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뒤뜰 - 홍미경

2005.03.13 13:21

미문이 조회 수:739 추천:21


벌써 십일월이 다 지나갔네, 새해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달력을 넘기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엄마는 스물아홉 살이 지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딸이 걱정스러운 거다. 엄마, 새해는 매일 뜨잖아요. 비행기로 쫓아다니면 하루에 두 번도 볼 수 있을 걸! 시간이란 단지 숫자에 불과한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가슴이 아려온다. 쑥쑥 줄어들고 있는 엄마 앞에 남은 시간이 자꾸 헤아려 지는 탓이다. 말을 그렇게 어물쩍 피하진 마라. 네가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되고, 아이도 늦기 전에 낳아야 하는 게 순리란다.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쏟아내고야 만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그저 귓등으로 스쳐 듣는다. 내 남편, 내 아이, 내 가족...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건, 단백질 덩어리에서 진화를 했건 결국 하나로부터의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괴변을 떤다며 못마땅해 한다. 하지만 나는 결혼이라는 틀에 기성복처럼 걸린 내가 싫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 내 젊음은 순한 가을햇살을 받으며 익어 가는 연초록의 능금처럼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미국에 온 지 이년 만에 서부 명문 대 중의 하나인 캘리포니아 주립 대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을 하게 된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자유, 자유, 자유! 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아오르던 열정. 나는 그 새로운 바람의 색깔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있었다. 따가운 여름 햇볕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잔뜩 쳐들고 살랑거리는 양귀비꽃과 귀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조차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속삭이던 그 때, 내 나이 겨우 스물 한 살이었다.
정신없이 한 학기가 지나고 여름 방학이 되었다. 나는 긴 여름 방학동안 일을 해서 경험을 쌓고, 돈도 벌겠다는 생각으로 신문의 광고 면을 뒤적이다가 서점의 구인 광고를 찾아냈다. 그리고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조금은 들떠 그 곳을 찾아갔던 것 같다.
서점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타운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문을 밀고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와 있는 실내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계산대에 서 있는 여자에게 그곳에 온 용건을 말했다. 조금 뒤 서점 구석에 있는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왔다. 크지 않은 키에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귀밑머리에 언뜻 흰머리가 보였다. 그는 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테이블에 가득 쌓인 책을 옆으로 밀며 앉으라는 말을 했다. 나는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준비해 간 이력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잠시 후, 이력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물었다.
왜 하필 서점을 택한 거요?
책을 좋아해요.
책이 재밌나?
재밌기도 하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지식과 생각, 경험을 만나게 되니까요.
요즘 읽는 책이 뭐요?
나는 그의 엉뚱한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자이 소설을... 두 번째 읽고 있어요.
다자이? 다자이 오사무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의자를 내 앞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물었다.
몇 번씩이나 읽고 있는 까닭이 있소?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 온 탓에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치열...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자이는 그 소설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완성해 갔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전공이 뭐요?
심리학과 사회학을 겸해서 하고 있어요.
문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소?
머뭇거리는 나를 쳐다보며 그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하긴, 감성만으로 문학을 할 순 없지. 생에 대한 깊이와 이해 없이 쓰인 작품은 모두 공해야.
그는 카프카라든지 니체에 관해서도 질문을 던졌고,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많은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다음 날부터 나는 그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곳에서 한 일은 주로 잉크 냄새 채 가시지 않은 새로 나온 책들을 정리해 목록별로 꽂아 정리하고, 손님들의 주문을 포장해 소포로 부치는 일이었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곧잘 나를 인터뷰했던 김 선생에게 멍청히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뭔가 희미했던 것들이 확 걷히는 느낌. 그리고 마침내 푸른 풀잎을 타고 굴러가는 맑은 이슬처럼 투명해진 영혼의 결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그를 찾아온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는데 그들 역시 그 곳을 나설 때는 얼굴이 왠지 한결 느슨해져 돌아가곤 했다. 함께 일하던 미스 정이나 스티브는 그들을 김 선생 매니아라고 부르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모두는 스스로 김 선생 매니아를 자청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미스 정에 의하면 그는 일 년 전쯤 덴버에서 왔다고 했다. 그런 대로 안정된 사업과 가족을 모두 놔둔 채 친구가 운영하던 그 서점에 불쑥 찾아온 것이다. 얼마 후, 사장은 친구인 그에게 그곳의 운영을 맡긴 채 서점을 한 군데 더 열어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저 책장 밑의 벤치 말야, 다 김 선생님이 나무를 사다가 직접 만들어 놓은 거야. 손님들이 편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거지. 그리고 차도 여러 가지를 준비해 놓아서 덕분에 나도 녹차 맛을 알았다니까. 차와 음악이 좋다며 한 두 시간씩 보내다 가는 사람들도 꽤 있어.
미스 정의 말투에서 그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그곳에서 일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독립 기념일 연휴가 다가 왔다. 마침 그 날은 월요일이어서 이박 삼일로 직원 야유회 겸 캠핑을 가기로 몇 달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일을 끝낸 뒤 나는 함께 일하는 스티브의 차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세 시간 거리인 캠핑장으로 향했다. 중학교를 다니다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는 스티브는 1.5세대답게 영어와 한국어에 능숙했고, 한국식 사고방식이나 이곳의 문화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세살 더 많은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다 학비도 벌고 경험도 쌓기 위해 휴학하고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정치 쪽으로 나갈 생각인가 보죠?
내 말에 스티브가 험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치학 전공하는 애들을 몽상가라고 하잖아. 하지만 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거라고!
그는 자기의 말에 한껏 무게를 실으며 대꾸했다. 나는 큰소리치는 스티브가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바닷가를 끼고 자리 잡은 캠핑장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 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사장 쪽 팀도 벌써 도착해 텐트를 치고 있었다. 남자들은 서둘러 텐트를 치고 랜턴 불을 밝혔다. 불 밑으로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누군가 나무를 가져와서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혼령처럼 연기가 하늘로 올랐다. 떨어질 듯 가까이 매달려 있던 별들이 시야에서 부옇게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닥불 둘레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의 제의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스티브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랩을 했다. 흑인의 남부 발음을 흉내 내며 몸까지 흔드는 통에 모두 즐거워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줄곧 길다란 나무 막대기로 불구덩이 속, 벌겋게 달아올라 숯이 되어버린 나무들을 해적이고 있었다. 모두의 성화를 못이긴 그가 작게 솟아오르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이 노래를 시작했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그가 노래를 부르며 쏘시개로 나무를 들쭉거릴 때마다 타닥타닥 거리며 불똥이 튀었다.
스티브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무슨 노랜 지 알아?
사랑...
나는 스티브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사랑?
다시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주변 텐트의 모닥불이 하나 둘씩 꺼져갔다. 불이 꺼지며 어둠이 제 빛깔로 돌아오자 확, 열린 하늘에 푸른빛의 크고 작은 별들이 차갑게 빛났다. 멀리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발밑에서, 의자 뒤에서 요란스럽게 울렸다. 멍하니 그 소리를 듣다보니 조금 어지러웠다.
누군가 불꽃이 사그라진 모닥불을 뒤져 은박지에 싸서 넣어둔 감자를 꺼냈다. 검게 탄 감자는 출출하던 참에 대단한 인기였다. 우리는 감자를 먹고 난 뒤, 시커멓게 변한 서로의 입을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졸음이 쏟아져서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몇 시쯤 되었을까. 속이 뒤틀리며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간신히 소리를 내어 미스 정을 불러 보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흐릿한 불을 의지해 텐트를 나오니 훅, 차가운 바람이 숨을 가로막았다. 정신없이 뛰어 마른 풀 숲에 앉자마자 속엣 것들이 치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쏙 나와서 옷소매로 훔치고 있는데 괜찮아요? 하며 누군가 휴지를 내밀었다. 그였다. 나는 조금 무안했다. 그는 모닥불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나를 앉혔다.
체한 것 같군. 따뜻한 보리차로 속을 좀 달래면 괜찮아 질 거요.
그가 마른 장작 몇 개를 불 속에 더 집어넣었다. 꺼져가던 불길이 살아났다. 버너 위의 등산용 코펠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몇 시쯤 되었을까요? 내가 묻자 그는 시계도 보지 않은 채 한 시쯤 되었을 거라고 말하며 알루미늄 컵에 보리차를 따랐다.
자, 마셔 봐요. 숨도 좀 크게 쉬고.
그가 건네 준 뜨거운 보리차를 조금 마신 후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울렁거리던 속이 편안해졌다.
모두 들어갔는데, 왜 이렇게 혼자 있어요?
잠을 자기에는 아까운 밤이지. 지금 바람 냄새가 느껴지나? 들꽃들이 뿜어내는 냄새가 실려 있지. 너무 좋아.
언뜻 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이 불자 불꽃이 더 크게 일었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 본 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불빛이 없는 곳에서 우주를 보고 있으면 말이오, 한없이 외롭고 초라한 내 존재를 느끼지.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까 더 외로운 것 아닌 가요?
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 동안 많이 지쳐있었소. 그건 아주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탓이오. 내 속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소.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나. 빛과 어둠. 그 어둠도 나의 한 부분인 거요. 나는 늘 그 놈에게 흔들려 왔소.
문득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빛을 원하오. 그 빛이 나를 지배할 때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것 같은 용기를 얻지. 그러나 내 안의 다른 내가 늘 나를 흔들어 대고 있소. 그럴 때 모든 것은 혼돈 상태에 있지. 어이없게도 나는 그 어둠에 나를 맡겨 버릴 때가 많았소.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오.
그의 말을 들으며 무심코 그의 어깨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남자의 어깨. 어디선가 본 듯한... 아버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가슴 한 구석에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어스름이 깔리던 저녁. 축 처진 어깨로 술 냄새를 풍기며 동네어귀를 들어오던 아버지. 내 다섯 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중동 붐이 한창이던 때,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서 건설회사의 현장 감독 일을 했다. 그리고 임기가 끝난 뒤 바로 괌으로 간 뒤 다시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생활비가 집으로 오긴 했다. 그 무렵부터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대화에서 지워버렸다. 집안 분위기를 모르는 누군가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묻기라도 하면 그 인간 얘긴 꺼내지도 말라고 독하게 소리치던 엄마, 그 엄마의 속눈물을 보며 자랐지만 어쩐지 나는 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엄마 몰래 옛날 사진첩을 꺼내어 보기도 했다. 내 어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커다란 얼굴이 아주 잊혀질 까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 가을이었다.
난, 안 간다. 그 한마디로 내 말을 막으며 괌으로 가는 비행기 표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는 엄마의 눈에는 물기가 서려 있었다.
불꽃은 서로 엉켜 더욱 커다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불빛 둘레에 모여 춤을 추는 유랑의 무리를 떠올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 언덕을 유랑하는 무리. 밤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릴 때면 그들은 타오르는 불빛 둘레에 모여 앉아 춤과 노래로 고단한 하루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걱정 따위는 잊어버리겠지. 불꽃이 만들어 내는 열기에 옅은 졸음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가만히 기댔다. 뭘 어쩌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막을 수 없을 뿐이었다. 막연하게 나를 흔들던 것의 정체가 확실해 진 이상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한쪽 팔을 살며시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밀어 넣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가 잡혔던 팔을 빼며 말했다.  
감기 들겠어. 그만 들어가 자도록 해봐.
뒷정리하는 그를 두고 텐트에 들어와 슬리핑백 속에 미이라처럼 누웠다.
도착해 보니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살다간 흔적은 조그만 돌 판 하나로 남아 있었다. 묘지 입구에서 산 노란 국화 한 다발을 내려놓으며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다시는 그 골목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의 여자가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아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영영 도망가 버렸어. 네 엄마에게서 도망 쳤듯이 말야.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야. 아마 네 아버지는 죽어서도 구천을 영영 떠돌아다닐 거다.
여자는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바다낚시를 가서 파도에 쓸려 버렸다. 친구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음에도 허리까지 차는 물속에서 릴을 던져 놓은 채 혼자 있다가 물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고, 없어진 아버지를 반나절 만에 찾아 올린 건 해양 구조대였다. 모두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고 했지만 그 여자는 아버지가 자살을 했다고 굳이 우겨댔다.
나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온 여자는 모아놓은 아버지의 유품을 보여 주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옷, 신발, 가방 따위가 쌓여있는 틈에 갈색 노트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노트를 펼치다 낡은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 사진을 집어 올렸다. 몹시 닳은 사진 속에는 푸른 색 겨울 오버를 입고 장갑까지 낀 다섯 살의 내가 들어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그 사진을 내 볼에 잠깐 대어보았다. 울컥,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을 밀고 올라왔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귀에서 쨍쨍쨍쨍, 작은 알람시계가 계속 울려댔다. 그리고 감은 눈 속에서 새하얀 빛이 쉴 사이 없이 터졌다. 그 빛이 반짝이며 터질 때마다 그의 환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가슴에 급한 물살이 흘러내렸고 나는 텐트에 새어들어 오는 빛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숨 막히는 열기에 눈을 떴다. 입술은 탔고 목이 몹시 말랐다. 미스 정을 찾았지만 그녀가 빠져나간 슬리핑백만이 빈고치 마냥 누워 있다. 간신히 윗몸을 일으켜 텐트 밖을 내다보니 텐트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직도 열이 너무 많아. 미스 정이 혜리가 앓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와 보니 열이 많이 나고 있더군. 스티브가 약을 사러 갔으니 곧 올 거요. 그 동안 좀 더 누워 있어요.
환한 빛 덩어리 하나가 텐트의 꼭지점에 걸려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칠월의 태양은 내가 누워 있는 얇은 나일론 텐트를 가차 없이 달구었다. 달궈진 텐트의 훅훅 찌는 열기와 속에서 끓어오르던 열은 내 얼굴에 발긋발긋한 열꽃을 피웠다.
약을 먹은 뒤에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내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확인한 그는 마침내 내가 갖고 온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부축해 텐트에서 나왔을 때 스티브는 자기가 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열쇠를 흔들며 쫓아왔지만 나는 그냥 그의 차로 올라탔다.

빛바랜 붉은 색의 체로키는 몹시 덜컹거렸다.
십 년도 넘게 탄 차요. 이걸 타고 로키산맥을 넘었지.
그가 창문을 조금 열며 말했다.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어 왔지만 얼마쯤 지나니 열도 내리는 것 같았고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심리학 전공이라고 했지?
한참이나 말없이 가던 그가 물었다.
심리학과 사회학을 겸해서 하고 있어요.
어느 쪽으로 나갈 건가?
아마 특수교육이 아닐까하고 생각해요. 오래 전부터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차는 가파른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 고개만 넘어가면 로스앤젤레스였다. 가슴이 싸르르 아파 왔다. 그와 함께라면 아무 목적 없이 그 길을 마냥 내 달려도 좋을 것 같았다.
저, 집 열쇠가 없어요.
마침내 차가 고개를 넘었을 때 내가 말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신 걸요. 내일 저녁에 오실 텐데...
그럼, 누구 아는 친척집이라도...
우린 이곳에 친척이 없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 가방 안에는 열쇠 꾸러미가 얌전히 들어있었고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엄마는 그 시간 낮잠을 주무시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일부러 기운이 없는 척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난감해진 얼굴로 차를 계속 몰았다. 차는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쳐 갔고, 어느 덧 타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타운에 들어오자 그가 느린 말로 물었다. 괜찮다면 우리 집이라도 가서 누워있어.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낡은 칠 층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실내에 들어서니 둥그런 갓이 달린 램프와 올리브색의 낡은 소파, 의자가 두 개 뿐인 작은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푸른빛이 도는 시트에서 그의 냄새가 언뜻 느껴졌다. 그가 이불을 덮어주며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잠을 자도록 해, 말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의 눈빛이 잠깐 동안 흔들렸다. 나는 두 팔을 올려 그를 가만히 잡아끌었다. 그가 저항 없이 내 위에 쓰러졌다. 내 옆에 있어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조금 뒤, 그가 내 곁에 몸을 눕혔다.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그는 나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그의 손이 느껴졌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늑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창문의 블라인드 틈새를 뚫고 아침 햇살이 들어와 있었다. 옆을 보니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그가 남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안하게 잠든 혜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줄곧 생각했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내 품에 들어오다니... 하나님, 내가 이 여자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혜리,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알게 될 거요. 우리가 밝은 빛 아래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그 때가 오면 말이오. 나는 그 때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소.
나는 그 편지를 손에 쥔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에 머리를 묻었다. 그가 몹시 그리웠다. 베개를 끌어 당겨 코에 댔다. 그의 체취를 느끼자 온 몸의 세포가 아프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날 이후, 내 모든 감각은 그를 향해 촉수를 뻗었다. 나는 매 순간마다 그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를 지켜보며 이기적인 나의 열정에 늘 부끄러움을 느낄 뿐이었다.

구월이 시작되면서 나는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낮에 그를 볼 수 없었던 나는 저녁이면 책을 덮고 자주 그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서점에 들어서자 미스 정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 선생님이 곧 덴버로 가신데.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 서운해! 나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 갔다.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요? 내가 더듬거리며 묻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곳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떠날 생각이오. 이젠 돌아갈 때가 되었소.
나는 말없이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기숙사에서 꼼짝 않고 틀어 박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고작 잠자고 일어나 하루 종일 좁은 방안을 서성이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그날따라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날씨 탓에 미술 대 앞의 광장은 여느 때와 달리 텅 비어 있었다. 할 일 없이 빈 광장을 서성일 때였다. 마음에 불안이 스멀거리더니 곧 심장에 쥐어짜는 통증이 왔다. 나는 곁에 있던 포플러나무에 몸을 기댔다. 내 정신은 다만 한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싶다. 미칠 듯이...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내 눈이 광장 끝에 닿았을 때다. 내 시선 끝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 그였다. 그가 온 것이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시선에 갇혀버렸다. 달려가자, 마음과는 다르게 꼼짝없이 우두커니가 되어버린 나. 마침내 그에게 등을 보이며 걸음을 옮길 때, 바싹 마른 낙엽이 발밑에서 바삭바삭 부숴 지는 소리를 냈다.
며칠 후, 기숙사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어 왔다.
지금 난 로키산맥을 넘고 있소. 리치 필드를 지나 산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함박눈이 내리고 있소. 폭설이 내릴 거라고 하루 더 머물렀다 가는 게 좋겠다고 모텔 주인이 걱정을 해 주었지만 난 스노우 체인만 끼운 채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지. 다행스럽게도 내 예감은 들어맞아 눈에 갇히는 일없이 순탄한 길을 가고 있소. 차창에 부딪쳐 수북이 쌓이다가 차안의 열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또 당신 생각을 했소.
혜리, 고맙소.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 그 사랑의 힘으로 나는 돌아갈 수 있게 된 거요. 내가 받은 사랑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곳으로 저절로 넘쳐흐르겠지. 나는 끊임없이 노력할 거요. 인종과 이념 그리고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그런 사랑만이 이 지상에서 계속되도록 말이오.
혜리, 많이 보고 싶을 거요.
별이 빛나는 밤이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당신 생각에 가슴이 저려 올 것 같소. 긴 머리에 굴러가는 웃음을 웃는 젊은 처녀를 보면 당신이 아닌 가, 뒤돌아볼 거요. 그리곤 웃겠지. 당신을 처음 만났던 서점에서의 싱그러운 모습, 얄미우리 만치 자신 있던 그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뛰었소! 아름다운 비밀이지. 그 비밀을 안고 돌아가오. 치열한 싸움은 끝났고, 빛이든 어둠이든 이제는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소. 사랑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오!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나는 아직도 그 한 여름 밤에 꾼 꿈을 잊지 못하고 있다. 미완으로 끝났던 나의 사랑, 하지만 나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서곡에 불과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향기를 내고 있는 그의 사랑을 본다. 그가 내게 준 사랑은 내 손길을 타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타고, 또 타서 재로 소진될 때까지 내 미완의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