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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웅 시집 {국경 간이역에서} 출간

 

배정웅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경북대학교 정치학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재학시 ‘개안’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보병장교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김춘수 시인의 서문으로 {사이공 서북방 15마일}(1968년발간)을 발간했고, 1970년 {현대문학}으로 다시 등단했다(파아 이원섭 추천). 시집으로 {타우위의 현장}(65년 신세훈과 함께), {사이공 서북방 15마일}(68년), {길어올린 바람}(77년), {강과 바람과 산}(78년 신세훈, 심상훈과 함께), {바람아 바람아}(81년), {새들은 페루에서 울지 않았다}(99년),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07년), 미주 백주년 기념 ‘한민문학대사전’의 대표편찬위원과 수년간 {미주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시전문지 {미주시학}의 발행인, 재미시인협회 회장, 해외문학대상(해외문학사), 해외한국문학상(한국문인협회), 민토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배 정웅 시인의 {국경 간이역에서}는 이주와 이산의 물결이 쉼 없이 흐르는 곳이다. 배 정웅은 이민자 혹은 망명자의 서러움과 그리움을 그가 디디고 서있는 땅의 경험과 모국의 문화적 기억을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세계를 구성한다.「에우칼립또의 춤」에서 탱고의 비유는 유칼립투스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하체는 거의 고정시킨 채 용이 될려다 만 이무기처럼/ 천의무봉의 상체로만/ 기의하게 흔들며 추는 춤의 달인”이라는 시행에서 미완의 꿈을 안고 사는 이무기가 등장한다. 왜 나무가 이무기와 같은가? 뿌리를 한 곳에 고정하고 상체만 흔들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이민, 혹은 이주를 ‘뿌리 뽑힘’으로 표현하는 통상적 비유를 떠올려보라. 인용된 위 시행에서 나무의 하체는 “거의” 고정되어있다. 즉 언제든지 뿌리 뽑힐 가능성이 있다. 멈추어있는 것들도 방랑의, 유목의, 혹은 다른 세상으로의 꿈을 간직할 수 있다. 완전히 고정된 것은 없다. 나무들처럼 “이 세상의 목숨 있는 것들”은 모두 한 곳에 “거의” 고정된 상태로 살아가다가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뿌리 뽑힐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주제가 마지막 행의 “춤바람”이란 한국적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방식은 배 정웅 시답다. 또 다른 시「베니강에서」에서도 인디오들이 구렁이를 잡았는데 배를 갈라보니 어린 소녀가 들어있었다는 전설 같은 삽화를 전하면서 시인은 한국의 단군설화를 차용해서 현재의 상태를 탈피 혹은 환골탈태하고 싶은, “이 세상 목숨 있는 것들의/ 未完의 꿈”(16-17행)을 상상한다. 시인은 꿈꾸기의 불가피성과 미완성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저 ‘아메리칸 드림’조차 이 본질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지금도 계속되는 밀려드는 이민자들의 ‘아메리카’를 향한 꿈꾸기에 각인된 역설적 현실은「자바시장의 비둘기」라는 시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시는 외다리 비둘기를 바라보는 노동으로 지친 미싱사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다른’ 얼굴을 포착해서 ‘진짜’를 보여준다. 콜럼버스 항해와 우연한 발견의 역사,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불법이민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노동력시장의 아이러니가 자바시장의 외다리 비둘기의 상징에 각인된다. 미국자본주의의 중심인 엘에이에서 마주친 ‘아메리카’의 민낯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이질적 정체성들로 가득한 현실이며 미완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이방(異邦)에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이민생활의 하루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배 정웅의 시는 낯설지만 생동감 있고 문화적으로 소화력이 강하며 모국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동시에 이질적 언어성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된 ‘시적 아메리카’를 만들어낸다. 이곳은 누군가의 손이 그 속의 “자궁을 열어/ 대담하게 언어의 처녀막을 건드”려서, 수록된 시편들에 돋아난 “불행의 가시에/ 몸과 마음이 내내 찔려서/ 낭자한 피같은 밑줄의 흔적”(「시인에게」)을 남기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가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세계이다.

 

아르헨티나 국경으로 가는 협궤열차가

정말 *노새의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서다가 가다가 서다가 가다가

조랑말이랑 망아지랑 들개 떼가 철로를 막아서면

체게바라 모자를 삐뚜름히 쓴 늙은 차장이 나서서

워이워이 쫓고

이름 모를 간이역에선 잡상인들이

마적 떼처럼 핏빛 화톳불을 피워놓았다

시든 패랭이꽃을 머리에 꽂고 귀고리가 별처럼 흔들리는

눈 큰 행상 소녀 하나가 차창 틈으로 손을 디밀고

한사코 조른다

이름이 실비나라고 했다

그때는 내 머릿속에 이름이 똑같은

집에 두고 온 어린 딸아이가

아련아련 생각이 나서

행상 소녀의 때절은 손을 슬며시 쥐어 보았다

마른 *꼬까닢이 내 손안에서 퍼석거렸다

사람은 온기라고는 한 점 없었다.

 

*노새의 마음 : 白石의 시 ‘광원’에서 차용

*꼬까닢 : 코카이나의 원료인 나무 잎사귀

----[국경 간이역에서] 전문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창틈으로 빼꿈히 건너다 보이는

*에우깔립또 한 그루

바람이 불 적마다

아, 저건 살사춤이다

저건 *메링게 아니 꿈비아

저건 저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능수능란하게 추는 탱고다

하체는 거의 고정시킨 채 용이 될려다 만 이무기처럼

천의무봉의 상체로만

기이하게 흔들며 추는 춤의 달인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면

그 어둠의 손수건 자락으로

대낮에 흘린 땀을 닦으며

내일 또 다시 불어올 만만개 바람의 손을 잡아

껴안고 추스르고 어우러지고 보듬어

어떤 형식의 춤을 한바탕 추어 볼 것인가

그 리허설을 준비하느라 어떤 날은

어쩌다 관객이 된 한 생애 고요와 몽환의 깊은 잠 속

나까지 흔들어 깨우고

나까지 아닌 밤중에 춤바람 나게 하느니

----[에우깔립또의 춤] 전문

 

-----배정웅 시집 {국경 간이역에서}, 도서출판 지혜,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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