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서재 DB

박영호의 창작실

| 박영호의 창작실 | 목로주점 | 갤러리 | 공지사항 | 문화영상 | 일반영상 | 영상시 | 그림감상실 | 독자마당 | 음악감상실 |

새로 발굴된 이육사의 시세계

2005.03.09 21:09

박영호 조회 수:453 추천:46

  
    이 육사 시인의 재 발굴된 작품 연구
   <재 발굴된 작품을 통해서 확인된 실행의 의지>

1) 저항시의 극점
우리의 민족 시인이며 저항 시인이고 지절의 순국 시인이신 이 육사 시인의 탄생 백 주년과, 순국 육십 주년을 맞아 많은 기념행사와 많은 연구 발표회가 열리는 등, 육사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 규명과 함께,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특히 금번에 재 발굴된 세 편의 시는 항일 투쟁에 대한 그분의 불타는 의지와 칼날 같은 실행의 정신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많은 독립투사와 많은 저항 시인들이 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등,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빛을 잃어가고 있으나, 이와는 다르게 육사 시인만큼은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그의 지고한 저항 정신과 함께 그의 시세계가 더욱 별빛처럼 빛을 발하고 있어서, 마치 홀로 빛나는 흙 속에 묻힌 진주와도 같다고 하겠다. 특히 그의 생애나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행적과 순국 경위 등, 아직도 미확인 된 사실들이 많아서 더욱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빛나는 독립 저항시인을 들라면 흔히들 한 용운, 윤 동주, 이 육사 이렇게 세분을 든다. 그렇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세분을 동일 선상에서 살피고 싶지 않고, 육사 시인 만큼은 이분들과는 달리 특별한 가치와 시 정신을 지닌 산 행동의 저항 시인으로 달리 구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 용운 시인은 삼일 독립선언 삼십삼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의 제일선에 나선 적도 있는 훌륭한 저항시인 이지만, 그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활동으로 보아야 하겠고, 또한 그분의 독립정신이나 저항정신의 기조가 인내와 함께 기다림으로 승화된 일종의 무저항 정신이 깃든 극히 종교적이고 조금은 관념적인 사색에 머물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고, 윤 동주 시인 역시 감옥에서 순국하신 분이지만, 그분의 시의 세계가 조금은 여성적인 서정적 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망국의 비애가 서사적 사실 보다는 서정적 진실로 그의 가슴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 반해, 육사 시인의 시 세계는 순 문학적인 의미에 앞서서, 철저하게 저항운동의 한 방법으로 표출된 적극적 의지적인 표현이고, 나아가서 그의 사상이나 관념이 한낱 사색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바로 독립에 대한 열망과 저항과 쟁취에 대한 실제 행동 의지로 나타난 일종의 문행일치(文行一致)의 소산이라는 점에서다.
다시 말해 불꽃 같은 저항의 의지를 직접 칼날 같은 행동으로 불태운 행동 시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시작 활동은 문학 창작활동에 앞서 바로 저항 운동의 방편으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육사의 시 정신을 일컬어 ‘불타는 의지에 대한 정회(靜懷)의 체현(體現)’이라고 표현한 김 학동 교수(서강대)의 말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육사 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시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시집을 비롯한 연구 서적이 200여종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이 12편, 석사 논문이 80여 편에 이르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까지 확인된 작품으로는 시가 33편인데, 1930년 26세 때 ‘말’이라는 시를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란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이란 작품으로 등단을 했고, 1940년(36세)에 발표된 절정, 광야, 태양 등을 끝으로 총 36 편에 이르는 시작품을 남겼다. 또한 평문과 수필을 비롯한 산문은 총 20 편에 이르고, 3편의 한시와 중국 로신(魯迅)소설을 번역한 번역문이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나 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 행적 등 미확인 내용들이 하나 둘 밝혀지는 것처럼, 그의 새로운 작품 또한 새롭게 발굴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러한 사례를 밝혀주기라도 하듯이 지난 2002년 11월 22일 중앙일보에 의해서 새롭게 세편의 시가 재발굴 된 점은 특기할만하다, 이 세편은 일찍이 1949년 4월 4일 ‘주간 서울’ 33호에 발굴 게재되었으나, 그대로 다시 사장 되었다가 이년 전에 재 발굴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세편의 발굴 작품을 통해서 육사 시인의 시 세계를 다시 한번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와 독립 운동 및 문학활동
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원천동)에서, 진성 이씨(이퇴계 이황의 13대손) 이가호(李家鎬)와 허길(許吉)의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이 원록(李源綠)이고. 두번째 이름은 원삼(源三)이며 자는 태경(台卿 )이다. 필명으로는 이 육사(李陸史, 李六四) 이활(李活) 등이 있으나, 육사라는 이름이 쓰이게 된 동기는 그가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의 수감번호가 264번(혹은 64) 이어서 이 육사라고 부르는 소리를 그대로 따서 이 육사(大邱李六四)로 1930년’ 별건곤’이란 잡지에 평문을 발표하면서 두 이름을 함께 쓴 것이 최초로 사용된 것이다. 그 다음 1929년 출옥 뒤 육사(戮史)란 이름과 육사(肉瀉1932 조선일보) 란 이름을 잠시 사용했으나, 가족들의 적극 만류로 다시 역사적인 큰 인물이라는 뜻의 육사(陸史)란 한자어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김희곤. 안동대 교수)
이러한 연유로 해서 1935년 6월 신조선에 발표한 ‘춘수삼제’(春愁三題)에 육사 이름이 처음으로 쓰였고, 이후 작품에서는 모두 이 육사(李 陸史)란 이름으로 통일해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점은, 많은 작품에 사용되고 있는 이활(李活)이란 이름인데, 육사가 작품 활동을 하던 같은 시기에 이활(李活)이란 이름으로 산문을 발표했던 동명이인이 두 사람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이학동 교수 문학사상 1월 2004), 따라서 현재 우리가 육사의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활의 글 중에서, 산문 중에 그들의 글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이 앞으로 보다 명료하게 밝혀져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는 철이 들기 시작한 7세 때부터 조부(치헌 이중직)에게서 한문학(소학)을 배웠고, 15세 때 보문의숙에 입학,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대구로 옮겨가 살며 석재 서오병에게서 그림을 공부했다. 또한 17세 때에 결혼을 해서 처가에서 설립한 백학 학원과 교남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년 가까이 교편 생활을 했으나, 1924년(20세)에 도일하여 1년간을 머물다 다시 귀국했다. 이때부터 중국을 오가기 시작했고,` 1924년 22세 때 북평 중국대학 혹은 중국 중산 대학에서 수학했고,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1932년 28세)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안동대학 김 희곤 교수에 의해 많은 진전이 있으나, 아직도 미확인 내용이 많다. 다만 그가 향학열과 학구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점은 그의 시세계가 결코 가볍지 않고, 보다 크고 무거운 사상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은 그가 1925년 일본에서 귀국 후 의열단(義熱團)이라는 비밀단체에 두 아우들과 가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 문화 강연 등,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시작 했고, 자주 북경을 왕래 했는데, 이 역시 항일운동의 은밀한 행동의 일부라는 점일 뿐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1927년 張진홍 의거(10.18)에 연루 체포 되어 1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룬 것이 최초의 구금이었고, 이후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라 수시로 감옥을 드나든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문사(중앙일보) 기자로 일하게 되었고, 1931년 1월에 다시 대구 격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3월에 석방되었고, 1934년 3월22에 다시 구속 되었다가 6월에 기소유예로 석방되는 등, 순국하기까지 전부 17번에 걸쳐 구속 되었다. 1942년 중국으로 건너가서 1년간 수학 후 돌아와 다시 1943년 4월 무기반입 계획으로 중국에 갔었고 7월에 귀국했으나 늦가을에 피검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1944년 1월 16일 새벽에 순국, 친지 이병희 여사에 의해 운구가 동생 이 원창에게 인계되어, 미아리 묘지에 안장 되었다가 1960년 고향 원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육사는 그의 전 생애를 독립을 위한 저항으로 헌신한 진정한 독립투사 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일본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결코 일본어로 글을 쓴 적이 없고, 차라리 한시를 써서 발표한 것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얼마나 철저한 항일 투사였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 활동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가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거나, 어떤 뚜렷한 문학 사상이나 문학단체에 심취되어 활동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가슴 속에 타오르는 망국에 대한 비탄과 울분을 저항의 불길로만 토로했을 뿐이다. 결국 그에겐 저항의 정신을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출구로 시를 썼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문학 활동에 참가했던 것은 잠시 동인지인 ‘子午線’(1937년11월 창간 민규태 편집)에서 신석초, 이병각, 윤곤강, 김광균, 오장환 등과 교우했던 것과, 잠시 신조선 창간에 기여했다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고, 주로 신조선, 비판, 문장, 풍림 같은 월간 잡지와, 조선일보 등 일간신문 등에 발표한 작품들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그의 사제인 이 원조가 1946년에 ‘육사시집’(서울 출판사)으로 묶어냄으로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기존 작품을 통해서 본 시세계
우선 그의 시 세계를 분류하는 방법적인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의식 세계의 변화를 단계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육사 시의 내적 세계가 한결같이 조국의 현실과 비애 울분 의지 등이 중심으로 이러한 내용이 어느 작품에나 공통적으로 연관성 있게 넘나들고 있어서, 변화에 따른 단계적 구분이 쉽지 않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오히려 내용을 중심으로 분류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단 시의 형태적인 기법상의 변화에서는 1938년(비판 9 월호에 실린 소공원)이후부터 2행의 시가 쓰이는 등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나는 등, 단계적 구분이 효과일 수도 있지만, 육사의 시에서는 형태적인 변화 보다는 주제의 추출을 통한 사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내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대적 구분보다는 내용상의 분류방법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의해 육사의 시세계를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해 보면, 첫째 그의 인간성 내지 인생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고뇌’의 표현 이고, 다음은 그의 ‘실향과 망국에 대한 비애와 울분’, 그리고 셋째로 ‘광복의 염원과 초인의 의지를 나타낸 행동’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내용이 확연히 구분 되는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모두가 함께 혼합되어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가) 망국의 비애와 인간적 고뇌
그의 작품 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개인적인 그의 인생관을 엿불 수 있는 인간적인 내면 세계와 함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시는 ‘황혼’ 과 ‘노정기’인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인 세계를 우선 살피는 것이 이분의 시 전반을 이해하는데 보다 효과적 이리라 믿는다. 사실 그의 내면의 세계는 그의 수필이나 평문을 통해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도 있지만, 시 자체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그의 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살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 두 편의 시를 통해서 육사의 인간적인 모습과 함께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생관 내지 그의 이상과 꿈의 세계를 살펴 볼 수가 있다.

내 골방의 커ㅡ텐을 걷고
정성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내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내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하니            
황혼아 내일,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이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황혼은 5연으로 각 4행으로 된 비교적 초기의 작품이고 그의 등단 작품(1935년 신조선)이기도 하다. 시의 외형적인 구성이 조금은 설명적이고 미흡한 면도 있으나, 의인화에 의한 돈호법 등의 수사적인 기교는 초기의 작품답지 않게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 구성이 기승전결에 의한 4분 형식으로 첫째 연에서의 항혼에의 접근과 더불어 느끼는 인간의 애정과 외로움이, 그리고 둘째 연에서의 황혼에 대한 소망이, 셋째, 넷째 연에서 그 소망의 구체적 사실인 황혼에 대한 자신의 꿈이나 사랑을 적고 있고, 다음으로 4단계의 마지막 연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작자의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우선 등장하고 있는 두개의 대치되는 공간, 즉 내가 있는 ‘골방’과 커튼 밖에 있는 ‘황혼’이다. 여기에서의 골방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밀페된 비극적 고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 없이 감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도 있었고. 그가 감옥 아닌 자유로운 공간이라도 그에게 진정한 광명이 없는 비극적인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일본의 압제에 있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황혼이란 외부의 공간은 자연적인 평화로운 세계를 말하고 그 자연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외로움을 바다의 흰 갈매기로 비유하고 있고, 그 인간적 외로움이 하나의 인간적 고뇌를 통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느끼는 고독은 개인적인 외로움 보다는 황혼이라고 하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고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연에서 넷째 연 까지는 시인이 황혼에게로 다가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고, 그것들은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결국 시인의 가슴에 안긴 모든 것, 반짝이는 별들, 종소리, 저문 삼람 속 수녀들. 그 많은 수인들. 모두가 외로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사회적 애정이 나타나고, 이 애정은 고비사막의 행상대, 그리고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까지도 자신의 타는 입술로 입 맞추고 싶다는 이야기다. 외롭고 암울한 현실속의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히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가니, 이 얼마나 크고 웅대한 기개와 사랑의 표현인가? 이러한 국가와 민족과 대한 사회적 애정이 만인을 사랑하는 인간애와 세계평화와 안식을 추구한 웅대한 그의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꿈이 잘 형상화 되어 있다.
다만 마지막 연에서의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도 없는 유한의 세계에 대한 그의 고뇌적 표현이 조금은 소극적인 듯도 싶으나, 내일이면 다시 찾아올 황혼에 대한 기다림이 있어서, 조국 광복과 세계 평화에 대한 그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노정기’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 저기 흩어져 구죽죽한 어촌보다 더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 2,3,4 연 중략>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이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먼 항구의 노정에 흘러간 생활을 드려다 보며      

  위에 인용한 ‘노정기’도 그의 개인적인 과거의 삶이 표현되고 있어서, 그의 과거의 행적과 함께 그가 느끼고 있는 그의 깊은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뇌를 함께 엿볼 수 있다. 단 여기에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 역시 조국이 없는 망국의 현실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탄식이 아닌, 진정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고뇌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의 저항 운동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노정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시의 세계가 그의 생각이나 관념의 세계만을 나타내지 않고, 그의 현실적인 행동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밤마다 꾸는 그의 꿈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이 아닌, 밀항하는 쩡크선 같이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는 극히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고, 일반적인 출항이 아닌 밀항이라는 표현이 바로 비밀결사에 의한 시인 자신의 구체적 저항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현실적인 장애나 암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만 말하는 많은 분들과는 달리, 필자는 여기에서 실제 몸으로 실행하는 저항운동의 현실적인 행동에서 오는 고통이나 장애에 대한 현실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장애와 깊은 고뇌에서 오는 인간적인 외로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의 행동을 시 속에 그대로 표현 했기에, 그의 시가 저항 시로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나) 광복의 염원과 확신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 작품은 1939년 문장지에 발표된 작품으로, 그의 작품활동 중 중반에 발표된 작품으로 ‘청포도’ 라고 하는 제목 자체가 풍기고 있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감각이 우리에게 다시 없이 신선하고 아름다운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청포도란 어휘가 지니고 있는 개념만으로도 고향, 전설, 여름, 꿈, 청포, 기다림 결실 등, 실제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어휘가 연상되는 등, 그 내용들이 그대로 알알이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
푸른빛과 흰빛의 시각적인 대치 기법이나, 그러한 감각적인 정서로 조국광복의 염원이나 저항의 열정 같은 극히 남성적이고 열정적인 의지를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순화시키고 있는 시적 전이가 절묘하다고 하겠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향의 모습을 배경으로 고향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속에 깃든 고향의 전설과 꿈을 나타내서 시인의 개인적인 꿈과 사회적인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긍극적으로는 내재된 조국광복의 꿈을 표현하고 있고, 바다의 가슴이 열리는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 수난에 지친 조국이 푸른빛 빛나는 청포를 입고 귀한 손님으로 온다는 광복의 꿈을 상징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놀라운 서정적 조화가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나 광복이 오는 그러한 열광의 날을 만끽하는 모습을 차라리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마지막 연은 조국 광복에 대한 확신을 넘어선 여유로움까지 나타내 보이고 있다.
혹자는 이 시가 조국광복에 대한 꿈이나 기다림이나 확신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도 하나, 필자는 오히려 이 시에서 말하는 손님이 가족이 아닌 이상 이같이 시로 남길 정도의 손님이란 사실적으로 있기가 오히려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한 그의 모든 시속에 한결같이 조국 사랑이나 광복의 기다림 들이 이처럼 상징적인 비유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꾸는 청포도의 꿈은 개인적인 꿈이 아닌, 새로운 고향과 조국에 대한 꿈이고 이는 결국 사랑과 광복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과 확신은 1940 년에 발표된 ‘절정’에서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매운 계절에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고국의 암울하고 처절한 현실을 매운, 채찍, 서릿발 칼날 같은 상징적이고 감각적인 극렬한 표현으로, 절박한 조국의 현실을 밝히고, 우리가 안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시인은 자각할 수 밖에 없고, 이 암울한 조국의 현실인 겨울은 결국 강철로 된 무지개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광복의 꿈인 무지개는 언제고 사라지지 않을 강철로 된 굳건한 무지개라는 것이다. 결국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상징적인 무지개가 아닌,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그리고 기필코 이루어 져야 할 꿈이라는 독립에 대한 확신과 강철 같이 굳건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결국 무지개와 강철이라고 하는 극히 대치되는 사물을 통해서 조금은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표현으로 시적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 초인의 의지로서의 행동
따라서 극점에 달한 그의 저항 정신은 이어서 발표된 ‘광야’나 ‘꽃’ 등에서 그 광복에 대한 칼날이나 불꽃 같은 행동의 의지를 불러와 체현으로 나타나는 항거의 불꽃을 나타내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그 누구도 부정할 길이 없는 빼어난 수작으로 육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역사가 열리던 먼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속에 번영해 왔던 조국의 모습이 단숨에 묘사되고 있다. 하늘, 산맥, 바다, 등의 장대한 어휘들로 천지가 열리고 그 누구도 범하지 못한 신성한 광야의 공간적인 배경을 단숨에 밝히고, 강물이 열리듯 나라를 열고 살아온 우리 선민들의 과거의 모습을 리듬감 있게 율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넷째 연에서는 눈이 내리는 암울하고 가혹한 현실을 밝히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고하게 피어나 향기를 발하는 매화처럼 살아 있는 우리의 민족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내일을 향한 새 생명의 씨를 뿌린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외치고 있다. 결국 먼 훗날 필연코 나타날 초인, 즉 조국 광복에 대한 환희와 탄성으로 굳은 의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 시의 특색은 광야라는 크고 넓은 역사적이고 초인적인 세계를 극히 남성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웅비한 남성적 기개를 광활한 광야를 통해, 조금은 신령하게 표현 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고, 외형적인 시의 흐름이 물이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 혹은 점강 형태로, 산맥이 달리고 백마가 달려오듯 아주 크고 빠른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는 특출한 시적 구성기법을 눈 여겨 볼 필 요가 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지 않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았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애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꽃’의 전문이다. 역시 혹독한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 내려온 민족혼의 그 끈질긴 생명성과 유구성을 꽃이라고 하는 사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암울한 현실적인 수난 속에서도 싹을 움터내어 피어 꽃 피우게 될 생명에 대한 기다림과 미래의 환희를 나타낸 것으로, 역시 조국 광복에 대한  기
                                                    
4) 재 발굴된 시를 통해 서 확인된 의미

산(山)>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에 엮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이 부르는 망향가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 하겠오

이 시는 육사의 그 어느 시보다 난해한 시인 것 같다. 우선 이 시에서 산이라고 하는 제목의 상징성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 이 시를 이해하는 첩경인 것 같다. 시의 내용을 살펴 보면 산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대화체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화자가 바로 산일 수 있고, 그 산이라고 하는 그 상징된 내용이 바로 이 시의 주제라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첫째 연에서의 달려온 것은 산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산을 바다와 조화 시켜 이 시의 전체적인 공간적 배경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겠다. 얼마나 크고 웅대한 배경이며 포부인가? 육사의 시에서는 이처럼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과 같은 큰 배경이 수 없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특히 광야에서는 거의 똑 같은 표현이 둘째 연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산이라고 하는 자연과 엄마와 조국은 동일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화로운 자연의 평화와 같은,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떠나온 뱃길은 고단한 망국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을 떠나온 이러한 현실이 넷째 연에서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이 시의 넷째 연과 다섯째 연이 바로 이 시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없이 살아가는 뱃사람들이란 시인의 눈에 비치는 망국의 현실이고, 그나마 망향가를 부른다고 했는데, 이 망향가는 어머니와 고향과 조국과 광복을 그리워하는 염원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자연히 마지막 연이 바로 이시의 주제로 압축되고 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즉 조국을 그리는 그 노래가 아무리 애절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해답을 유추 시키고 아울러 자신의 결의를 분연히 밝히고 있다. 결국 조국광복에 대한 방법은 노래 같은 소극적인 갈망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행동만이 가능하다는 그의 굳은 행동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 발굴된 이 시는 그 동안 조금은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육사의 행동 철학에 대한 의문을 밝힐 수 있는 검증적 확인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잃어진 고향 >                                          

제비야
너도 고향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 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이 사막에 떠러져 타죽어도
어이서러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우선 이시의 표제가 역시 우리에게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잃어진 고향’이란 우리가 통상 쓸 수 있는 ‘잃어버린 고향’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아닌. 남에 의해서 수탈된 것이라는 수동태 의미로 이를 의도적으로 의식해서 썼으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고향을 찾아가는 제비를 의인화 해서, 조국 광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한 현실적 어려움과 그의 인간적인 외로움과 함께 헌신적인 그의 열정과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제비라고 하는 사물을 등장시켜 대화 형식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그 어려움이 둘째 셋째 연에서 서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고, 넷째 연에서는 그 고충의 극대화와 함께 광복에 대한 그 구체적이 열정을 홧홧한 가슴으로 표현하고 있고, 다음 다섯째 연에서의 죽음이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암시를 나타낸 것이고, 그러한 죽음에도 결코 서러워하지 않겠다는 그 뜨거운 의지가 결연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의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결국 순국 했고, 이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또한 여섯째 연에서의 홀로 높고 빠른 한 마리의 제비는 자신의 인간적인 외로움 나타내고 있다고 보며 이는 ‘광야’에서의 초인이나 청포도의 귀한 손님과 같이 고귀한 기상으로 이해되어야 하리라고 굳게 믿고, 마지막 연의 그곳에 하늘이 열리면 제비와 나의 새 고장이 열린다고, 제비의 고향 찾기가 바로 우리의 고향과 조국 찾기로 합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이 ‘잃어진 고향’ 역시 죽음까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조국 광복에 대한 열정적 사랑과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화제(畵題)>

도회의 검은 능각(稜角)을 담은
수면은 이랑이랑 떨여
하반기(下半旗)의 새벽같이 서럽고
화강석에 어리는 기아(棄兒)의 찬꿈
물풀을 나근 나근 빠는
담수어의 입맛보다 애닯어라

이 시는 단 6 행으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시다. 또한 제목이 ‘화제 ‘(畵題’)라고 되어 있어서. 어떤 그려진 회화 작품에 대한 제목이란 뜻으로 이해 될 수 있으나, 어떤 가상적인 모습인 상징적인 어떤 그림에 대한 이메이지를 나타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시의 내용은 우선 현실적 시각적인 내용과, 현실적인 내용이 아닌 관념적인 내용이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1,2 행과 4행의 화강석은 사실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고, 나머지 행은 관념적인 내용처럼 표현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나 혹은 그림의 배경이 되고 있는 도회는 서울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유인즉, 이 시는 유일하게 제작 연대가 정축(丁丑)00 야(夜)라고 되어 있어, 1937년인 이 시기에는 그가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 나타나는 수면은 서울의 어느 수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많은 관념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는 그냥 서울이라는 그 시대의 암울하고 가난한 사회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에 대한 견해를 나타낸 권 오만 교수도(서울시립대, 문학사상 2004,1) 전자 쪽을 밝히고 있으나, 이러한 점은 앞으로 깊은 연구와 확인을 통해서 밝혀져야 하리라 믿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제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의 버림받은 차가운 꿈에 젖은 가난하고 헐벗고 애닯은 조국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에 나타나는 모든 어휘들은 한결같이 어둡고 음성적이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아름다운 모습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어디에도 밝고 아름다운 모습은 없고, 어쩌면 아름다울 수 도 있는 이랑이랑 떠는 수면조차도 하반기의 새벽처럼 서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반기란 의미
란 원래가 죽음을 상징하는 조기인 반기다. 따라서 죽음이나 다름 없는 망국, 조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조금은 긍정적인 내용을 사용하고 있는 육사 시인의 치밀한 의도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새벽이라는 표현과 함께 기아와 담수어가 그것이다. 조국의 슬픈 모습을 그래도 새벽이라는 밝아오는 개념으로, 그리고 아직은 담수어처럼 순한, 그리고 미래가 있는 아이를 통해서 조국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화강석의 의미는 실제 주변에 있었던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 위에 기아가 놓여 있는 것을 이전에 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찬 꿈이라는 표현을 나타내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기아의 찬 꿈은 물풀을 나긋나긋 빠는 배고픈 담수어의 입맛보다 더 애닯다는, 기아에 허덕이는 조국의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서정적 감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조국의 암울하고 불행한 현실의 회화적이고 서경적인 모습을 통해 애닯아 하는 육사 시인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연민의 정을 엿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의 전설과 꿈을 나타내서

5)세 편의 시를 통해서 확인된 사실
우선 첫째로 육사 시인의 시 세계의 중심 사상이 조국과 민족에 대항 사랑과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의 표출이라는 점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재 발굴된 세 편의 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둘째로 그의 시상의 세계가 남다르게 높고 깊고 그 웅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의 시적 배경인 공간을 포함한 모든 시간적 배경까지도 역시 그렇다. 거의 모든 그의 시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적 배경이 구성 되는데, 더러는 세상이 열리는 태곳적 까지도 확대되어 나타나고, 광복의 개념으로 미래라고 하는 개념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점도 이를 밝혀주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적 배경 역시 광활한 대륙과 멀리 아프리카대륙에 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은 그가 실제 온 생애를 통해서 수 없이 드나들었던 대륙의 발자취와 그 웅혼한 마음과 사상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셈이다.
셋째로 그의 시세계에는 그의 인간적인 외로움이나 초인적인 뛰어남이 결코 초라하거나 자만스럽지 않게 승화된 애국 애족의 아름다운 인간애와 품위 있는 호기의 선구자적 기상이 조화를 이룬 고결한 인품의 향기가 시 전편에 녹아 흐르고 있는 점이 또 하나의 특색이라 하겠다.
넷째로 그의 시 세계는 관념이나 사색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바로 행동에 까지 이어지는 실행의 문행(文行)일치 내지 ‘정회(情懷)의 체현(體現)’ 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육사의 산문 ‘계절의 오행’에서 인용한 다음의 육사 자신의 글에서 그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를 부동의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에게 행동만의 연속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계절의 오행’에서 권 오만 교수(서울 시립대)발췌
따라서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의지의 세계는 곧바로 그의 행동이고, 이를 사실로 실행했기에 그는 결국 순국 했던 것이고, 그의 순국이란 것도 그의 시 속에 또는 산문 속 이곳 저곳에 희생이라는 내용으로 예견되었던 사실이다.
다섯째로 시어의 선택이 손쉬운 우리말 보다는 함축미가 있는 비교적 무거운 한자 어휘가 많이 쓰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 역시 그의 시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깊은 철학적 사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노릇이겠고, 또한 그가 한학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도 설명이 되리라 믿는다.
여섯째로 그의 시의 주된 내용이 국가적 사회적 역사적인 극히 의지적인 비교적 서사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서정적 미학으로 조화 시키는 시작 기교가 돋보이는 점이 시 표현상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일곱번째로 다양한 수사 기법을 활용하여 현대시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고, 또한 시행의 구성이 3.4행의 장문의 서술적인 구성에서 3 행 그리고 2행으로 발전하여 2행의 짧은 단형이 대표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 또한 구성상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튼 육사의 새로운 세 편의 시의 출현으로,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실행의 저항 시인으로 초극점의 위치에 우뚝 솟아 있음을 확인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