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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카네이션 가슴에 달고. "

2006.05.14 21:40

이 상옥 조회 수:309 추천:57



오래전
우리 엄마가 나를 낳으실때  
우리 엄마는 이미 과부가 되셨었단다.  
나는 물론 사생아는 아니였지만
유복자로 태여 나게 된 운명이였다.  
물론 내 엄마도 이미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아가셔야 할 팔자에 놓이셨었는데  
엄마 나이는 당시 40세니까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막 불혹의 나이로 한참 젊은 나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한때 그지방에서
행세하던 집안에다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는 유지셨던 아버지께서 급작 스러운 사고를
당해 모든 재산은 당신 치료를 위해 탕진하시고  
아들 둘,
그리고 딸 하나 거기다 어머니 뱃속에는 나까지 남겨 놓은 체  아버지는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 하셨단다.  
지금도 젊은 나이에 가장을 잃으면  
너나 없이 생계의 위협으로 몸부림을 쳐야 하는데
그 시대 우리 엄마의 고통 스러움 이란건  보지 않아도 넉넉히 짐작 할수 있는 일이였다.  
엄마는 아직도 유년기를 못 벗어난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어떻게 어떻게하여 경기도 수원에 정착하셨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난 잘 모르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수원에는 나의 옛추억도 참 많이 남아있다.  


나는 태여 나면서 부터 병약하여 한마디로 모든 잔병 치례라는건 다 하면서
엄마에게는 걱정과 수고만 끼치고 자랐다.  
거기다가 6.25 란 혹독한 전쟁을 격게돼여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피란을 가셨었는데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격는 전쟁 고통이였지만  
특히 홀로 우리를 보호 하시고 먹여 살리시는 엄마에게는 필설로 다 못할 고난의 시기였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우리 가족들의
생활 형편이란건 한마디로 살아 남기 위한 궁핍한 생활 그 자체였었다.
나도 그때는
정말 잠이들때까지 눈 앞에 어른 거리는 먹거리로 환장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과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가난한 것에 대한 불평은 한번도 한적 없이
인간은 다 이렇게 사는줄만 알고 꿈을 키우며 좀 수줍고 어리석었지만
공부는 항상 학급에서 1등을 하며 잘 자랐다.  
그리고 잘때는 어머니 돌아 가시든 해 (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봄 )까지
항상 엄마 가슴을 꼭 끌어 안아야만 잠이 들수있었다.  

우리 엄마 !
그 분은 내 기억에도 언제나 맺고 끈는 것이 분명하셨고  
누구든지 좋아하는 정말 믿을만하신 분이 였으며 친구들도 많으셨다.  
가끔 친구 분들이 찾아와서 살아가며 격게 되는 하소연을 하면
그냥 조용히 들어 주시기도 했고  
사남매를 거느리고 얼마나 어려운 인생살이를
하셨게는가만은  
내 기억속에도
우리 들 앞에서 한번도 힘들어 하시지 않고 열심히 일 하셨쓰며  
신용이 있으셔서 어떠한 약속이라도 약속 은 꼭 지키고 사셨다.  
그렇게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시던 엄마가  
어느 화창한 봄날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진 다음  
잠시 열흘정도 투병 하시다가 아무 말씀도 않 남기시고
그냥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노랑나비와 흰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았고  
먼 산에는 아지랑이가 아롱 거리며  
물 오른 수양 버들로 호들기를 불던 봄 동산은 붉은 진달래가  만발하여 온통 붉게 군대 군대 물든 산을
나는 상여를 따라 구슬픈 상여꾼들의 노래를 들으며  
짚신을 신고 진창에 진흙을 가득 뭍히면서 눈물도
모른체 엄마 상여를 따라 갔었다.  

당시의 내 기분이란것은 무엇에 홀린듯
그냥 벙벙하고 허전할 뿐이였다.
그러나 차츰 엄마가 남기고간 슬프고 터엉 빈 마음의 허무를 느끼게 됐다.  
학교 갔다가 돌아와 " 엄마 ! "하고 부르며
집에 들어오면 횡하니 찬바람이는 빈자리.
사방 어디를 둘러 봐도
내 사랑하는 엄마는 아무데도 없었다.  
아 ~~~~
엄마가 정말 안계시는구나.  
북 바치는 서러움에 나는 통곡을하며 집을 뛰쳐 나갔다.
다행히 엄마가 묻친 곳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혼자 찾아가 물끄러미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히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몇년이 지나니까  
엄마는 이제 나를 돌보아 주시는 나의 수호신으로 변하여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서서히 자리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나의 생활 이란 것은 그냥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그 어느 누구도 격어보지 못한 고통스러운 삶이였지만
난 언제나 돌아가신 어머니께 마음을
의지하며 어떠한 어려움도 잘 이겨 낼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 밤 하늘을 쳐다보면
반짝이는 별빛 사이로
엄마가 나를 사랑스러이 내려다 보시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느때는  
" 엄마  !  나 외로워요. 엄마 보고 싶어. " 하고 울부짓으며 외쳐 볼때면  
어머니께서는 다정하게
" 얘야  !   내 사랑하는 아들아.
어릴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잖니.
넌 내가 믿을 수 있는 애니까 잘 참아 낼수 있을거야."
하며 속삭여 주시는 것 같았다.
그럴때면 난 항상  
" 어머니 절 믿어 주세요.나 할수 있거든요.
또 잘 참아 낼께요."
하며 나의 오늘날 까지 잘 지켜 주신 사랑하는 내 엄마  !

가끔
다른 분들이 쓴 자신의 어머니 회상록을 보면
철이든 만큼의 이성적이고 예의를 지킨 내용을 읽게 되지만
나처럼 어린 시절에 홀 엄마를 여위 사람에게는
변함없이 엄마의 품에 안기는 감성만 남아 있을께다.
이제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나도 장성하여 장년이 됐지만  
내 생각에 우리 어머님의  영혼은  
아마 이세상을 하직한 모든 분들이 가시는 곳을 마다 하시고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지켜 주시고 가끔은 않스러워 하시기도 하셨을것 같았다.
항상 철없는 막내 주위를 맴돌며
내게 용기도 주시고 위로 하면서 오랜 동안을  
나와 함께 계셨을 테니까.
" 엄마 참 고마워. 언제나 나를 지켜주시고 돌봐 주신 사랑하는 우리 엄마 ! "
"얘야, 사랑하는 막내 아들아. 나는 널 굳게 믿고 있었단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 엄마 야 ! " 하며 그 사랑 스러운
품 안에 안기고 싶은 바램은 변함이없다.


" 엄마 ! "
이제 나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든 당신은
정말   " 맑고 깨끗한 영혼 "을 가지고 사셨든 분 같아요.
나는 이 세상에서 11년 정도를 당신 품안에서
자랐읍니다만  
그 어린 내 나이에 당신이 기억에 남을 만한 말씀을
해주신 건 전혀 없었지만 당신의 살아간 발자취
그자체가 바로 내게 해주려 하신 말씀이였을거예요.
정말 당신은 이세상에 태여나서 온전히 당신 몫을
다하시고 훌륭히 세상을 마감한 분이세요.
그리고 나도 그  당신의  " 아름다운 전설  "을
우리 아이들에게 대대로 이여져 내려가는 정신적인 유산으로 만들겁니다.

" 엄마 ! "
이제는 당신도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랑 하셨든 그분 곁으로 가세요.
여기 이 세상은  만사 " 오우 케이 " 이니까요.
그분을 만나시거든  
당신만 남기고 혼자 먼저 가신 분의 품에 안겨
응석도 부리며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보시구료.
우리도 " 빨간 장미 "를 한아름 당신께 보낼께요.

- 당신이 사랑하는 막내 아들 올림 -

( 한국 일보 중서부판 5/1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