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한번째 편지 / 김영강

2010.08.02 10:02

미문이 조회 수:767 추천:1

초대장과 함께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옥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김동추였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사십 년 전에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만 육십, 회갑이 되면 당신을 꼭 만나리라고 굳게 다짐한 그 맹세입니다. 다가오는 3월 5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초대장을 동봉하오니 꼭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줄 안 되는 간단명료한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 끝에는 <1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 사십 년 만에 받는 백한 번째 편지였다. 육십 회 생일잔치가 열리는 장소는 엘에이 올림픽 가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봉투에 명기된 발신처는 이곳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진 산 마리노였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옥희 역시 회갑인 나이에 생긴 일이다. 김동추가 미국에 살고 있단 말인가? 대학 시절, 옥희에게 백통의 편지를 보낸 김동추, 그는 애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만난 적이라고는 서너 번도 안 되었다. 그것도 다시는 편지하지 말라는 그녀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냥 혼자서 편지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난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편지를 읽는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냥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편지가 배달됐을 때, 하필이면 옥희는 외출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항상 골프장으로 향하는 남편인데 그날은 예약이 안 됐다고 집에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온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라 옥희는 아침 열 시쯤에 집을 나섰고, 친구랑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급한 일정 때문에 점심만 먹고 바로 헤어져 집엘 들어서는데 남편이 편지를 내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생각조차 안 해본 사람인데도 김동추의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남편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빨리 뜯어보라고 재촉했다. 편지를 같이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늘을 봐도 한점 부끄럼 없는 그녀인지라 자신 있게 봉투를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김동추? 누구야? 오동추가 아니고 김동추야?” 남편은 마구잡이로 봉투 한 귀퉁이를 북 찢었다. “왜 있잖아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만날 편지했다는 사람. 언젠가 내가 얘기한 적 있죠?” 이름도 잊어버린 척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치미를 뚝 딸 걸, 그만 진실이 툭 튀어 나와버렸다. “아! 당신 옛날 애인? 그 편지 백 토오옹...” 편지 백통이라는 뒷말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실실 웃었지만 마디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였다. 갑자기 옥희의 언성이 높아졌다. “옛날 애인은 무슨 옛날 애인이야?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신혼 초에 남편이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 등굣길에서 매일 마주치던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말도 한번 못 붙여 보고 혼자 가슴을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남편의 그 마음이 참 아름답고 측은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김동추 생각이 났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너무 쌀쌀맞게 굴어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했다. “아니, 아무 반응이 없는 여자한테 미쳤다고 편지를 백통씩이나 보내? 자기가 꼬리를 쳤으니까 그렇지.” 그날 밤, 옥희는 울고불고 소동을 벌였다. 옥희는 “날 의심하면 자기랑 살 수가 없으니 이혼하자”고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엔 남편이 싹싹 빌어 무마가 됐었다. <중략> 초청장 받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술술 잘 이어졌다. 김동추와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친구가 중간에서 거들었다. “옥희가 초청장 받고 지금, 그날만 손꼽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미리 만났네요.” 보통 때 같으면 펄쩍 뛸 옥희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가만있었다. 그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또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입담 좋은 친구가 있어 얘기가 더 잘 풀렸다. 김동추는 독신이었다. 육십이 되도록 결혼을 한번도 안 한 것이었다. 옥희의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김동추에게 미안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그때는 참 미안했단 애길 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동추 씨. 동추 씨”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거기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가야죠.”하는 소리와 함께 웬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고 형상만 보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뮤직 센터가 쩡쩡 울렸다. 옥희의 침대도 흔들거렸다. 사십 년 동안에 한번도 김동추 꿈을 꾼 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 매일 생각을 하다 보니 꿈에까지 그가 나타난 것 같았다. 꿈을 꾼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통 받았다. 발신인은 김동미였다. 아니, 김동미가 웬일로? 동시에 발신처로 눈길을 주니 김동추가 보낸 편지와 같은 주소였다. 순간, 강한 의문 하나가 번개처럼 번쩍하며 뇌리를 스쳤다. 초대장을 받은 후부터 무슨 까닭인지 김동미가 김동추의 얼굴에 겹쳐져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었다. 봉투를 뜯는 옥희의 손이 떨렸다. 회갑연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소되었다는 간단한 공문 편지와 함께 김동미가 친필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옥희야,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려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어울리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이구나. 네가 깜짝 놀랄 소식 한 가지 전한다. 나, 동추씨랑 결혼했어. 우리가 먼 친척간인 거, 너도 알지? 그래서 집안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결국은 단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간의 사정이 아주 복잡했어.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할 얘기가 정말로 너무너무 많아. 옥희야, 내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너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면 너는 믿을 수 있겠니? 진심이야. 나는 동추 씨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어. 슬픔, 아픔... 그리고 그의 지병까지도. 동추 씨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회갑연이 취소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주 좋아 의사의 허락 하에 추진한 일이었는데 말야. 지금 병원에 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꼭 와 주리라 믿는다.’ 저 만치서 스무 살 적의 김동추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김동미가 슬픈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옥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휴우하고 내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