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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힌인 소설연구(7-2)

2006.11.29 12:45

박영호 조회 수:884 추천:59

<미주 힌인 소설연구> 7

3)19 60 년대의 미주 한인 소설
영문 소설   (상)



김은국( 金恩國 , Richaed  E  Kim)

머리글
김은국의  『순교자 』(The Martyred)가 1964년에 뉴욕에 있는 조지 브래질러 사(George Braziller)에서 출간 발표되자, 그는 이약 미국문단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의 소설은 소설 분야에서 20주 동안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뉴욕 헤랄드 트리븐지에서는 “어느 나라에서건 십년만에 한 사람정도 나 나타날 유능한 젊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서평을 필두로 많은 비평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를 극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66년에 구겐하임 장려기금(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고 최우수 도서상(Natinal Book Award)을 받았으며 1969년에는 스웨덴 힌림원에 의해 정식으로 노벨상 수상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30년대의 강용흘과 함께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이지만, 이들의 작품이 영문으로 먼저 쓰였다는 점과 함께 한국적인 민족혼의 결여 등을 들어 본국에서는 이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우리문학으로 포용하지않고, 더러는 그 가치를 폄하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는 한국적 정신이나 한국인의 혼을 주제로 한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한국적 작가이면서 세계적인 작가였고, 현지에서도 그를 미국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여전히 한국이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의 작품은 한국의 혼이나 한국적인 정서를 뛰어넘는 그럴만한 보다 큰 소설적 미학적인 보편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김은국의 <순교자>가 이처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점은 바로 소설의 주제가 인강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종교까지도 초월해서 표현한 휴메니티의 극치라고 할 수 있고, 그 표현 방법이 당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까뮈의 실존적 철학이나 허무주의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 인류 전체의 가장 소중한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에 따른 영혼의 고뇌를 표현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김은국이 1970년 6월에 귀국해서 6월 18일부터7월 4일까지 열리고 있던 ‘동서 문학의 해학’이라는 주제로 극제 펜클럽 제 37차 회의에서 한국측 대표로 참석했을 때 했던 말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 때 대회의 귀빈자격으로 참석한 강용흘이 먼저 모잡지사에서 마련한 좌담회에서 “나는 한국문화나 한국적인 것을 지리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다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사람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어떤 선전을 위해서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했고, 김은국 역시 자신도 ‘한국적’ 혹은 ‘비한국적’이라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고 이에 동조한다. 이어서 그는 “자신은 분명 미국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는 그를 ‘한국작가 리차드 김’ 이라고 소개되기 시작(뉴욕 타임즈, 순교자의 서평 1964)되었다” 고 말하고 있어서 역시 그들은 한국 작가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들이 지닌 가치는 한국의 가치를 넘어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순수 에술을 위한 미적 추구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작품 가치를 보다더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고, 주제만이 한국적인 특색이 나타나 있지않을 뿐 그 소재나 배경이나 이야기는 여전히 한국적인 것들이다. 물론 영문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일 수 있지만,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이제는 따로 이야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이에 대한 이해가 일반화돼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 바삐 이를 우리 문학으로 적극 수용해야 하고 그 문학적 가치를 보다 바르게 평가하여 이를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초석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김은국(金恩國 , Richaed E Kim 1932-)의 생애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는 부분적으로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역시 30년대의 재미작가 강용흘과 마찬가지로 시대적으로 불운한 시대에 살았던 그의 가족은 거주지를 수도 없이 바꾸면서 살았던 연유에서 출생지가 두곳으로 전해지는 점에서 바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은국은 1932년 3월 13일 독립 유공자인 부친 김창도씨와 부인 이옥현씨의 장남으로 함흥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시절을 주로 황해도 황주와 평양에서 보냈다. 또한 그는 평양고보에 입학해서 교육을 받았으나 졸업하기 일년 전인 1947년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기독교 집안인 그의 집안은 공산주의 박해를 피해 월남해서 남쪽 항구도시인 목포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 목포 중고등학교에서 수학했고 이때의 동기생으로는 소설가 최인훈 (‘광장’의 작가)이 있다.
그는 1950년에 서울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인천에 피신해 있다가 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곧바로 군에 입대해서 해병대에서 그리고 육군으로 옮겨 통역잘교 노릇을 하게 된다. 그는 다시 통역 정보 장교로 옮겨 도합 5년동안 근무하게 되고 1954년 보병 중위로 제대를 하게된다. 이어서 그는 미군 7사단 아서 트르더(Artho G, Trudeau)장군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는 1955년에 미국 버몬트 주에 있는 사랍 명문대 미들베리대학(Middlebury collage)에 입학하여 1959년까지 문학 역사, 정치를 공부했다. 이어서 그는 존 홉킨스 대학(Johns Hopkins Univresity)에서 문학 석사학위( M.A in Writting1960)를 받았고1962년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웍샵’ (University of Iowa’s Writter Workshop)에서
창작 석사학위(MFA)를 받았다. 다음으로 1963년에는 하버드대 (Harvard University) 극동언어 및 문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M.A)를 받았다
그는 이미 재학시절인 1960년 2월 미국 여인 페닐로프 앤 (덴마크계 미국인)과 결혼했고, 1960년에 아들 데이빗과1962년 딸 메리사가 출생했다. 그의 미국 여인과의 결혼은 강용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문 소설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1963년부터 캘리포니아 롱비치 주립대에서 영문학 강사로 강의를 했고, 이 때 그는 포드 재단에서 외국학생에게 주는 장학 기금((Ford Foundation Forien AreaFellowship 1962-1963)을 받아 본격적으로 소설창작에 들어갔고, 그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학위 청구 작품으로 했던 소설을 다시 고쳐서 1964년에 뉴욕에 있는 조지 브래질러 사(George Braziller)에서 출간했다.
소설은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일약 도스도옙스키나 알베르 까뮈 등과 견주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30년대의 강용흘에 이어서 1966년에 구겐하임 장려기금(, guggenheim Fellowship)을 받았고. 이어서 그는 그의 제2 소설집인 고국의 5.16 군사혁명을 배경으로 해서 쓴 『순결한 사람』(THE INNOCENT)을 1968년에 발표했다. 이어서 그는 1970년에 그의 출생으로부터 조국이 해방되기 까지의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일제에 의해 모든 것을 이름까지도 빼았겼던 자신의 어린시절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  『잃어버린 이름』(『LOST NAMES』)을 발표했다.
이동안 그는 『순교자』 발표후 조교수가 되어 매사츠세스 대학으로 옮겨가 문학창작을 강의했고, 이밖에도 샌디에고 주립대와 뉴욕주 시러큐스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풀 브라잇 교수자격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이후에는 계속 고국에 머물면서 주로 방송과 신문 Tv 등을 통해 주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사회참여 문학이라할 수 있는 글을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제작 발표했다
또한 그는 작품 창작보다는 번역일에 몰두하여 어네스트 존 헤밍웨이의 『엔덴의 동산』과 솔 벨로의 『죽음보다 더한 불행』과 제이콥 브르노스키의 『인간 등장의 발자취』 등을 6권을 번역했다. 또한 국문으로 이미 두차레에 걸쳐 번역된 『순교자』(장왕록 역 1964년, 도정일 역1967년)를 손수 다시 번역해서 출간했고, (을유문화사 1990,6) 『LOST  NAMES』『잃어버린 이름』역시 손수 국문으로 번역하여 상하 2권으로 출간 했다.(도서출판 다람 2002)이어서  그는 코리아헤랄드의 영자신문과 동아일보에 칼럼이스트로 많은 칼럼 기사를 썼고, 어린이를 위한 『푸른 새』(1983년) 『‘On Japan’(1984) ‘잃어버린 세월’』(1985)’『한국전쟁』(1983) 『한국 기독교 200년』(1981) ‘Apass the Manchuria’(1987) ‘『 in Serch of Lost Koreans in The Soviet Union’』(1988) 『‘The Great Trans-Siveria Railway’』(1989) 등의 저술로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산동포 실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 등을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엮어서 발표했고, 아메리칸 인디언 들의 삶과 자화상을 엮은 『대자와 더불>』를 발표했고  중국과 시베리아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을 찾아 여행한 기록을 적은 포토 엣세이집인 『소련과 중국,그리고 잃어버린 동족들』을 펴냈다.
또한 그는 1990년대 초에 Tv에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난다’ 라고 하는 커피 선전 광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하는 기행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90년대 초에 갑자기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가 미국에 건너가서 지내리라는 추리만 무성할 뿐 십여년 이상 그의 모습은 다시볼 수 없었고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강용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을 펴낸 김욱동(서강대학) 교수에 의해서 그의 행적에 대한 탐문이 시작되었고 미스터리에 가까운 10여년의 그의 행적이 밝혀졌고, 그는 현재 메사추세스 한 시골 마을에 세 은거하고 있으며 그는 그곳에서 지금 암투병중이라고 했다. (‘순교자’의 작가 김은국 행적을 찾아서’ <신동아> 2005.1) 그리고 그는 병마와 투병 중이지만, 아직도 건강하고 그의 작가 정신은 예나 다름없이 꿋꿋하다고 전화로 직접 통화를 한 김욱동 교수는 그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2)『순교자 』(The Martyred)
원래 이 소설은 그가 와이오와 대학 문학 창작과 창작 웍샵에서 학위 신청작품으로 사용했던 것을 구겐하임 장학 기금을 받아서 다시 고쳐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단번에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미국 원로소설가인 펄 벅은 <훌륭한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싱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고 있고,, 시을 긍정하려는 갈망에서 오눈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알아다. 그러나 김은국은 이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 라고 겨찬하고, 뉴욕 타임즈는 “ 순교자는 구약 성서의 욥기, 도스도옙스키, 알베를 까뮈의 위대한 도덕적 심리적 건통에 서 있다.”라고 적고 있으며, ‘어소시에이트 지’도 “순교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마지막 절규할 때와 같은 절망 속에 있을 때의 기독교인의 신앙과 고뇌를 다룬 작품이다. 아울러 치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듯힌 기법으로 쓴 김은국의 이 소설은 인간의 정신적인 시련의 과정을 잘 포착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은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일약 도스도옙스키나 알베르 까뮈 등과 견주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작품으로 1969년 스위스 한림원에 의해 정식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선정이 되어 등록 되었던 점으로 보아서도 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엿볼 수가 있다.

1)전쟁 소설 로서의 순교자
이 작품은 한국동란을 배경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 되고있지만, 전쟁은 비참과 죽음이란 극한 상황으로서의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 직접적인 전쟁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요한 배경으로서 전쟁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대의 절망과 고통과 불안을 그리고 죽음까지도 표현하고 있어서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영혼의 고뇌에 대한 모습을 보다 적나라하게 살필 수있다.  또한 이 소설의 발단이나 중심 소재가 되고 있는 열두 목사의 죽음도 전쟁으로 비롯된 것이고, 이들의 죽음 이외에도 다섯 사람의 주요 인물 중 두 인물이 뒤에 전사를 하게 되고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사람은 생사불명으로 나타나는 등,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처참한 전쟁의 그 비극적인 세계가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의 중심소재가 되고 있는 평양의 열두 목사처형 사건인데, 이 소재 역시 완전한 허구만은 아니고, 실제로 전쟁중에 있었던 북한 기독교계의 비극적인 사건인 목사들의 검거 및 처형 사건(‘순교자 宋貞根 목사전’)과 유사하다고 보면, (작가의 조부는 실제 목사였고 그의 고모부인 이학봉씨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김은국 행방 추적 기사’ <신동아 >2005.1) 이 소설은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참상을 있었던 모습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소설은 하나의 미스터리와 같은 사건에 대한 사실 확인 추적으로 시작되는데, 실제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정신 세게에 대한 진실을 추적해가는 추리 소설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특색이다.
또한 그 진행 역시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처럼 사건 속에 감추어진 비밀에 대한 진실 찾기가 표현되고 있고, 그 미스터리는 소설의 종말에 가서도 주인공인 신 목사의 사망 유뮤나 그의 행방이 의문으로 남는 등, 끝까지 그의 행위에 대한 가치 유무 등은 미스테리로 남는다. 이러한 점이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의식 세계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소설의 발단은 국군의 평양 진주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서 평양 시내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열네 목사가 체포되고 이들이 처형되지만 두사람은 살아 남는다. 이 소설의 화자인 국군 정보장교 이 대위는 점령지인 평양의 치안과 정보 책임을 맡고있는 장대령으로부터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지시 받는다. 이 대위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대학강사로 근무하다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그의 강사경력이 인정되어 정보장교가 되었다. 그는 정치적인 면이나 종교에는 관심이 없고,, 어디까지나 사건의 진실만을 밝히려는 정의감이 있는 이상형의 인물로 이 소설에서 주인공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우선 살아남은 두 목사를 만나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한 목사라고 하는 젊은 목사는 이미 현장에서 충격으로 정신병자가 되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인 중년 목사인 신 목사에게로 시선이 집중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처형당한 열두 목사는 순교자로 생각하지만 살아남은 두 사람을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 목사는 좀처럼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들의 처형을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 대위의 집요한 추궁끝에 그는 결국 그들의 처형장소에 함께 있었다고 밝히고, 그는 죽은 목사들에게나 신자들에게나 자신은 배신자이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의롭게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목사직을 사임히겠다고 한다. 그러자 신자들은 흥분하고 그의 집으로 몰려가 그를 향해 유다! 유다! 라고 외치며 그의 집을 향해 돌을 던진다.
그러나 목사들의 처형에 실제 가담했던 포로로 붙잡힌 북한군 소좌의 진술에 의하면 사실은 이와 전혀 달랐다. 그는 많은 목사들이 모인 대책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내 뱉는다.
“내가 당신네들 그 위대한 영웅, 위대한 순교자들이 꼭 개처럼 죽어 갔다는 애길 들려줄 수 있게된 것은 큰 기쁨이오. 꼭 개새끼들처럼 훌쩍거리며, 낑낑거리며, 엉엉 울면서 죽어갔어~ 살려달라 아우성 치고, 자기네 신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꼬락서닌 과연 보기만 해도 즐거웠어. 그들은 개처럼 죽은거야! 개처럼. 알겠어? 모조리 죽여버렸어야 하는건데!”
그리고 살아남은 두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한 사람은 미처버렸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는 감히 내게 대항해 온 유일한 친구야. 난 당당하게 싸우는 걸 좋아해. 그자는 용기가 있더군.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배짱있는 친구는 그자 하나뿐이었어. 나는 내게 침을 뱉을 수 있는자를 존경해. 그래서 그자만은 쏘지 않았던거야.”
라고 말하고 있어서, 처형당한 열두 목사는 생명을 구걸하며 비굴하게 죽어갔다는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음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신 목사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사실은 이와는 또 조금 다르다. 정소좌의 말처럼 배신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목사들의 대표자격인 박목사는 배신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다른 목사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 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어. 나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없으니까’ 하고, 소리 지르고 ‘정의롭지 못한 하느님에게 기도하고싶지 않아!’ 하고 절대의 고독 속에서 죽어 갔다고 한다.)이러한 표현은 뒤에 나타나는 신목사의 고백과도 같은 것으로 신에 대한 불신과 그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대위는 신 목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결국 이대위는 신목사 자신으로부터 진실에 대한 사실은 고백 받게 되는데, 신목사는 목사로 봉직해오던 중 일찍이 신은 없다고 부종하는 무신론자가 되었으나.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속이고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설교를 해왔고, 북괴군으로부터 살아남은 이제는 그들 모두가 순교자들이었고, 처형당한 순교자들에 대해 스스로 배신자이기를 원하고 신자들에게는 미움을 받는 유다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기상천외의 고백을 듣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 목사가 이처럼 진실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된 그 참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고, 또한 신목사의 그런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점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신을 부정한 신앙인의 고뇌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앞서의 비평들을 통해서도 잘 표현되고 있지만, 작자는 이 소설의 첫 페이지에 수록한 알베르 까뮈에 대한 헌정문을 통해서 알베르 까뮤의 <이방인 >속의 글귀를 인용하고, 까뮈의 그 “이상한 형태의 사랑”(이는 신의 구원을 통한 사랑이 아닌 현실에서의 인간에 대한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의 사랑-필자의 설명)이라고 하는 까뮈의 정신이 자신이 전쟁의 참호 속에서도 비참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밝히고 있듯이, 작자는 이러한 까뮈의 실존적 사상을 이 소설의 중심 인물인 신목사를 통해서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신목사의 미스터리에 가까운 생각이나 행동이 바로 까뮈의 실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상한 형태의 사랑’ 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이상한 형태의 사랑’ 이라는 표현은 결국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의 신에 의한 구원의 사랑을 부정하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은국은 바로 이 이상한 형태의 사랑을 신목사의 고백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신목사의 고백을 인용한 것이다.
“평생토록 나는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 죽움, 냉혹한 죽음에서 받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 아무 것도 없소! 아무 것도!”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엄청난 고뇌가 일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고 그들을 기다는 영광과 영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순교자,  p 281)
하고 말한다. 결국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그래도 그는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애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거짓으로 배신자가 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결국 까뮈의 인간에 대한 실존적 사랑을 표현한 것과 같은 점이라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리가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중략)”그리고 정의는?””물론이오. 정의 –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오? 그 정의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궁극적인 정의를 주어야 하오.  ”  “당신은?”  “계속 고통 받아야 하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자 나는 처음으로, 전쟁에 말려든 이후 처음으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가 시작했다. 그것은 내 양친과 내 조국의 동포들, 그리고 내가 파괴한 수많은 미지의 인간들에 대한 회오의 눈물이었다. (순교자 p 283)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이 바로 신목사의 “이상한 형태의 사랑”이다. 그는 신을 부정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절망의 고통을 사람들에게는 안겨 줄 수가 없고 여전히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점은 화자인 이대위의 자세다. 그는 자기의 직분이나 여견에 관계없이 진실만을 추적해가는, 그래서 그는 신목사와는 다르게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실을 추적해 가고 있어서 진실되지 못한 것 같은 신목사와 갈등을 빚지만, 그도 결국 신 목사의 고백을 듣고 신자들을 사랑하는 그의 뜻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혹자는 진실과 정의만을 만을 추구하는 이대위가 신목사의 진실되지 못한 행동을 끝까지 비판하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 점을 두고 실망을 나타내지만, 이는 이야기가 되지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밝혀가는 진실이란 결국 그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결국 신에 대한 부정과 함께 실존적 인간 구원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순애보적인 인간 구원의 정신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목사의 진실하지 못한 행동이다. 이를 두고 필자가 가까이 접한 글로
작자 김은국이 까뮈에게서 영향읗 받았기에 이 책을 그에게 바친다는 내용의 그의  ‘헌사’와 정명환씨의 『한국작가와 지성』(문학과 사상사 간 1978)의 글을 예로 들어 쓴 이동하(서울 시립대)교수의 ‘순교자와 알베르 까뮈’(재미 한인문학. 도사출판 월인간. 2003)란 글에서 우선 까뮈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정신과 김은국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신 목사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까뮈의 페스트에서 표현되고 있는 점은 신은 없으니 우리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도움이 되던 안되던 극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진실된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고, 이에 비해 김은국의 순교자는 신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도 여전히 종교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어서 신념이 없는 종교를 위장해서 신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점에서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까뮈의 궁극적인 정신이나 신목사의 그 정신이 같타는 것이지 그 방법이 같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이상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보편성에서 벗어난 특별한 형태란 점이 같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신의 구원이 없는 세계에서도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서 현실적 실존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인간 사랑의 정신이다. 따라서 신목사의 방법은 논리적 모순일 수는 있지만, 소설 미학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그리고 ‘이상한 형태의 사랑’ 의 표현으로는 차라리 다시 없이 좋은 표현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신이 없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들이지 신을 긍정하고 보면 모든 이야기는 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종교는 마약’ 이라는 말이나 ‘병자에게 일시적 방편으로 마약을 주는 경우’ 라는 표현에도 설명이 될 수있을 것이다.

결국 이는 인간의 현실적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인 문제들이어서 소설의 핵심 주제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점은 아니다. 따라서 신 목사의 신자들에 대한 본질적인 사랑의 진실성이 문제이지 그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의 의미는 영혼의 세계나 신의 세계가 아닌 있는 현실의 세계를 의미 한다. 따라서 신은 없지만, 그들에게 이 비참한 현실에서 절망과 고통에서 헤어나 용기와 희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신의 구원을 믿게 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김은국의 순교자에 나타난 진실의 문제’ (『재미 한인문학. 도사출판 월인간. 2003)와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신목사가 진실되지 못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속인다는 점인데, 여기에서 그의 진실 문제는 그가 표현하고 있는 그 의 엄청난 고통으로 이미 진실성이 밝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화자인 이대위에 대한 진실의 문제도 그렇다, 그는 보편적인 가치나 진실된 사실만을 끝까지,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좀더 치열하게 신목사와 대치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마는, 그래서 그 역시 순교자의 의미에서 거리가 멀어 졌다고 하는 표현은 좀 석연치가 않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신 목사와 화자인 이대위 그리고 그의 친구이면서 처형당한 목사 중의 한사람인 박복사의 아들인 박대위와 주인공인 신 목사와 그의 친구인 고 군목이고 다은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고 사건이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이 대위의 상관인 정보 책임자인 장 대령 등 다섯 사람이다. 이 중 신목사와 고 군목만이 신앙에 직접 관계된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무신론자에 가깝지만, 종국에 가서는 모두가 신의 유무에 관계없이 구원의 신앙을 이해하고 신자들을 돕는 인간의 따뜻한 사랑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따라서 이대위의 진실 문제에도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고, 이러한 이 대위의 진실 문제나 그의 순교자적 정신은 김은국의 다음 소설인 『순결한 사람』(The Innosennt)에서 화자인 이 소령으로 다시 등장해서 역시 순교자에서 등장했던 인물인 고목사를 다시 만나서 그가 대학으로 복귀하지 않고 군대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과정에서 까뮈의 실존적 민중사랑이나 구원의 사상의 실현 방법과 똑 같은 형태의 순교자적 정신이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다. (죄없는 사람. P4-7)
결국 순교자적 정신이란 고통과 희생이 필수다. 따라서 신목사의 신자들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희생정신이나. 대학에 복귀하지않고 군대에 남아서 무엇인가 국민을 위해서 일하려는 이 소령의 희생 정신이 바로 실존적 순교자적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순교자』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목사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통해선 암시되고 있는 신목사의 모습을 도스도엡스키의 『까라마조브카의 형제들』에 나오는 극시 속에 재림한 예수와 비교해서 그 타당성이나 진실성을 극히 부정적으로 지적한 점에 대해서도 그렇다. 작자 김은국 자신이 ‘순교자’란 의미는 꼭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고, 이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구원과 사랑을 표현하려 했다,’ 고 표현 했듯이, 여기에서 말하는 순교자란 꼭 에수의 부활을 표현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순교자가 누구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이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또한 앞서의 표현처럼 종교적인 사실의 옳고 그름이나 그 진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소설의 방법론적인 이야기 일 수 있어서, 우선 부정적인 측면에서 살필 때 지적될 수도 있는 점들이지 이 소설의 가치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는 있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따라서 순교자에서 표현되는 신앙이란 하나의 소재 내지 방법일 뿐이지 직접적인 주제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명백히 이해해야 할 것이고, 수차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실제 나타내고자하는 것은 인간과 신의 관계나 신의 부재가 아니고,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과 이에 따르는 주인공들의 고뇌가 중심 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 목사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인류에게 현실에서의 위안과 꿈을 주려는 그 실존적인 인간애가 바로 소설의 중심이고 가치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 소설에 나타나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는 흔히 있는 것으로, 이의 가까운 한 예로 박상준씨의 ‘김동리의 기독교소설 다시읽기’ (‘예수에 대한 다시, 새로 쓰기의 의미’ 『문학사상. 2006,3)에서도 김동리는 그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구원의 의미를 인정하고 있지만, <사반나의 십자가>이후를 쓴 <부활>에서는 부활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표현하고 있는 점은 모순이라고 지적하지만, 그러나 이를 소설의 다시 쓰기나 새로 쓰기로 보면 이를 이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김은국의 신목사를 통한 순교자의 표현은 주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방법일 뿐이어서 크게 문제가 될 수가 없다. 결국 도스도엡스키나 까뮈나 김은국의 소설 들은 모두가 궁극적으로 종교를 초월하고 있다는데 보다 큰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소설 『『<다빈치 코드>』 역시 그렇다. 이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개연성이 있는 가설을 실제 사실로 기만하고 있는 점도 이는 신성에 대한 하나의 모독이 될 수는 있지만, 소설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아무튼 <순교자>는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초월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불쌍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끝까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신을 안겨주는 구원의 정신과 자기 희생 정신을 나타낸 휴메니티 표현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결한 사람 』(The Innosennt)
이 소설은 그가 구겐 하임 장려기금을 받아서 쓴 두번째 소설로 1968년(Houhton Mifflinh co. Boston)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작가의 기대처럼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순교자』의 화자였던 인물인 이대위의 재등장이라 할 수 있는 이소령을 통해서 소설이 진행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내용 역시 <순교자>의 내용과 같이 혼란된 인간 사회에서의 나타나는 선악과 그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표현한 것으로, 『순교자』의 연장선상에서 쓰여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의 가치가 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에게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비교적 동일한 관심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전쟁이라고 하는 극한 상황이 배경으로 표현되었던 <순교자>에 비해, 이 소설은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봄부터 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어서, 전쟁 다음에 오는 시대적 사회적 혼란이나 5.16 군사혁명 같은 일종의 한정된 정변이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외국 독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동일한 주인공에 의해서 주로 동일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점이 여전히 관심사가 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순교자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의 내용들이 군 내부의 이야기에 한정되어 있어서 일반 사회의 모습이나 일만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점도 문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한국에의 현실에 관계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이어서 이에 민감한 한국 한국인들에게는 관심이 있을 듯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었던 점이 당시 일반인들의 군부나5.16 군사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팽배해 있었고,  이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국민정서를 생각하면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나 소설의 내용이 군 내부의 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인식되어 아예 소설을 읽으려는 관심조차 지니지 않았던 것 같고, 작자가 과거 군에 재직했던 점 등으로 극우파에 치우쳐 있는 인상이 나타나 있는 점이 더욱 더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과 저자를 철저한 우파로 지적하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스스로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고, 성향에 관계없이 군이 정치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세를 표현했을 뿐이고,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생의 구원이나 이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이 흥미를 끌지 못했던 이유중의 하나가 통일된 사건을 위주로 한 소설이 아니고, 순교자처럼 여전히 상황만을 주로 소개하고 있는 인물 성격 표현을 위주로 하고 있는 일종의 상황 소설이라는 점이다. 흥미 위주의 사건의 특이성에 따른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보다 극적인 연결 고리가 강렬하지 못한 점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미국 육군 군사 교육반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선상에 있는 53명의 장교 중 『순교자』에서 등장했던 두 사람인 이 대위와 군목인 고목사와의 재회에서 시작 되는데, 여기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표현되고 있는 대화 핵심이 바로 순교자의 핵심 내용인 민생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순교자와 같은 실존적 인간 사랑의 방법이 거론되고 있는데, 순교자에서 신목사의 기행과 같은 휴메니즘이 여기에서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서, 그것도 군대라고 하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권력집단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점이 하나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우선 부패한 권력 집단인 군 내부의 심한 분열과 함께 당시의 혼란하고 어려운 사회적 모습이 고목사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고, 거기에다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군부를 신랄하게 비판까지 하고 있는 고목사가 그런 부패하고 쓸모없는 군대에 그대로 남아있는 주인공인 화자 이소령에게 왜 대학으로 복귀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소령은 고목사가 민생 구제의 일이 그의 본분인데도 이처럼 군부의 부패나 사회의 어려운 문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의 신자들의 영혼 구원하는 일들과는 전연 별개의 것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점에 크게 화를 내고, 교회에서 인생을 구원하려는 것이나, 교회 밖에서 민생을 구원하려는 일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고 똑 같은 대상이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어려운 군부의 현실 속에서 머무는 것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보다 앞서는 일일 수 있다는 논리를 밝힌다. 결국 이는 까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전개되는 의료활동을 통해서 그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까뮈의 인간에 대한 현실적 실존적 인도주의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소설이 순교자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인도주의 사상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어쩌면 이소령 자신도 그런 순교자의 정신을 지닌 사람 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무튼 <순교자>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인간과 신의 관계를 통한 인간 영혼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이 소설은 그 시대에 나타나고 있던 그심한 폭력에 대한 불안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 피할 수 없는 인간 도덕 문제를 표면화 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소설의 공통된 그 궁극적인 주제 표현은 역시 인류 구원이라는 인도적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소설의 배경은 부패한 민간 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군부가 군사혁명 조직을 꾸미는 일이 사건의 배경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야기되는 수 없는 음모와 폭력 살육에 대해 주인공이 도덕 문제로 겪는 갈등과 그리고 그 고민을 통해서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이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이소령이고 그의 상대적 인물은 그의 상관인 민대령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인물 성격이 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우선 화자인 이소령은 순교자의 화자인 이 대위와 다름 없는 인물로, 그의 신분은 한국전에 실제로 참전했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이로 군부의 계획 수립 참모의 한 사람으로 비밀스런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그는 폭력을 지극히 싫어하는 도덕주의자이고 정의심에 불타는 애국 청년 장교다.
다음으로 이 소령과 함께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 인물로 등장하는 민대령은 이 소령의 상관인 민 대령이다. 그는 알려지지않은 많은 루머를 지닌 특별한 사람으로 그는 많은 음모를 이선에서 실제 행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방식에 의해서 실제로 살육과 폭력을 거리낌없이 행사 한다. 이에 이소령은 그의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민 소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끝내 울분을 느끼고 그 때마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정의를 역설하지만, 이 때마다 그는 화를 낼뿐 그의 생각에는 변화가 없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극한 상황으로 치닺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만이 다르게 그대로 병행할 뿐, 군 사회의 단결이라는 특별한 관계로 사무적인 유대는 더욱 공고해진다.  결국 민대령은 이소령의 지헤로운 머리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모 속에서 끊임없이 폭력은 이어지고, 그 때마다 이소령은 민대령에게 그 부당함을 토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소령과 민 대령의 변함없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는 인간의 양심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대령은 결국 죽게 되고 말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이소령에 대한 비판은 누구나 손쉽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민대령에 대한 표현은 경우에 따라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자에 따라서 그 시대의 가치기준을 달리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에 대한 문제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선과 악의 도덕기준 등에 대한 문제와 인류 평화를 위한 정의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폭력이 난무하는 불안한 현대 지구상의 모습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 』(LOST NAME 1970)
이 소설은 김은국의 세번째 소설작품으로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Prageger Publishers, Inc 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것이다. 내용은 작가가 태어난 1932년으로부터 조국이 광복되었던 1945년까지의 한 가족의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그들이 직접 보고 겪었던 사실들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 내용 역시 완전히 한국적인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의 헌정문에서 ‘ 이 책을 내 부모님과 자녀들에게 바친다 ‘라는 말을 적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한 가족사를 적은 한 개인의 자전적 글이라 할 수 있지만, 내용은 완전한 소설 형식으로 쓰여있고, 내용 역시 한 개인이나 가족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전체의 이야기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국 광복 이후 잊혀져 가는 우리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인과 이를 통한 관용과 사랑과 그리고 반성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의미에서 쓰인 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이 글의 핵심은 단연 꺼지지않는 굳건한 민족혼의 재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되자, 많은 작가가 관심을 보였고, 각 신문사에서 서평들을 실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나는 이 작품을 김은국의 최고작으로 꼽고싶다. 그는 한 가족의 눈을 통해서 외계에 의한 강점과 수난을 겪고 마침내 해방되기까지의 한 나라의 국민 감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이 작 품은 한국을 소재로 해서 쓴 창작으로서는 내가 여태 읽은 그 어느 것보다 훌륭한 작품이다.” (대지의 작가 펄 S 벅 )” 이 작품은 증오의 글이 아닌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이름을 잃어버린 죄스러움을 조상에게 속죄하는 정경을 극적이고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뉴욕 타임즈 서평. Edward Seidensticker, New york Times Book Review).”이 용기와 인내의 기록은 한 젊은이의 타오르는 분노와 감동적인 사랑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투시한 글이다.”(Saturday Review)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하나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비슷한 작품으로 여긴다는 점이 문제일 것이다. 이점에 대해 서 작자도 “나는 이 책을 하나의 허구적 소설로 썼는데, 독자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으로 보고있다.”라고 불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작자의 허구적 구성으로 쓰인 소설임에 틀림이 없으나. 작자의 많은 사실적 경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점과 표현이 일인칭 화자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 등이 이런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총 8장으로 나누어 있는데, 첫째 장인 ‘강을 건너서’에서는 주인공인 작자가 보자기에 쌓인 젖먹이이어서 아기의 어머니를 통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고, 다음장부터는 소설의 주인공인 작자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어린 화지인 주인공의 눈에 비친 모습이 주로 표현되고 있으나, 사실은 그의 양친과 조부 등 을 통해서 모든 성인 가족들의 감정과 행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은 각기 다른 여러 형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민족적 양심이나 고민, 그리고 갈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이 단지 일제의 압박과 수탈, 그리고 고통만을 표현란 것이 아니고, 그 고통을 이겨내는 민족적 저항의식과 그 힘을, 그리고 미움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관용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반성의 정신까지도 표현되고 있는 점이 바로 이 소설이 지닌 가치이고 특색이라 할 것이다.    
우선 한국인 교사에도 두 형태가 등장 하고 있는데, 한 교사는 제자인 주인공을 위해서 일본인 교사와 맞서 싸우고, 결국 문제가 되어 학교를 떠나 만주로 가지만, 왜경의 밀정으로 오인이 되어 죽음을 당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일본에 동조하는 현실적이고 비양심적인 교사도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당시의 고통과 갈등 그리고 민족적 배신과 동족간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이 패하자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하고 간사하기도 한 일본인 교사가 등장하고 있는데, 작자는 이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인한 보복을 생각하지 않고, 끝내는 관용과 용서로 그를 구해주는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 감동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나 작자의 가족 중에도 삼촌 한 분이 일본군 소좌로 만주 관동군에 가 있다는 집안의 욕된 사실을 감추지않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자기 반성의 정신을 엿볼 수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바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새로운 깊은 뜻을 엿볼 수 있는 점도 이 소설이 지닌 미학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뉴욕 타임즈의 서평에 실린 ‘ 이 글은 증오가 아닌 사랑을 표현한 글이다.’ 라고 표현 한 말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점은 실제로 그의 부친이 독립 유공자였고, 그의 외조부가 목사여서 그의 집안이 모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잃어버링 이름』에서 중심 소재가 되고 있는 ‘창씨 개명’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그 유례가 별로 없는 민족 혼의 말살 정책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났던 1930년대에는 미국의 공황 등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황을 겪고 있었다. 한국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 역시 경제가 어려워지자. 양육 강식을 일삼던 서구 열강들과 함께 중국과 동남아시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고, 이미 만주를 점령하고 본토를 침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발판인 조선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한국에 ‘내선 일체’라는 명분으로 조선어 교육폐지를 통해 조선어를 말살했고, 끝내는 창씨 개명을 시행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언어말살 정책은 유럽에서도 이미 많이 자행되어 왔지만, 일찍이 이름을 말살해버리는 경우는 드믈었다. 동양이나 우리나라에서의 이름이란 조상과 가족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어서 이를 말살하는 것은 조상과 가족의 뿌리까지도 송두리째 말살하는 꼴이 된다.  이러한 고통과 오욕을 겪어야 했던 민족의 수난에 대한 표현이 증오와 분노로만 점철되지 않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고, 자기 반성을 통한 민족적 화합의 정시이 나타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영역본은1888년에 뉴욕 소재 Originally Publish에서 다시 재판되었고, 국문 번역본은 일찍이 을유 문화사에서 1991년 번역 되었으나 번역을 못 마땅하게 여긴 김은국은 자신이 손수 국문으로 다시 쓴 것을 2002년 ‘출판사 다림사‘에서 출간했다. .

뱆음말
그는 1970년 이후에는 별로 창작을 하지않았다. 대신 그는 귀국해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비교적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이와 관게되는 저서를 많이 집필했다. 특히 그는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동포들 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중국, 러시아 거주 동포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이들을 직접 탐방하고 이에 대한 저서들을 통해 이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역시 그는 민족을 사랑했던 민족작가이고. 인류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닌 인도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문학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린 세계적인 작가이었음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