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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하나 ! ( 꽁트 )

2007.06.03 08:58

이 상옥 조회 수:506 추천:61

나는 1947년 생이며 74년에 결혼을 했고

같은 해 5월 말,

당시의

많은 동포들처럼 빈손으로 트렁크 하나에 카시미르 담요 한장하고 우리부부 정장 한벌

그리고 속 옷가지 몇점과 결혼 앨범 만을 달랑 들고 이민 비행기를

외상으로 1300불이라는 당시의 거금을 내고 미국에 정착 한 사람이랍니다.

당시 우리나라 일년 수출이 1억 5천만불 하던 시대니까  

미국은 별천지 같은 나라였지요.

미국의 역사는 항상 먼저 온 사람들의 궃은 일들을 뒤에 온 사람들이

하게 되있어서 우리도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 들이던

아침에 커피 끌이고 청소하고 특히 변소 청소를 할 때면 공연히 심통이

사나워 지긴했어도 빈손으로 와서 이렇게 남의 도움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됐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수었어서 고통 스러웠댔지요.

생각해보니 내가 평생을 살아 갈 나라에서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싶어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학교에 등록하고 그야말로 고생스러운 주경야독을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미국을 빨리 이해 할 수 있었고 소위 말하는 '어메리칸 캐피탈리즘

( 미국식 자본주의 )'이란걸 어렴푸시 이해도 하게됐죠.

당시에 내가 배웠  던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존경 받을일이다.

아이디어를 내여 사람들을 고용하고 돈을 벌어 세금을 내는 사람은 훌륭하고

본 받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도 '어메리칸 드림 ( 이민자 누구나가 꿈 꾸던 집을 소유하며

아이들의 꿈을 이루게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였읍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도 딸아이 그다음은 아들,

이렇게 둘을 낳아  

아내와 어려움 모르고 아이들을 다 대학을 졸업하여 딸아이는

대학시절부터 연애를 하던 남자친구와 삼년 전에 결혼을 해서 잘 살고있으며

작년에는 새집을 사서 이사를 했답니다.

우리 사위는 영국계의 백인이며 직업은 변호사지요.  

아들녀석은 미시간 대학에서 경제학과 재정학을 공부한 후 졸업하여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지난 봄에 대학동기와 둘이 시카고 다운타운에

타운 하우스를 사서 요즈음에는 금발의 발레리나와 연애에 빠져 가지고

전화 조차도 뜸 해진 형편이랍니다.  


이제 세상은 많이 변하여 우리 부모님 시대에는 오십이 넘어 육십이 될 때까지

허리가 꼬부라 져도 일을 했어야했지만  

우리시대에는 벌써 주체 못할 시간을 어떻게 소일해야하나 ?에서

시작 한 생각은 급기야 ' 과연 무엇이 인생일까 ? '

아니 ' 멋진 인생살이란 정말 어떤 삶 일까 ? '

뭐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치더군요.

특히 아이들이 떠나 갈 때 쯤이면 여지 껏 묵묵히 삶의 반려로 또 함께 인생을

헤쳐온 동지였던 아내가 소위 말하는 갱년기 우울증이 들이 닥치는 시기 입디다.

나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조실 부모를하여 '안락한 가정 '에 대한 나의 꿈은

한마디로 '내 인생의 목표 '였었지요.



우리 집은 아이들을 탁아소에 맞기지 않으려고 아내는 오후 4시에 일을 시작하여

밤 12시 30분 쯤 집에 오는 일을 하여  아이들은 항상 내 몫이였답니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숙제하고 도서관에가고 식당가고 낚시가고  

아침이면 깨워서 학교 갈 준비시키고  

주말이면 금요일 저녁부터 신나는 밤이였죠.

아이들과 " 핑팽 앨리 "라는 전자오락실에 같이 가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쏘고 부수고 던지고 웃고 떠들고  

끝나면 같이 핏자집에 가고 말이죠.

그러고나서 하룻밤을 자고나면 토요일이 옵니다.

아침에는 아이들 종교교육 때문에 2시간을 미국 천주교회에

데려 다 주고 난 간단히 아이들이 필요한 미국식품점에 들려 필요한 물건을

산 후 다시 교회로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와 가까운 곳에 소재한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두서너 시간을 보낸 다음 간이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는 집으로 갑니다.

그때 쯤이면 아내는 한잠 싫 것 푹 자고 일어나서 집 청소와 빨래를 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요.



나는 결혼하여 아내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들어줬지만  

아이들의 교육 만큼은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지요.

그 이유는 내가 헐씬 더 미국의 교육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서 였답니다.

아내도 그런 사실에 항상 공감하여 의례 껏 내가 잘 알아서 하려니 하고 믿어 줬구요.

다만 아내는 아이들과 우리말로 이야기를 했고 나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어 지금도 아이들은 급하면 " 엄마 ! "를 부르지 않고 " 대디 ! "하고

부를 때마다 난 뭔가 아내 몫을 빼앗아 온 것 같아 아내에게 계면적어 하지요.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 할 즈음에는 경제 사정도

괜찮아져서 집도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매년 우리 가족은 겨울이면

멕시코나 자메이카,풀로리다주,캘리포니아 등으로 휴가를 다니며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답니다.


이제 도리켜 보면  

혼자서나 아니면 친구들과 술판을 벌릴 수도 있고 카지노에도 갈수 있으며

가족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새삼 느끼는 것은  

인간은 쾌락이란 자극이 오래 못 간다는 사실이더라구요.

내게도 한때 '데미 무어 '같이 생긴 백인 여성이 접근했던 때가 있었지요.

어렸을 때 '에바 가드너 '나 '데보라 카 '같은 여 배우들을 상상하며

꿈을 꾸고 공상에 졋었 던 내가 정말 그런 여인이 내게 접근하여 추근덕 거릴 때  

난 심장을 당연히 두근거렸었지요.



어느날 그여자는 노골적으로 ' 시카고 심포니 ' 의 비싸고 좋은 자리 표 두장을

내 앞에 드리밀며 미소를 지을 때  

난 입술을 덜덜 떨면서 " 오우 케이 "하고 대답을 했읍니다.  

아내는 일하러 갔고  

딸아이가 고등학생이였을 때였답니다.  

" 아빠 " 볼일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화를 하며  

난 그여인과 아주 나이스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떨리고 진땀이 나서 고통스러웠었지요.

도둑이 제발 져리다고 항상 사방을 두리번 거려야 하고  

컨써트 홀에서도 덜덜 거리기는 매한 가집디다.  

그 여자가 조용히 머리를 돌리면 그 은은 한 향수 냄새.

내 아내와는 전혀 다른 기막힌 냄새에 정신이 몽롱해 지더라구요.  

음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말이죠.

컨써트가 끝 난 후 그 여자는 집까지 바래다 달라 더군요.

그건 사실 내가 지켜야 할 최소의 에티켓이여서 난 두말 않하고 집이 어딘가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잠시 빤히 내얼굴을 쳐다 보드니 기왕이면 미시간 호숫가를

드라이브를 했으면 좋겠다는 군요.  

시간은 벌써 밤 10시 30분.

' 아내가 오려면 두시간 남았구나.' 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레익쑈어 드라이브를 질주 했답니다.  

여인이 말을 걸었지만 이때는 아내가 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내가 무슨 대답을 어떻게 했는 지도 기억이 않나더군요.  

드디여 그여인의 고급 아파트 앞에 도착했지요.

" 탱큐 매튜 ! "하며

내 볼에다 키스를 할 때 난 다시 한번 정신이 몽롱해졌지요.

그 여인의 은은한 향 내음은 정말 미치지요.

" 매튜 ! 잠시 들어가서 커피 한잔하고 가 ! "

난 마치 얼음 물을 흠뻑 뒤지버 쓴 것처럼 정신이 버쩍납디다.

한마디로 자기와 사랑을 나누고 가란 뜻이 였거든요.

" 쏘리, 마아가렛 아이 해브 투 고 홈 나우 "

" 리얼리 맷 ? "

" 예스, 아이 해브투 ! "

" 바이 매기 ( 마아가렛의 애칭 ) ! "

고개를 약간 흔들며 쓴웃음을 짖는 그여인을 뒤로하고 난 과속을 하여

무사히 집에 도착했지요. ,

막 옷을 벋는 중에 아내의 차소리가 차고에 난 후 그녀는 불이 켜진 페밀리 룸 엘

들어오며 " 또 불키고 자는 구나 ! " 하는 아내의 얼굴과 마추 쳤지요.

" 어 ? 당신 오늘 왠 일이야,이렇게 늦게."

난 죄책감으로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처다 보지도 못하고 횡설 수설했지만

아내는 눈치도 못채고

" 나 변소 가야돼."하고 올라가더니 곧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지요.

난 아이들 침실에 들려 행복하게 잠아든 얼굴을 보며 죄책감으로 울고 싶었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밤새도록 뒷치럭 거리다가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 준후 출근을 했지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읍디다.

난 깨달았어요.

' 바람 '을 피운 다는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 지 말이예요.

난 그길로 멋진 카드를 하나 사다가 그여인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내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더 이상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연을 써서 보네니까 그래도 마음이 많이 가라안더군요.



사실 난 우리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특히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고

여행하고 테니스와 골프를 같이 쳤을 때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더군요.

이제 아이들이 떠나갔으니  

내가 사랑과 추억을 만들 상대는 당신 뿐이구랴 !

30여년 가까이를 동거 동락한 사랑하는 나의 아내 말입니다.





김 성준 님 !

이렇게 아흔아홉 구비처럼 빙빙 돌려서 끝없이 지루하게 말하는 것이

전형적 인 내 스타일이랍니다.

결론은 당신의 딸 들과 아내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어떤건지

난 잘 모르겠군요.

여기 올린 글은 그냥 -작품 -으로 만 이해하고 싶어서죠.

이렇게 아마추어는 가끔 - 꿈 -과 - 현실 -을 분간 못 할 때가 있는 것을

이해 해 주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오시거든 멋진 장미 다발을 그 가슴에 안기며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란 영화에 나오는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처럼

멋진 키스를 딸들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해 보시구려 !

당신의 사랑하는 따님들도 이담에 시집가서 그들의 남편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아야 되잖아요 !

햐 !

오늘도 이글 쓰다가 누구처럼 밤 세우네.

하하하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