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 / 최문항

2012.10.08 06:38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440 추천:4

<단편소설> “니하우!” “미국인데 영어로 합시다!” “한국말 하슈? 꼭 중국사람 같이 생겼구먼.” “당신이야말로 짱개처럼 생겼으면서 누구보고 그래?” “연변에서 왔수다. 이름은 피아오 지웬.” “난 필라에서…. 이름은 홍동길이요.” “필라가 어디쯤 있는 나라요?” “젠장, 필라델피아도 몰라?” 우린 같은 날 같은 시에 조영감하숙집에 들어왔다. 연변에서 왔다는 박 씨는 뭐 그리 아는 게 많은지 한국으로 유학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가짜 소셜번호 얻어가지고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까지 준비했는데도 나 같은 놈이 기숙하고 있는 하숙방에 자빠져 있었다. “박씨, 각설이타령 들어봤어?”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제법이네 어디서 들었어? 아리랑 마켓 앞마당에서 품바 잔치한다는데 슬슬 거기나 나갔다 옵시다. 탁주도 얻어먹고 이쁜이 각설이도 만나보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같은 방 쓰는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니니까 서로 확 터놓고 어떻게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지나온 이야기나 나눠 보자고…” “사실 나야 뭐 할 얘기도 없어! 형씨부터 시작해 보슈.” “미국이 하도 넓다 보니까 여기는 동부하고 전혀 다른 기분이 나더라고, 버스 타고 흔들흔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나가봤지! 벌거벗은 여자들이 비치발리볼 한다고 모래밭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더라고 꼭 싱싱한 물고기들이 모래 위에서 펄떡거리는 것 같았어! 비키니 입고 자전거 타는 아가씨들도 멋있고 말이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나 모래사장이야 뭐 해운대나 대천 다 비슷비슷하지만 그 팔등신 미녀들은 정말 한번 안아보고 싶두만!” “그래서 눈이 짓무르게 아가씨들만 보다 돌아왔쑤?” “그러니까 짱개하곤 말이 안 통하는 거야! 차원이 다르거든, 내가 거기서 뭘 봤느냐? 날개 부러져 나뒹굴고 있는 날 봤다 이거야……. 자전거대여점 옆 공터에 휠체어를 탄 홈레스영감이 새떼들을 향해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더라고, 나도 별 할 일 없이 새들의 군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나니 비둘기 몇 마리만 남아서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어 그런데 그중에 한 놈이 비실비실 휠체어 근처까지 밀려와서 파드득거리는 거야, 자세히 보니 그놈은 한쪽 날개가 축 늘어진 것이 꼭 내 꼬락서닐 닮았더라고… 멀쩡한 비둘기들이 그놈을 쫓아와서 날카로운 부리로 톡톡 쪼아대는데 그것도 축 늘어진 왼쪽 날개 밑 깃털이 다 빠진 상처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더라니까, 한 놈이 실컷 괴롭히고 나면 또 다른 놈이 덤벼들어 계속 쪼아대는 거야… 뒤뚱거리며 도망치는 놈을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놈은 무엇에 쫒기는 듯 잔뜩 긴장된 눈에는 독기가 가득하고 기회만 되면 날카로운 부리로 내 손을 사정없이 쪼아대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목덜미에 잿빛 나는 깃털이 지는 석양 때문인지 찬란한 무지개 색으로 번쩍거리더라고, 다른 새들이 감히 흉내 못 낼 자신만의 고고한 빛을 지니고 있었어! 내가 무지개 색에 취해서 지난 수년 동안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데 휠체어에 앉은 영감이‘젊은 양반! 그 날개 부러진 새는 보이고 이 늙고 병든 놈은 눈에 안보이슈?’하면서 또렷한 한국말로 날 나무라는 거야!... 휠체어 옆에 주렁주렁 매달린 비닐봉지와 태양 볕에 검게 탄 주름진 얼굴, 길게 자란 흰 수염 때문에 그저 흑인 홈레스피풀인 줄 알았지 누가 한국사람 일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미국형 각설일 만났구먼 그래!” “그러고 보니 긴 피어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모두 한국 사람이고! 내가 동부에서 어영부영 시간 보내고 있을 때 서쪽에서는 그 유명한 산타모니카 해변을 한국 사람들이 몽땅 점령해 버렸더라고. 주머닐 뒤져보니 잔돈까지 다해서 삼십 불이 채 안 되더라구……. ‘영감님 제가 가진 게 요거 다네요, 어디 가서 요기라도 하세요.’하면서 꾸겨진 지폐를 영감 손에 쥐여주고 돌아섰는데 고맙다는 소린 안 하고 그 날개 부러진 비둘긴 자기가 잘 걷어 먹이겠노라고 걱정 말라고 중얼거리더라니까…” “필라에서 돈 좀 챙겨 가지고 왔나 보지?” “난 여태껏 돈 같은 건 걱정해본 적이 없어! 빈손이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일 할 데는 쌓였더구먼, 페인트, 목수보조, 청소, 봉제공장, 여기 싫으면 저기 가고 내 맘대로였어! 내가 뭐 돈을 많이 달라고 해? 보험 오버타임 그런 게 다 뭔데? 그냥 일거리 있고 술집 좋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니까 영어 한마디 안 해도 되고 어떤 땐 미국 놈들이 한국말 척척 알아듣고 도대체 막히는 게 있어야지!” “참 좋겠시다 걱정 할 게 없어서…” “그런데 말이야 요즘 와서 갑자기 국토 방위국인가 뭐 홈랜드 씨큐리티라나 하는 놈들이 여기저기 들쑤셔 대니까 불평 한마디 없이 꾸덕꾸덕 일만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시골구석까지 밀려 내려왔잖아 이거…” “아무 걱정 없다고 방금 전에 말해 놓고선 금방 불평이야?” “아니 불평이라기보다는 좀 귀찮다는 거지 뭐, 지금 일하는데 빠똥 얘길 해야지… 요즘에 새벽 6시는 캄캄하고 해 뜨려면 아직 반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를 꼭두새벽부터 작업 시작하라고 불러놓은 그놈은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도 한참 있어야 기신 기신 나타난다고, 잠도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곧장 길 건너 멕시칸 식당으로 가서 젖이 남산만 한 마리아하고 시시덕거리다가 8시가 한참 지나서야 제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바빠진 것처럼 인상을 북북 긁어대면서 일을 재촉하기 시작하지. 허긴 타임카드라는 게 사람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더라고, 일분만 늦게 찍어도 빠똥이 제 사무실로 불러들여 가지고선‘일 할 맘이 있냐? 없냐? 다른 사람 부른다만다.’아우성을 쳐대니 어떻게 피해갈 방법이 있어야지!” “아니 그 빠똥인가 하는 놈도 한국 사람인데 그래?” “내 말 좀 더 들어 보라고, 내가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빠똥이 나보고 다짜고짜 비행기나 기차 같은 거 타 본적 있냐고 묻는 거야.‘미국 들어올 때 대한항공 타고 왔습니다.’ 하고 퉁명스레 대답했지, 사실은 배타고 들어왔는데! 이번엔‘비행기속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야?’그래서‘엔진’이라고 했더니 피식 웃으면서‘그런 거야 조종사가 걱정할 일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야? 이사람 급한 일 한 번도 안 당해 봤구먼! 제일 중요한 게 똥간이야’하더라고… 그리고는 있는 폼을 다 잡아가면서‘우리가 바로 비행기 기차 버스에 들어가는 고성능 변기 만드는 회사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물건을 만드는 거라고~’하면서 첫날부터 구린내를 풍기더라고!” “그거 말 되는 농담이구만.” “그러면 왜 거룩하신 매니저님을 빠똥이라고 부르느냐? 순전히 본인의견을 존중해서 그렇게 부르게 됐는데 멕작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자기를 빠뚜롱(보스)으로 부르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 바람에 애들이‘빠뚜롱 빠뚜롱’했는데 언제부턴가 우리 한국 사람들끼리는 ‘빠똥’으로 줄여서 부르기로 했어.” “빠똥이란 사람이 한국 사람이니 얼마나 좋아! 우리 염색공장 매니저는 인도 놈인데 걔네도 사람차별 말도 못하게 해대두만!” “그래서 박 씨는 짱개라고 했어? 한국 사람이라고 했어?” “형씨! 짱개가 뭔지나 알고 짱개 짱개하는거요? 여기에서 우리가 남미사람을 멕작이라고 부르듯이 연변에서는 조선족들이 밑바닥 일하는 한족을 업수이 여겨서 부르는 말인데 그들은 돈 되는 일이면 체면이고 뭐고 없이 달려들어 생계를 꾸려가는 밑바닥 인생을 말하는 거외다… 내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녀서 그런지 중국 놈 같다고 하면서 날보고 커다란 염색 보이라 통에 들어가라는 거야, 그 안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말이야…” <중략> “여하튼 오렌지카운티는 나 같은 귀한 사람이 일하기는 딱 알맞는 곳이지, 빠똥도 나 믿고 늦게 출근하니까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 아니야? 그런데 드디어 운명의 아침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던 거야!” “왜?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아침에 공장 문을 열어주고 멕작들이 타임카드를 다 찍은걸 지켜보고나서 마지막으로 내가 '땡'하고 찍었는데 갑자기 큰 키에 홀쭉한 놈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공장 뒤쪽 문에 가서 붙어 섰어,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건물 앞쪽에도 한 놈이 양복 윗저고리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라니까, 나는 직감적으로 저놈들이 날 잡으러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아챘지!” “필라 세탁소 영감이 보낸 놈들이었나?” “그게 아니고 이번엔 진짜 위험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거였어! 나는 슬쩍 빠똥 방으로 들어가 있는 대로 폼을 잡고 앉아있었어, 조금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검은 안경 낀 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한테 뭐라고 한참 씨부렁대더라고, 그놈은 내가 사장인 줄 알고 떠드는 것 같았는데 나는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도 태연한 자세로 미스 리를 불러들였어, 깜찍한 미스 리도 마치 사장 대하듯이 내 말을 고분고분 듣는 체하더라고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졌어!” “정말 홈랜드 애들이 쳐들어온 거였어?” “홈랜든지 이민국 놈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그놈들을 미스 리한테 묶어놓고 슬쩍 옆문으로 빠져 나와서 허겁지겁 길 건너 멕시칸 식당으로 빠똥을 찾아갔어.” “홍형! 무슨 일 생겼습니까?” “매니저님! 이민국 수사관들이 쳐들어왔어요, 빨리 건너가보세요!... 하는 수없이 매니저님! 이라고 불러줬어 그래도 꼬박꼬박 주급 타다 나눠주니 고마운 일 아닌가? 말이야, 괜히 김가 놈이 매니저놈 매니저놈 하니까 나도 그렇게 부르지만 나 같은 불법 체류자에게 일자리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김가 놈은 제가 언제부터 영주권 받았다고 하늘 같은 매니저를 매니저놈이라고 불러 못된 놈 같으니라고…” “빠똥이 건너가서 일은 잘 마무리 했나?” “그 수사관들은 서류 없는 멕시칸 두 놈을 잡아가면서 내 주소와 인적사항을 적고 자수하지 않으면 모든 경찰순찰차에 현행범으로 체포 명령이 떨어질 테니까 빠른 시간 안에 자수하라는 공갈 협박을 남겨놓고 물러갔다고 하면서 당분간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고 하더라고!” “그럼 또 다른 데로 옮겨 가야겠네?” “그래……. 또 정처 없는 길을 떠날 때가 된 거지 뭐!” “저 영감 그 홈레스 맞지!?” “저기 각설이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 그 홈레스영감 같은데 일어서서 걸어다니고 있잖아? 휠체어는 어떻게 했지? 그럼 불구가 아니었단 말인가?” “혹시 다른 사람 아닐까? 가까이 가서 보자구!” “영감님 품바 잔치구경 잘하셨어요? 그리고 휠체어는 어떻게?” “왜? 나는 걸어다니면 안 되냐? 그저 장사할 때만 앉아 있으면 되는 거야! 미국 살아가는데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날 찾아 와봐 내가 시원스레 답해 줄 테니까!” “무슨 문제든지요? 그럼 이 멍청이 좀 도와주세요! 홈랜드 애들한테 쫓기고 있다잖아요!” “그러는 너는 쯩 있고? 그래서 두 놈 다 다른 데로 튀려고 하는 거지!” “영감님은 영주권 다 있으세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나한테는 그런 거 하나 없어도 여기가 낙원일세! 낙원이 뭐 별난 건 줄 알아? 마음 편안하고 남부러울 거 없고 내일 걱정 없으면 되는 거야! 내 휠체어 빌려 줄까? 이 위에 앉아 있으면 쯩 보자는 놈도 없고 길목 좋은데 찾아서 조용히 앉아만 있으면 돈도 쓸 만큼 생긴다고! 짱개! 자네 한번 앉아볼래? 돈 생기는 일이라면 체면이고 뭐고 없다고 했나?” “영감님! 아무리 어려워도 길거리에 나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멍청한 것! 이것도 엄연한 내 직업이야! 내 꼴이 우습게 보이지? 그럼 더 쫒기면서 고생들 해보라고, 그럼 나는 가네! 또 만나세!” “홍형! 우리 꼴이 정말 거리에 나앉을 만큼 처량해 진 거요?” “나는 한 번도 뒤로 물러서 본 적이 없어! 내가 걸어온 험한 들판에 뿌려진 땀과 피눈물을 한데 모아서 그림을 그린다면 아마 산타모니카 해변을 절룩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그 비둘기의 목덜미 깃털에 반짝이던 화려한 무지개색을 그려낼 수 있을 거야...” - 내가 누구냐? 홍길동 아니 홍동길이가 이제는 날개 달린 철새처럼 푸른 하늘로 솟아올라 따뜻한 섬나라, 와이키키 해변으로 날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