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의 [풍장(風葬) 1]

2008.01.12 00:32

임혜신 조회 수:904 추천:2

시:   풍장(風葬)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거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가을이 깊어갑니다. 마른 잎새들과 싸늘한 바람과 건조한 햇살이 발아래 쓸쓸하게 부서지는 아름답고 슬픈 가을입니다. 이런 때 떠오르는 시집 중 하나가 ‘풍장’입니다. 이 시를 쓴 황동규 시인은 ‘풍장’ 외에도 다수의 시집과 영역시선을 냈고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상, 그리고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한 한국의 대표적 시인입니다. 시집 ‘풍장’은 자유와 초탈에의 해학이 넘실거리는 뛰어난 시집이지만 ‘죽음’이라는 한 가지 주제 아래서 장장 14년에 걸쳐 쓰여졌다는데서 또한 대단히 의미 깊은 역작이지요. 이 시집에는 자연 속에 풍화되는 그러므로 가장 자연스런 죽음인, ‘바람의 장례‘, 를 노래한 7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풍장 1'은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로서 황폐한 자연장례의 미학을 절묘하게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는 것, 소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잘 살았던 사람도 그럭저럭 살았던 사람도 시간이 되고 때가 되면 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겠지요. 죽음이라는 냉정한 결별은 생명들이 각각 치러내야 하는 가장 큰 아픔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장례절차를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겠지요.  장사법(葬事法)에는 땅에 묻는 토장이 있고 불에 태우는 화장이 있고 물에 던지는 수장이 있고 또 그대로 자연 속에 내다버리는 풍장이 있습니다. 각각 의미와 절차가 있겠지만 풍장은 문화적으로 그중 원시적인 장사법이며 또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의 장례인 것입니다. 이 시는 비인간적이며 비문명적이라 할 수 있는 원시장례를 통해 소란한 절차 없이 자연으로 회귀해가는 일의 시원적 자유로움과 순수성을 재음미하게 합니다.
  ‘풍장 1’이 전해주는 죽음이란 세상의 발자국소리에 까무라칠듯 놀라기도 하면서 전세 택시에 실려 무인도로 가는 일이기도 하며, 옷과 구두와 시계라는 이승의 추억과 더불어 편안하게 풍화해 가는 일이기도 하며, 한 생애를 유혹하던 붉은 열매에서 떨어져 바람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며,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마지막까지 더불어 노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사가 일원화된 유희의 순간이 죽음이라면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득도의 순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생의 희로애락을 벗어 던지고 무를 향해 발을 내딛는, 해탈조차 넘어선 탈자아의 자유로운 경지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문명의 무게, 인간의 무게, 인연의 무게, 그 모든 생사에 얽힌 애증의 보따리를 훌훌 벗어버리는 그 무욕의 경지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평생 지니고 살았던 사회적, 문화적, 개인적 짐을 미련 없이 다 던져버리고 한 송이 풀꽃처럼, 한 마리 들짐승처럼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기꺼이 떠나가는 무소유, 무존재의 황홀한 가벼움 때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