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시감상 / 이윤홍 시 '발보다 더 낮게 엎드려'

2005.03.25 07:23

문인귀 조회 수:1592 추천:51


발보다 더 낮게 엎드려
-세족례-

                            이윤홍

어릴 적
내 발 닦는 일은
언제나 엄니의 몫이었다.
노란 양은대야
따스한 기분 좋은 물 속에서
더런 발과 장난치며
연애하며 사랑하다
뽀송뽀송 쨍 마른 수건으로 감싸 내주면
또다시 밖으로만 내달리던
아픈 발 고단한 발

오늘은
아버지가 닦아주신다.
세상 온갖 더럽고 추한 곳만 골라 다닌
똥 묻은 발
닦아주면 또다시 밖으로 나다닐 탕자의 발
아직도 걸어갈 길이 멀어 곤곤(困困)한 발
더럽고 피 흘리는 발 앞에 무릎 꿇고
엄니 손길 잊어버린 불효의 발을
아버지가 닦아주신다
발 보다 더 낮게 엎드려
닦아주신다.


<감상>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발을 닦아주시던 기억이 난다. 시커멓게 때가 낀 더러운 발을 따뜻하게 덥힌 물에 담가놓고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비누칠을 해서 매끄매끈 문지르다가 뽀드등 뽀드등 누런 양은대야가 울리는 소리가 나도록 깨끗이 씻어주셨다. 그리고는 마른 수건으로 감싸 닦아주시던 일이 생각난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고 한다. 제자들의 발보다 더 낮은 자세로 엎드려 더럽고 추하고 피 흘리는 발을, 갈 길이 멀어 곤고(困苦)하기만 한 그 발들을 하나하나 닦아주셨던 것이다.
  부활절을 맞으며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셨다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 예수님이 이제는 나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대야에 물을 담아놓고 낮게 앉으시며 “어서 발을 내 밀라”는 눈짓을 보내시는 모습이다.

  이윤홍시인은 Los Angeles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인데 4년 전 60편의 시를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열심히 좋은 시를 써서 발표하고 있다. 그 후 한국일보 신인상과 한국정부에서 주는 해외동포문학상을 수상했고 창조문학에서도 신인상을 받은바 있다.  지금도 매주 1회씩 새로 쓴 시를 들고 찾아온다. 시와 ‘사람들 동인’이며 미주문협회원이다. 시집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기억」이 있다.
                                                 문인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