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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소설 연구) (9)

2007.07.23 17:15

박영호 조회 수:453 추천:21

            (미주 한인 소설 연구) (9)  

             1980 년대의 미주 한인 국문 소설  
             송상옥의 등장과 미주한인 현대 국문 소설의 정착  (상)

                                                                                                              (시인. 평론가) 박 영호
들어가면서
1930년대의 강용흘과 1960년대의 박인덕과 김용익과 김은국에 의해서 쓰인 한인 영문 소설들이 한국의 문화와 문학을 현지에 크게 알린 바 있지만. 우리 미주한인 국문소설은 이보다 앞서 1910년대부터 시작되어 1945년 조국광복을 맞기 전까지 꾸준히 발표되고 있었지만, 조국 광복을 기점으로 1980년대까지 이렇다 할 국문소설을 찾아볼 길이 없이 미주한인 국문소설은 일종의 긴 공백기를 맞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한인 이민 역사와도 상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당시 유학생이나 정치 망명객 등 주로 특정 지식인들에 의해서 국문 소설이 쓰여지고 있었으나, 조국 광복을 계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입국해버리자 자연 국문 소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당시 고국에서 유행되고 있던 신문 연재 소설 게재 형식을 이곳 신문에서도 모방 게재하는 형태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부터 한인 여성들의 많은 국제 결혼과 함께 유학생의 숫자가 해마다 증가하여 미주 거주 한인의 수가 광복 전에 비해 많이 증가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숫자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5년에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뉴프런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이민법이 개정 실시(1965년 입안, 1968년 시행))됨에 따라 공산국가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정식으로 이민을 올 수 있게 되자, 이에 많은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대량으로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우선, 초기에는 이러한 외국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던 월남전 파견 기술자들과 서독에 가 있던 간호사와 광부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나, 1970 년에 접어들자 현지와 본국에 개설된 전문 이민 대행업체를 통해서 본격적인 취업이민이 붐을 이루게 되어, 1968년부터 시작된 이민 숫자는 1970년대 말까지 약 70 만 명에 이르게 되었고,(2006년 말 현재 240만)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대도시에는 이미 한인타운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한인 이민자들의 성격을 보면 1910년대의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은 일반적인 현대 이민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이주 목적은 단지 돈을 벌어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종의 취업이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일부는 사진 신부와의 결혼 등으로 미주에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학생이나 망명객과 같은 일시 체류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귀국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겐 이민자라고 하는 뚜렷하고 의식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의 의식 세계는 철저하게 고국과 연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이주 목적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극히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량 한인 이민자들은 이들과는 매우 다르게, 이주 목적부터가 매우 개인적이고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색으로 나타난다.  물론 생활 수준 향상이나 자녀의 교육 등의 일반적인 문제가 다수의 공통된 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파탄이나 애정문제나 또는 도피성에 관계된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이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 현상이라 하겠지만 아무튼 1910년대의 이민자들과는 그 의식 구조가 현격하게 다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점은 이 시기의 소설을 통해 확실하게 구분 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변화 중의 하나가 바로 소설의 배경이나 주제가 고국에서 현지의 이야기로 옮겨왔다는 점이다. 우선 과거 1910년대부터 광복되기 이전까지 쓰인 국문 소설은 거의가 한결같이 조국광복이나 애국 애족 등을 주제로 하는 구국소설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소설의 배경이나 내용이 철저하게 고국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이 시기의 소설은 일종의 현장소설이나 다름없이 주로 이민 초기에 겪게 되는 이민 생활에 대한 회의나 갈등과 좌절과 아픔 등, 철저하게 현지의 삶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제 2기 대량 이민자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의식세계가 한인 국문 소설에 의식세계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량이민이 시작 된지 십여 년이 지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그저 현지에 대한 르뽀 형식의 글인 현지답사나 기행문이나 체류기 같은 글들이 서울에서 발표되고 있었고. 더러는 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으나 그 내용들은 한결같이 고국인들이 본 미국 현지에 대한 소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서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러한 제 2의 대량이민자들의 삶의 모습이나 그들의 의식 세계가 미주 한인 소설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최초로 미주 한인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작가 송상옥씨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본국에서 이십여 년 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통해서 일반 대중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중진 유명작가다. 전업 작가나 다름없는 그가 미국에 이민을 온 것은 1981년이고, 그는 이민을 오자 마자 같은 해에 곧바로 미주 한국일보에 자리를 잡고 신문지상을 통해서 소품 형식의 짧은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송상옥씨야 말로 1980년대 미주 한인 현대 국문소설의 정착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동안의 체험을 중심으로 현지의 삶의 모습과 함께 자신의 의식 세계를 소설로 형상화하여 1986년에 26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집중적으로 신문에 발표했고, 이를 묶어 다음 해에 그의 10 번째의 소설집이며 미주 최초의 국문소설집인 <소리>(범우사 간1987)를 출간했다. 우선 이 소설집은 1980년대 미주에서 발표된 최초의 한인 현대 국문소설집이라는 점에서 우선 특별한 가치가 있고.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제 2 대량 이민자들의 초기의 삶의 모습과 함께 그들의 숨결과 그들의 의식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최초의 택스트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소설집의 표제부터가  <소리> 이고, 부제가 '아메리카 통신'이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이는 이민자들의 모습이나 의식세계를 소리라고 하는 상징적 표현을 쓰고 있어, 이는 현지의 독자만이 아닌 고국의 독자들에게 까지도 일종의 보도 통신 구실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유럽에서 건너온 초기 이민자들이 그들이 보고 느낀 신천지에 대한 새로운 모습과 그들이 겪는 모험이나 체험 등을 적은 글을 작성해서 유럽으로 보냈던 것과 유사한 구실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소리>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나의 삶의 공간 이동이라는 현대 이민자들의 행적이 담긴 하나의 시대적인 자료와 함께 이민자들의 살아 숨쉬는 숨결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자료로서 더 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점은 우리 문학의 영역확대 및 세계화와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이는 일찍이 작품집 <소리'>에 대한 서평으로 강성천 교수가 "이제 우리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할 때다. 그것은 정치, 경제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문학의 측면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또 다른 영역' 월간 <문학정신>1987)라고 평했던 말에서도 이를 잘 엿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민을 온지 십삼 년 만인 1994년에 일시 귀국을 했고, 그리고 의욕적으로 많은 본격 이민소설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자전적 장편 소설 <세 도시 이야기>(상하 2권 1995년 여명 출판사)와 소설집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창작과 비평사 간 1996)이다.
장편 <세 도시 이야기>는 그가 성장한 남도 항구도시와 서울과 그리고 로스엔젤스의 세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한 개인의 생애를 통해서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민생활과 일시 귀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에 따른 그의 모든 의식 구조와 변화를 총체적으로 밝힌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다.  따라서 화자인 이영규의 이민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어린 시절의 근원적인 탐미의 환상적인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비극적인 전쟁을 통한 불운한 한 가정이 파괴되는 배경 속에서 그러한 쓰라린 기억을 지닌 화자는 파괴된 고향을 버리고 떠나 서울에서 좌절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며 탐미적인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그는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는 새로운 고향과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찾아 떠나온 이야기와 현지의 삶에서 느끼는 이민자로서의 갈등과 아픔의 세계를 적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한 개인이 이민을 오게 된 근원적인 의식 세계를 살필 수가 있고, 그가 이민의 삶에서 느꼈던 회의와 갈등과 그 아픔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지닌 꿈에 대한 허무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탈출인 귀향의 의식 세계를 살필 수가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미주 이주자들의 지니고 있는 이민의 꿈과 그들이 현지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그들이 각기 느끼고 있는 이민에 대한 의식 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가 있다.
물론 이는 화자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화자의 의식 세계가 모든 이민자들의 그것과도 똑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이를 통해서 이와 상반된 또 다른 의식 세계나 인물을 조명해볼 수도 있고, 그래서 거기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의식 세계나 이민자들의 참된 실상을 파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개인적인 쓰라린 기억으로부터의 탈출과 탐미의 세계를 찾아 방황하는 개인적인 꿈이 이민으로 연관 지어지고 있고, 이로 비롯된 이민의 삶이 아픔과 허망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함께 자신에게 합당한 일을 찾아 다시 역 이민을 행하는 그야말로 이민의 모든 실체를 그대로 밝히고 있는 샘이다.
그가 다음에 발표한 그의 열 한번 째 소설집인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에서는 그가 이민 현지에서 경험한 십삼 년간의 이민생활에 대한 총 결산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그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여러 형태의 이민의 삶을 통한 그들의 아픔을 밝히고 있고, 자신이 귀국해서 광화문 에서는 느끼는 또 다른 여러 의식의 세계를 밝히고 있어서, 이는 그가 귀국해서 모든 이민자들을 대변해서 내는 제 2의 아픔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의 공통된 주제 역시 이민생활의 아픔과 공허다. 작자는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으로 고국과 미국과 이민을 상징하고,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이중문화인이 되어있는 자신의 의식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이야기는 이민의 이야기이고, 그가 찾아간 이민의 꿈은 한낱 빛깔만 고운 파피꽃밭 같은 신비한 세계일 뿐, 꽃이 지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그저 적막하고 황량한 들판뿐이라는 공허함으로 이민생활의 허무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그는 이민의 꿈이란 근원적으로 한낱 바다의 푸른 빛깔이나 의식 속의 한 조각 하늘빛처럼 환상적인 피안의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고국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어쩌면 그가 서울에 돌아간 현실적인 이유가 그 동안의 이민생활에 대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던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13 년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미국생활을 정리 하는 글을 쓰려 했다는 표현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귀국해서 발표한 글은 생각보다는 그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크게 돌아오지는 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그 사이 고국을 떠나있었던 작가이고 그의 작품이 흥미 위주의 사건이나 사실을 다룬 그런 류의 작품과는 다르게 주로 의식 세계 위주로 묘사한 문예소설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고, 또한 고국을 떠난 작가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 고국의 보수적인 문단 풍토도 그렇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민에 대한 고국인들의 이해가 지금처럼 너그럽지만은 않았던 점에도 문제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점은 그가 서울 광화문에 있었던 세월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소설집<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서두에 적었던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글 속에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가 있디.

"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없었나요? /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요? / 글쎄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서울엔 아무도 없었어요."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 P .285)

그는 서울에 머문 지 사 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IMF로 인한 직장의 어려움과 가족과의 결합 등 현실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은 다만 그가 처음 이민을 오던 때와 똑 같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허망감 에서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꿈과 현실 사이를 부단히 오고 가는 그 사이의 거리가  먼 이국일뿐, 그리고 반복일 뿐 그의 버릴 수 없는 탐미의 세계에 대한 꿈이 그를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오게 했다고 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재 도미 이후에 발표한 그의 자연을 향한 탐미적인 세계에 대한 상징적 작품 <사막 구경>(중앙일보 에머지 새천년 2001)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아무튼 그는 떠남과 돌아옴 이라는 이민을 두 번 행한 경우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재 도미한 이후 그 다음에 느껴졌으리라는 자아에 대한 또 다른 발견과, 영혼의 고향 같은 탐미적 세계와 참된 자아를 끝까지 찾아가는 원숙한 정신 세계가 표현되는 작품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의 작품에는 역량도 문제지만 우선 이민을 와서 역 이민을 갔었고, 그리고 다시 재 이민을 감행한 다양한 경험을 지닌 그에게서 기대해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믿는다.

다음으로 팔십 년대에 미주에 등장한 한인소설 작가는 <바보 용칠이>의 작가 최태응((1936-1998)이다. 그는 해방 전 1939년에 납북 소설가 박태준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을 했고, 한국 전쟁 때 단신으로 월남을 해서 수 많은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다. 그는 사회의 그늘진 세계에서 사는 불우한 사람이나 비교적 신분이 낮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부당하게 겪어야 하는 비극적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지만, 이를 결코 파괴적인 보복이나 악으로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인간애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인간의 순박한 인정으로 승화시키는 작가로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휴메니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거의 절필을 하다시피 하고 지내고 있었고, 그러다가 그는 1979년에 딸이 살고 있던 미국 동부 시카고지역으로 이민을 왔으나, 다음에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로 옮겨와 그곳에서 재혼을 하고 정착하여 지내다가 1998년에 작고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1985년에 단편 '샌프란시스코는 비'(최태응 전집 태학사 간)를 그리고 1988년에 '하나 남은 천사'(미주문학 6호)를 그리고 1995년에 단편 '노마네'<서른세 사람의 만남>(33인 문집 해냄 출판) 등을 발표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이미 삶의 장년기를 넘겨버린 황혼기의 이민자들이 겪는 그들대로의 또 다른 갈등과 소외감에서 오는 회한과 허무를 표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품 세계가 그러하듯이 그의 이민 소설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원망 같은 슬픔이나 고통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곳은 없다. 다만 잔잔한 감동으로 모두를 감싸 안는 다시없이 따뜻한 인간애로 승화키는 오직 너그럽고 순박한 인간의 정을 잔잔하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앞서 표현된 한국 인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답게 그가 남긴 이민소설에서도 힘든 이민의 삶을 외롭고 고통스럽고 슬픈 모습이 아닌 다시없이 순박하고 밝고 천진스런 어린 아이의 모습과도 같이 표현하여, 인간의 정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점을 특색으로 남기고 있다. 아무튼 대가인 그가 대도시가 아닌 한인 타운과는 조금 먼 소도시에 살았던 탓으로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던 점은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이 한국의 대표적인 전쟁소설의 하나이며 이데오르기 작품인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다. 그는 조국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의 최대 시련인 남북분단과 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민족의 최대의 사상적 문제가 되었던 이념문제를 집요하게 다른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그는 1959년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안수길 추천)하여 바로 다음해에 <광장>(1960)이란 소설을 발표하여 관심을 끌었고 후기에는 희곡 작가로 많은 작품활동을 했고 그의 희곡이 이곳에서 여러 번 공연 된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상하 두 권의 장편 소설<화두>( 상 하 2권민음사간 1997)를 발표했다.
작품 <화두>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행적과 의식 세계를 중심으로 엮은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주로 시대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적 이념에 대한 그의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그의 생각을 광범위 하게 펼치고 있다.
그의 가족은 일찍이 북한 땅 회령에서 공산주의 박해로 원산으로 이주했고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전쟁을 피해 그곳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왔고, 그래서 목포 대구 서울 등으로 전전했던 그의 가족이 1970년대 말까지 전부 미국에 이민을 와서 살고 있었고, 그만 홀로 서울에 떨어져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그 동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힘들게 살아왔던 피난살이와 이에 대한 기억과 그 때마다 느끼던 의식의 세계를 시간에 관계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주변과 자신의 생각을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고, 아울러서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부친과 가족을 중심으로 이민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중한 주제 중의 하나로 대두한다.
따라서 <화두>에 나타나는 이민 이야기는 <광장>에 나타난 그의 가족사에 따른 이념문제와 한국 전쟁과 함께 피난살이의 연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민이라는 사실을 고향 상실로 비롯된 하나의 피난살이의 연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969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아이오아 대학에 머문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그는 장기간 가족과 합류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민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거론된다. 이는 길고 긴 피난생활 끝에 온 가족을 안전하게 미국에 정착시키고 난 후 고국의 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고국에 홀로 두고 온 큰아들을 미국 땅에 안전하게 피난 시키지 못한 것을 불안해 하던 그의 부친이 이 때 그의 이민을 권했기 때문에 그의 이민이 하나의 주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국문으로 소설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장남인 데도 끝내 이민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부친과 가족이 전쟁의 불안이 전혀 없는 자유와 땅에서 지내는 것을 다시없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자유로운 사상과 민주주의의 근원지인 미국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따라서 이 <화두>의 핵심은 그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집요하게 추구하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광복 이후의 가장 큰 역사적 시대적 명제인 이념문제 이지만, 이민이라는 문제 역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화두의 하나가 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적인 문제와 비극을 세계적으로 확대 해석해서 이민을 시대적 역사적 측면에서 밝히고, 있고, 한국인의 미국이민은 신세계의 꿈이나 경제자립이 목적만이 아닌 전쟁 등의 불안을 피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가는 또 다른 이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문화적 정신적 측면의 가치를 국제적이고 세계적으로 표현해 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점이 특색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민족의 배타성이 문제인지 아니면 이념 문제 등 지나치게 철학적인 사상적 내용과 그리고 문화적인 내용에 치중된 탓인지는 모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게 많이 읽혀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주 한인 이민의 의미를 우리 민족의 이념적 전쟁의 비극에서 비롯된 하나의 피난처로 다루고 있는 점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보면 이민 소설에 대한 작품 활동 정도나 내용적인 면에서 팔십 년대의 미주 한인 국문소설 하면 단연 송상옥이다. 팔십 년대의 미주한인 소설에 대해 이 만한 양의 소설과 이만한 내용의 소설을 쓴 작가는 아직 없다. 이처럼 그는 1980년대 미주한인 국문소설의 재등장과 함께 미주한인 국문 소설의 정착에 특별히 기여했고, 최태응씨나 최인훈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현재까지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시대적으로 특이한 한 시기와 공간에서 쓰인 문학작품은 미학적 가치에 앞서 역사적이고 사회적 측면에서의 가치가 보다 크게 부각되기 마련인데, 이는 역사가 그 시대의 사실적 기록이라면 문학작품은 그 시대의 살아 숨쉬는 인간성과 문화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고, 특히 소설이 여러 문학 형태 중 가장 사회적인 문학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들이 남긴 소설들은 현대 우리 민족이동과 문화이동이나 그 영역확대에 대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고, 나아가서 앞으로 나타나게 될 이중문화나 글로벌 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리 민족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거론한 세 분 이외에도 일찍이 1970년대 중반에 본국에서 박시정이란 작가가 미주 현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은 <날개소리>라는 창작집(문학과 지성사 1976)을 출간했고, 이어서 김지원이란 여류 작가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우선 이들의 작품이 현지에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과 이들의 작품들이 소품 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동하 교수(서울 시립대)의 저서 <재미한인 문학연구>중 '박시정과 김지원' 에 대한 표현에서 "박시정은 엄격한 의미에서 재미한인 작가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그는 한국 작가인 것이다. "(재미한인문학연구 P, 356)라는 점에서 본문에서 제외 했고, (물론 최인훈도 여기에 해당되지만 그는 중진 작가이고 그의 이민에 대한 이야기가 미주한인 이민의 중요한 한 화두가 된다고 믿어 여기에 싣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에뜨랑재여 그대의 고향은>을 발표한 신예선 작가가 있으나 아직 작품을 접할 수가 없어 차후로 미룬다.
다음으로 1980 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현묵(뉴욕)김유미(시카고)김동원 박요한 김광주 등 실로 많은 한인 국문 소설가들이 등장하고 다양한 형태의 국문 소설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이러한 작가와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 시대적 구분이 되는 2000년대의 작품 세계에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믿는다.

1) 송상옥(宋相玉 1938-)

송상옥과 미주 한인 국문소설
  7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한인들의 이민으로 미주에 한인이 밀집되기 시작한 곳은 L.A와 뉴욕 시카고 등에 먼저 한인 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문화권이라고 해야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신문 발행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이미 본국 네 개의 주요 일간지 미주지사가 엘에이에 밀집되어 있었고, 바로 이러한 시기인 1981년도에 송상옥이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국일보 미주지사 본사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미주한인 국문 소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부문에서는 그보다 먼저 박남수 고원 김용팔 마종기씨 등이 이미 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서부에는 이숭자 김호길 씨 등이 와 있었지만, 소설가 쪽에서는 송상옥씨가 엘에이에 맨 처음으로 등장 했다. 실로 광복 이후 삼십여 년 만에 유명 국문 소설가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소설을 써온 작가로 그는 이미 중견 작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소설가인데도 이를 모두 버리고 이민을 왔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러나 그가 이민을 온 목적이 우선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일반적인 경제적 목적이나, 자녀 교육 등 삶의 질의 개선과는 조금 다른 것은 알 수가 있지만, 이민 목적이 그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단일하게 표현된 곳은 없다. 이러한 그의 이민의 꿈을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룬 조갑상(평론가)씨는 '이주자의 꿈과 삶'이라는 글에서 이주자의 꿈을 '죽기보다 더 어려운 마음의 병'이라고 표현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주자의 꿈은 죽음보다 더한 절대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보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허망함은 아픔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이민 목적은 다만 상징적이고 산발적으로 이곳 저곳에 표현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의 의식 속에 어린 시절부터 지녀온 탐미의 세계에 대한 방황의 연장과, 전쟁의 비극으로 가족과 고향이 파괴되어버린 젊은 날의 절망과 좌절감에서 비롯된 허무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인상이 짙다. 그는 어린 시절 바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의식의 세계가 열렸고, 바다 건너에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함께 자라기 시작했고, 그는 이민 오기 전 수년 동안 해외를 수없이 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바다를 건너 이민을 왔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꿈꾸던 먼 바다의 빛깔과 하늘 위의 한 조각 하늘빛 같은 탐미의 세계는 이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서 오는 허망함의 아픔만을 느낀다.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집 <소리>(범우사)는 그가 미주에 건너 온지 육 년 만에 출간한 것으로 그는 이 작품집에서 여러 형태의 미주한인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이민의 삶에 대한 표현은 한 마디로 극히 부정적이다. 그리고 허무와 아픔이다. 그래서 그는 귀향의 의지를 다지고, 결국 그는 새로운 자아에 대한 발견으로 할 일을 찾아 이민 13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 때까지와 함께 이민의 삶에 대한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 <세 도시 이야기>와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을 발표했다. 이는 그의 인생역정을 통해 꿈의 발원과 함께 이민이라는 떠남과 그리고 다시 귀향과 함께 또 다시 느껴지는 광화문의 인파와 더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민에 대한 행적이나 이민의 아픔이나 이민에 대한 부정적 견해보다도 이러 내용 속에 나타나고 있는 그의 숨김 없는 인간성에 대한 진성성의 표현을 통해 자아성찰과 존재에 대한 탐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의식 세계를 표현함에 있어 자신의 초라한 의식이나 패배의식이나 남의 비판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까지 들어내 보이는 점이 그의 소설의 미학적 가치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조갑상 교수가  "결국 송상옥이 이주의 문제를 공간의 차원이 아닌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송상옥을 통해 본 이주자의 꿈과 삶')라는 하는 말에서도 잘 엿 볼 수가 있다.
그는 4년여 동안 고국에 머물다가 고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장기출장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다시 하는 일을 찾아 새롭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다시 차를 몰고 사막으로 가 그가 그리는 환상의 세계 같은 곳을 찾아 헤맨다.
이렇게 그의 이민의 삶은 떠남과 귀향과 다시 떠남이 있고. 그 속에 고통과 아픔이 있고, 그리고 안식과 평화가 있고, 갈등 속에 허무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이 반복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는 이민이라고 하는 떠남의 의미만이 아닌 귀향과 함께 다시 떠남이라는 떠남이 반복되는 이민에 대한 모든 역정을 거친 특이한 경우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고국과 이곳을 오고 가거나 하는 공간 변화나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린 사실적 고향을 떠나서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그가 추구하는 탐미의 세계를 현실 속에서 찾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그는 "이상하게도 나는 바다의 집념이 강하게 일 때일수록 좋은 소설을 쓰고 싶어진다." 라고 <바다에의 집념> 에서 말했던  환상 같은 상징의 세계가 그곳이 아닌 이곳 미국에서 현실 속의 탐미적 세계로 나타날 것을 기대해 본다.

(2)송상옥의 창작활동과 작품 연보(宋相玉 1938-)
그는 1938년 일본 토야마현(富山縣)에서 부친 송응순씨와 모친 김수연씨의 사이에서 낳은 8남매 중에서 다섯째인 삼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해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그 해에 해방이 되어 귀국(1946)했고 경남 마산에서 성장했다. 그는 귀국하자 마자 초등 2 학년에 곧바로 입학을 해서 처음에는 언어문제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우리말을 익히게 되었고 성장해서는 우리말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중학에 입학하던 해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대학(와세다 대학)을 나와 당시 마산 상업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그의 큰 가형이 미군 통역으로 지원 입대해서, 그 해 겨울에 북한 서부전선에서 실종(후에 전사로 처리)됨에 따라 그의 부친과 함께 모든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정에는 크고 작은 불운한 일들이 많이 생기고, 그의 가정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기울어진 것 같다, 이러한 점이 그의 성장기에 상처로 남아 그가 성장한 후에까지도 그의 정신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는 마산 중학을 거쳐 마산 고등학교에서 수학했고, 이 때 벌써 훗날 시인과 소설가로 문단에 활동하게 된 강이석 이재하 이광석 박헌령 김병총 김만옥 등과 함께 "백치 동인회"에서 같이 활동을 했고, 그의 작품이 당시 유명 학생잡지 <학원>과 서울 <학생신문>등에 입상되기도 해서 그는 일찍이 소설가의 길로 입문했다.
마산고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1958)해서, 김동리 서정주 김구용 박목월 등에게 지도를 받았고 1960년에 졸업했다.  이때 함께 수학해서 후일 문단에 등단한 급우로는 김문수 김민부 김사림 김주영 박경용 박이도 박종배 백도기 서영수 오재섭 오찬식 유현종 윤석진 윤혁민 이규호 이근배 이리화 이창연 조대현 조장희 천승세 최선호 홍기삼 등이 있다.
  그의 부친은 장남의 실종으로 인한 슬픔으로 늘 가슴 아파하다가 끝내 1958년 11월에 별세했다.
그의 부친이 별세한 다음해인 그가 대학 재학 2학년 때 그는 그의 소설 '검은 이빨'(1959 1월)이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고, 같은 해에 단편 '제 4 악장'이 국내 최대 지성잡지인 <사상계>(1959 5월)에 신인 작품으로 추천되어 등단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신춘 문예에 입선한 작품 '검은 이빨'은 소설 내용이 너무 자극적인 흑백문제가 다루어진 것으로 이는 한미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어서 신문에 게재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가작으로 처리가 되었다. (당시 동아 일보 문화부장이 직접 밝힘)
이 작품은 다시 '바닥 없는 함정'으로 제목을 바꾸어 같은 해 사상계에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 단편 '바닷가의 이야기'(자유공론)와 '죽음저쪽'(학생예술)을 발표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곧바로 군대에 입대했고 군 복무 중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중편 '도피'(새벽지)외 단편 '바다 저쪽'(새벽지)을 발표했고, 5.16 직후인 6월에 제대를 하자, < 사상계>에 단편 '잠복초'와 '형제' 그리고 '두 죽음'을 발표했으나, 그의 작품  '잠복초' 가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듬해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62년에 그는 사상계 출신 소설가 김동립의 추천으로 그가 과장으로 있던 국가최고 회의 산하 '국제문제 연구소'에 들어가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 때 단편 '성 바오로의 신부'(사상계)를 발표 했다.
이어서 그는 1963년 단편 '짓밟힌 유산'(현대문학) '마의 계절'(사상계)을 발표 했고, 1964년에는  '어두운 날'(세댸) '다시 그 웃음을'(사상계) '투명도'(문학춘추) '냄새 나는 사나이'(현대문학) '두 친구'(신동아) '추상'(세대)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이 그는 그의 모친이 별세(1964)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 년 뒤인 1966년에 그는 선배 소설가 김동립전무와 문화부장 이경남 시인의 추천으로 직장을 일요 신문사(현대 경제일보)로 옮기고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에는 왕성하게 열정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단편 '화석'(정맥) '단층'(현대문학) '마로니에주변'(신동아) '하이 소사이어티 클럽' <문학>'옥상에서'(사상계) '귀환선'(자유공론) '귀향'(청맥) '삼팔선이 이사 갔다'(시사) '바다와 술집'(문학)(이상 1966년) 등이 있고, 1967년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소설계) '우리 어머니를 아시나요'(한국 전쟁문학전집) '떠도는 심장' (현대문학) '작은 석상'(동서춘추)등을 발표했다.        
다음해 1968년에 4월에 그는 권경자(41년 출생, 동창인 권 영근의 누이)씨와 결혼을 했고, 같은 해에 다시 직장을 조선일보로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문화부 차장을 거쳐 월간부 부장대우로 지내다가 13 년만인 1981년 2월에 사직했다.
이 해 '잃어버린 동산'(농원) 'o 양의 병실'(여성동아) '열병'(현대문학)허깨비'(월간문학)를 발표했고 이 중 단편 '열병'으로 1969년 2월에 제 14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인 7월에 장남 인준이 출생했고  '말라리아 섬'(신동아)'시계와 예수 그리스도'(현대문학) '형장'(현대문학) '천사의 집'(주부생활)을 발표 했고 다음해에는 장녀 규영이가 출생했다. 발표된 작품은  '실종'(월간문학) '반신불수'(현대문학) '썩은 맹장'(세대) '가면주점'(문화비평) '낮과 밤의 이야기'(예술) '어두운 바다'(다리)등이 있디.
1971년에는 장편 '죽어서 말하는 여자'(주간조선 연재 )'비너스 작전'(현대문학) '탈바가지의 얼굴'(월간문학) '흉물'(신동아) '어떤 몰락'(현대문학) '유배'(월간문학)장편 '환상살인 '(삼성출판사)을 발표했고, 1972년에는 '여배우의 결혼'(여성중앙)을 그리고 1973년'에는 '겨울 비'(문학사상) ''어떤  종말'(현대문학) '유한 술전'(문학사상) '아무도 오지 않았다'(세대)을 발표 하고, 1974년 '가면부대' (신동아) '상가'(한국문학1975년) '어떤 수인'(문학사상) '다시 귀향'(주간조선) '장미 피고 지고'(소설문예) 장편 <밤으로 흐르는 강>(국제신보연재)을 발표 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5년에는 그의 대표소설집이라 할 수 있는 첫 소설집 <흑색 그리스도>(일지사)를 간행했다.
그리고 1976년에 단편 "어둠의 끝' 으로 한국소설가협회가 주는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그는 병문안'(한국문학) '죽어가는 사람'(소설문예) '사진 한 장'(뿌리깊은 나무)'한밤중 잠을 깨어'(독서생활)를 발표했다.
이어서 그는 1977년에 '작아지는 사람'(문학사상)소설집<작아지는 사람>(일일신서적 공사간) 문고 소설집<성 바오로의 신부>(범우사)와 소설집<마의 계절>(삼중당)을 출간하고, 해외 여행으로 대만과 홍콩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1978년에는 '해외여행'(문학사상) '목련'(주간조선) 소설집<우리 어머니를 아시나요>(세종출판공사) 꽁트집<토요일 아무 일도 없었다. >(월간 독서)를 간행했고, 두 번째의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979년에는 '허깨비 춤'(문학사상) '어떤 훈장'(한국문학) '환상의 꿈'(현대문학) '벗은 혼'(현대문학) '아이들'(시문학) '외출'(주간조선) 장편 <어둠의 강>(한진 출판사) 소설집 <떠도는 심장>(범조사)간행하고, 세 번째 해외 여행으로 25일 동안 미국과 유럽 등의 12개국 도시를 순방 했으며 같은 해에 일본을 다시 다녀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미국 여행으로 하와이 뉴욕 그리고 워싱톤 등을 다녀왔고, 다음 해인 1980년에 '형'(문학사상) 장편 <겨울 무지개>를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다시 엘에이 뉴욕 워싱톤을 다녀왔다. 이 때의 잦은 여행으로 그는 이미 막연하게 어딘가로 떠나가 살고 싶은 마음의 싹이 돋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드디어 1981년 2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3월에 단신으로 미국 엘에이로 떠나왔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한국일보 미주 본사 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장편 <겨울 무지개>(삼중당)를 간행했고, '싼타모니카에서의 죽음'(월간 조선)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이년 전에 일차 실시되었다기 멈추고 있던 한국일보 미주 신춘문예 공모가 다시 실시되어 심사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이로써 해마다 미주 문단에 새로운 한인 소설가들을 배출 하기 시작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82년에 김호길 (시인. 세계 한민족작가 연합회 고문) 전달문(시인, 미주 펜클럽 회장)과 함께 미주문인협회를 창립하여 그는 초대 2대 회장을 맡았다. 이로써 그는 그 때까지 각기 흩어져 있던 미주 문인들의 구심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3년에 미주 최초 문예지인 <미주문학>을 발행하고 그는 창간호의 발간사와  '어떤 시작'이라는 제하의 짧은 소설을 실어 미주 땅에 드디어 한국문학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그리고 그는 1986년 일년 동안에 미주 한국일보 신문지상을 통해 총 26편의 단편을 잇달아 발표했고, 이에 두 편을 더해 다음해인 1987년에 소설집< 소리>(부제.' 아메리카 통신' 범우사 간)를 출간했다. 이로써 그는 미주 최초의 한인 소설집을 출간한 셈이고, 이는 그의 이민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고, 미주한인 현대소설의 중요한 사료를 마련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 해에 현대문학에 단편 '기묘한 삶'(1988년에)과 동서문학에 '보복'(1988) 등을 발표했는데,, 작품  '기묘한 삶' 에서는 지금까지 그가 이민생활에서 느끼던 회의와 갈등이 정점을 이루고 있고 아울러 귀향의 꿈이 의지적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이 작품 세계는 그가 귀향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그는 1990년에 다시 해외 여행길에 올라 모스크바와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그의 바람 같은 떠남의 병이 다시 꿈틀대고 있었던 것 같다. 1993년 그는 미주 한국문인 협회 창립 십 주년 1992년 행사에서 협회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협회로부터 공로 패를 받았다. 그리고 이해 말 한국일보를 사직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4년 드디어 단신으로 귀국을 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일로 그 동안 그의 정신세계 속에 자라고 있던 현실로부터의 탈출의 꿈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귀국하자 YBM 시사 영어사에서 편집위원으로 자리잡고 일하면서 중편 '버려진 방'(문학사상)을, 그리고 다음해는 '흔들리는 땅'(동서문학) '말과 아픔으로 시작되었다'(계간 심상)' 딸의 캠퍼스에서'(조선일보 여성지 ‘필’) '종이 비행기'(현대문학)를 잇달아 발표했고, 이어서 자전적 소설 장편 <세 도시 이야기>(상하 2권 여명 출판사간 1994)를 출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제 5회 서라벌 문학상'(서라벌 및 중앙대 동문회 제정)을 수상했고, 이어서 제 7회 미주 문학상(미주 한국문인협회 제정)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11한 번째 창작집 '광화문 햄버거와 꽃'(1996년 창작과 비평사 간)과 장편소설 <들소 사냥>(세계사)을 출간하였고, 단편 '두 세계에 살다'(샘이 깊은 물)와 중편 '비밀을 가진 사나이' (현대문학) 등 실로 수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결국 그가 서울에 간 현실적인 이유는 그 동안의 이민생활에 대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는 탐미의 세계도 결국은 그의 소설 작품을 통해서만 찾는 것이 가능 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1997년 중편 '불타는 도시'(21세기 문학)와 중편'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문학시대)과  '사람이 없는 마을'(한국소설)과 '부르는 소리'(믿음의 문학)를 발표한 것을 끝으로 고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지 4년만인 1998년 4월에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다.
그가 역 이민을 포기하고 재 도미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겠지만, 재 도미 후의 작품세계에 나타나는 그의 의식의 세계를 살펴보면 이는 역시 그가 선천적으로 탐미적인 세계를 찾아 부단히 방황하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귀국 후 2001년 '사막구경'(중앙일보사 간 에머지 새천년)을 그리고 2004 년에는 '산장으로 가는 길 '(문학 수첩)과 2005년 '눈 구경, 혹은 앨라스카'(문학나무)를 발표했다.
그는 다시 2000년에 미주문인협회 13대 회장으로 추대 되었고, 2006년 12월까지 14대 15대 16대 등 3대에 걸쳐 육 년 동안 잇달아 연임했다. 이 동안 그는 제 21회 세계한민족문화제전 (서울, 재외동포재단, 10월 23~28일)에 참가하는가 하면  여미주문학 발전 공로로 남궁진 문광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특히 그는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재임 기간 동안 그 동안 년간으로 발행되어오던 미주 문협의 협회지 <마주문학>을 년간에서 계간으로 격상 발행(계간 첫 호 통권 19호 2002년 여름호)했고, 2002년부터는 본국 문예진흥원에서 주는 후원 기금을 받아 회원들의 인터넷 문학 서재를 개설하는 일에도 공을 세웠다.  이처럼 그는 명실공히 미주 문협을 미주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단체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샘이다.
또한 그는 1982년부터 현재까지 미주 한국 미주 중앙 두 일간신문에서 실시되고 있는 신춘 문예 소설 심사를 맡아 현재까지 수많은 현지 소설가들을 발굴해 미주한인 국문 소설의 대부 역할을 해왔다.  
이처럼 그는 미주 문단을 구축하고 발전시키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임에 들림이 없고, 80년대 미주한인 문학을 대변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창작활동과 문단활동 양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는 현재 로스엔젤스 지역 벨리에 거주 하고 있고, 부인과 슬하에 1남 1녀 가 있다.

(3)작품 세계  
송상옥의 작품 세계는 우선 두 부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우선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방법과 또 다른 하나는 작품 내용에 따른 구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시대적인 구분과 내용적인 구분울 병합해서 밝혀 보기로 한다.  
우선 시대적 구분에 의하면 그가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1959년부터 그가 이민을 오기 전까지인 1981년 이전까지를 전기, 그리고 그가 이민을 와서 현재까지 작품을 발표했던 시기를 후기라고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후기에 해당하는 이민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 세계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전기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 하리라 생각되어 이를 간략하게 살펴 보면. 우선 그의 전기 작품은 총 11권의 창작집(3편의 장편소설 포함)과 문학 잡지에 발표한 수많은 단편들과 그리고 많은 수필과 한 권의 콩트 집이 있다.
이러한 그의 전기 작품에 나타난 특색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닥 없는 陷穽>이나 <熱病><黑色 그리스도>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우선 작품 세계에 대한 작자 자신의 평을 들어보면 그는 "주로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 하려 했다" 라고 그의 우직한 성품처럼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우선 필자가 접한 그에 대한 비평 중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는 이 태동교수(서강대 )의 표현을 빌면  "그는 독특한 바다와 여인의 이미지가 깔려있는 환상적이고 회화적인 스타일로 인간의 현존 현상과 삶의 부조리를 끊임 없이 표현하고 있다."(<부조리와 인간의식>'송상옥 론' 문예출판사 1981)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부조리한 현실 상황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과 갈등과, 그리고 이를 안고 방황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자아발견과 함께 참된 인간성을 찾아간다는 것이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중심 주제이고, 표현방법에서는 그는 극히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기법으로 특별한 미학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극히 탐미적이고 상징적이어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난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은 역시 이 태동 교수의 또 다른 글 '60년대의 한국문학'<조선 중앙>(605호 1980)에서도 거론되고 있지만, 그의 소설은 이처럼 지극히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데다가 이를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어서 그의 소설은 사실에 의한 흥미 위주로 쓰인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당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소설을 썼던 조선씨 같은 작가의<영자의 전성시대>와 같은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작품은 없다. 따라서 그는 소설미학적인 측면에서 치밀한 구성이나 특수한 전개 기법에 의해 주제가 설계되어있는 순수소설인 단편소설의 특색을 가장 잘 살려내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흑색 그리스도>를 보면 허무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탐미의 세계를 찾아 방황하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와 함께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찾아가는 내용이 비교적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머리에 원형탈모증을 지닌 주인공인 화자는 중학 시절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개가를 하게 된 형수가 "도련님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지 마세요. 바다보다도 역시 사람의 일이 중요한 거랍니다."하고 생글거리며 옆구리를 찌르던 형수의 유혹에 대한 냉소와 반항으로 마음에 슬픈 기억이나 아픔이 일면 언제나 여인을 넘어뜨리려는 충동을 느끼고, 끝내 바다로 뻗은 흰 길 위에서 영희를 쓰러뜨리게 되고, 그리고 슬퍼하는 그녀를 버리고, 그래도 계속해서 그는 자꾸 뭔가 앞이 훤히 트이는 것 같은 유혹이 일어 영이, 향순이, 미스 윤. 등의 인간성이 다른 여인들에게 다가서지만, 모두가 어긋나기만 하는 현실적 모순 속에서 끝내  자탄에 젖어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스도는 이제 아무도 데도 없어."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하숙집 건넌방에 살던 경자의 자살 기도 앞에서 그는 비로소 생명과 삶의 가치를 느끼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새삼 찾아가며 죽은 형이 남긴 싯귀를 떠올린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다 /네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를……' 이어서 그는 형의 죽음에 무관했던 자신을 후회 하고, 자신의 어머니 곁에서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영희에게 돌아 가기로 작정 한다는 생명력 있는 주제로 표현되는 작품이다. 내용은 까뮈의 소설을 연상케 하는 실존적 휴메니즘의 작품이랄 수 있고, 표현기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적고 있는 이상의 날개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탐미적이고 환상적인 그의 작품 경향은 작품 '열병'이나 '바다와 술집' 그리고 시계와 예수 그리스도'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에 대해   이어령씨는 그의 <바닥 없는 함정>을 두고. "한국 소설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극찬했는데, (사상계, 1959 9월호) 이러한 그의 전기 작품 경향이 그의 후기에 와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이민을 오게 되고 그의 삶의 장이 고국을 떠나 이국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자명한 노릇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 중 대표적인 하나가 바로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다분히 철학적이고 실존적 가치를 찾아 헤매는 전기 작품 속의 정신적인 방황이 다음 미국에 건너온 후에는 삶에 대한 현실적인 방황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특별한 변화들이 나타나는 그의 후기의 이민 작품 세계는 우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다.
그가 이민을 와서 생활하다가 고국에 귀국하기까지의 1980 년대를 제 1기로, 그리고 그가 서울에서 머물렀던 1990년대 중반을 제 2기로, 그리고 그가 다시 도미해서 현재까지를 제 3기로 구분해서 살펴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