나타났다.
" 하이 대디 ! "
" 하이 내아들   !  "
우리들은 끌어안고 포옹을 했으며
이층에서 아내가 큰 소리로 " 피터 왔니 ? "하며 달려내려 왔다.
" 엄마 이거 ! "
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 독일 빵집 "에들려
빵만 한보따리를 사왔다.

아내는 약간 초최한 피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걱정이였지만
피터는 겸연적어 하며
요즈음 준비중인 3차 CFA( Certified Financial Analyst )시험 공부하느라
힘이 드는 뜻으로 미소만 지었다.
지난 2000년 유수의 명문대 입사 동기생 15명중
2명만이 CFA 시험 1차에 합격했고
다시 피터만 2차 CFA에 합격해 혼자서 외로히 3차 시험을
준비 중이란다.
이런때
내가 그 아이에게 할말이란
" 너는 성실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니까 네 꿈을 이룰꺼야 ! "
하며 그의 등을 두드려 줬다.


이제는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밝은 장래를 의심치 않지만
그아이가 어릴때 부터 그렇게
뛰여난 아이는 아니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지금 비록 성적이 뒤떨어진 아이 일지라도
부모는 결코 실망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보라는 뜻으로
나는 나의 아들 피터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 딸아이 쏘피아는 한마디로
모범생이였다.
나는 그 아이의 어린시절
그아이를 위해 같이 놀아 주거나
잘때 책을 읽어주고 함께 도서관에 간것 이외에
그애의 학업 성적을 위한 투자를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혼자 티비 ( 교육 방송 )을 보고 에이 비 씨 디를 깨쳤고
학교에 가서는 항상 A를 받아와
아이들 교육 처럼 이세상에 쉬운일이 없는줄 알았는데
그런 이유로
그 다음 피터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나는 친구도 사귀고 좋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다.

다만
그애가 학교에 들어갈때 생일이 9월12일이여
부모에게 한살 일찍 학교에 보네거나
일년 후에 보내도 돼는 결정권이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부모인 나는 우리 한국식으로
일찍 학교에 보내면 다 좋은줄 알고 천방지축인 그녀석을
킨더 가든에 보냈는데
이제부터 문제가 아주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사무실로 피터의 담임 여선생이 전화를 한것이다.
" 자신의 클레스 22명중에 피터 하나만 알파벳을 못 깨쳐서 당신이
집에서 그정도는 좀 수고를 해야한다. " 고 말해
나는
" 아니 그런건 학교에서 가르쳐야 ,,,,,, "하며
말끝을 흐려 버렸지만
그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 한 것이였다.
그후부터 학교에서는
공부는 않하고
허구 헌날 말썽만 부리는 아이의 대열 첫번째가 바로 내 아들
피터 였다.
일 학년이 되고
그러나 성적표는 항상 끝에서 가까웠으며
가끔 스쿨 뻐스 안에서 다른 아이와 싸워 가지고
내가 교장실에 불려 다니지를 않나 ,,,,,
이 학년이 됏지만 상황이 바뀐건 하나도 없었다.

이 학년을 간신히 마치고
성적이 또 끝트머리여서
학군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각 학교에서 추려내여
여름방학 동안 못 따라간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들에게는 불명예스런 학교 였지만

( 아직 까지 내가 아는 사람의 누구의 자녀에게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 )
부모들의 입장으로는 그렇게라도 해서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기 바랬던 것이다.
피터는 누나도 않가는 학교를 내가 왜가냐며
울고 불고 난리가 나서
나는 다시 학교를 찾아가
딸아이도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담당자 하는말이
당신 딸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가 와서 배울것은
하나도 없다면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초등 학교 3학년이다.
담임 선생과 나는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다.
그 녀석이 학교에서 한 행동과
일을 마치고 집에온 내가 그 녀석을 붙들고 숙제를 도와주며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꼼꼼히 선생에게 보고하고.
학교에서도
그 녀석과 코-드가 맞아 장난을 열심히 치는 녀석이 발견돼면
재 빨리 멀찌기 자리를 바꿔치며
그 녀석이 공부에 열중 하도록 힘썼지만
그러나 녀석의 성적은 전혀 변함이 없어

부모로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내 아들에게
한번 이렇게 말했다.
" 얘야, 너는 너의 누나처럼 A좀 받아올수는 없니 ? "하고 웃으며 묻자,
그 녀석 힛죽 웃으며 우리말로 " 아랏어. 아빠  ! "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그때
한마디를 덧붙혀
그 녀석에게
" 네가 비록 공부를 못해도 너는 내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네가 첫번째야 ! "라고 말하자,
그 녀석 싱겁게
" 나도 아빠가 세상에서 잴 좋아 ! " 하고 대꾸했다.

이제는 벌써 5학년
어느날 그녀석이 성적표를 들고
히히 낙낙하며 내게 내밀며
" 아빠 나도 A 받았어요 ! "
하며 나에게 내민 성적표에 과연 A가 하나 있었다.
바로 공작이( Hand Craft ) A였다.
잠시 내 머리속에는 복잡한 생각이 왔다 갔다 했지만
약속대로
" 이 녀석 열심히 해서 A를 받았네. "하며
미소를 지으며 그 녀석의 수고를 격려해주자
그 녀석도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 뿌듯해 했다.

그렇게 초등 학교를 마치고
한국의 중학교 과정인 주니어 하이가 됐다.
여기서 부터는
학군에 따라 좀 다르긴 하지만
피터의 학군은
공부 잘하는 아이 순서 대로 학급을 편성하여
일반은
24명중 우등생만 16명이나 됐어도
피터가 속해 있는 학급은 겨우
준 우등생 1명이 고작인 열등생 반에서 공부를 했다.
모르겠다.
한국같으면 부모들이 아우성을 칠지 몰라도
여기는 모두들 당연히 그런결과를 받아 들인다.
나는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내가 저 아이에게 내 공장을 물려줘야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지네게 됐다.

나는 그 아이와 같이 낚시를 다니고
함께 일하는 아내가 오 밤중에나
집엘 와서
주말이면 잠든 아내를 놔둔채
아이들과 미국 교회에서 종교 교육을 2시간 마치면
도서관으로
공원이나 또 낚시터로
가끔 샤핑을 함께 다니며 한번도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는 다른 아이와 우리 아이를 비교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아이들에게
" 최선을 다하고 성실해라 ! "그말만은 꼭 하면서.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다행이 너무 어린 나이에 학교에간
아들 녀석이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는지 성적이 좀 좋아졌다.
나는 그아이에게
" 거봐라 최선을 다하면 항상 결과가 좋아지기 마련이거든. "하며
그 녀석을 격려해 줬다.
이제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성적은 600여명중
간신히 중간을 유지했지만 나에게는
고맙기 그지 없었다.
바닥을 기던 아이가 장족의 발전을 한것이 아닌가 !
그러나
매일 티비만 보고
냉장고를 끼고 살던 아이여서
몸도 뚱뚱하고
뭐 한마디로 그저 그렇고 그런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는
아들녀석을
나도 그때 막 시작한 테니스를 가르쳤다.
그리고
거금 1500불을 들여 딸아이와 함께 안드레 아가시를 가르친
" 닉 볼리터리 " 여름 테니스 스쿨에
보낸것이다.
가족이 함께 자그 만치 600 마일을 운전하여
두 아이를 떨어트리고 오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제발 테니스를 좋아했으면 하는 욕심 뿐이였었다.

돌아온
두아이는 테니스의 이론을 알고 자랑 스러워 햇으며
특히 매사에 자신감을 갖는 모습을 본 나는
마음속으로 " 투자를 잘했나봐 "하며 기뻐했다.
게다가 테니스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피터가 턱거리로 학군의 최강인 고등학교 테니스 팀에 뽑혔다.
아이는
햇볓이 쨍쨍쪼이는   무더운 여름 태양아래
여기 저기 테니스 시합을 다녔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긴 했지만 그의 몸은 군살 하나 없는
날씬한 소년이 돼있었고
테니스를 치는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고 또 잘 살았다.

나는 들어 내놓고 쾌재를 불러대며 휘 파람을 불수밖에   !

그리고
또 일년이 지나
고등학교 싸프모어가 됐다.
바로 그때
피터와 우리집에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으며 찾아온 것이였다.
다름 아니고
아내의 사촌 언니가 포트란드 오래건주에 살고있었는데
그집 아이들은
타고난 천재들이여서 학교 공부를 무척 잘했다.
그중 둘째 아이가 SAT 수학을 800점 만점을 받고 대학을 일리노이주 샴페인에 있는
U of I로 오게 되여
그집 아이셋 우리아이 둘
첨만나 보는 손윗 동서 부부까지 모두 우리집에 모여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그집 큰딸 소라는 SAT 1600점 만점에 1560점을 받아 각 주에서 2명이 뽑히는 우수 학생으로
백아관을 방문하여
대통령과 함께 사진을 찍은 수재였다.
현재는 콜롬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그 아이까지
모두 모여 어른들은 골프를 치러가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놀이 공원으로 모두들 즐거운
추억을 만든 것이였다.

이제
아이들도 어른들도 다 떠나가고
또 그 가을에 내 사랑하는 딸아이도 대학에 진학하여
모두 떠나버린 조용한 우리집에
변화가 생겼다.
아들 피터가 그때부터 밤 늦도록 아니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공부를 하기 시작 하는 것이였다.

그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시작한 동기가 바로  
지난 여름 그 아이들 끼리 만났을때
소라가   피터에게  
" 이 세상에 바보로 태여 나지않은 사람은 누구나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수 있다. " 라고 말해준  

그말이 바로 피터에게  격려와 용기를 준 말이였던 것이다.
피터의 성적이 막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여
고등학교 주니어때
피터도
평점
4.0 만점에 4.0를 받아왔다.
물론 더러는 에이피 과목을 공부하여 4.0 이상을 받는 학생들도 있지만
나는 내 아들 피터가 자랑스러웠다.

이제
대학 입학을 준비해야 할때
내 평생 소원은 피터가 저 U of I 만 들어가 줬으면 했는데
그 대학 쯤은 문제 없게 생겨 버린 것이였다.
어느날 저녁
피터는 자신의 장래를 나와 함께 의논하기를 원해

우리둘은 차를 한잔씩 나누며 앉아
그 아이에게
어느 대학에 갈예정인가 물었다.
자신은
돈을 제일 많이 벌수 있는 스탁 부로커가 되고 싶어
학교는
유니버 씨티 어브 워싱턴이나 미시간 대학을 가고 싶다 했다.
나는 부모로써
아이들의 학비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 사립 대학에 입학한 딸 아이의 학자금으로 일년에 25000불을
정신없이 마련하고 있는중인데
저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가면
또 다시 한 30000불을 합해  일년에

자그만치 55000불이나 만련해야 하는
그 사정을 아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그렇긴 하지만  
네가 과연 미시간 대학에 입학할 자신이 있는가 하고 묻자
" 아빠, 그일은 내가 해야될 일이니까 당신 몫만 걱정 하세요. "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졸업반이 됏고
11월에 대학 원서를 제출해 보네자마자
그는  이주만에
일리노이대학, 위스칸신 대학, 미시간 대학까지 모두 합격 통지서가 왔다.
당시에
피터가 공부하려는 과목은
미시간 대학과 MIT가 전국 공동 일위였기 때문에
피터는 꼭 미시간을 가기 원했지만
나의 경제 사정 때문에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또 마주 앉았다.
피터는
대뜸
" 아빠 나 유 어브 아이 갈테니까 걱정 하지 마세요. "하며
나를 안심 시켰다.
그녀석이 차라리
" 나 미시간 갈레요 ! "했다면
" 야, 돈 없으니까 유 어브 아이를 가라 "햇을텐데
저 녀석이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나는
" 걱정 말고 미시간을 가라. 내가 집을 저당 잡혀서라도 네학비는 해결할테니까 ! "
피터는
그렇게 해서
미시간을 갔고

또 열심히 공부하며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주립 대학을 4년만에 졸업했다.
물론 행운이 항상 내 아들을 따라줘
직장도 여러 회사중에 입에 맞는 회사를 골라서 갈수있었지만
그건 내가 잘나서나
피터가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엇 보다도
이 세상일을 주관 하시는 그분이
우리 가족에게 베픈 은총일것이기 때문에  !

또 긴 이야기를 한참 햇지만,
이런 우리 가족의 경험이 다른분들에게도 참고가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




- 이 상옥 -

PS: 피터는 그후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여 시카고 대학 MBA를 직장다니며 팟 타임으로 2년 반 만에 졸업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