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같은 사람 / 이영숙

2010.02.08 08:28

미문이 조회 수:684 추천:3

비가 왔다. 켈리포니아가 많이 가물었다고 염려가 많았는데 비가 와서 좋았다. 물을 아껴야 한다고 모든 가정의 정원에 물을 주는 것도 일주일에 두 번만 주기로 시에서 정했다고 했다. 일 년여 전의 미주의 어느 일간지에 가뭄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인공 비를 계획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인공 비를 계획하게 되었을까. 내가 봐도 그동안 비가 너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비가 오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다보니 비가 온 날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켈리포니아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비가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니 비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따로 설명이 필요도 없을 게다. 나뿐이 아닌 것 같다. 이곳의 사람들은 비가 올 때에 우산을 쓰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대부분이 비를 그냥 맞고 다닌다. 내가 속해있는, 백인들이 90%인 어느 합창단에서 지휘자가 연습 중에 한 이야기다. 어느 곳에서 합창단 연습을 해야 하는데 비가 온 어느 날 많은 단원들이 지각을 했더란다. 나중에 그 사연을 들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비를 즐기느라 늦었다고 말했단다. 모두들 와~ 웃으며 하는 말이 “이곳이 바로 캘리포니아다”라는 것이었다. 어제, 드디어 비가 왔다.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를 보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온 것은 아니다. 기상대의 말은 ‘폭우’가 올 것이라 해서 오랜만에 폭우를 구경하게 된 줄로 알고 기다렸는데 기대를 벗어났다. 그러나 약간의 비도 안 온 것 보다는 나름대로 위로가 되었다. 비가 오기에 우리 집에서 기르는 화초를 밖에다 내놓았다. 비를 먹은 화초들은 다음날 보니 훌쩍 자라있었다. 싱싱한 잎에선 윤기가 나고 활짝 핀 모습이 생기가 넘쳐 보인다. 어떻게 저렇게나 생기발랄하게 자랐을까. 화들짝 놀란 듯 쑥 자라나 있다. 참 신기하다. 보기엔 똑 같은 물인데 수돗물을 줬을 때는 그저 그만하던 것들이 비를 맞고 난 다음은 이렇게 다르게 자라있으니. 어느 분의 글에서처럼 ‘비는 생명’인가보다. 보통 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명이 비에는 있다. 봄에 비가 한차례 오고 난 다음에는 겨우내 죽었던 나무들에서 싹이 움트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신비롭다. 슬쩍 스치고 지나가는 빗물의 작은 손길에 죽었던 나무들이 생명을 얻으니. 참 신기하다. 비는 창조주가 세상에 보내신 정말 멋진 선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다 똑같이 보이는 사람. 그저 흔하게 널려있는 남자, 혹은 여자. 그러나 깊이 알고 보면 다 다르다. 남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있다. 움츠려, 매사에 자신을 잃고 쓰러져 가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 지나가듯 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자신감을 얻게 하고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주는 사람이 있다.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나듯 숨겨진 생명력을 가진 사람. 삶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사람.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 뭐라고 특별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저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 입을 다물고 있어도 곁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그런 사람. 빗물 같은 사람이 있다. 그가 여자이든 남자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