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하늘에 피는 노을 (수필) / 김영강

2008.09.30 00:57

김영수 조회 수:1142 추천:4



    해묵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이십 년도 더 전에 오려놓은 신문지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눈에 띄어 찾고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미 노오랗게 빛이 바랜 신문 조각은 세월의 흐름으로 온통 얼룩이 져 있었다.  흐르는 세월은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들어 잔잔한 활자들이 개미떼처럼 가물거리며 겨우 시야에 들어왔다.  연도와 날짜 없이 시만 달랑 잘라놓은 것이 아쉽기도 하다.
    1980년쯤이었을까?  이곳 로스안젤레스에서 발간되는 한국일보에 짤막한 시 한편이 실렸었다.  제목은 '고아원 하늘에 피는 노을'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남자아이가 쓴 것이었다.  고아들의 글짓기대회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이었다.  시를 읽고 이렇게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혼자 보기 아까워 복사를 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건네주고 멀리 있는 친구에겐 우편으로 부치기도 했었다.
   내게도 그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더 느꼈는지도 모른다.

   고아원에 아기을 두고
   하늘에 오른 엄마는

   아기 배고플 때쯤
   작은 밥공기라도 돼서
   아기 곁에 내려오고 싶을게다.

   아기가 잠들 때쯤에
   머리맡 베개라도 돼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싶을게다

   그러나
   애를 태워도
   내려오지 못하는 손길
   애를 태워도
   땅에는 와 닿지 않는 목소리

   마음이 타서
   고아원 하늘 위에 피는
   노을이 됐나 봐.


   초등학교 4학년이면 겨우 열 살밖에 안된 아이일 텐데, 어떻게 이리도 엄마의 심정을 잘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직접 체험한 배고픔과 추움과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음으로 표현한 이 시의 구절구절이 아이 자신이 원하는 간절한 소망과도 직결될 수 있으니까.
   고아원 뒷동산에 앉아 저녁노을을 쳐다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오도카니 홀로 앉은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슬프디슬픈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있다.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엄마만 있으면 아이에겐 더 이상의 소원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아들의 모습이 아이에게 겹쳐지더니 아이는 어느새 아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만 그 아이의 엄마가 돼버린 것이다.
   "엄마, 나 배고파. 추워.  엄마, 왜 날 두고 혼자만 갔어."
   이슬이 맺혔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아이는 드디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아이의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신다.
   "엄마, 정말 보고싶어.  보고싶어 죽겠어.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 어딨어?  대답 좀 해 봐.  엄마아...."
   아이의 울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내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엄마 나도 엄마한테 따라갈래... 나 고아원에 있기 싫어.  정날 싫어 싫단말야.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가 있는 하늘 나라에라도 따라가고 싶은 심정으로 이제는 아이가 앙앙 소리를 지르며 운다.  고아원에 있기 싫다는 아이의 말이 절규가 되어 내 귀청을 때린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노을 속에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땅에는 와 닿지 않는 애절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맴돈다.
   "내 아들아,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단다.  네가 어딜 가든 이 엄마는 늘 어와 함께 있단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쳐라.  그리고 마음을 굳게 가져라.  용기를 가지고 밝은 얼굴로 살아야 한다.  너에게는 희망 찬 미래가 있다.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해.  그 꿈은 꼭 이루어진단다. 엄마가 도와줄게. 내 사랑하는 아들아."

   창밖엔 노을이 곱게 물들어 있다.  온갖 빛깔들이 한데 얼려 오묘한 빛으로 채색이 된 저녁노을...,  세상을 덮어주는 비단 이불 같기도 하고 인생을 노래하는 연극무대의 배경 같기도 하다.
   사람들도 살다 보면 나만의 색깔은 세월에 씻겨 온데간데 없어지고 지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루두루 섞여 버리고 만다.  담장 밖에서 부산하게 들려오는 삶의 소리가 하나같이 다 다르듯이, 처음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목청을 돋구다가 차츰차츰 음성을 죽여가며 화음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도 저 노을처럼 아름답게 채색이 되어가는 것일 게다.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이도 지금은 서른 살이 넘은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밀어 닥친다.
   그 동안 그는 어디서 어떻에 살았을까?  공무원이 되었을까?  아니면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을까?  아마 지금쯤은 유명한 시인이 되었을지도 몰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혹시 나쁜 길로 빠졌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아이이고 또 엄마가 늘 마음 속에 함께 있었을 테니 절대로 나쁘게는 되지 않았을 거야.  결혼은 했을까?
   착한 아내와 아이가 하나쯤 딸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입양이라도 되어 같은 미국 땅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보니 한번 만나보고 싶은 충동까지 강하게 밀려왔다.  박사 공부라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욕심도 생겼다.
   청년을 그리는 내 마음에 어른이 된 아들이 어느새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함에 저절로 떠오른 미소와 함께 점점 빨라지는 세월의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청년이 된 그 아이도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선가 저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을 빛에 반사된 청년의 얼굴에 웃음이 기득하다.  고아원 하늘에 핀 노을이 땅에는 내려올 수 없는 애타는 엄마의 마음이었다면, 지금 저 노을은 청년이 된 아들을 바라만 보아도 희열에 찬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이제 그는 슬픔이 기쁨으로 승화된 시를 적는다.
   어머니의 마음 속에, 저 노을 속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