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온몸을 투신하는 것이다.

2005.07.10 09:04

이승하 조회 수:1586 추천:99

  아래의 글은 소설가 엄광용 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웹진 사이트 www.aromabooks.com에서 퍼온 글입니다. 여러분 모두 방문해보기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은 온몸을 투신하는 것이다>

  엄 광 용


  얼마 전에 나는 대학 후배인 시인 오정국과 등산을 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 선생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정국은 구상 시인의 수제자이기 때문에 어떤 제자들보다 스승의 가정사를 두루 잘 알고 있었다.

  ……시인 구상이 부인 서영옥을 만난 것은 해방 전 원산에 살 때였다. 한 지인의 소개로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는데, 그 첫 만남이 아주 고전적이었다.

  "참한 여성인데 지금 원산 보건소에 다니고 있다네. 일본에 유학 가서 의대를 나온 이비인후과 의사라네. 내가 그 처녀에게 자네 얘기를 잘 해놓았으니, 보건소 가서 진찰받는 척하며 살짝 한 번 보고 오게나."

  이처럼 중매를 선 사람은 맞선의 자리가 아닌 당사자끼리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어느 날 구상은 원산 보건소에 들러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는 여의사를 눈여겨보았다. 여의사도 진료 중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잘생긴 청년이 누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말 한 마디 나눈 일도 없었고, 의식적으로 눈길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첫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버린 것이었다.

  바로 그 무렵, 구상은 폐에 이상이 생겨 깊은 산속으로 요양을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요양 생활이었다. 어쩌면 병이 악화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깊은 산속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구상이 요양을 하던 곳은 인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며 나무 열매며 칡뿌리로 연명하는 초근목피의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뒤늦게 구상이 폐병에 걸려 요양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서영옥은 다니던 보건소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혼자서 길을 묻고 물어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깊고 깊은 산길을 헤맨 것이었다. 인가가 없으니 제때 끼니를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깊은 산속에서 사흘 밤낮을 헤맨 끝에 그녀는 구상이 살고 있는 초막 앞에 이르러 쓰러지고 말았다. 사랑을 위해 온몸을 투신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병간호하겠다고 찾아간 서영옥은 오히려 그로부터 병간호를 받아야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 평생을 같이하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두 사람은 대구 근처의 왜관에 머물렀다. 아내 서영옥은 그곳에서 '왜관순심의원'이란 개인 병원을 열어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와서는 순천향병원 이비인후과 의사로 근무하며 평생을 의료 생활에 투신하였다.

  구상과 서영옥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구상의 세레명은 '세례자 요한'이었고, 서영옥은 '마리아테레사'였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서 마리아 테레사는 평생을 사랑에 투신한 사람이다. 젊어서 한 남자를 만났을 때 온몸을 투신하여 사랑을 한 것처럼, 결혼 후에는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평생 자신의 몸을 바쳤다.

  순천향병원에서 이비인후과 과장까지 지낸 유능한 의사였지만 서 마리아 테레사는 평생 동안 집안 일로 돈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집안의 생계는 시인 남편의 수입으로 근근이 꾸려나갔다. 이 사실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서 마리아 테레사는 평생 동안 천호동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이 사는 요양소에 거의 월급 전액을 바치다시피 하였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달려가 그들의 병을 보살펴주었다. 왕진을 다닐 때도 택시 요금이 아까워 늘 버스를 타고 다녔다.

  누군가가 왜 힘들게 버스를 타고 다니느냐고 물으면 서 마리아 테레사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고통스럽게 다니며 환자를 돌보아야 그 환자의 병도 잘 낫습니다. 본인이 고통을 알아야 환자의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는 법이지요."

  시인 오정국이 직접 경험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서 마리아 테레사의 근명성을 아주 잘 나타내준다.

  "사모님은 정말 근검절약에 투철한 분이셨지요. 해마다 새해가 되면 우리 식구들이 세배를 가는데, 그때 간혹 사진을 찍어줄 때가 있어요. 그분은 사진을 찍으면 반드시 보내주기는 하는데, 꼭 여러 달 걸려야 우편으로 그 사진을 받을 수 있지요. 사진 한 통을 다 찍어야 필름 현상을 맡기는데, 사모님은 꼭 필요한 사진만 몇 장씩 찍다보니 그 한 통을 다 찍을 때까지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서너 컷 남아 있을 경우 빨리 현상하려고 아무 장면이나 막 찍어서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지요. 그런데 사모님은 필름 한 컷조차 절약한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이야기는 오정국이 어느 날인가 스승 구상 선생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구상 선생의 목소리로 표현하면 이렇다.

  "그 사람이 한 번은 내게 30만 원을 갖다 주더군. 생전 안 하던 일을 해서 내가 참 이상하게 생각했지. 허헛, 참! 사람이 죽으려면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한다더니만, 그러고 나서 몇 개월 후에 저 세상으로 갔다네."

  가톨릭에서는 숨어서 소문 안 내고 이웃을 돕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은수자(隱修者)'라고 한다. 서 마리아 테레사는 그런 고결한 정신을 가진 은수자였다.



  여러분, 잘 읽어보셨습니까?
  저도 사모님이 찍어주신 사진을 한 장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상 선생님이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의도 자택으로 문안을 간 적이 있습니다. 대낮에 선글라스를 낀 스승과 함께 찍은 귀한 사진,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날, 사모님이 저희 집으로 부쳐주셨습니다. 사진을 받고 큰 기쁨과 감동을 받았는데, 저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었군요.
  얼마 전 구상 선생님 1주기를 맞아 추모 문집 발간 기념식이 서울 YMCA에서 있었습니다. 제게 시인의 도리와 인간의 길을 가르쳐주신 구상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