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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 소설 연구 (3)

2005.07.23 15:31

박영호 조회 수:588 추천:41

「미주 한인소설 연구」(3)
                                                                                                                  
삼일운동 이후부터 광복이전까지의 한인소설
           한국어 소설 2                                

(3)사회적 의식과 개인 의식의 대결을 통한 애정 승리
「돌 먹는 사람들」 (구름)(1932.9.22-1932.11.17)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삼일 운동 이후에 쓰인 미주 한인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색의 하나가 바로 애국을 통한 국가적인 집단의식이 변화되어 나타난 하나의 사회의식의 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회의식은 눈앞의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회의 제반 모순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하나의 사회적 이념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 의식이 표현되는 과정에서는 보다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또 하나의 의식인 인간의 보다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애정이나 신앙 같은 개인적인 의식의 세계의 출현과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사회 의식과 개인 의식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된 점이 바로 시기의 가장 큰 사회적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그 어떤 국가적 의식이나 그 어떤 사회적 의식도 결국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원천적인 욕구에 의한 인간성을 결코 앞설 수 없다는 개인 의식의 빛나는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고, 이와 같은 국가나 사회주의 집단 의식과 개인의식의 대결 과정은 이 시기의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주제의식인데, 그 대표적인 소설이 바로<돌 먹는 사람들>이고, 다음에 소개되는 <새벽 길>이나 <자유혼인> 등에서도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불 수 있다.  
소설 <돌 먹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의식이 보다 새로운 가치로 나타나는 인간의 개인적인 자유 사상과 충돌을 일으키는 점을 표현한 대표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초기의 소설과 앞서의 ‘동지’라는 작품에서 나타난 개인의식에 대한 사회적 집단의식의 승리가 이 소설에서는 뒤바뀌고, 인간 내부의 현실 세계인 개인의식에 의해 사회적 집단의식이 궁극적으로 무너져가는 현상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의 핵심은 애정이라는 개인 감정과 집단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의식이라는 두 의식의 세계에서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고민과 갈등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외부적인 사회의식이 주인공의 내면 세계인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결국은 압도당하고 만다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 소설이 쓰인 시기(1932년)와 소설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본국에서 일기 시작했던 프로 문학이 민중으로부터 차츰 배척을(1925년 카프KAHF 결성, 1931일제 검거, 1935년 해체) 받게 되어 궁지에 몰리던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는 셈이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우선 사회주의 이념이 간접적으로 미주 소설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벌써 미주에도 이미 고국과 똑 같은 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이 옮겨와 있었고, 문학 활동에도 이미 프로 문학이라고 하는 형태의 내용이 표현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 당시 신한 민보 지상을 통해서 발표된 평론가들의 논쟁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선 리 정두와 리 정대라는 두 분이 프로문학에 사상적 뿌리를 둔 분이라고 할 수 있고, 그분들의 직접적인 표현 내용으로 보아 이분들은 이미 고국의 프로문단과도 깊이 연계가 되어 있었던 것 같고, 이와는 달리 임 영빈과 월 성 두 분은 문학의 순수 미학적 가치를 역설하고, 일체의 사회적 목적에 바탕을 둔 도구로서의 문학에 냉담하게 반응하고 있어서 전기한 두 분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문학이나 평론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이 시기의 문학 평론에 대한 별도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리라 믿는다.
이 소설의 내용은 우선 서두에 기두리 선생이란 특별한 인물이 소개되고 이분의 기행이 소개되는데, 그 기행은 괜히 집을 나와 걸인 생활을 하고, 처자가 마련해준 옷을 가난한 사람들과 바꾸어 입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으로, 이는 바로 헌신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 행동을 표현한 것이고, 결국 민생을 구원하려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의식을 하나의 사회의식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유흥만을 일삼는 부유층을 공격하고, 후원금 도용 등과 같은 부정직한 사회적 폐단 등을 폭로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러한 사회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기행은 바로 소설 속에 표현되는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듯싶다. 이러한 점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인도주의 사상이나 기독교의 사상과 같은 종교적인 힘을 이용하려 했던 점으로 볼 수 있고, 이러한 이색적 사실은 실제 이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사회주의 사상과 개인적인 애정 감정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창한 사회적인 대 이슈가 애정이라고 하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참담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내용이다.
8회에 걸쳐 연재된 이 소설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주시 가두리 공원에서 어느 돈 많은 사람에 의해서 전라남북도 활쏘기 대회가 실시되는데 만수는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회 문제만을 골돌히 생각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현재는 청년회원이다. 그리고 그는 노동 연맹 간부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 탄생 이천 년이 가까워지도록 민생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데 조바심을 느끼고, 친구인 강 순명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독교와 같은 무저항주의를 떠나서 보다 현실적으로 짧은 시일 안에 민생 구원 과업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한다.      
그러나 만수에게는 마음에서 늘상 떠나지 않는 또 하나의 갈등의 세계가 있다. 사랑하는 정희 때문이다.
정희는 그의 친구 상진이의 여동생이다. 상진이는 삼 년 형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그 동안 만수가 그의 가족을 돌보아 주기로 해서 그는 자주 그녀의 집에 들린다.
만수는 정희 집을 방문하여 정희의 얼굴을 보게 되고 서로가 말은 않지만 그래도 서로가 미래의 부부될 사람임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만수는 정희가 있어서 더욱 열심히 활동을 할 수 있고, 그러다가 죽더라도 정희가 자신의 시체를 붙들고 울면서 자랑스러워 하리란 생각을 하고 더욱 힘이 생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민중에게 다가설 수 있을까 하고 더욱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되고 그 동안 사회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꼼곰히 따져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가끔 권총께나 사용은 하지만 정작 부르주아의 집에는 근처에도 못 가고 몇 백 원이나 몇 첨 원을 겨우 가진 소위 자작 자급하는, 거진 같은 계급을 괴롭게 할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의 마음을 잃게 된다. 그리고 유일의 선전기관인 문예방면에 있어서도 오륙 년 동안을 외줄거리로만 써왔다. 조선 신분이나 잡지에 싣는 소위 프로문예는 천편일률로 살인 방화 강도이다. 그래서 대중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미움을 받아왔다. 대중은커녕 주의자간에도 염증이 생기게 되고 독자는 물론 글 쓰는 자기네들까지도 막다른 골목에서 실증이 나게 된 것이다.  민수는 자기가 글을 써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글 쓰는 데는 장기가 없음을 그는 탄식한다.  “어찌할꼬 어떻게 해야 민중에게 사회의식을 같게 할꼬? “ 이것이 민수 의 큰 고민이다. “
만수는 배 목사로부터  ‘돌 먹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통한 설교를 듣는다.
전주군청에서 길을 닦는데 필요한 돌을 나르고 부수는 일에 각 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에 동원해서 일을 하는데, 한 노인이 힘이 지쳐서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자, 일본 경찰이 다가가서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힘이 없어서 일할 수가 없다고 빌었다. 그러자 왜 점심을 안 가져 왔냐고 묻자, 노인은 가져 올 게 없어서 못 가져 왔다고 다시 빌자 일본 경찰이 “ 돌이 먹어라 “  “돌이 먹어라” 하면서 발길로 찼다. 부인이 그만 동그라져서 울었고, 그러자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따라 울었다는 이야기다.
배목사는 백성들에게 아직까지도 이 광야에서 왜 깨달음이 없느냐고, 정신을 차리라고 설교한다.
예배당에서 뛰쳐나온 만수는 친구 태환이와 함께 산에 올라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배 목사는 프랑스 혁명 때의 시골목사들이나 톨스토이처럼 사회주의의 앞잡이고 그래서 기다리자고 하지만, 만수는 그렇게 느리게만 수작을 할게 아니라고 말한다.
만수는 다시 정희의 집을 찾아가서 정희를 만난다. 그리고 정희가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고 자신의 생각처럼 그가 투쟁하다 죽으면 함께 따라 죽겠다고 하는 분투성이 있는 여인임을 알고 감격하여 서로 껴안고 한없이 즐거워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근심을 덜고 그녀가 사랑과 투쟁에 대한 원군임을 알고 한없는 기쁨에 잠긴다.
그러나 만수는 날로 힘들어지는 사회주의 실현에 골돌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들을 분석하고, 특히 문예방면의 프로 문학이 실패했음을 상기하고, 다시 민중에게 다가갈 방법에 고심한다.
신흥학교 신교사 낙성식에 기념 영화상연을 하는데, 미리 은밀하게 공작하여 사회주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아리랑과 풍운아를 상연하게 한다.
다음날 어느 갑부가 정희를 욕심을 내서 정희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그의 다섯째 부인이 되는 혼인을 하게 된다는 뜻밖의 소식을 정희로부터 듣는다.
그리고 정희는 자신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그 하나는 자신을 데리고 달아나 달라고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피하고, 그저 만수가 없이는 자신은 살지 못한다는 말로 죽음을 암시한다.
만수는 자신이 해야 할 사회주의 운동과 정희에 대한 사랑을 두고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민에 휩싸인다.
그러나 만수는 결국 사랑을 택하게 되고, 친구들의 계획적인 준비로 마련된 자동차를 타고 몰래 정희와 함께 떠난다.
그리고 이미 연락이 되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천안의 만수 친척 집으로 향한다.

이처럼 이 소설에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하나의 반사회의식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이념과 이를 실행 하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고, 그 실제적인 운동의 하나인 프로 문학활동의 오 년 동안의 세부적 활동 경과와 그 실적에 대한 평가 까지도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 동안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실적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일의 선전기관인 문에 방면에 있어서도 오륙 년 동안을 꼭 외줄기거리로만 써왔다. 조선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로 프로문예는 천편일률로 살인, 방화, 강도이다. 그래서 대중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미움을 받게 되고, 대중은커녕 주의자 간에도 염증이 생기게 되고 독자는 물론이지만 글 쓰는 자기네들 까지도 막다른 골목에서 실증이 나게 된 것이다.’

위의 글을 보면 이 글을 쓴 작자가 프로 문학에 직접 관여했거나 아니면 이에 상당한 식견을 지닌 인물이라는 추리가 가능하고, 이 글을 쓴 의도 역시 상당한 의문을 낳게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아무튼 다른 소설 작자들과는 달리 이 시대의 전문적인 문학이나 문예사조에까지도 정통한 상당한 실력의 문학자라는 점이 소설 내용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제도 그렇고, 주인공을 통해서 사회 의식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이 그 시대에 변화의 물결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자를 이를 이해하고 보면,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두고 표현되는 사회주의에 대한 표현이 결코 작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우선 확실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소설 속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색으로 종교적인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배 목사를 통해서 만민 평등주의와 중생의 구원이라는 기독교라는 사상을 사회주의 사상의 실현하기 위한 일시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고, 이러한 종교적인 힘도 현실적인 민생구제나 사회주의에 궁극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표현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은 다음과 같은 주인공 만수와 그의 친구인 태환과의 대화 중 태환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다.

「그는 우리들의 앞잡일세, 프랑스 혁명 이전에 촌 교회 목사들이 자유주의를 선전한 것처럼, 사실 말하자면 배 목사는 톨스토이와 같이, 오히려 그보다도 철저하게 하니까. 여하간 다행한 일이오. 좋은 일일 세.」

이와 같은 태환의 말에 대해 주인공 만수는  “여보게 그렇게 늘어진 수작만 하고 있을 게 아닐세 “ 하고 대답하고 며칠 뒤 배 목사의 ‘돌이 먹어라’의 설교도중 교회를 뛰쳐나오는 것으로 교회와 결별을 표현하게 된다.
결국 만수의 정신 세계는 사회주의 사상과 그 실현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작자의 의도는 그러한 사회적 의식 자체의 표현이나 선전에 있지 않고, 이를 전제해서 이처럼 중대한 사회적 의식도 애정과 같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내면의 욕구에는 밀려나고 만다는 인간성의 절대성을 표현한 점이 바로 이 소설의 극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소설의 대단원에서 개인적인 감정인 애정을 위해 사회적 투쟁을 뒤로 미루고 애정도피 행각에 오른 점이 그렇고, 이는 사회적 의식의 분명한 패배이고 애정의 빛나는 승리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집요하고 무거운 사상의 세계가 비교적 단순하기 그지없는 개인적인 내면의 감정 세계에 굴복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하나의 집단적 사회의식과 애정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본능세계와의 갈등을 통해서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애정의 세계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어야 한다는 개인의식의 절대적 가치가 주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점은 가슴에 끓고 있는 사랑의 피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사상이나 동지나 사업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정희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살수가 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 하다는 만수의 생각에서 단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 구성 면에서도 이야기의 전개에도 전혀 무리가 없고, 더욱이나 효과적인 위기의 설정으로 애정과 사회운동 양자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필연성으로 이끌어, 애정의 승리와 사회 의식의 패배를 도출해 낸 점 등이 단편소설의 미학적 가치를 잘 나타낸 이 시기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소설은 그 시대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이념과 함께 이들의 사상적 특색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시대성내지 사회성이 보다 강하게 부각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전통적인 애정 윤리에 대한 확인
「사랑하는 누님께」(씨. 씨. 한 1924.7.24)
이 글은 일인칭인 나라는 표현으로 쓰인 서간문이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애정 일변도의 연애편지로만 볼 수 없는 점은 단편 소설이라는 명칭이 서두에 붙어 있고, 개인 의식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는 애정모럴이나 사회 비판에 대한 내용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나, 이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는 그 의도와 그 시대의 시대적 특성을 감안 하면 소설적 표현이란 점이 전혀 부정적일 수만은 없다. 다만 사건의 표현이나 진행이 전혀 없다는 점이 소설로서의 결정적 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본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여인으로부터 애정의 편지를 받고 그 답장으로 쓴 편지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일반적인 애정에 대한 이야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남녀의 그릇된 결혼관이나 문란한 애정생활 등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젊은이들의 생활 태도에서부터 남녀 애정에 관한 모든 사회의 그릇된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표현되고 있고, 아울러 자신의 깊은 사고를 통해서 마련된 극히 이성적이고 전통적인 자신의 애정관을 피력하고 있다.
우선 그의 의견 개진 방법을 보면, 모든 잘못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잘못된 원인으로 비롯되어 가장 당연하게 나타난다는 인과 응보나 사필귀정에 바탕을 두고 설명되고 있다.
그가 비판의 대상을 삼는 것은 우선 패가망신하여 빈궁하게 된 부호나 개인들이고, 그들은 진실되지 못하고 허황하게 노력과 실력을 허비한 데서 그들이 패가망신하게 되고 실패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국민이 놀기를 좋아해서 결국은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일종의 사설이나 논설을 방불케 하는 표현으로, 이러한 점이 이 글이 단순한 편지의 성격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상은 남녀 애정에 대한 비판이다. 그 시대에 이미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남녀의 손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자유분방한 애정생활을 비판하고, 아울러 고국의 도덕적이고 전통적인 애정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지의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남녀가 헤어질 수도 있다는 꽤 합리적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는 점이 특색이다.
다음으로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인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생각하는 여인상은 ‘고운 얼굴’ 보다는 ‘고운 마음’이고, 이상적인 여인상은 자신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함께 일 할 수 있는 ‘동지’로서의 여인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직도 국가적인 집단의식이 개인적인 의식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을 엿볼 수 있고, 아울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구세계의 미풍양속의 관습을 고수하려는 작자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첫째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공부와 자신의 수양이어서 우선 이러한 할 일을 다 하고, 그 다음으로 여인과의 애정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어, 애정은 제 2 조건이라고 극히 합리적이고 절제되고 이성적인 애정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미주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젊은이인데도 주위의 현실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뚜렷한 애정관과 결혼관을 바탕으로, 그릇된 주위의 애정관이나 결혼관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라 할 수 있고, 그 내용은 다분히 고국의 전통적인 애정윤리에 바탕을 둔 듯한 하지만. 그래도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유통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작정 보수적인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는,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점은 우리의 전통적인 구세계의 바른 애정관을 지키려는 하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수라고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세계에도 적응해가려는 극히 합리적인 자세가 엿보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 혼인」<오 정수> (1924. 9. 4)
이 소설은 전통적인 남녀 애정관이나 결혼관에서 서구의 애정 중심의 자유 연애 결혼 형태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혼란과 그 충돌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애정윤리를 그대로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일종의 애정 모럴 형태를 다룬 과도기적인 현상의 애정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주인공 곽 성수가 개인의 감정에 바탕을 둔 애정의 순수성으로만 이루어지는 서구의 자유연애 결혼 감정과 이전의 전통적이고 극히 사회적인 형태의 결혼 사이에서 심한 혼란과 갈등을 느끼지만, 자유연애 감정을 따르지 못하고 그래도 이성적 판단에 의한 종전의 결혼형태를 택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전통적인 애정 윤리를 그대로 고수해 가는 내용이 중심으로 표현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소설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년 전, 미국 칼톤 대학에서 공부하던 곽 성수는 이전까지 전혀 개의하지 않았던 연애와 결혼문제에 붙들리게 되고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영화라는 여인으로부터 이상적인 혼인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상적인 여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건강, 외모, 그리고 재정 명예도 중요한 대상이라 생각하고, 색정대상이 아닌 친구로서의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이상적인 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귀국하여 이상적인 상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들처럼 통상적으로 큰 애정은 없으나 이화대학을 나온 경성 여자인 길 진명과 약혼을 하게 된다.
공장을 세울 터를 찾던 중, 원산 부근 곽천 명승지를 여행하다가 산 언덕에서 실족하게 되고, 김 순실 여인의 도움으로 의식을 되찾는다.
김 순실의 애정 깊은 보살핌 속에서 곽 성수는 차츰 순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고, 약혼한 길 진명이 인조물 이라면 김 순실은 천연물이라고 느끼고 김 순실이야 말로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이미 자신이 약혼한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김 순실은 곽 성수의 가방 속에서 길 진명의 사진을 발견하고 곽 성수에게 간접적으로 그의 뜻을 묻지만, 곽 성수는 미국의 것이 우리 것보다 나은 줄을 모르겠다고 답한다.
이에 김 순실은 자신은 부모가 정해준 배필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꺼내지만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한다.
곽 성수는 김 순실이 정혼한 것으로 알고 떠나게 되고, 그녀를 잊기 위해서 원산이 아닌 강원도 간성 땅에 공장을 세우고 살아가면서 김 순실이 서양식처럼 혼인하지 않고 혼자서 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먼저 전제되고 있는 곽 성수의 미국에서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문제의 제기 및 설정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의 구체적 내용은 전통적인 고국의 결혼 방식과 새로운 자유 결혼방식, 그리고 자유연애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이상적인 여인상에 대한 것들이다.
우선 곽 성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은 우선 애정보다는 친구로서의 여인이 보다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곽 성수의 이성적인 여인상은 극히 도덕적이고 전통적인 애정모럴에서 오는 동양의 전통적인 여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여인이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인생살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귀국하여 배필을 찾아나서는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잘 나타난다.  모든 조건을 갖춘 이상적인 여인이란 그렇게 쉽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가 결혼하기로 약혼한 길 진명 여인은 큰 애정이 없이 통상적인 현실 속의 여인이다. 애정 제일주의인 자유연애 결혼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이화학당 출신이라든가 집안이 점잖다든가 하는 등의 사회적인 여건에 의해 이루어진 선택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에게 새로 등장한 김 순실은 그가 만난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할 수 있고 연애 감정에서 이루어지는 자유결혼으로 이어 질 수 있는 대상이다. 결국 그는 감성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 사이에서 번민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가 겪는 갈등은 일종의 자유결혼이라고 하는 이상의 세계와 보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 세계와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번민 속에서 그는 새로운 세계의 관습을 택하지 못하고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애정모럴을 고수 하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의 결혼관은 다음에 인용된 부분에서 단정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곽 선생, 미국에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혼인을 주관하는 법이 없지요?」
「없어요.」
「곽 선생은 미국 법대로 물론 하였겠지요.」
「미국 법대로 하려고는 했으나 우리 것보다 나은 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맘대로 자기 뜻 맞는 이끼리 사는 것이 좀 좋을 까요? 나는 우리 부모가 벌써……」
하고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필치 못한다. 곽 성수는 이를 어떻게 들었는지! 자기 혼인 이야기를 부끄러워 그러는 줄 알았는지 모르거니와 순실이는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시작만 해놓고 필치 못했다.
남을 위하여 자기의 애인을 위해서 하려는 거짓말도 맘이 허락하지 않았다.

위에서 자유롭게 혼인을 하는 미국 법이 우리의 것보다 나은 줄을 모르겠다는 곽 성수의 답변에서 그는 아직도 미국 방식보다 우리의 관습이 좋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곽 성수의 본능적 감정 세계에서는 미국식의 자유연애 결혼을 따르려 하지만, 이성적인 의식세계는 오랜 관습의 세계에 젖어 아직도 전통적인 구습의 애정 윤리에 붙들려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은실의 경우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애정의 절대성에 붙들려 있고, 곽 성수와의 자유연애를 통해서 자유 결혼은 이루고 싶지만, 곽 성수의 그렇지 않은 뜻을 알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애인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려는 애정의 절대성에 충실한 여인이다. 이러한 은실의 사랑의 절대성과 자유 결혼관은 소설의 대단원에서 서양식으로 장래에도 결코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소설의 내용은 새로운 서양의 애정윤리를 따르지 못하고 종정의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결혼을 택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처럼 전통적인 구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애정윤리가 대두되는 혼란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애정 윤리를 지켜나가려는 작자의 의지가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일종의 주체성에 대한 확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기독교 정신의 정착
「사랑의 빛. 愛의 光」<만수산>(1926.10.26 이전 -1926.12.9 14회)
이 소설은 종교소설이라는 장르 명이 붙어있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신앙소설이다.
이전의 초기 소설인 <맹 마리아> 나 <힘쓰면 될 것이라> 등에서 표현되었던 것처럼 미주 한인들의 극 소수의 의식세계를 통해서 하나의 부분적인 정신 세계로 구국을 위한 방법으로 표현되던 신앙 세계가 이 소설에서는 전체적인 단일 소재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는 본격적인 종교소설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등장 인물들의 신앙적인 정신 세계와 이에 따른 감화를 통해서 그들이 참된 구원의 세계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과 현실 생활에서도 성공을 거둔다는 종교적 주제의식이 단일하게 표현된 소설이다.
이러한 소설의 등장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관심과 탐색에 머물던 새로운 서구의 신앙 세계가 차츰 미주 한인들의 의식 속에 차츰 하나의 생활 종교로 정착해가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종교적인 감동이나 감화를 주기에는 미흡한 편이고, 인물 설정이나 사건의 전개 등이 조금은 명료하지 못하여 소설적 흥미를 끌지 못하는 편이다.  이러한 점은 미주 한인 소설에 대한 최초의 평문이라 고도 할 수 있는 홍 성삼의 비평의 글 ‘종교소설 <사랑의 빛>을 읽고서 ‘(신한 민보. 1927. 1. 20)에서도 부분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홍 성삼은 자신은 다만 소설을 좋아하여 읽게 되었고, 자신이 소설을 남보다 잘 써서 평론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지극히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일반 감상문의 수준을 넘어선 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소설의 작자가 경험이 풍부하고 뛰어난 관찰력과 문장의 유량함을 지녔다고 칭찬하고 있으나, 소설의 사건 전개나 그 표현의 불합리 한 점을 낱낱이 지적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종전까지 일반적인 관심에 머물러 있던 기독교 정신이 차츰 생활 속에 하나의 생활 종교로 정착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라 하겠다.  더욱이나 이 소설의 작자 만수산은 다음에 소개되는 <탈선의 최후>의 작자이기도 한데 이 소설 역시 신앙을 바탕으로 표현된 일종의 도덕적 계몽을 목적으로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서, 작자가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으리라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14회로 연재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25년간 교회 목사로 봉직한 한 성도 목사는 교회를 퇴직하고 농촌에 돌아와 매일같이 서재에 묻혀 독서를 하며 지내고 오후에는 그의 딸 애신과 함께 뒷 뜰을 산책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그의 맏아들 중생은 친구들과 함께 조직을 꾀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애인이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혼인해 버렸고, 출옥 후 결혼을 했으나 가정에도 소홀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방탕 생활을 하는 것이 늘 그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애신은 자기집에 마련된 정구장으로 운동을 하러 오는 청년들 중에 신 광명이라는 청년에게 관심이 쏠린다.
  화창한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돌아온 애신은 홀로 산 언덕으로 산보를 나가 우연히 벌목을 하고 있는 신 광남을 만난다.
  신애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나 신 광남은 자신은 무신론자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전도사인 자신의 누이가 결혼 첫날밤에 광풍에 불이 붙어 불에 타 죽은 사실이 계기가 되었음을 듣게 된다.
  이에 신애는 주님에게 그를 위해 다시 기도를 드리는 찰나 광풍에 나무가 넘어지면서 애신의 몸을 덮치고 애신은 그대로 가사상태에 빠진다.
  신 광남은 그녀를 업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간호하면서 그녀가 깨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한목사는 그녀의 회복을 위해서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숨을 거둔다.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로 애신은 깨어나게 되고 건강을 회복한다. 이를 계기로 해서 중생과 신 광남은 다시 신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서로가 가까워진다.
신애가 완전히 회복되자 두 사람은 일본으로, 그리고 중생은 미국으로 유학 길에 오른다.
신 경남은 상과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하여 음악학교를 졸업한 신애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은 서울에 큰 빌딩을 지어 백화점을 운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중생은 장차 한국 기독교를 위해 큰 일을 하려 한다.

이 소설에서의 중심 내용은 하느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혼의 구원이고, 중심 인물은 한 중생과 신 광남이다. 이들에게 영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한 목사의 죽음과 애신양의 회생이다.
결국 죽음을 통해서 구원된 새로운 영혼의 탄생을 표현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한 목사의 죽음과 애신양의 회생이라는 신앙적인 기적을 보고, 지금까지 신을 멀리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던 맏아들 중생이 회개하고 구원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또한 누이이의 죽음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던 신 기남 역시 이 신앙적 기적을 보고 다시 구원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처럼 두 사람의 구원은 바로 예수의 죽음에 의한 대속처럼 한목사의 죽음을 통해 영혼이 구원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 신 광남은 두 개의 죽음을 눈앞에 체험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전도사로 일하는 여동생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고, 두 번째는 한 목사 죽음과 애신양의 회생을 신앙적 기적으로 믿고, 이에 다시 신의 품안으로 귀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한 비평의 글을 쓴 홍 성삼은 이 소설의 약점으로 중생 인물에 대한 소개가 미흡하고, 그의 구체적 방종생활에 대한 표현이 생략된 점, 그리고 불필요한 않은 보조인물의 설정, 산 속에서 애신 양과 신 광남의 만남과 애신 양의 행동 표현의 부적절함, 그리고 신 광남의 누이의 죽음이 황당한 점, 그리고 두 곳에서나 나타나는 갑작스런 격풍과 한 목사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두 남녀의 사랑의 과정이나 후반부가 지나치게 생략된 점 등에 대한 모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홍 성삼의 지적은 상당히 합당한 지적 같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러한 점은 바로 소설 속의 이러한 모순들이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할 것이다. 갑자기 격풍이 불어 애신양이 나무에 깔리게 된 일이나 한 목사의 갑작스런 죽음과 애신양의 회생, 그리고 전도사의 죽음은 신앙적인 기적으로 보면 조금도 무리가 없고, 오히려 이러한 점이 바로 신앙적인 가치로 표현되어 소설의 가치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오히려 신이 역사하는 신령한 신의 세계를 나타내는 감동적인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모순점으로 지적된 누이 동생의 첫날 밤의 돌연한 죽음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녀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전도사업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신에 대한 약속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녀가 미국을 다녀와서 결혼을 하게 된 점은 신에 대한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이 황당한 것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 신앙적인 계시나 징벌 같은 그런 의미로 연관지어 보면 합당하게 표현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내용은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암시나 복선 등의 치밀함이 부족해서 신앙인 조차도 이해의 접근이 쉽지 않다면 이는 작자의 표현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신앙세계의 합리적인 전달이 미흡한 점은 구성의 산만함이나 애정 표현의 미흡함과 함께 이 소설의 미학적 가치에 치명적인 점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감동의 세계를 애정과 연결시켜 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작가적 의도가 표현된 순수 종교소설이라는 점에 이 소설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6)신앙적 도덕성과 정체성에 대한 확인
「탈선의 최후」(만수 산인.1927.9.8-1927.9.15 4회 연재)
이 소설은 4회로 나뉘어 있고 2회씩 두 번에 걸쳐 게재된 짧은 소설이지만. 한인 젊은이들에 대한 신앙적인 정신 세계와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적 교훈을 강조한 종교적 계몽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목사의 종교적인 설교를 바탕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핼련양이 자신의 근본인 구세계와 현실적인 새 세계와 사이에서 방황하며 겪는 갈등의 세계를 통해서 그녀가 새로운 세계에 이끌려서 신앙과 동포들을 멀리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고, 그녀가 임종의 순간에 ‘탈선’이었다고 회개하고 있는 점이 바로 작자가 표현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신앙적인 세계를 저버리고 조국 동포를 멀리했던 점이 탈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세계는 신앙적인 세계이고 또한 동족과 동족의 문화 가까이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새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백인들이나 현지의 문화만을 지나치게 가까이 하는 세계는 비도덕적인 탈선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성실하지 못한 애정행각에 대한 회개는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귀의이고, 또한 동포들을 멀리 했던 점에 대한 반성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민자들에게 현재는 물론 언제까지고 하나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충돌이나 이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정체성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민 소설의 특색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소설의 주인공이 이민 1.5세나 이민 2세라는 점에서 더욱 더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이민 이십오 년이 지난 이민의 시대적인 변화가 새롭게 나타나는 시대적 특색이 강하게 부각된 작품이라 할 수가 있다.  우선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와이 이십오 년 이민사를 집필하고 있는 양운은 아침 예배에 있었던 ‘”한민족은 물질적, 정신적으로다 죽었으니 하느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 는 현 목사의 설교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어서 핼련 양이 십팔 세의 꽃다운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핼련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공립학교와 한국 학교 두 곳에 열심히 다니고 모든 사람의 귀여움을 받는다.
그러나 차츰 성장하면서 지나치게 영특한 관계로 서구문화에 비해 많이 뒷떠러진 조국의 문화나 동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한국에 관계된 것은 모두 싫어하게 되고 동족을 경멸하며 백인들만 가까이 사귀면서 지낸다.
그의 부친은 평시에도 그러했지만 그가 임종 시에 다시 교만한 그녀를 불러 놓고 신앙심을 갖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긴다. 이에 핼련은 눈물을 흘리며 깊이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핼련은 교화 선생으로 그리고 한인 청년회의 일을 보면서 주위의 칭찬을 받게 된다.
그러나 친구들과 오이키키 공원으로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백인 청년과 다시 사귀게 되고. 핼련은 이로 인해 다시 심한 갈등과 번민에 빠진다.
그녀는 백인 청년이 청하는 대로 사랑에 이끌려 차를 타고 고속도를 질주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고, 결국 병원에 실려가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탈선’이라는 말이다.

주인공을 통한 사건의 전개에는 신앙적인 세계가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지 않으나, 서두에 표현된 작자의 의도를 보면 종교적인 정신 세계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신앙적 구원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적인 정신 세계는 곧바로 도덕적인 정신세계로 이어진다.  
결국 이 소설 역시 신앙적인 영혼의 귀의를 중심으로 도덕적인 생활 태도를 강조하고 있고, 이를 지키지 못해서 죽음이란 파멸에 이르게 된 탈선의 세계를 통해서 교훈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깊이 회개하게 된 점이나,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비정상적인 세계로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이로 인해서 비로소 영혼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점이 암시적으로 나타난다는 종교적인 미학적 표현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신앙 세계의 표현과 함께 나타나는 이민 2세들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이 소설의 소중한 골격을 이루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작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소설에서 보다 큰 중심 축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점은 객관적으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민 2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고, 사건의 진행이나 핼련의 의식 세계에 나타나는 갈등이나 그 구체적 사실들 모두가 일종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구세계를 지키려는 한인들의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7) 현실 극복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
「새벽 길」 (미쉬칸 구름)(1934.1.11-1934.6.21 21회 연재))
이 소설은 21회로 연재된 비교적 긴 소설이나 이야기의 진행으로 보아 그 결말이 미완된 듯도 싶은 소설이지만, 이것이 작자의 의도인지 아니면 게재가 중단이 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소설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새롭게 변해가는 한 개인의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변화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하나의 교육 계몽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의 꿈이고 이상이라 고도 할 수 있는 민족운동을 위해서 이역 땅을 바람처럼 떠돌다가 이의 실패로 고국으로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은 가정의 파산과 아내의 배신이다. 이러한 사회적 개인적 양면에서의 좌절과 패배의 고통 속에서 이를 다시 극복하고 현실을 직시한 보다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교육과 계몽을 통해서 개인의 사회적인 꿈과 개인적인 꿈을 함께 재건해 간다는 그 과정을 극히 교훈적이고 계몽적으로 밝힌 소설이다.
결국 지금까지 잘못 추구해온 민족운동과 가정의 파괴에서 나타난 사회적인 패배와 개인적인 패배와 암담한 국가적 현실 속에서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새롭고 참된 방법으로 이를 극복해 가는 모습을 나타낸 일종의 사회적 교육적 계몽 소설이라 하겠다.

이야기는 김 철수가 오랜 친구인 광호에게 예고 없이 한 밤중에 방문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칠 년 만에 만나보게 된 김 철수는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 침울하고 지친듯해 보인다. 원래 김 철수는 누구보다도 강직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처음과 끝이 언제나 같은 틀림없는 사람이었고, 니체와 로맨놀랑의 글을 즐겨 읽고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종의 강권주의자였다
김 철수는 중국과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구국을 위한 민족운동을 꾀하고 있었으나 그는 결국 실패하게 되는데, 그가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외부사정에 있지 않고, 내부의 분열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분열은 물론이고 같은 주의 속에서도 서로가 분열되어 결국 지리 멸멸 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실패하고 국내에서 활동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오 년 만에 귀국을 했으나, 기다리는 것은 가정의 파산과 부인의 배신이었다. 수원 제일의 재산가이던 집안이 파산되어서, 그로 인해 부친은 임종했고, 아내 은순이가 배반을 하고 집을 떠난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부인을 찾아가서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은순이는 이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날 김 철수는 광호가 학교에 가고 나자 홀로 신문도 보고 그럭저럭 지내려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은순이와의 그 동안 인연이 떠오르게 되고, 극심한 분노와 함께 말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광호는 철수를 자기 학교로 데려가서 선생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둘이서 함께 동산에 올라가 앉았다. 그곳에서 철수는 아내의 배신을 털어 놓았다. 이러한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듣게 된 광호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철수를 위로한다.
광호는 철수의 사회운동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고, 사회주의에 대한 목적과 역사적 가치와 세계적인 추세, 그리고 우리민족과의 이해 관계 등에 대해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는 끝에, 철수는 우리국민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서 민중을 훈련시키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기회가 오면 동맹파업 등의 노동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철수는 광호의 집에서 며칠간 묵기로 하고, 광호는 철수에게 저녁에 열리는 야간 학교에 나가 가르치고, 아침에는 교회에 나와 설교를 해 주기를 부탁한다. 철수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게 된다.
다음날은 선생님들과 냇가로 놀러 나가 여선생 고 정심을 만나게 되고 서로가 관심을 갖게 된다.
고 정심은 학생을 시켜 그녀가 꺽은 꽃을 철수의 방에 꽃아 두게 하여. 이 꽃을 보고 철수는 이 꽃을 보면서 다시 은순이의 생각에 붙들리게 되어 옛날이 자꾸 떠오르지만, 이제 그는 그녀를 악마라고 생각하고 잊으려고 노력한다.
광호가 철수에게 삼사 년간 이곳을 위해서 학교에서 교사로 희생해 줄 것을 부탁하자. 철수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철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철수는 동회를 조직하여 구판부를 설치하고,  또 여인들을 가르치는 야학을 개설하는 등 교육 계몽사업에 적극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꿈을 꾸는 동료 교사인 고 정심과는 더울ㄱ 가까워지고, 앞산  암자로 산보를 다녀온 것을 계기로 서로가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은순이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차츰 벗어나게 되면서, 고 정심과의 새로운 애정의 꿈을 이루어간다.

이 소설에서 전재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좌절과 고통이다.  그 좌절은 오랜 세월을 외지에서 진행하던 민족운동이라는 집단의식의 패배인 사회적인 패배와 함께 가정의 파산과 처의 배반 등 개인적인 패배의 두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좌절과 고통이 결국 새로운 자각과 함께 현실을 직시를 유발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이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광호의 민족운동 실패도 삼일운동의 실패처럼 하나의 현실성이 희박한 집단 의식의 실패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맨손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던 삼일운동과, 광활한 중국과 러시아 땅을 휘돌며 추구했던 민족운동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서 나타나게 되는 자각이 바로 눈앞의 현실로 개인적인 가정이나 애정세계에 대한 관심이고, 구국에 대한 정치적인 민족의식이나 사회주의 의식보다는 극히 현실에 입각한 민중계몽이라는 구체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앞서의 ‘돌 먹는 사람들’ 에서 장황하게 나타나는 사회주의 사상이 이 소설에서도 장장 삼 회에 걸쳐 광호의 질문과 철수의 답변을 통해서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 대세와 함게 아시아 걱구에 미치는 영향이나 우리의 현실 등 아주 장황하게 표현되고 있다.  다만 이는 하나의 사상과 이념적인 것이고 실제 행동으로는 앞으로의 청년회 결성 계획 정도로 이 소설에서는 간략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이 쓰인 그 시대의 상황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회주의 사상이 그 실천 과정에서 무리가 있고, 생산성의 향상이 아닌 분배에만 한정된 표현이어서 분쟁이 유발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좌절을 맛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사회주의는 뒤로 밀쳐두고 그 보다는 현실적으로 시급한 농촌 운동과 야학 운영 및 계몽교육 등 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력들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주인공 김 철수에게는 애정 문제가 그에게 다시없는 중요한 현실 문제이고,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에 앞서 소중할 수 있다는 점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점은 철수가 느끼는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결국 이국에서의 실패한 민족 운동보다도 아내의 배신 같은 개인적인 패배가 더욱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데, 이러한 인간성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진실성이나 ‘백 년 가약’ 같은 전통적인 애정 모럴이 파괴되어가는 시대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엿 볼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애정이라는 개인적인 의식과 사회계몽이라는 사회적 의식인 이 두 세계가 축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애정 계몽소설이라고 할 수 있고, <새벽 길> 이란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새로운 방법에 의해서 민중계몽과 새로운 애정의 세계가 미래를 향해서 미학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두 남녀의 애정이 새벽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같은 열망으로 함께 미래를 향해 가고 있어서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게 되리라는 추리는 가능하지만, 보다 확실한 암시적 표현이 없이 소설이 그대로 끝나고 있어서, 하나의 여운보다는 의문으로 남는 미완의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 소설 구성상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새벽길이란 표제의 상징성으로 해서 소설의 미완의 내용이나 결말을 이해시키려는 것이 작자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8) 사회적 모순에 대한 고발과 정의 구현
「특이」< 산꿀 >(1928.12.27-1929.5.23 17회)
이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글의 서두에 작자의 작품에 대한 소개의 말이 수록되어 있는 점과, 무대 및 인물 소개, 지문 등이 나타나고 있는 등, 희곡적 형태로 쓰인 점이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작자가 소설 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이를 희곡으로 보기에는 구성과 표현상에 무리가 많다. 이러한 형태는 장르의 형태가 완전하게 독립되지 못한 일종의 과도기적인 복합 문학 형태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특이라고 하는 혼혈인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혼혈인 문제와 함께 인종차별 문제를 고국에 앞서 일찍이 미주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은, 미주 한인 소설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다분히 고국에 앞서 보다 자아 비판적인 선구적 의식이나 행동이 표현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는 셈이다.
  표제로 사용되고 있는 ‘특이’라는 말은 우리에겐 트기 라고하는 동물을 지칭하는 말로도 인식되고 있어서, 혼혈인을 동물에 빗대어 하나의 비어처럼 쓰이고 있지만, 원래 이 말은 한자말 特異(특이)에서 온 말로 트기로 연음으로 소리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해서 그냥 트기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처럼 특이라는 어휘가 지니고 있는 의미처럼 그 시대는 오늘과는 또 다르게 혹독한 차별과 멸시를 당했는데 그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부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필 수가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이러한 혼혈인들이 겪어야 했던 그 구체적 고통과 함께 외적의 침략과 수탈의 역사 속에서 비롯된 민족적 수난과 개인적인 비애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는 셈이고, 그들이 격어야 했던 고통과 차별이 얼마나 혹독했던 가를 밝히고, 또한 그 시대의 보다 큰 하나의 사회적 차별이랄 수 있는 소득 분배에 대한 현실적 모순을 비판하고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겨 가난 해소 및 소득 분배의 공정을 기하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는 구체적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혼혈인인 주인공 황 일남을 통해서 그 스스로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여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바로 자신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 차별을 해소 하는 방법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는 추리를 낳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지주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처지와 같은 동류의 지주를 상대로 투쟁을 하는 모순점을 행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소설의 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의 그릇되고 모순된 차별에 대한 사회 인식을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결국 개인의 자유와 평등사상의 실현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와 권리를 밝히려는 숭고한 정신과 행동이 표현된 일종의 사회소설 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혼혈인 만이 아닌 인종 차별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인종 차별의 문제는 과거만의 일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현실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 국민의 과거에 중국인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을 생각해 보면, 우리 국민도 인종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국민의 차별 문제에서도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소설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오년 난리통에 황 과부와 청국군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인 황 사덕은 부모를 여윈 후 하와이로 건너가서 본토 각지를 전전하면서 흑인 여인을 만나 황 일남을 낳고, 갖은 고생 끝에 결국 많은 돈을 벌고 다시 한인 여인과 결혼을 하여 살다가  귀국 한다.
  후처인 황 부인은 남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황 일남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기고 배려하여 그곳에서 공부하게 남겨두고 온다.
황 사덕은 귀국하여 금광을 하다 말고 땅을 사서 대지주가 되지만, 너무 인색하고 혼혈인 이라고 해서 갖은 멸시와 차별 속에 살다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게 된다.
홀로된 황부인은 딸과 함께 주위의 갖은 멸시 속에서 살면서도 박사가 되어서 돌아오게 될 아들 황 일남을 기다린다.
  황 일남은 공부를 마치고 함께 공부했던 역시 혼혈인인 방 정애와 결혼을 해서, 고국에 대한 큰 꿈을 지니고 귀국한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에 대한 고국인들의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차별과 멸시에 크게 실망한다.
  지주 회의에 회원으로 참석을 하게 된 그는 지주들의 방만한 태도에 우선 놀라게 되고, 수확이 반감해서 소작료를 십분의 육으로 면해 주자는 의견에 반대하고 전액을 면제해 주자고 하여, 지주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직접적인 박해와 위협을 받게 된다.
우연히 그의 친구인 주 무영이 평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와 연락이 닿아 주 무영이 그를 방문한다.
주 무영은 철학자인 임 천우로부터 폭력배들이 그의 집을 습격 하리란 소식을 듣게 되고, 이를 대처할 준비를 해서 그들이 닥치자 주 무영은 그들을 물리친다.
이런 소란으로 그의 모친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고, 주 무영이 떠나게 되자. 집안은 다시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그의 아내는 가출을 하고,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에 황 일남은 말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괴로워한다.
친구 주 무영은 가출한 그의 아내를 찾아가서 설득해서 남편에게 연락을 취하게 하고, 자신은 순안으로 가서 황 일남을 대신하여 지주회의에 참석하고 의장 옥재곤의 비리를 폭로해서 그를 축출하고 그가 의장이 된다.
새로운 지주 모임에서 황 일남은 전 재산을 빈궁인과 건설사업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하여 많은 지주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옥 재곤은 다시 흉계를 꾸며 그의 집을 습격하려 하여 황 일남 집안은 다시 불안에 휩싸이나, 막상 당일이 되자, 수 많은 경찰과 소방대원 그리고 기자들과 기생들과 온 시민들이 모여서 일시에 황 일남 박사 환영식장으로 바뀐다.

위에서 발단이 되는 문제는 혼혈인에 대한 사화의 혹독한 차별과 멸시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시대의 사회적인 가장 큰 모순이고 차별이라 할 수 있는 가난이나 빈부의 격차 그리고 소득 분배와 같은 사회적 차별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는 혼혈인인 자신에 대한 차별에 항거라고 할 수 있고, 인류의 평등 사상에 바탕을 둔 인간성에 대한 회복과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반적인 흥미를 떠나서 사회 정의에 대한 실현과 함께 특이라고 하는 혼혈인과 인종 차별에 관계되는 문제와 소득 분배에 대한 사회 정의에 대한 실현 문제를 고국에 앞서 일찍이 이곳 미주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을 통해서 우리는 미주 한인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의식 세계가 본국에 한 발 앞서 가고 있다는 현상을 엿볼 수도 있다.
아무튼 자유주의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개인적 사회적 차별인 혼혈인과 인종에 대한 차별과 빈부에 대한 차별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 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가장 이색적인 점이 바로 주인공 황 일남이 자기의 전 재산을 빈민에게 환원 하여, 자기 스스로 차별을 무너뜨리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이 지닌 미학적 가치라 할 수 있고, 이러한 개성적인 인물에 의한 혁신적인 행동이 바로 소설적 흥미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전체적인 소설의 구성 역시 비교적 긴 시간적 배경과 함께 미국과 본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무리 없이 표현하고 있고, 효과적인 위기감 조성이나 극적인 반전 등을 통해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다만 사실 표현에 부분적으로 무리한 점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우선 두드러진 표현 미숙의 하나가 주인공 황 일남에 대한 인물묘사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공부를 끝낸 이민 제 2세다. 이러한 혼혈인 2 세가 계모와 이복 동생을 찾아 그에게는 이국이나 다름없는 고국에 귀국해서, 곧 바로 고국의 현실에 대처해서 적응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