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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해외문학상 수상작품

            미주한인 영문소설에 나타난 민족혼의 신화적 가치
         - 차학경(Theresa Hack Kyung Cha)의『딕테』를 중심으로 -
                                                    
                                                     박영호

들어가면서
하나의 신화(神話.Mythologe)나  설화(說話. Fable)는 대체로 역사 이전의 사실이지만, 어쩌면 사실적인 역사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사실적일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은 고대 신화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믿었던 고대 신화만 하더라도 그 방대한 양적,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이를 따를 수 있는 보다 가치 있는 당대의 사실적인 문헌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점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보다 보편적인 최대의 미학적 가치는 그 대상이 우선 신(神)이고, 그 신의 세계가 직간접으로 표현된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보다 바르고 보다 큰 가치를 느끼게 할 수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인류 최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성경(聖經)만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적인 내용이라면 그것은 조금도 신비하지도 않고 지금처럼 관심을 끌 수 없었겠지만, 그것이 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다 큰 미학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문학적 측면의 미학적 가치도, 결국 신이나 신의 세계에 비교적 가깝게 접근되어 있는 신화나 설화적인 표현의 작품이 어설픈 사실적 가치가 표현된 작품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독자들에게 접근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말하는 신화나 설화가 꼭 신 자신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다만 이야기가 무언가 조금 신령하다거나 신의 세계에 접근되어 있는 그런 신비함이나 영묘(靈妙)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인간의 생각이 사실적인 세계를 초월해서 보다 신령한 좀더 높은 가치의 세계로 승화된 그런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점이 사실적인 소설에서 보다 더 미학적으로 상승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신화적인 표현을 반신(半神)혹은 반신적(半神的)인 표현이라고도 하는데, 그래서 고대 전기문이나 영웅전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바로 신화나 전설 속의 인물처럼 조금은 신령(神靈)하기도 한 반신 같은 인간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표현은 주로 상징성이 짙은 고전문학 작품 속에 많이 표현되는데, 근대나 현대문학 작품 속에서도 꾸준히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환상이나 상상 등 꿈의 세계 같은 심미적 세계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많이 표현이 되는데, 주로 상징법을 통한 수사학적 기교를 통해서 주로 표현된다. 또한 이러한 표현 방법은 비교적 전통적인 신화문학을 지니고 있는 민족의 문학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미국 현대문학을 이끌어오던 전통적인 현대 앵글로색손(white Anglo Saxon Protestant) 문학에는 이러한 고전적이고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작품이 거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전통적인 설화나 신화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원주민인 인디언 아메리칸 문학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겠지만, 완전하게 형상화된 작품은 거의 없고, 부분적인 구전 등이 있으나. 이 역시 거의 말살에 가까운 정책으로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으며, 부분적인 구전 등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지금 말하는 바의 신화적 설화적 표현이 1930년대에 남부 농장에서  일기 시작한 흑인들의 소울(soul) 음악과 함께 그런 신비가 깃든 문학적 표현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고, 서민문학처럼 그들 사이에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50년대 <Native son> 을 발표한 리차드 라잇 (Richard Wright)과 <Invisible man 1952년 >을 발표한 랄프 일리슨(Ralph EIlison,)등에 의해 그러한 신화적 설화적 표현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프리카-아메리칸 문학(Africa- American)이라는 소수민족 문학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수민족문학 (Ethnic Minority Literary)의 하나로 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와 토니 모리슨(Tony Morrison)이다. 앨리스 워커는 그의 풀리쳐 수상작인 <The Color of people>을 통해서 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신화적인 세계로 표현했고, 이어서 노벨상을 수상(1994)한 현대 최고의 아프리카 아메리칸 문학자인 토니 모리슨(Tony Morrison)은 그의 대표작 빌러비드(beloved 1988)를 통해서 그들의 원혼(怨魂)들이 지닌 한(恨)과 고통을 신화적이고 설화적으로 밝혀 새로운 신비적 사실주의라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빌러비드>의 내용은 일짝이 미국 신시내티 시에서 있었던 실제적인 사건(1856년)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마가렛 가아너라는 흑인 여자 노예가 노예 사냥꾼들로부터 탈출도중 다시 붙들릴 위기에 처하자, 두 살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노예로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목을 베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고,  '사랑하는 내 아기' (beloved) 라고만 새겨진 묘비명의 아기 영혼의 재현을 시작으로 노예제도로 인해 부당하게 고통과 슬픔을 겪고 죽어간 영혼들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듯 표현하고 있다. 결국 미국으로 향하던 노예선상에서부터 미국에 끌려와서 죽은 수많은 흑인 원혼들의 한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아메리칸 인디언 (Native American)인 루이스 에드릿 (Louise Erdrich)역시 그의 작품 <Love Medicine>과  <The Best Queen>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신비적 세계가 표현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소설들은 현실적 사실을 보다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영적 세계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비적 사실주의가 실용적이고 사실주의적인 미국 전통 문학을 퇴색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전쟁 이후 급격하게 팽창된 자유평등 사상으로 인한 민권 운동의 실현과 함께 맞물려 있고, 많은 다른 소수민족의 권익 신장에서도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돌출적인 변화는 오랜 전통적인 미국 문학형태에 대한 하나의 싫증에서 비롯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백인에 의해 장악되어오던 종전의 백인 문학에서 일종의 반 앵글로 아메리카 문학, 혹은 탈 백인 문학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소수민족의 소설들이 현지인들에게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처럼 그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국가나 민족의 전통문화나 전통 정신 세계가 그들에게 하나의 신화적인 신비한 감동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권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된 중국의 아메리칸계의 대표적 작가 맥신 홍 킹스턴(Maxine Hong Kingston)만 해도 그렇다. 그의 대다수의 작품들이 현지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모국에 대한 표현을 통해 나타난 신화적 신비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1930년대 발표된 강용흘의 <초당>소설이 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한국에 대한 관심과 한국과 동양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한국적 신비성을 소개하게 되었던 점에서도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신화란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이를 신격화 해서 묘사된 것들이지만, 미주한인 영문 소설 속에 나타나는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는 인물의 신격화 보다는 역사와 민족과 그 전통문화에 대한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초월해서 보다 설화적이고 신령한 세계로 승화시켜 보다 큰 미학적 가치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바의 미학적이란 표현은 아름다움에 한정된 협의(俠意)가 아닌, 우리가 말하는 모든 가치를 통칭하는 광의(廣意)의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 해야 할 것이다. 필지는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를 하나의 ‘미적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곤 하는데, 이는 모든 가치기준을 하나의 아름다움에 두고 이에 근거해서 그 가치를 표현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부의 가치도 그 부의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로 인해 이룰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 궁극적인 목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현지인들이 외국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신비함이란 그 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전통이나 관습 내지 그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들 속에 그들의 토뎀이나 샤머니즘 같은 원시 민간 신앙과 함께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들이 깃들어 있다면 더욱 신비해서 더욱 관심을 갖게 되리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다 가치가 있고 신비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그들에게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가능 하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는 사실보다는 한 층 더 높게 종교적으로 승화된 내용에서 주로 발견될 수 있고, 이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참된 미학적 가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실적 세계만을 다룬 작품에서는 이러한 보다 근원적이고 신령한 미학적 가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사실을 초월한 하나의 신화나 설화와도 같은 세계로 승화되어 나타날 때 비로소 그 가치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어 표현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주 한인 영문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미학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바로 우리 미주 한인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미학적 가치를 헤아리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에서 발표된 영문 소설은 1928년에 쓰인 유일한의 《한국에서의 내 어린 시절》(When I was boy in Korea)이 그 시효라 할 수 있고, 이어서 강용흘, 유인덕, 김용익, 김은국, 등에 의해서 꾸준히 발표되어 왔고,  
1980 년대에서부터는 종전에 밝힌 소수민족 문학의 한 여파로 보다 많은 1,5 및 2세 한인 작가들에 의해서 한인 영문 소설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서 우선 현지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점은 우선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우선 앞서 말한 우리의 전통미에 대한 신화적이고 그런 세계에서 오는 신비한 미학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고, 다음 한 가지는 한인 1,5세난 2세 들에게서 표현 되고 있는 이민의 삶에 대한 제반 문제와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주제 중 여기에서는 단연 미주 한인 영문소설에 나타난 우리 고유문화와 역사에 대한 신화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딕테(DICTEE)』에 표현된 민족혼에 대한 신화적 표현
테레사 차학경(Theresa Hack Kyung Cha 1951-1982)에 의해서 발표된『딕테』(11월 뉴욕 Tanam Press ) 작품은 현재 미국 대학과 국내 대학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에 대한 덱스트 북으로 많이 쓰이고 있고, 한동안 미국 평론가들에 의해 미국 1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그는 이미 70년대 후반 그러니까 대학 졸업을 전후해서 영상작가로 그의 이름이 이미 상당 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소설이 처음 발표 되었을 당시 (1982년 11월 NewYork Tanam Press )에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그러니까 그녀의 사후에야 비로소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 까닭은 우선 소설의 난해성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직후인 1983년에 발표된 도널드 리치(Donald Richie )의 논문이나 수전 울프(Susan Wolf)의 애프트 이미지(Afterimage)의 글 등에서 『딕테』에 대해 거론하고 있으나(로라 현이경), 초기에는 거의가 관심 정도를 나타낸 것뿐이고, 아프리카 아메리칸 페미니스트인 벨 혹스 (bell Hooks)가 그의 목소리 내기에 대한 글에서 찬사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로라 현이경의 ‘테레사 학경차 딕테에서’), 아무튼 초기에는 딕테 작품을 <금지된 바늘 땀>(The forbidden stitch)에서는 시로 분류 하는 등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셸리 왕 (Shelly wong)은 『딕테』가 그리스 신화나 가톨릭을 다룸으로써 차라리 아시아계 미국 문학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하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러한 점은 모두가 이 책의 난해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츰 새롭게 그 가치가 밝혀진 것처럼, 이러한 보수적이고 구교적 신앙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보다 더 큰 관심으로 그들에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이는 난해성 속에서도 그러한 종교적 신비가 하나의 신화적인 가치로 승화되어 보다 차원 높게 미학적 가치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자아쓰기 국가쓰기》에서 엘레인 킴, 리사 로우, 셸리 성 왕, 로라 현이강 이렇게 네 사람이 쓴 에세이가 바로 『딕테』의 역사적 그리고 비평적 읽기 등에 대한 조명의 시발점이 된 듯하다. “(로라 현이강의 참고자료에서)
『딕테』는 일반 소설처럼 일정한 스토리가 없고, 일기나 메모, 그리고 애송시나 고해송 등 여러 형태의 글이 영어와 불어와 그리고 여러 문체로 쓰여있고, 인물사진과 기록 사진, 한자 문자, 그리고 인체 조직도와 음성기관 도해 등 실로 여러 형태가 함께 실려있고, 백지 지면을 이용한 명암 효과 표현 등 파격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문장 역시 운문과 산문, 그리고 실용문 등이 혼합 사용되고, 바로 쓰기, 뉘여 쓰기, 타이핑, 서예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표현 기법이 쓰이고 있다.
이처럼 그의 예술은 장르에 개의치 않고, 언어와 음성 시각 행동 등이 모두 함께 혼용 표현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합예술과는 그 형태가 또 다른 장르 경계의 파괴로 시작되는 언어의 반란에 의한 새로운 건축과도 같은 것으로, 이는 바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문학 형태의 대표적인 한 특색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딕테』를 두고 단적으로 “이단성의 미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리사 로우(Lisa Lowe)의 표현에서도 잘 엿볼 수가 있고, 작가가 이미 비데오 작품이나 영상설치 미술 등을 통해서 이름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점을 두고 그녀가 프랑스의 꼴라주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고도 말하기도 한다. (현대미국소설의 이해. 박소영)
이처럼 『딕테』는 언어 예술의 최 전위적인 작품으로 장르의 속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문학 형태에 대한 하나의 텍스트적 가치가 되고 있는 샘이다. 따라서 『딕테』는 국내외에서 문학 비평뿐만 아니라 역사, 영상 예술 및 언어학과 그리고 정신분석학 등 많은 분야에서 비평 대상이 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 파격적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복잡성 속에 작가 가 말하고자 하는 통일된 이야기가 분명히 비밀스럽게 장치되어 있고, 그 핵심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나의 주제는 언어에 관한 것”이라고 첫 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핵심 주제는 언어에 대한 것으로, 자신 기억 속에 깃들어 있는 모든 의식 세계를 언어 구조로 재현하고 있는 점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따라서 『딕테』에는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을 통한 표현으로 많은 내용이 병렬 혹은 혼합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핵심 소제는 언어이고, 이 언어를 하나의 주술(呪術)적인 분위기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민족의 혼과 한을 보다 신화적 혹은 설화적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자신의 근원인 모국어 상실에 대한 고통과 새로운 언어에 대한 강압과 혼란이, 과거 현재의 시제가 혼용되는 언어적 구조로 재현되고 있고, 아울러 암울한 한국 역사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세계가 하나의 사회성 내지 역사적 측면의 페미니즘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애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탈출 등이 현대나 오늘의 시제로 표현되어 이러한 점이 하나의 민중설화적 분위기로 표현된다.

이러한 『딕테』의 주제에 대한 주요 비평을 보면, 우선 UC 버클리의 김경년 교수는 “『딕테』는 성경과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만큼 다원적이다." 라고 말하고 있고, “90년대 이후로 많은 평론가들이 현대의 불확정성, 분열, 그리고 바뀌기 쉬운 복합적인 정체성 사이에 아주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개념과 『딕테』의 유사성에 매혹되어 왔다.”고 일레인 김교수(산호세 대학)는 극찬하는가 하면, 국내의 한 일간지 서평은 “그녀의 글쓰기가 미주 한인문학의 주류를 이루던 자서전적 작품과는 구별되는 주요 이유로 그가 미주 한인문학과 한국 이산문학의 지평을 비약적으로 넓혀놨다.” 라고 평가하고. “『딕테』라고 하는 그 단어의 뜻이 받아쓰기, 지시, 명령을 나타내듯이 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이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불안과,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욕망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딕테』의 제목에서 의미하듯 한국인이라고 하는 한 유색인의 언어에 대한 받아쓰기이자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현지 언어에 대한 받아쓰기의 거부인 셈이다."(국민일보 서평)라고 말하는 등, 90년대 이후로는 실로 수없이 많은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많은 비평가들이 한결같이 그녀의 『딕테』에 표현된 한 이민자의 언어적 문제를 통한 정체성에 대한 그 주제적 가치와 그리고 형식을 초월한 전위적인 구성과 표현 방법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점들이 바로 『딕테』가 지닌 특별한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수 많은 복합적인 가치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가치를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이 점이 바로 이 글의 핵심으로 이 작품에 나타난 언어적 특색의 하나인 극히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의 주술적 표현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표현의 가치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종교적 국가적 그리고 언어적인 면에서 우선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퍼스트모더니즘 이라고 하는 경계허물기와 함께 종합 예술형태를 혼용하는 점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극히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표현이 이 작품이 지닌 또 다른 소설 미학적 가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일찍이 김경년(버클리 대. 평론가. 딕테 번역자)씨가 거론 한 바가 있는 “차학경은 우리의 한으로만 규정지어지는 식민 역사 속에서 유관순의 신화를 발견하며, 자신의 어머니(허영순)체험 속에서 식민시대의 민중신화를 읽어내며, 4.19나 광주민중항쟁, 분단 등의 현대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신화를 엮어나가고 있다. 차학경의 천재성은 바로 이런 ‘신화성의 인식’ 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감히 우둔한 생각을 해본다.” (김경년 딕테 번역 출간 후기에서 『딕테』 P, 214)
이처럼 ‘신화성의 인식’ 이란 표현으로 차학경의 천재성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신화성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닌, 신의 세계에까지 승화되어 나타날 수 있는 한 층 고도화된 미학적 가치에까지 도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선 소설 구성이 아홉 사람의 고대 그리스 신화의 무즈(Muse)의 시신(詩神 )들의 이름을 인용하고 그들이 주관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는 점에서 엿볼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이 무즈들의 신화적인 행위가 아닌 우리의 역사와 사실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김경년씨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신화를 창출해 내고있는 작가의 표현 기법을 천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인류 역사의 근원이나 시작은 성경의 창세기나 각국의 건국신화처럼 신화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실에 대한 신화적인 표현은 어찌 보면 사실에서 멀어지는 비현실적이나 비사실성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이와는 달리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가치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표현이 보다 사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김경년의 ‘신화성의 인식’ 에 대한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유관순과 작자의 어머니를 통한 식민시대의 민중신화와 함께, 민중 항쟁과 분단 등 모든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사실을 마치 한국의 무즈나 다름 없는 여성적인 신으로 신화(神化)화고 있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는 달리 김경년씨가 미처 밝히지 않은 마지막 ‘폴림니아 성시 ‘(Polymnia Sacred Poetry)속에 나타나고 있는 토속적이고 민속적이고 설화적인 쩗은 두 이야기가 바로 『딕테 DICTEE 』의 신화적 표현이 집약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딕테 DICTEE 』가 보다 신화적인 소설로 규정될 수 있는 핵심 주제가 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우선 김경년씨가 밝히고 있는 바의 설화나 신화적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사포(Soppho)의 글을 시작으로 하는 언어 이야기와 이민의 언어적 고통을 다룬 서문에 이어, 첫 번째의 클리오 무즈(Clio muse)의 역사 (History)이야기와, 다음의 칼리오페 무즈(Caliope Muse) 서사시(Epic Poetry)의 어머니 이야기 두 곳에서 주로 표현되는데, 먼저 클리오(Clio) 무즈의 역사 이야기를 보면, 유관순의 사진이 첫 페이지에 실려 있고, 유관순과 삼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함께 독립 투사들에 대한 내용이 소개된다.

“그녀는 삶의 시간을 완성시킨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완성시켰듯이: 그들은 자신의 생애를 끊이지 않는 신화로 만들었고, 역사의 재고에 따라 자신의 행적이 거짓이거나 진실 중 어느 것으로 판명될지 따져볼 여유도 없이 그들의 행동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딕테 P. 38)

작자는 이처럼 유관순을 불멸의 그리고 절대적 위인으로 승격 승화시킨다. 시간을 완성시킨다는 사실은 하나의 의지적이라기 보다는, 숙명적이고 신의 계명처럼 절대불명의 절대성으로 규정하고 있고, 그녀의 시간에 대한 완성의 행위를 영원불멸의 신화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 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 다시. 그것은 똑 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혀진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딕테 P. 43)

이처럼 작가의 표현은 뚜렷한 역사적 의지가 드러나 있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사실적인 역사보다 더 확실하고 단호하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 기록을 넘어선 또 다른 사실적 가치로 살아나는 표현 방법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미래의 역사를 위해서- 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이러한 점이 바로 그의 생각이나 표현이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설화적이고 또는 신화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시간이 멎는다. 시간은 어떤 사람들으 위해서는 멈추어 준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여원의 시간, 나이가 없는, 시간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고정된다. 그들의 영상, 그들의 기억은 부패되지 않는다.”(딕테 P. 47)

영원 불멸의 절대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죽었지만 (일본군애게 총살 당하는 사진이 실려있다.)그들의 죽음은 그 시간부터 영원히 멎는 시간 속에 민족의 영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관순이 신령한 민족의 위인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영원히 살아 남는 역사와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딕테>는 역사적 사실을 보다 근원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서 애국 정신의 영원성이나 절대성을 신화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이 역사의 참된 가치를 밝히고, 소설 미학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무녀와도 같은 이러한 언어 작업은 접신이라도 들린 듯 신화적 작업으로 다음의 칼리오페 무즈(Caliope Muse) 서사시(Epic Poetry)에서도 계속된다.

“당신과 같은 피난민들. 이민자들. 유배자들. 당신의 나라가 아닌 그 땅에서 멀리 떠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나라가 아닌. 당신은 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짓을 그 땅과 사람들에게 하는 짓을. (중략) 당신은 떠났다는 것을 알고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중략)그러나 당신의 마- 음, 영혼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딕테 P. 55)

이곳에서도 역시 첫 페이지가 여성인 작자의 모친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되고 있고, 여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망국의 아픔과 슬픔을 말하고 있고, 고국을 떠나야 했던 고통과 고국에 대한 사랑을 밝히고 있다.

“당신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열 여덟 살 난. 당신은 늘 아팠기 때문에 더욱 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당신은 고된 일살 생활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강제로 주어진 언어들을 말하곤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중략) 당신은 삼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중략)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모국어는 단신의 안식처 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딕테 P. 56)

나라를 잃은 슬픔과 언어를 빼앗긴 고통과 강제로 이국어를 말해야 하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언어는 그들을 상징하는 의식의 전부다. 그래서 언어를 빼앗긴 고통과 남의 언어를 말해야 하는 고통은 치욕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안식처인 그들의 말을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말한다.  
이처럼 언어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처럼, 이 글에서도 언제나 중심이 된다. 또한 여기에서 그녀는 그의 어머니와 그리고 또 그녀의 어머니 등 모두가 여성이고 여성에 대해서만 말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와  그리고 애라토(Erato Love Poetry)에 나타나는 성 태래사 . 이렇게 이 글의 모두가 여성들의 이야기로 이는 페미니즘의 큰 강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칼리오페  무즈  글은 남성들을 배제한 완전히 그들만의 글이다.

“ 마음 한 가운데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 색인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태극 타이치 t’ ai-chi 마크를 가지고 다닙니 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속한다는 상징, 목적의 상징.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상징. 탄생에 의한. 죽음에 의한. 피에 의한, 당신은 그 상징을 당신의 가슴 속에. 마-음 속에. 당신의 영-혼 속에. 당신은 노래합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진정 이것이 애국가였을 것입니다. 부르는 것이 금지된 민족의 노래. 태어나지 않은. 그리고 고아인. 그들은 당신에게서 언어를 빼앗아 갔습니다.”(딕테 P. 57)
  
“당신은 기다립니다. 당신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불이 활활 타오릅나다,
        자비송으로 부터 대영광송까지 성모님의 노래 그리고 거룩하시도다. 응답송까지. 분명히. 곧. 응답이 올 것이다. (중략)
   당신은 기다릴 줄 아는 분이십니다. 미제례에서 기다립니다. 글로리아서 기디립니다. 마그디파캇에서 기다립니다.상투스에서 기다립니다. 응답송가를 위해서. 응답 성가. 합창응답. 메아리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딕테 P.57)

여기까지가 바로 김경년씨가 말하는 바의 딕테의 신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점이 하나의 신앙적인 주술처럼 신에게 향하게 되고, 그리고 드디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하나의 개인적인 간구와 기원이 국가적 민족적으로 확대되고, 결국 민중 설화나 민족신화로 형상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슬프고 쓰라린 국가의 한이 민중적 한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이 바로 딕테가 지닌 가장 큰 문학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필자는 이러한 문학적 성과가 보다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마지막 ‘폴림니아 성시 ‘(Polymnia Sacred Poetry)를 통해서, 작자가 우리의 대중적 민족혼이나 민족정서를 어떻게 하나의 민중적 민족적, 그리고 역사적인 미래의 신화로 승화 시키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딕테의 이 마지막 '폴림니아 성시'(Polymnia Sacred Poetry)에서 작자는, 토속적인 우리 옛 고국의 모습이나 다름없는 여름 들판 위의 우물가를 배경으로한 두 소녀의 이야기와, 그리고 창문 앞에 서 있는 키작은 소녀가 발돋음으로 창밖을 내다보려는 의지가 우리의 미래의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앞쪽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순결한 모습과 슬픈 한의 역사가 우리의 전통적인 여성미를 통해서 다시없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또한 다음 두 번째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얽매어온 과거의 슬픈 역사적 고통의 끈을 풀고, 밝은 미래를 향해 발돋움 하려는 소녀가 창문 앞에서 어머니나 다름없는 누군가의 신과 같은 절대적 힘을 기다리는 그런 민족 모두의 미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전설과도 같고, 꿈속 고향과도 같은 이 고국 들판의 우물가 이야기를 통해서, 가난과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해온 우리 민족 모두의 모습을 하나의 민족적 설화나 신화로 승화시키고 있는 작자의 주술적 언어의 표현에 필자는 경이로움마저 느낀다.

그러나 이 아홉 번째의 마지막 무즈의 이야기는 너무 서정적이고 토속적이며 꿈속의 고향처럼 아름답고 아늑해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귀향이라도 한 것처럼 긴장을 풀고 아름다운 우물가에 주저앉아 버리듯 그저 아름다운 정경에만 젖어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두 글은 네 페이와 한 페이지가 채 못되는 짧은 글이지만, 이곳에는 이 글의 대단원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슬픈 삶과 한이. 그리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가려는 민족적 지혜와 아름다운 마음이, 작자의 주술적인 언어를 통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표현돼소 있다. 결국 우물가의 두 소녀와 창문가의 어린  소녀의 소녀의 모습은 우리 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꿈이 우리의 고유한 전통미를 통해서 극히 정서적이고 신화적이고 설화적으로 우리 민족 모두의 미래에 대한 꿈으로 상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 속에 흐르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 민족 사이에 흐르고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이다.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바로 우리 민족의 바른 모습이고, 그래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민중적 얼과 국민적 서정이 그대로 조화되고 재현된 우리 모두의 민중적 설화이고 민족적 신화라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장인 이 폴림니아 성시 (Polymnia /Sacred Poetry)에 쓰인 두 이야기가 결국 작가가 모든 무즈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요약해서 다시 하나의 대단원으로 구성하고 주제를 표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가 있다.
이제 <딕테>의 핵심 주제가 담긴 두 이야기를 감상해 보자.

“그녀는 이 우물에서 물을 한 번 마셨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멀리 걸었던 것을 기억했다. 한 젊은 여인이 홀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녀 옆에 서있는 두 개의 커다란 항아리를 채우고 있었다. 마을의 우물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때는 여름이었다. 태양은 더욱 이른 시간에 빛나고 기온은 빨리, 그리고 단번에 올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강한 광선을 피하도록 머리에 쓸 흰 수건을 주었고 얇은 직물의 윗 저고리를 주었는데 그것도 하얀색이었다.(딕테 P.179)

길을 떠나온 소녀는 고향과 고국을 떠난 우리 모두의 나그네 모습일 수 있고, 우물가의 정경은 우리가 살아온 바로 우리 과거나 역사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바로 우리 민족과 역사가 현대로 재현된 것이러고 할 수 있다. 소녀가 걸었던 먼 길은 우리가 힘들게 살아왔던 길고 긴 역사의 재현이고, 물 긷는 젊은 여인은 우리 모든 여인들의 모습인 바로 우리 민중 여인들의 한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어머니가 주었다는 흰 수건과 흰색 윗저고리는 바로 백민(伯民)과 서색(瑞色)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민족 성정(性情)이 표현된 전통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고대 샤머니즘적 제례에서 시작된 흰옷과 흰떡 흰술 흰밥에서 시작된 바로 우리 민중 설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흰 빛에 대한 이야기는 엘리테르 서정시’(Elitere Lyrie poetry)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는 여인의 순결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위의 정경은 바로 우리 멀고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민중 설화 속의 모습이고, 민족 신화 속의 모습들이다.

“그녀는 여인이 두레박을 들어올리자, 돌 우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각 동작을 눈으로 따르고 있었다. 여인은 두레박을 우물의 담 위에 쉬어놓고 앞치마 속에 손을 넣어 조그만 사기 그릇을 꺼냈다. 그릇의 이가 빠진 부분은 오랜 시간으로 때가 묻었고 그릇의 바닥까지는 금이 가 있었으며 바닥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릇을 두레박 속에 담가 가득 채웠다. 그녀는 그것을 어린아이에게 주었다.
그녀는 액체를 아주 빨리 마신다. 대지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서늘하다 그녀는 여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이 더욱 맑아졌다. 그녀는 여인이 미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P. 180 딕테)

우물은 원천적으로 우리 삶과 생활의 근원이고 또한 생명의 근원이다.  따라서 우물가의 모습은 바로 우리 삶이 표현된 민족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곳에는 우리의 사랑과 기쁨이, 그리고 고통과 슬픔이 모두 깃들어 있다. 젊은 여인과 어린 소녀, 그리고 먼 길이라고 하는 고통스럽고 힘든 세월과 목이 마른 가난과 슬픔- 이 모든 것이 민족의 힘들었던 역사와 민중의 삶이 표현된 것이다. 또한 우물과 물의 의미는 민족의 삶을 이어온 생명의 근원이며 민족에 대한 사랑의 근원이다. 결국 작자는 이 우물가에 흐르는 두 소녀 사이의 따뜻한 사랑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조그만 사기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민족의 얼이 담긴 만족의 고유한 전통미가 표현된 것이다. 이가 빠지고 때가 묻고 금이 간 작은 사기 그릇-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긴 수난의 역사와 민족의 한이 서린 것이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학적 발상인가. 이것이 바로 그녀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신묘한 신화적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여인은 그녀에게 왜 집을 멀리 떠났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몹시 앓는 어머니를 위해 이웃 마을에서 약을 구해가는 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른 새벽부터 걸었는데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피곤하고 목이 말라서, 우물가로 온 것이었다. “(P. 181 딕테)
“여인은 기울여 들었고 아이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중략)  그녀는 이것들은 그녀의 어머니를 위한 특별한 치료제인데 그녀는 그녀에게 가져다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어 무릎 위에 놓았다. 그녀는 그릇을 들고 약을 꼭 그 그릇에 담아 드려야 된다고 했다. 설명을 마친 후에 열 번째 주머니와 그릇을 그녀가 주는 선물로 간직하라고 했다.”(딕테 P. 181)

우물가의 정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소녀를 위해서 베푸는 젊은 여인의 머리 수건의 보자기와 조그만 사기 그릇과 열 번째의 주머니가 상징적이다. 여기에서 열 번째의 약 주머니는 바로 이 글이 쓰여있는 열 번째인 폴림니아 성시를 (Polymnia Sacred Poetry)를 의미한다. 결국 마지막 이 글은 작자가 독자에게 주는『딕테』의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딕테』의 이 마지막 장은 바로 소녀 어머니의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 열 번째의 약 주머니로 이 사랑의 주머니가 결국 민족의 아픔인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의 주제는 조국의 아픈 역사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베푸는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작자의 수려한 문장을 통해서 샘물보다 더 맑고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앞서의 난해한 문장이 일정한 구성의 묘에서 표현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추리를 가능케 한다.
  열 개의 약 주머니 – 열 번째의 무즈신, 이것은 우리의 슬픈 과거를 치유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개하는 미래의 소망이 담긴 것이어서, 이러한 점들이 바로 이 짧은 우물가의 이야기가 바로 토착적이고 향토적인 민족 설화나 신화로 의도적으로 표현된 된 것이라고 확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두 번째의 이야기 역시 어려운 현실과 미래의 꿈을 상징하는 키작은 소녀와 높은 창문을 통해,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개척해가려는 국민적 소망을 역시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이 글 속에는 우리 민중의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토속적인 정신 세계가 극히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고, 또한 미래에 대한 철학이 있고, 그것이 보다 선험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엄마 나를 창문으로 올려 주세요. 그의 시야로부터 너무 높이 올려다 보는 어린 아이. 유리창 사이로 어떤 영상이 이제 검은색들 회색들의 희미함. 그녀의 위에 머뭇거리는 단지 그녀의 그림자들 머리는 가능한 만큼 뒤로 젖혀졌다. 나를 창문으로 올려 주세요. 창틀과 그 사이 유리. “(딕테 P. 191)

높은 창 앞에 오르기를 바라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검은 색이나 회색 같은 현실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현실극복의 꿈을 밝힌 글이다. 선명한 아름다움이란 창문의 표현으로 우리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고, 그곳을 볼 수 있게 몸을 올려달라는 주술적 표현은 밝은 미래에 대한 우리 모두의 꿈을 표현한 것이다.
창문과 침묵과 그리고 밧줄과 종소리라는 언어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보다 동양 철학적이고 심미적인 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나를 창문으로. 그 그림의 영상으로. 올려 주세요. 암석의 무게에 매어있는 밧줄들을 풀어 주세요. 처음엔 밧줄들. 종들이 떨어지자 울림들이 뒤따른다. 정적을 깨뜨리기 위하여 무게를 들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소리를 떨친다. “(딕테 P. 191)

창문을 통해 밀어 올리기에 대한 의지의 세계가 심미적인 신화적 가치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창문과 침묵과 그리고 암석과 밧줄, 그리고 종소리라는 상반된 언어 의미의 대치를 통해서,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역사와 현실의 모든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한다. 소녀는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고 꿈이다.
암울한 오랜 세월의 정적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이제 종소리로 들리고 그 종소리는 하늘에 떨친다. 그래서 하늘이 울어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극히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세계가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모두가 하늘과 신의 세계에 유관되어 있는 바로 신화의 세계라고 확신 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신화적인 세계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혼과 한을, 그리고 동양적인 철학과 우리의 전통미에 대한 아름다움을 다른 여러 주제와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재기에 넘쳐난 서술인가.
이런 점에서 보면 이러한 신화를 기술하고 있는 그녀 역시 이 작품 속에 표현된 사포 시인처럼, 그리고 그리스의 아홉 무즈와 함께, 그녀 또한 동양의 사포(Soppho)내지 한국 사포라고 할 수 있고, 한국 현대 신화 속의 한 무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적인 문학자가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것은, 우리 미주한인 영문소설을 위해서는 애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버클리 대학에서 사귄 사진 작가 리처드 반즈(Richard Banes)와 결혼하고, 『딕테』를 펴낸 사흘 뒤인 11월 5일 남편의 스튜디오 지하 파킹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라고 하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어처구니 없게 피살 당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녀와 딕테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리라 믿고, 앞으로 제 2의 <딕테>와 제 3의 <딕테> 같은 현지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좋은 한인 영문 소설이 계속 출현되리라고 기대해본다.

(편집자 주)
이 글은『초당  』과『꽃신』(The Wedding shoes)과 『딕테(Dictee)』이렇게 세 작품을 중심으로 쓰여진 글이지만 여기에서는 『딕테(Dictee)』만을 발췌한 수록한 점을 밝혀둔다.

<참고자료>
‘Dictee’  (Theresa Hack Kyung Cha 1982 11월 New York Tanam Press)
The Cycle of American Literature (The first frontier, Robert E. Spiller)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이해’(유선모. 신아사, .2002년)
‘The History of Earlier Korean American’ (1883-1941
‘The Grass of Roof’’ (Kang Yong   Hill. 1931.  Charles Scribner’s Sons.Press. New York)
Beloved (Tony Morrison 1988)
Asian American Literature (Elain Heikyung Kim 1982)
한국계 미국 작가론 (유선모 저 신아사)
The Wedding shoes (Yong Ik Kim .1956. New York harper's Bazarr Press)
아시아계 미국 문학의 길잡이 테레사 차학경의  Dictee(로라 현이강/ 김애주 옮김)
‘자아 쓰기 국가 쓰기’(Writing Self Writing Nation, Kim and Alarcon. 1934 .Berkley Third Woman Press)
‘현대 미국소설의 이해’(박소영. 배화여대)
‘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어문각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