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오는 밤 / 홍 영순

2010.06.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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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수민이 이불을 다독다독 눌러주며 말했어요. “밤이 되니 눈이 많이 오는구나. 춥지 않니?” “춥지 않아요.” “수민아, 내가 너 유치원 데리고 다닌 것 생각나니?” “생각나요. 할머니랑 찍은 사진도 많아요.” "넌 어려서부터 착하고 똑똑했지. 그래서 사람들이 네가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칭찬했어.” “지금은요?” “지금도 마찬가지야. 넌 착하고 의리 있고 재주도 많잖아. 할머니는 네가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걸 믿는다.” “.......” 창문 밖 목련 나뭇가지에 눈 내리는 소리가 사르륵 사르륵 들렸어요. “할머니!” 잠든 줄 알았는데 수민이가 할머니를 불렀어요. “저 여기서 할머니랑 같이 살면 안 돼요?” “네가 할머니랑 살면 난 좋지!” “정말 그래도 돼요?” “너 학교를 옮기고 싶은 거니?” “예, 이 동네에 있는 학교로 옮기고 싶어요. 할머니가 아빠엄마한테 말해주실 수 있어요?” 수민이가 할머니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어요. “네가 하루 더 생각해보고 그래도 할머니랑 살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할머니 꼭 약속 지키실 거죠?” “그래.” 다시 목련나무 잔가지에 눈 내리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렸어요. “수민아, 자니?” “아뇨.” “그럼 할머니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예.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세요.” “아주 오래전, 할머니가 5학년 때 이었으니까 너만 했을 때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늘 설악산을 보며 학교에 다녔다. 비록 산골이긴 했지만 우리들은 설악산만큼이나 큰 꿈들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때 우리 마을에 6학년인 박진수와 이대복이가 있었어. 그들은 단짝 친구였는데 학교나 마을에서도 모두 칭찬하는 모범생들이었어. 그런데 그 애들은 너무 가난했어. 그 아이들 아버지는 탄광 광부였는데 탄광에 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나셨거든. 그래서 그 애들은 학교가 끝나면 양계장에 가서 일했지.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어. 길 가던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양계장에 닭들도 얼어 죽기도 하고 알을 잘 안 낳는 거야. 결국 주인은 진수와 대복이한테 일을 그만 두라고 했어. 두 친구가 며칠을 좇아가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사정을 했지만 소용없었어. 중학교 등록마감이 닷새밖에 안 남자 대복이가 진수를 찾아와서 말했다. “양계장에 가서 닭 몇 마리만 갖다 팔면 모자라는 입학금이 될 텐데...” “도둑질을 하자고?” “나중에 꼭 갚으면 되지. 몇 배로 꼭 갚으면 되잖아.” “그래도 어떻게 도둑질을 하니?” “우리가 공부를 못하면 가난한 사람들 돕겠다는 우리들의 꿈도 끝이잖아.” "……." 개울물이 얼어 쩡쩡 갈라지는 매섭게 추운 밤이었어. 진수와 대복이가 양계장에 갔지만 차마 도둑질을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헛간에 들어가 마른 풀을 조금 놓고 불을 붙여 언 손을 녹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면서 불이 풀 더미로 옮겼어. 진수와 대복이가 불을 끄려고 아무리 애써도 불은 무섭게 번졌지. 불길은 헛간 옆에 있는 닭장으로 번져 닭들이 불에 타죽었다. 개 짖는 소리에 주인 부부가 뛰어나왔을 때는 헛간과 양계장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어. "불이야! 불이야!" 동네 사람들은 "불이야" 소리에 다들 뛰어나왔어. 우리 집 식구들이 뛰어나가고 나도 나갔지.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서 불을 껐어. 그런데 웬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부는지 마치 도깨비가 불을 옮기듯이 양계장은 물론이고 집 까지 다 타버렸다. 그런데 진짜 큰일은 방에서 자던 양계장 집 네 살짜리 외동딸이 불길을 피하지 못한 거야. 경찰이 나와 조사를 했고, 진수와 대복이는 소년원에 있게 되었다. 죽고 싶을 만큼 속상하고 슬펐겠지. 얼마 후, 진수와 대복이가 소년원에서 나왔어. 그러나 예전에 자기들이 살던 그런 고향이 아닌 것 같았단다. 모두가 자기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어. 그 애들은 중학교도 못가고 사람들 눈을 피해 방에만 처박혀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대복이가 진수를 찾아와 울며 말했어. “난 도저히 여기서 이렇게 못 살겠다.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어디로 가?” “우리는 이제 전과자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새롭게 시작할거야. 같이 가자.” “여기서 잘하자. 우리가 정말 잘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용서 할 거야.” “아니, 이제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우리를 좋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 “대복아, 우리는 아버지가 없고 엄마만 있잖아. 우리가 엄마를 도와드려야지.” “엄마는 내가 잘되면 모시러 올 거야.” 결국 며칠 후 대복이는 고향을 떠났고 진수는 남기로 했어. “진수야. 잘 있어.” 홀어머니만 남겨놓고 몰래 떠나는 대복이는 울고 또 울었어. 진수도 울며 동구 밖가지 따라갔어. “대복아, 가는 대로 꼭 연락해.” “......” “대복아, 꼭 다시 돌아와야 해. 기다릴게.” 그리고, 43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갔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그 마을에 나타났어.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도리로 코까지 가려서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단다. 그 할아버지는 마을놀이터가 있는 공원에 와서 두리번거리고 있었어. “여기가 맞는데...... 여기가 집이였는데…….” 공원을 이리 저리 돌아보던 할아버지가 커다란 은행나무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아, 여기에 아직도 내 이름이 있구나!” 그 은행나무에는 희미해지긴 했지만 대복이가 어렸을 때 새겨놓은 ‘이대복’ 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더 놀란 건, 그 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대복공원> 이라고 쓰여 있었어. 공원이름을 읽던 할아버지가 은행나무에 기대어 울기 시작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서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느라 그 할아버지가 거기 있는지도 몰랐지. 한참이나 울던 할아버지가 눈을 꼭꼭 뭉쳐서 굴리기 시작 했어. 눈 덩이가 커질수록 할아버지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단다. 잠시 후 할아버지 앞에는 커다란 눈사람이 서 있었어. 그때야 아이들이 눈사람 곁으로 모여들었지. 할아버지는 다시 모자를 깊이 눌러 쓰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단다. “너희들 박 진수라는 사람이 어디 사는지 아니?”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흔드는 거야. “나만큼 늙은 할아버지란다. 아직도 여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산골 마을에 한집 두 집 불이 켜졌어. 눈 오는 날 설악산자락에 작은 마을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단다. “옛날에 박 진수는 언덕 위에 살았었는데 많이 변하여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구나.” 그때 작은 남자아이가 장갑 낀 손으로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어. “저 언덕 위에 천사의 집이 있는데요.” 그러자 다른 아이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어. “이 할아버지는 박 진수 할아버지를 찾고 계시잖아.” 그때 좀 큰아이가 추위에 떨고 있는 할아버지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말했어. “천사 할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여기 사셨으니까 박 진수 할아버지를 아실지 몰라요. 가서 알아보세요. 거기 가시면 오늘 밤 잠도 자고 먹을 수도 있어요." "거긴 여관도 있니?" "아뇨. 누구든지 갈 곳이 없으면 거기서 살 수 있어요." “누구든지?” “예, 아픈 사람도 있고, 거지도 있고 그리고 고아도 있고요.” "천사할아버지는 집 없는 강아지, 고양이, 새들도 다 데리고 살아요." 아이들은 마치 자기 할아버지를 자랑하듯이 신나게 한마디씩 했단다. "그 할아버지 이름이 천사니?" 할아버지가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말했어. "그건 몰라요. 이 마을 사람들은 그냥 천사라고 불러요." 날이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집으로 가고 놀이터에는 할아버지와 눈사람만 남았지. 한참을 빈 공원에 서있던 할아버지가 언덕으로 향했어. 언덕에 올라선 할아버지가 어느 집 앞에 발을 멈추며 중얼거렸어. ‘아, 여기가 맞구나! 옛날 진수네 집이 그대로 있어!’ 대복할아버지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집 주인이 나왔어. 집 주인은 문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며 말했어. “... 이대복? 대복이가 맞지?” “박진수? 자네가 진수지?” 두 할아버지는 서로 와락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저녁을 먹은 후, 박진수 할아버지가 이대복 할아버지 손을 잡고 말했어. “왜 이제야 왔나? 내가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데.” “날 기다렸다고?” “자 이리 와보게. 난 오랫동안 자네 방을 준비 해놓고 있었네.” 박진수 할아버지가 안내한 방에는 이대복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쓰던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어릴 때의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던 대복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 “박진수, 정말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자네가 꼭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거든.” "우리 어머니는?" "자네 어머니는 내가 모시고 있었네. 자네를 기다리며 집과 텃밭을 마을 공원으로 기증하셨지. 공원 이름은 <대복공원>이야." "대복공원은 아름답더군! 어머니는 언제 세상 떠나셨나?" "대복공원을 봤나?” “오다가 우리 집이 있던 곳에 갔더니 공원이 되었더군.” “그래 거기야. 그 공원 위쪽으로 자네 어머님 산소가 있는데 그건 못 봤나?" "못 봤는데." "내일 같이 가서 보세. 82세로 3년 전에 자네 이름을 부르며 가셨어." "어머니가...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가셨어? 흐흐흑 ......" "진작오지 그랬어. 얼마나 자네를 기다리셨는데." “내가 잘못 생각 한 거야. 전과자란 꼬리표는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데 도망 다닌다고 없어지나?” “많이 힘들었겠네. 진작 왔으면 좋았을 걸.” “난 고향사람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어.” “고향사람들은 늘 자네를 걱정하며 기다렸어.” “정말 나를 기다렸어?” “그럼, 얼마나 기다렸다고.” “그럼 날 용서 한 건가?” “처음부터 용서했던 거야. 자 밀린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편히 쉬게나. 내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자네를 진심으로 반길 걸세.” “자네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난 자네가 떠난 후 어렵게 공부를 했어. 내 죄를 용서 받는 길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생이 되었어. 그래서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장학생으로 공부를 했어.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어쩌다 집 없는 사람들과 살게 되었네.” "자네가 옳았어. 마음에 있는 전과자 꼬리표는 훌륭하게 살면 저절로 떨어지는 거였어." "피곤 할 텐데 그만 자게." 이대복 할아버지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부신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단다. 커튼을 열자 눈 덮인 설악산 대청봉이 아침햇살에 반짝였어.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에 그동안 난 왜 못 돌아왔을까? 아, 얼마나 아름다운 설악산인가!” 이대복 할아버지가 눈 덮인 설악산을 보며 감동하고 있을 때 박진수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어. “자, 아침을 먹고 날 좀 도와주겠나?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어린아이가 있다네. 가서 아이를 데려와야겠는데 찻길이 눈으로 막혔어. 자네가 그 아이를 데려 올 수 있겠나?” “가고말고! 내가 가겠네!” 이대복 할아버지는 경찰서로 뛰기 시작했지. 반짝이는 눈길을 뛰는 할아버지 얼굴은 햇빛처럼 환했단다. 전날 밤 추위에 떨고 있던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민이가 말했습니다. “그 후로 이대복 할아버지도 마음속에 있던 전과자란 꼬리표가 없어졌겠지요?” "그럼. 지금은 이대복 할아버지도 <천사의 집>에서 박진수 할아버지랑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 "처음부터 박진수 할아버지처럼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잠시 조용히 생각에 잠겼던 수민이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엄마가 전화로 내가 싸운 이야기 했어요?” “그래, 네가 지금 많이 속상할거라고 하더라.” “처음부터 그 애들과 싸우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 애들이 공부 못하는 진우를 왕따 시키고 바보라고 놀렸어요.” “그래서 진우를 도와준다는 게 패싸움이 되었구나.” “그런데 한 아이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어요.” “얼마나 다쳤는데?” “머리를 다섯 바늘이나 꿰맸어요.” “어유, 정말 속상했겠구나!” “패싸움 했다고 학교에 소문이 쫙 났고 일주일이나 정학 당했어요.” “저런! 좋은 일 하려다 나쁜 아이 취급을 받게 됐구나! 그래서 다신 그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니?” “제가 학교에 안가면 불량학생 꼬리표가 평생 저를 따라다닐 거예요. 며칠만 쉬었다 돌아가서 더 착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될 거예요. 그래야 이대복 할아버지처럼 안 살고 박 진수 할아버지처럼 살 수 있지요.” “그 애들이 다시 진우나 너를 왕따 시키고 괴롭히면 어떻게 할래?” “선생님과 엄마아빠와 의논하겠어요. 절대로 그 애들을 미워하거나 싸우지 않겠어요.” “수민아, 역시 넌 훌륭하구나. 이왕 왔으니 할머니랑 지내다 개학할 때 가라.” “아뇨! 일주일만 할머니랑 있다 갈게요. 빨리 가서 도서관에도 가고 열심히 공부 해야지요.” 수민이와 할머니가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동안, 뜰 안 가득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