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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시문학에 나타난 향수의 미학

2005.09.03 13:14

박영호 조회 수:417 추천:50


POETRY & POETICS
'미주시인'(THE NEW POETIC WAVES)2005년,창간호 게재

       미주 한인 시문학에 나타난 향수의 미학

1) 출항하면서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여 이땅에 살아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을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에겐 대단히 소중한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그들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에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의 실제적 모습과 함께 그들이 지니고 살아왔던 그들의 의식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 속에는 그들의 실제적 삶의 모습과 함께 그들의 구체적 숨결까지도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과는 모든 것이 크게 다른 백여년 전에 쓰였던 단 한 편의 시가 우리에게 그 어떤 역사적인 사실보다도 가슴에 깊이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시문학 작품 속에 그들이 지닌 사상 감정과 함께그들의 숨결까지도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민 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그 작품 자체에 대한 미학적 가치에 대한 연구도 소중하겠지만, 이처럼 시대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도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미주에는 220만 명에 가까운 한인들이 고국을 떠나와 살고 있다. 이처럼 많은 한인이 이땅에 살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일찍이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고, 또 앞으로 어떤 특별한 계기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한인들이 이땅에 옮겨와 살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앞으로도 이민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쓰는 이민 문학도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 갈 것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갈 이 이민 시문학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를 정립해 볼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미주시문학에 나타나 있는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의식의 세계에 대한 그 구체적 내용을 분석 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민자들이 지니고 있는 그들의 의식 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바로 떠나온 구세계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구세계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현실 세계의 모습과 함께 이중구조로 나티니고 있는 점이 바로 이민 문학이 고국 문학과 다르게 구분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이민자들은 이처럼 과거와 현실인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고, 고통과 불안을 느끼고 갈등과 좌절을 맛보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세계가 바로 구세계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여기에서 떠나온 구세계란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오던 원천 세계인 고국의 공간과 시간으로, 우리 인간은 원래가 이러한 원천의 세계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외부지향적인 본능이 있어서 성장하고나면 보다 나은 세계를 찾아 탈고향 내지 탈고국으로 원천 세계에서 떠나간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다른 하나의 본성인 귀속성이라고 하는 일종의 속자성과 같은 회귀성이 있어서, 비록 몸은 떠나가도 정신세계는 원천 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가 없고 이를 우리의 의식 속에 평생 붙들고 살아간다.  결국 떠나온 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밖에 없고, 이러한 향수는 이민자들의 정신세계에 가장 근원적이고 바탕이 되는 의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이민자들에게는 이러한 원천의 세계가 하나의 회상과 그리움으로 떠오르기 마련이고, 이러한 향수에 대한 의식은 이민자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 언제까지고 함께 붇들고 가야할 숙명적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민 시문학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이민자들의 향수의 세계가, 이민 시문학 속에서 어떤 형태와 어떠한 미학적 가치로 변형발전 되어 표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그 구체적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문제 제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민자들이 누구나 한결같이 느끼는 이 향수가 직설적인 그리움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시대적 상황이나 개인의 처지에 따라 그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미주 한인 초기 이민자(1902-1919)들에게서 나타난 향수의식은 1970년대의 대량이민자들의 작품 세계에서 나타나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표형한 일반적인 향수 의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구체적 사실을 살펴보면 초기(1903-1919사이) 시문학 작품 속에 (총 170여편) 직접적인 향수를 소재로 한 작품은 소설에는 단 한편도 없고, 시가에서도 단 10 여편을 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작품이 한결같이 조국에 대한 사랑이나 망국의 비애나 그리고 조국광복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결국 그들의 관심이 구세계인 고국이라는 점은 틀림이 없지만, 그 구체적인 표현은 과거나 현실의 조국이 아닌, 그들이 돌아가야할 광복된 미래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광복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귀향의지에 대한 구체적 행동이 바로 애국운동과 함께 구국운동이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민 초기 이민자들의 향수는 귀향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으로 변형되어 표현 된 것이고, 이는 일반적인 향수의 표현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타나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고국에 대한 향수가 이처럼 변형되어 나타나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가 창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한인 이민 문학의 심층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 위해서는 이처럼 이민자들의 향수의 세계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 발전되어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고, 아울러 그 변형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여러 모습의 미학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데에 문제 제기의 의의가 있다 하겠다

1) 모성과 본성에 대한 그리움
  향수의 근원은 자신들의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원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서 말하는 원천 세계란 어린시절의 고향 풍광에 대한 서경적 개념만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근원적인 개념으로서 감성과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원초적인 본성의 세계를 말한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유아기로부터 성장기에 이르는 사이에 주로 형성되는 성격이 타고난 천성에 영향을 끼쳐 본성을 이루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민자들의 향수란 이러한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향수의 근원적인 감정은 우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의식 세계에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로, 이들은 우리 의식의 심연 속에 늘 잠재되어 있고, 우리가 죽는날 까지도 우리가 함께 지니고 가야할 운명적인 영혼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이민자들은 떠나온 원체험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없고, 그들의 의식속에 잠재되어 있어서,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의식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더러는 새로운 세계와의 충돌 속에서 극심한 갈등과 이질감을 느끼기 마련이고, 아러한 데서 떠오르는 모성이나 고향은 다시없이 아름다운 꿈의 세계나 안식의 세계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 하면 흔히  ‘꿈 속의 고향’을 연상하게 되고, 우리가 찾아가는 미래의 안식의 세계도 결국은 새로운 고향을 찾아 가는 것이어서, 떠나온 고향이나 우리가 찾아가는 고향은 같은 것이고, 그래서 고향은 하나의 이상적인 세계와도 동일한 이상향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오디푸스의 모성에 대한 접근도 그렇고, 푸로이드의 꿈의 세계도 결국은 잠재된 본성이나 원천세계에 대한 표현인 것처럼 이민자들의 향수 역시 모성과 함께 원천세게에 대한 본능적 회귀의식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박남수의 시  ‘회귀’ 에서  ‘꿈’ 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꿈이면 꿈마다 자그마한 토종의 여자를
흉측스럽게 껴안고 동이 튼다.

사실 외지에서, 벌써
반 평생이 되지만, 꿈에는
고향의 좁은 길을 서성거린다,

뿌리에 감자 달리듯 매달리어
공동의 꿈을 만들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어 있다.                  (박남수 ‘회귀’ 에서  ‘꿈’ 의 일부 )
  
흔히 꿈의 세계는 영혼 속에 잠재되어 있는 원천 세계가 표현되는 것이라고 하듯이 몸은 이역에 살고 있지만, 그의 영혼의 세계인 꿈속에서는 이렇듯이 토종이라는 순박한 고향 여자와 잠을 자고, 고향길을 서성거리고,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의 품속에 안기어 있다는 모성과 원천 세계와의 근원적인 종속관게를 잘 나타내고 있다.
좁은 길, 토종 여자,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은 바로 고향에 대한 향수의 표현으로, 자신의 원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적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어 있다는, 그래서 그의 영혼은 원천 세계인 모성과 고향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신과 원천 세계와의 그 숙명적인 영혼의 고리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감자같이 매달린 꿈의 추구도 결국 모천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꿈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고 그 근원은 바로 모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음은 최연홍 시인의 시 ‘한국행’ 의 일부분이다.
        
고향에는 빈집만이 기다리고 있어도 고향엘 간다.
3대가 뭍혀 있는 산에 올라 외국에 살고 있는 장손의 용서를 빈다.
          
원래 고향의 사실적인 개념은 ‘고향’ (전광석, 문학과 지성사. 1999)에서 말하고 있듯이 혈연 및 인척과, 언어, 관습전통, 등 이러한 세 요소가 상호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모두 하나의 원천의 세계나 본성의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표현된 빈집은 이미 실존적 의미보다는 상징적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혈연과 본인에 얽혀있는 관계의 고리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무한한 것이고, 산에 오르는 것 역시 뿌리라고 하는 그의 원초적인 인척과의 고리 때문이고, 이 고리는 죽음 뒤의 시간에 까지도 이어지는 그래서 현세의 시간을 초월하는 숙명적인 관계로 묶여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고향을 정말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참으로 인륜을 거역하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고, 시인이 용서를 비는 것도 결국 고향을 떠나서 사는 것은 인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하나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향수란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그리움은 모성과 함께 그 어떤 그리움이나 사랑보다도 순수한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초적인 애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상대적으로 평온한 세계가 그리워지듯 외롭고 삭막한 외지에 살게되면 포근하고 안일했던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포근한 고향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이는 일종에 안식과 평안을 즐기려는 인간의 본능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2) 유랑 의식에서 꽃피는 향수의 미학
고국을 떠나와 이곳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세월에 관계없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을 새로운 고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질감에서 오는 유랑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들은 거의가 다 자의에 의해서 고국을 떠나 왔지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떠나온 구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가 없고,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할 수 없는 생태적, 사회적인 이질감에서 자연히 유랑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천을 떠나온 불안이나 외로움 속에서 유랑이라고 하는 떠돌이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유랑의식 바탕에는 외로움의 그늘과 함께 향수라고 하는 그리움의 우수가 깔려있다.
이처럼 유랑의식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향수는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를 표현한 글이어서 다시없이 아름다운 미학적 가치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은 고래로 유랑의 길 위에서 쓰여진 많은 고전들이 오늘날 까지도 한결같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고, 그 까닭은 바로 이처럼 나그네 문학이 인간 본연의 영혼의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빈 하늘을 쳐다보며
강가의 서울을 가슴에 품는다.

만하탄은 정거장
사랑할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타인의 도시
바람 같은 정거장.                 (김윤태 시 ‘만하탄’ 의 일부)

위의 시에서 유랑 의식을 유발하는 것은 강가의 서울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고향이 아닌 이곳은 빈 하늘이고, 아무런 사랑도 기다림도 없는 바람같이 떠도는 유랑인과 유랑의 도시를 표현하고 있다.
결국 사랑과 기다림이 없는 삶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 그래서 유랑인이라고 느껴지는 것이고, 이곳의 삶이 그저 오고가는 바람처럼 나의 도시일 수가 없는 유랑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까마득한 시절에 고향을 잃어버려 어디가 고향인줄 조차도 모르는 집시의 방랑과는 또 다른 가슴에 고향이 있는 유랑인이고, 그처럼 고향인 서울울 품고 있어서 더욱 외로운 것이다.  

발판을 잃은 나비는
지친 날개를 공중에 싣고
조용히 아래를 굽어 보았다.
영원히 되푸는 푸른 원형이 일렁이고
어지러운 꿈의 그물코만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산다는 것은 발판을 잃고
하늘을 맴도는 방황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 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 에서  ‘꿈의 흔적‘ 일부 )

꿈의 세계는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원천 세계가 표현된 세계다. 꿈속에서 느끼는 의식 세계가 어찌보면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의식의 세계일 수가 있다.  시인은 꿈속에서 발판이 없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허한 하늘을 맴돌고 있다. 이는 정착할 수 있는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자신의 유랑인 의식을 한 마리의 나비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의 발판이나 하늘은 고국과 이역이라는 구체적인 공간보다는 인생이라는 근원적인 공간과 삶 자체를 표현한 보다 큰 세계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결국 인생 자체가 하늘을 떠도는 방황이라는 것이고, 본향을 떠나 사는 인간의 유랑의식과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박남수 시인은 일찍이 이북에서 월남(원산)을 했고, 다시 말년에 이민을 왔으니 개인적으로도 유랑인 의식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점은 다음의 ‘맨하탄의 갈매기’ 라는 시를 보면 그의 유랑인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맨하탄 어물시장에 날아드는
     갈매기. 끼룩끼룩 울면서, 서럽게
서럽게 날고있는 핫슨강의 갈매기.
고층건물 사이 잘못 들은
갈매기. 부산 포구에서 끼룩끼룩, 서럽게
서럽게 울던 갈매기여.                            ‘만하탄의 갈매기’ 의 일부

그가 월남을 해서 부산 피나민 시절에 갈매기로 끼룩끼룩 울면서 느끼던 그 서러운 유랑인 의식을 그는 이제 잘못 날아든 이곳 뉴욕 맨하탄 빌딩숲 사이에서 다시 부산 갈매기로 끼룩끼룩 울면서 서러운 유랑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향수란 유랑의 길 위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슬픔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3) 향수로 비롯된 회한과 슬픔의 미학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고국을 떠나왔지만 고국을 떠나 이국에 산다는 것을 늘 하나의 부담으로 느끼고 살아간다. 그리고 더러는 무언가 고향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소외의식 속에 잠겨 살고, 그러한 그러한  의식이 하나의 죄의식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감정은 마치 부모를 버리고 떠나와 사는 어느 탕아와도 같은 심정이 되어 이는 이민자들에게 깊은 회한의 슬픔에 잠기게 마련이다.
이민자들이 그들의 의식의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회한의 슬픔이다.
이처럼 고향이나 모성에 대한 회한이란 영혼의 슬픔이고 외로움이어서, 이는 다시없이 아름다운 미학적인 세게로 다시 창조되어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향수는 슬픔과 회한을 낳는 슬픔의 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낮선 땅에 떨어진 지 벌써 까마득
보리톨 하나가 그리도 아까웠었는데
그러나 이제서야 알겠어요
어머니
공이에 얻어맞아 알갱이 되고
보리끼리 부대끼며
껍질 벗는다는 것을
그리고 또 잔돌과 섞였으니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이상묵 ‘절구를 생각하며’ 의 일부 ‘미주 한인 문학대사전’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게 어머니로 인해 텨득한 인생의 뒤늦은 깨달음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회한의 슬픔이 시인의 가슴을 치고 있다. 어린시절 어머니 절구질을 돕던 일에 대한 회상 속에서 어머니로 비롯된 알곡의 소중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이국 땅의 순수하지 못한 잔돌 틈에 섞여버려 돌아갈 수 없다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순수한 영혼의 회한이고 애절한 그리움의 표현인가?
긴 인생의 여정 끝자락인, 그것도 먼 이역에서 느낀 깊은 사색적인 깨달음과 이제는 감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깊은 고뇌와 회한의 슬픔이 애잔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그 그리움과 회한의 슬픔이 다시없이 아름답게 우리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도 알곡이라는 영혼의 순수성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이 표현되고 있는 다시없이 아름다운 미학적 세계가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박남수 시인이 고국을 떠나면서 이민의 슬픔과 아픔을 회한으로 남긴 ‘안녕,안녕’ 이라는 시의 일부다.

웃지말라, 꾸짖지도 마라.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
때리는 채찍은 장난이겠지만,
맞는 개구리의 배는
생명과 이어지는 아픔.
한사람의 깊은 아픔은 누구도 달래지 못한다,          

안녕은 못하고 떠나지만
잊지않을 거라고 전하여다오.           (‘미주문학 대사전 ‘에서 박남수 ‘안녕, 안녕’의 일부)

고국을 떠나 이민을 간다는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마치 어린 시절 장난으로 때리는 매를 맞는 개구리 배의 아픔에 비유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별인가?  이민을 간다는 사실이 시인에겐 슬픔을 넘어선 하나의 아픔으로 그 아픔은 생명에로까지 이어지는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민을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뼈아픈 고뇌와 슬픔을 느끼고, 그러한 아픔을 지니고 떠나 가면서도 그는 조국을 결코 잊지않을 거라고 그래서 안녕, 안녕이라고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이민자들은 두고 떠나온 고국에 대해서 모두가 한결 같은 회한의 감정을 지니고 있고, 고구인들보다는 더욱 애절하게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다.

4) 향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이민 생활의 어려움이나 성공 여부나 현지 생활에 대한 적응 정도에 관계없이 떠나온 구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의 영혼 속에 붙들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활 속에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의 한 예가 바로 대도시에 생긴 한인 타운들이다.  그들은 현지 새활의 어려움 속에서 적응보다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모국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현지의 실정에 구애받지 않고 그대로 한국어 간판을 내어달고, 모국음식을 그대로 먹고 모국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한인 타운에서 멀리 떨어져 외봅게 사는 한인들은 이러한 한인타운을에 두고 마치 고국인 앙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우리와 나를 지키려는 일종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선 관습적으로 젖어살던 고국을 떠날 수 없어서 이를 현실적으로 현지에서 붙들고 살려는 노력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미국 속의 미국이 아닌 한국을 그대로 살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황소 개구리가 살고 있다./ 그 황소 개구리가/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티티까까호수에도 살고 있다./ 우리들처럼 보따리를 싸들고/ 고향을 떠나와서 살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 수면에다가도/ 국경을 그어 놓았지만/ 그런 하찮은 경계선 따위로/ 그들을 이편 저편/ 갈라서게 할 수는 없다/
국경을 넘어 페루쪽으로 가서는/ 개굴개굴/ 삼삼오오 볼리비아로/ 집단 이동해 와서도 개굴개굴/ 어리석은 사람들의 처사를/ 짐짓 조롱해 본다, 꾸짖어도 본다./
육신의 눈은 모두 멀어 있지만/ 마음의 눈은 어둠 속에서/ 띠띠까까 호수보다도/ 더 넓게 푸르게 열려있다.                            (배정웅, ‘남미 통신’ 에서 ‘띠띠까까 호의 황소 개구리’ 의 일부)

  위의 시는 남미 알젠틴,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을 두루 떠돌던 바람의 시인 배정웅 시인의 시다.
서울에서 살던 황소 개구리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먼 이국에서도 울고 있다는 것이다. 이국 어디에서나 똑같이 울어대는 황소개구리 울음 소리는 우리의 어쩌지 못하는 우리의 소리라는 것이고, 그 울음 소리를 통해 고향을 떠나도 변질될 수 없는 우리라는 동일성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이러한 점은 인위적인 법이나 국경 따위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의 망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곳 저곳을 넘나드는 우리의 삶에 대한 추구도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당연한 처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변질될 수 없는 한국인의 영혼과 그들의 향수가 청각적 개구리의 슬픈 울음 소리와 시각적인 띠띠까까 호수의 물빛으로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지 한인들의 영혼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달러 몇 푼에 팔려가듯 또 다른 이역으로 떠나기도 하는 현실의 삶을 상징하는 그들의 육신의 눈은 멀어 있지만, 영혼의 세계인 마음의 눈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띠띠까까 호수보다도 더 넓고 푸르게 열려서 꿈속 같은 두고온 고향이나 찾아가는 새로운 고향을 향해 늘상 푸르고 넓게 열려 있다는 그의 아름다운 영혼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가 있다.
결국 황소 개구리의 울음 소리는 어린시절에 듣던 고향의 소리이고, 고향을 그리는 한인 이민자들의 울음 소리이다. 결국 어디를 가도 변할 수 없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모여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향 고살 바람골의/그 혼령이 나를 따라와
꿈에도 생시에도 /노랑 꽃대궁 나부낀다
눈물빛 그보다 진한/캐리리포니아 뜰의 민들레     (김호길 ‘캘리포니아 민들레’의 일부)

고향의 혼령을 그대로 이곳 캘리포니아로 옮겨와 현실의 세계에서는 물론 영혼의 세계에서까지도붙들고 살면서, 눈물빛이라고 하는 그 피나는 삶의 고통과 향수를 이기고 고국의 혼을 캘리포니아 땅에 꽃대궁으로 피우겠다는 새로운 고향의 건설에 대한 의지와 그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영혼의 세계를 극히 의지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극히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정신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는 주체적인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몇 만 몇 천리 밖인지
봉숭아 물들이던 손에
지금도
나비 지나가는 소리가
개울 물소리가
몰려와  

앞산 골짜기에
백 년 묵은 벽화가 있는
암자를 향해
손 모으고
살아간다.                                    (‘미주 문학사전’에서 윤희윤 ‘이민시대‘ 일부)

  고국의 다시없이 아름다운 정서에 대한 서정적 묘사를 통해 결코 떠날 수 없는 원천의 세계인 고국의 모습을 나타내어, 현지의 모습과는 너무도 이질적이고 대조적인 고국의 역사와 전통적인 문화와 그 영혼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오직 이러한 원천 세계의 모습만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려는 현실적인 시인의 정신세계와 그 자세가 표현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어 온 조국의 정서나 그 영혼의 세계를 그대로 지키고 살아가려는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로서의 자세가 두 손 모으고 살아간다는 표현으로, 현실적이고 또한 극히 의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미주 한인들은 국적이나 현지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계없이, 차라리 고국인들 보다 더한 의지로 조국의 혼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5) 모천을 향한 귀향 의지
향수라는 것이 앞서 말했듯이 모성과 본성인 원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고 보면 귀향 의식은 당연한 것이고,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결같이 귀향의식을 지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라서 앞서 말한 모천과 본성으로의 회귀의식은 본능에 가까운 원천세께에 대한 그리움의 세계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귀향의지는 극히 현실적이고, 의지적인 행동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이민자라면 모두가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세계이고 귀향의지는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적극적인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천에로의 회귀의식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이민 생할의 어려움이나 실패여부 등에 관게없이 누구나 지니게되는 공통적인 의식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귀향으식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귀향의 의지이고, 이러한 귀향의지는 향수가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되어 나타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향의 의지는 시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앞서 기술한 것처럼 이민 초기인 1900년대 초기 이민자들은 임시 체류자는 물론 정식 이민을 온 사람들까지도 여건이 되면 귀향을 해야겠다는 귀향의지에 부풀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의 시작품 속에는 이러한 귀향의 의지를 나타낸 작품이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귀향의 의지가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시대적 상황에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조국이 망국의 비애에 쌓여 있는 등의 정치적인 이유로 귀향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드의 귀향의지를 광복된 조국에 두었고, 이의 실현을 위해, 조국 구국운동에 앞장서ㅆ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광복된 조국의 미래에 그들의 귀향의지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광복이 되기 이전까지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량 이민 이후로는 이러한 귀향 의식이나 실제적 의지가 가장 자연스럽게 고국의 현실에 관계업이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많은 시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수평선을 넘어와 이쪽 세상에서
무작정 흘러가버린 삼십년
아직도 나의 발걸음이
서정시 하나 써서 포켓 속에
깊이 감추고
그 어느 겨울날의 바닷가를 따라서
강구 마을로 돌아가는 것은
내 따뜻한 사랑이 미리 알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윤 ‘동해의 수평선과 마주 앉아서’의 일부)

동해 바다와 마주하는 바닷가에 앉아서 고향에 대한 귀향의 의식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고국을 떠나온지가 반평생을 지났지만 아직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사랑이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다는 고향 마을로만 돌아간다는 것이다. 포켓 속의 서정시는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고향의 정서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고, 미리 알고 기다린다는 따뜻한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고향의 모성의 품과 같은 원천 세계 속의 안식과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아름다운 향수와 그 향수에 대한 귀향의 의식의 세계를 극히 서정적으로 표현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다

바닷가에 나가선다
파도가 발목을 잡아당길 때마다
가슴속 바위가 흔들거린다.
무엇인가 우-우-우- 울부짖으며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연어다

연어는 크게 함바퀴 원을 그리더니
태평양 물살을 가르면며 모천(모천)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인문학대사정’에서 이연홍 ’연어’ 의 일부)

위의 시는 앞서의 ‘동해바다-‘ 의 시가 ‘귀향의 의식 세계’를 다루고 있다면, 이 시는 이 보다 더 적극적인 ‘귀향의 실행 의지’가 적극적으로 표형되고 있는 셈이다.
가슴속의 바위는 바로 원천 세계인 모천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고 굳어서 된 것이고, 그 무거운 바위가 모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그리움으로 바다의 유혹으로 인해 살아나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끝내 현실적인 몸짓으로 요동친다. 그것은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포효이며, 귀향을 알리는 출항의 고동소리 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한마리의 연어가 되어, 모천인 조국을 향해 생동감 있게 치달아 간다는 율동적이고 적극적인 귀향의 의지가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감각적 몸짓으로 단숨에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향수에서 비롯된 귀향의 의지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본능적인 의식 세계의 표현이고, 이는 생태학적인 측면에서도 회귀 본능이라는 본성으로서의 모천에 대한 회귀 의식이 바로 증명되고 있는 연어의 몸짓으로 상징되고 있다.

6)주체성에서 떠오르는 향수

나는 봄이면
미국의 도시를 떠나
숲속에 핀 진달래꽃을 따먹는다
그리고 진달래꽃을 안고 나온다

나는 숲속에서 나와
그 꽃을 마을 소년에게
전한다
소년은 십년후
청년이 되어
봄 숲속에서
소월을 만난다.       (최연홍 ‘진달래꽃’ 의 일부)

위의 시는 민족의 혼을 상징하는 진달래꽃을 통해 고국의 얼을 극히 상징적로 표현하고 있는데 시인은 미국에 살면서도 민족의 혼을 상징하는 진달래꽃을 찾아가고 이를 따먹는 것으로 고국의 흥취인 향수에 젖는다. 그리고 이를 영혼속에 붙들고 살아가려는 의지로 꽃을 안고 나온다. 이는 시인의 고국에 대한 하나의 주체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고, 소년에게 찐달래꽃을 전하는 것은 민족의 얼을 이민 후세에 전하려는 시인의 의지의 표현이고. 이런 의지가 십년 후 소년이 민족의 얼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들의 정체성확립에 영향을 주려는 시인의 의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이국 땅에서도 이국 이라는 공간과 후세에 이르느 시간에 관계없이 민족의 혼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시인의 주체성의 자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고국에 대한 향수는 주체성에 대한 자가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서 이민 2세들에게 까지도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민족의 혼을 바로 심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체성이나 정체서은 자연히 향수에 대한 촉매구실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향수의 세계
  이민의 길은 역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보다 나은 새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이민의 길은 개척의 길이며 그 길은 험난하다. 이러한 어려운 개척의 삶 속에서 그들은 두고온 고향에 대한 향수에도 젖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아메리카의 드림 속에 새로운 고향을 꿈 꾸기도 한다. 이러한 찾아가는 새로운 고향은 두고온 고향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도  고국의 모습도 함께 섞인 이중문화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 속에 건설된 이중 고향의 모습인 셈이다.
이러한 새로운 고향 역시 고국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여기에는 우리의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민족혼이나 고국의 정서도 깃들이어 있고 현지의 새로운 고향의 모습도 있다. 그래서 가장 이싱적인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아메리키 드림에 젖어있는 이민자들에겐 향수의 세계가 가장 미학적으로 가치있게 나타난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제시되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향수의 세계와 함께 앞으로 미주 한인 시문학이 빛을 크게 발할 수 있는 제재로 다시없이 소중한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저문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나의 길을 안내하는 별이 빛나는데
별을 따라 길이 없는 길을
무작정 걸어서 간다

그러나 곧 이어올 그대 위해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모래 위에 내 발자국을 새겨놓고 간다.      (‘한인 문학대사전’ 조윤호 ‘외로운 길’에서)

어렵고 힘든 자신의 미국 이민의 삶을 사막을 걸어가는 외로운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근원적으로 다를 수 없는 자연이라는 본성적인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자연과 친화하며 어려운 이국의 삶을 살아간다. 그가 가는 길은 아메리카 드림이라고 하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눈물과 고통의 세계인 이민의 삶은 사막과 같이 무척 힘들고 외로운 길이지만, 길을 밝혀주는 별빛이 있고 그 불빛은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안내자인 셈이다.
결국 자연과의 친화적 자세의 묘사로 이민의 어려운 삶을 극히 사색적이고 서정적으로 순화 시킨 기법이 돋보이고 후세들을 위해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는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개척자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빛깔이 각기 다른 꽃들이/
모양이 다른 잎새들과/
각기 다르게 피어나는 소리까지도/
함께 어우러진 이 꽃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화원의 주인은 사람이지만/
피고 지는 꽃과/ 세월을 이어가는 씨앗은/
빛과 바람과 세월이 만들고
그들을 키우는 구름과 별과 대지는
하늘이 주인인 것을             (박영호 ‘미주문인대사전’에서 ‘화원산책’일부)
    
   빛깔이 다른 여러 민족의 문화와 언어가 서로 어울리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미국사회의 모습을 하나의 꽃동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도 우리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한 무더기의 꽃이나 한 그루의 나무로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이 땅의 주인은 인디언도, 백인도 그 누구도 아니며, 오직 세상을 창조하신 하늘이 주인일 뿐이라고. 그래서 인종에 관계없이 그 누구든지 이 땅 위에 살면 모두가 주인일 수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 땅의 주인이며, 또한 우리의 새로운 고향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8) 자연과 종교로 승화되는 향수
이러한 점은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리의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를 찾아오는 교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에는 모국 동포들이 모여 있어서 그곳에 가면 우선은 고국에라도 온듯한 포근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갈구하는 어머니의 품속이나 본향과 같은 근원적인 안식의 세계인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귀향에 대한 간구가 아닌 본향에 대한 회귀를 간구한다. 이는 이민자들이 느끼는 향수가 근원적으로는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어서, 영혼의 세계인 본향에 대한 그리움의 세계로 쉽게 넘나든다.
결국 고국에 대한 향수가 보다 근원적인 영혼의 세계인 본향에 대한 향수로 승화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할가 수 있고, 향수는 일종의 구원과 안식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바람처럼
어디선가 불리어 온 사람들의 나라

믿음이 없는 사람도, 가끔
외로워서 외로워서 찾아드는 교회당    (박남수 시집 ‘서쪽, 그 실은 동쪽’ 어느 하인교회에서의 일부)

미국은 네티브인 아메리카 인디언을 제외하곤 모두가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바람 처럼 불리워온 유랑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적인 목표에서가 아니라. 외롭고 외로워서, 그러니까 고구이 그리운 향수에서 교회를 찾아든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은 고향과 같은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찾아서인 것이고, 이는 결국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떠나서 영원에 이르는 본향에 대한 향수를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 향수가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본향에 대한 귀항의 의지로 승화 발전되어 나타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다시 자연에로의 귀환 의식으로도 표현되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음에 인용된 고원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자.

날마다 마시는 물
오늘은 왜 새 맛일까

고향은
물이 좋지.
고향을
마신건가.

물맛이
고향이라면
산에 가야
맛이지.                                                        (고원  시집 ‘달 둘이 떠서’ 에서 ‘물맛’ 전문)

위의 시를 보면 감각적인 물맛으로부터 시작된 고향의 세게를 물과 산이라는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물을 통해서 표현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향수의 세계를 자연으로의 귀의 의식으로 확대 승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다.  결국 고향에 대한 향수는 우리의 구세계인 원천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인데, 원천 세계의 보다 원초적인 세계는 자연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근원은 신의 세게 아니면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우리의 보다원천적인 세게는 자연이다. 따라서 고향이라고 하는 풍광은 특정한
새롭게 느껴지는 감각적인 물맛에서 시작된 고향에 대한 향수가 산이라고 하는 물의 상대적인 자연물로 표현되고 있어서, 누구나 다 손쉽게 자연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고향하면 바로 뒤따라오는 말이 산천(山川)이 아닌가?
고향을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산과 물을 통해서 밝히고. 그 산과 물을 통해 고향의 보다 근원적인 세계인 자연에 대한 회귀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보다 크고 깉은 고향의 근원이 되는 자연이나 우주로 확대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물과 산이라는 극히 감각적인 자연물에 대한 표현으로 고향의 풍광에 대한 향수를 자연에 대한 회귀의 향수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원 시인의 자연을 통한 향수의 표현은 말년에 들어서서 자꾸 신앙적인 영혼의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명상적 세계로 집약되어 가고 있는 그의 시세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위에서 기술된 것처럼 이민자들의 시문학에서 나타나는 향수의 세계는 종교적인 영혼의 세계나 아니면 우주나 자연의 세계로도 승화되어 나타나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향수가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이민 초기 시문학에는 향수의 세계가 애국 애족 이나 실제 구구이나 광복운동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러한 점은 미래 조국에 대한 귀향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고, 또한 1970년대에 미주 시문학에 나타난 민주화 운동이나(고원 황갑주 등), 오늘날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남북 통일에 대한 꾸준한 표현도, 결국 조국애 대한 관심과 향수에서 빚어진 일종의 변형된 향수 미학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격국 이민자들이 느끼는 향수는 인간의 보다 큰 원초적인 그리움이라 할 수 있고, 구원과 안식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맺음말-
결국 이민이란 구세계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떠나와 사는 삶이어서 구세계와의 인연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고 어떤 형태로든 구세게에 대한 의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어서 모든 이민 시문학의 근간이 되고 있고, 향수의 세계는 이민 시문학이 언제까지고 지니고 가야할 장 대표적인 제재이며 이민문학의 특별한 가치와 특색이 되고 있다.
결국 이민의 삶이란 나그네의 삶이다. 고향이 없는 방랑자나 유랑인이 아닌 고향이 있는 나그네의 삶이다. 고향이 있는 나그네는 결코 고향을 잊지 않는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그 그리움을 바탕으로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찾아가는 고향이나 떠나온 고향은 같은 것이며 그 새로운 고향을 찾아 노력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민의 삶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이민 문학인 것이다.
따라서 이민 문학에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 있기마련이고, 그 변화되어 나타나는 향수의 모습에서 새로운이민 문학의 창조적 미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향수의 미학이 바로 이민문학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되며 특색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님의 일반적인 목적인 새로운 꿈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나. 새로운 세계와 조화되어 나타나는 이중문화의 모습도 결국은 향수의 꿈이 이룩된 것이고 이러한 점은 우리인류문화의 꾸준한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민문학의 시작은 향수이고, 이 향수가 완전하게 배제되어버린 이민문학은 이민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뿌리 없는 집시문학인나 유랑문학으로 전락하여 언젠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뿐인 것이다.
무론 완전한 현지에의 동화나 조화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떠나는 경우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바른 향수나 그리움은 개념은 체념이나 패배가 아닌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이고 도전이며, 또한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귀향의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내 고향과 내 조국의 문화와 언어를 언제까지 잊지 않고 지켜나갈 것이고, 설령 피가 섞이고 다중문화(Multiculturalism) 속으로 섞여 가더라도 결코 국제 미아가 되지 않고 두고온 고향이 있는 한국인으로, 그리고 한국문학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