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는 秘訣

2015.07.05 06:29

son,yongsang 조회 수:375

 

 ‘겨울을 나는 秘訣

 

어느 날 나는 갑자기 그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어요. 그것은 텅 빈 도서관 건물을 등지고 땅거미 진 교정을 지나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내가 그때 그녀를 떠올리게 되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날은 몹시도 추웠던 날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다가 분분히 날리는 때 이른 눈발이 코 잔등에서 녹아내리며 얼마 전에 운동장에 깔렸던 후추가루 탄인가 하는 것의 매캐한 냄새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는지 바람이 불적마다 시시로 나의 눈을 아리게 하던, 그렇게 스산스러운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나 봐요.

 

나는 잔뜩 내려앉은 하늘을 우울하게 바라보며 손끝으로 안경을 치켜 올렸었죠. 그러면서 휑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어요. 나는 걸으면서 생각했었어요. 누군가 본관 건물의 강의실 창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하고.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었지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바바리 코오트의 깃을 바싹 올리고 유연한 포오즈를 취하고 싶어졌어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우스운 짓거리밖에 될 수 없겠지만 사실 나는 그날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울고 말았을 거예요.

 

그날, 다시 열렸던 도서관은 느지막이 내가 들어갔을 때까지도 사람이라곤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밖엔 앉아있지 않았어요. 그래도 일찍부터 와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뿐 누구 하나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더랬어요. 그들은 모두가 고시공부를 하는 안면 있는 친구들이었어요.

실내에는 월동 준비로 설치해 놓았던 난로에 조개탄이 지펴져 있었어요. 나는 책가방을 빈자리에 풀썩 던지고는 슬금슬금 그 옆으로 다가가 담배를 뽑아 물었지요. 그리고는 그들처럼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마침 올해 들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후르륵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쿨럭쿨럭 일부러 기침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흩어지지도 않았어요.

 

나는 버릇처럼 발끝으로 걸어 신문 열람실로 들어갔어요. 일간신문을 건성건성 훑어보며 나는 비죽비죽 웃음을 내뱉었지요. 고바우가, 두꺼비가 그랬고 야로씨, 나원참 여사, 왈순아지매 등 모두가 그랬지만 마음 한 구석엔 그저 웃어버릴 수만 없는 뭔가가 치밀어 올랐어요.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연재소설로 눈을 돌렸지요.

 

대재벌의 아들과 무용수와의 정사가 질펀하게 지면을 깔고 있었고 40대의 장년과 술 취한 경아가 거울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고 또 누구와 누구가 술집에서, 호텔에서, 침실에서 모두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처절한 투쟁으로 버티고 있었어요. 비록 그들의 생활은 우울한 것이라 해도 그 정사의 순간만은 모두가 행복한 것이었어요. 나는 문득 느껴지는 성욕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름으로써, 그것으로 나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고 생각하였지만 가슴에 맺힌 울울함은 조금도 없어지지 않더군요.

 

나는 또다시 발끝걸음으로 걸어 자리로 돌아와 앉았어요.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눈을 어릿하게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돌연히 외부의 빛이 차단된 나의 망막 속에는 비누 거품 같은 무수한 방울들이 난무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 속에서 그 무수한 원 속마다에서 또 하나의 나를 보았어요. 그 속의 나는 모두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은 첫눈이 분분하게 흩날리는 음산한 날씨 탓도 아니었고 만화나 연재소설 탓만도 더욱 아니었어요. 좌우간 원인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울울함 때문에 나는 평온한 주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때문에 나는 그날 공부라고는 한 자도 하지 못하고 말았죠.

 

창밖엔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어요. 나는 망연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펴놓기만 했던 책을 꾸려 넣고 도서관을 나서고 말았어요. 쉬익- 비 새듯이 바람이 불었어요. 나는 코트 자락을 더욱 여미며 의연해야지! 의연해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대운동장을 막 벗어나다가 엉뚱하게도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진 것이어요.

 

그녀는 만화가게 주인이었어요. 그녀의 만화 가게는 내가 단골로 들리곤 하는 우리 집에서 꽤나 떨어진 네거리의 포장마차집의 옆에 있었어요. 아직 새파란 처녀가 왜 만화방을 차렸는지 그 이유 같은 것은 아직 듣지도 못했고 내가 알바도 사실은 없었지만, 우선 그녀는 생긴 용모나 마음 쓰임새가 밉상이 아니었어요. 만약 지독하게 못생기고 심술궂기까지 했다면 그 지겨운 기억 외엔 결코 보고 싶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기에 가끔 생각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어요.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가을도 중반에 접어든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 나는 마구 술렁대는 학교에서 같이 술렁거리고 있다가 결국엔 침울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학우들이랑 어울려 학교 앞 대포집에서 무슨 원수나 진 것처럼 탁배기를 퍼 마시고 2차로 니나노집을 찾아가 싸이싸이 아싸라디아 맨소리다마, 꿍작꿍작, 술만 먹고 돈만 내라를 미친놈처럼 불러 제끼며 작부를 끼고 희롱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도 취한 것은 아니었어요. 마구 지랄발광을 하고 싶은 가슴은 아무리 술을 처먹고 작부의 치마 밑을 더듬어 보아도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우리는 신발 끈도 매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퉤퉤 침을 뱉어가며 아무데나 좔좔 오줌을 깔기기도 했어요. 그리고는 마지막 같은 참담한 기분으로 서로 빠이빠이 악수를 나누고 모두들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네거리에서 버스를 내린 나는 습관처럼 나의 단골인 포장마차집의 휘장을 들치고 들어갔어요. 그 속에는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훈훈한 무엇이 있었어요. 그곳엔 솥 속에서 설설 끓고 있는 우동국물의 구수한 김의 탓만도 아닌 그러한 정겨움이 있었어요.

 

대포 한 잔에 오뎅 한 꼬치를 먹은 나는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어요. 바깥에는 으스스한 바람이 일고 있었고 메마른 몇 잎 낙엽이 또르르 굴러다니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느끼며 문득 늬들 마음 내 아느니라하고 노래한 돌아가신 조지훈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그의 시() ‘落花를 중얼중얼 읊조리기 시작했어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나는 마구 울고 싶어졌어요. 그때 그녀가 나타났어요.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고 있었어요. 판자 문 두 개 중 한 개를 끼어 닫고 나머지 한 개를 문지방에 맞추고 있었는데 그 문은 이가 잘 맞지 않아 그녀는 애를 쓰고 있었어요. 나는 무심결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판자문의 이를 맞추어 주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방긋이 웃으며 목례를 보냈어요. 나는 그녀의 그러한 웃음에 영문 모르게 와락 그녀가 좋아졌었지요.

 

그렇게 그녀와 나는 알게 되었어요. 그 후부터 나는 그녀의 가게로 종종 놀러가곤 하였지요. 주로 포장마차 집에서 대포 한 잔을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는데 그녀는 언제나 뜨개질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늘 FM방송의 클래식을 듣고 있었어요. 나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면 별 흥미도 없는 만화책을 건성건성 훑어보면서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어요.

 

항상 똑같은 만남이고 또 그렇게 띄엄띄엄 만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누구도 자기의 주변 예기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어요. 마치 서로 부담스러운 얘기는 하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가끔 보는 것으로 궁금증을 푸는 것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커피 사드릴까요? 하고 물어왔어요. 나는 커피보다 대포를 사달라고 말을 받았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선선이 응낙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금고를 열고 동전을 한 주먹이나 움켜쥐고는 천천히 일어섰어요.

 

포장마차 집에서 그녀는 나의 술 마시는 모습을 구경하듯 바라보며 맛있어요, 그거? 하고 묻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싱긋 웃어주었고 그녀는 술판 위에다 쥐고 있던 동전을 나의 술값만큼 또박또박 세어서 올려놓고는 했어요. 나는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얹어지는 동전을 보고 있노라면 어떨 때는 아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 술을 얻어먹고 있는 내가 꼭 개미귀신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녀의 조그만 손아귀 속에서 잘랑잘랑 쏟아지는 그 동전의 쇳소리는 온 몸이 근지러울 정도로 나를 들뜨게 하곤 했지요. 참 이상한 일이었죠. 어쨌든 나는 엉뚱하게도 그것에 맛을 들여 그녀네 가게를 들리기만 하면 대포를 사달라고 조르고는 했죠.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였어요. 나는 그녀에게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밤늦게 술이 억병으로 취한 내가 이미 닫힌 그녀네 가게 문을 마구 두들기고 들어가서는 술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그만 가게 바닥이 질펀하도록 오물을 토해놓은 일이죠. 그리고는 인사불성이 되어 난로 곁 긴 의자에서 잠이 들어버린 일이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연민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빨을 가지런히 누님처럼 웃기만 할 뿐이었어요. 나는 화끈한 심정으로 달아나듯 그녀의 가게를 뛰쳐나와 버렸어요. 그리고는 그 이후로 근 스무날 동안이나 한 번도 그녀의 가게를 찾아가지 않았는데 그날 조기방학을 한 학교의 텅 빈 도서관을 돌아 나오다가 갑작스럽게도 그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진 것이었어요.

 

오래간만이어요. 좀 말랐네요. 요즘좀 시끄럽데요. 신문 보니까. 별일 없었어요?

내가 그녀의 가게를 들어섰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가게 안에는 아이들 서넛이 난로 옆에 모여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다가 흘끔 나를 돌아다보았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만화책을 뽑아들었어요.

오늘은 대포 안하세요?

그녀는 말갛게 나를 쳐다보며 신선하게 웃었어요.

오늘은 제가 사죠. 시내 나가서.

나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건성으로 훌럭훌럭 책장을 넘겼어요.

시내까지 나가요?

.

그러면 늦을 텐데.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어요. 나는 공연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어요.

늦으면 아무데서나 자죠.

나는 퉁명스레 함부로 말을 뱉어내며 후욱 한숨을 쉬었어요. 일순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찬찬히 나를 뜯어보았어요. 그러다가는 암말 없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었어요.

 

그날 나는 그녀에게 많은 말을 지껄였어요.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채 알게 모르게 나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응어리를 맥주거품 삭이듯 서서히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눈치였어요. 나는 언젠가 그녀를 처음 보던 날처럼 와락 그녀가 좋아져 하마터면 그녀를 끌어안을 뻔 했어요. 그래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술집이 문을 닫는 그렇게 이르지만은 않은 시간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어요. 군데군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 쿨렁쿨렁 흘러가는 어둠 덮인 거리를 우울하게 내다보고 있었어요. 그들의 빛바랜 소매 끝에는 조금씩 때가 묻어 있었어요.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들과 또 다른 사람들의 소매 끝에도 정겨우리만치 모두 조금씩 하루치의 때가 귀청처럼 끼어 있었어요. 그녀는 내게 살그머니 기대며 속삭이듯 입을 열었어요.

내일부터, 아니 앞으론 뭘 할 거예요?

글쎄또 술이나 마시겠지 뭐. 그러다가 생각나면 돈 들고 여자나 찾아가고그러겠지 뭐.

나는 어느새 반말 지껄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나의 궁구르는 듯한 목소리에 피식 실소를 하더군요. 그리고는 친숙한 몸짓을 하며 눈을 흘기는 것이었어요.

그러지 말구요

그러지 말구?

나는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물어 보았어요.

그러지 말구내일부터 할 일 없으시면 우리집에 와서 만화를 보세요. 공짜로 보여드리지요.

만화?

, 어차피인생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겨울을 나는 비결이지요!

그녀는 의외에도 신파조의 말투를 쓰며 장난스럽게 말했어요.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결국 빙그레 웃고 말았지만, 조금만치 가라앉았던 우울증이 또 다시 슬그머니 머리를 쳐드는 것은 아무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


* 이  콩트는 40년도 지난 세월의 어느 날, 실의에 빠져있는 우리 젊은 날의 자화상이다. 그동안 내가 챙겨 본 글 자료를 보니 20대의 내 모습이 창호지에 얼룩진 상흔(傷痕)처럼 남아 있었다. 울컥 그리움과 서러움이 뒤엉켜 리메이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