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조그만 만화가게가 있었다. 학교가 파하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내 발길이 그 쪽으로 향했다. 어둑어둑한 만화방 벽면에는 탐정만화 순정만화 공상만화 무협지 등 정말 입맛대로 진열돼 있었는데 나는 순정만화와 공상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날 나온 만화는 통독하다시피 했을 정도로 만화 맛에 홀딱 빠져 있었는데 가끔 집에까지 들고 와서 읽다가 엄마한테 혼이 나곤 했다. 그런데 학교 숙제나 과제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허둥대는 일이 잦아지자 엄마는 빌려온 만화책을 몽땅 아궁이에 쑤셔 넣어버렸다. 빌린 만화책을 돌려주지 않으면 돈을 물어내야 하는데 어린 내가 돈이 있을 리도 없고 결국 단골 만화가게를 포기하고 골목을 한참 돌아서 있는 만화가게까지 원정 가서 읽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당시 만화 속의 로봇과 엄희자의 순정만화 속의 서양공주 모습을 꿈속의 연인처럼 책이고 노트고 빤한 구석이 없을 만큼 그려댔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는데도 그때 갚지 못한 만화책 값이 마음에 찜찜하게 남아있고 만화가가 되고 싶어했던 친구 오빠를 은근히 좋아했던 기억이 내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번지게 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만화를 언제부터 멀리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화가 아이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명작만화도 많이 보급돼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말 오랫동안 만화를 외면하고 지냈다. 대신에 소설을 즐겨 읽는다. 장편이나 단편소설을 사서 읽기도 하지만 국내외 문학지에 두 세편 실리는 단편도 재미있다. 한번 손에 쥐면 끝장을 보게 하는 '읽히는 힘'이 대단한 소설도 좋지만 사람 감질나게 하는 신문 연재소설도 좋다.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 중에는 아빠가 다른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며 겪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공지영의 '즐거운 우리집' 과 서문경과 반금련의 정사이야기를 빌어 어둡고 추악한 사회상을 폭로한 '반금련'은 잊혀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언젠가 신문만화를 본적은 있지만 지면이 아깝다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운 내용을 접한 후 만화가 그렇지 뭐 격하시키는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만화 '국수의 신'은 범상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득한 경상도 사투리와 생동감 넘치는 그림도 좋지만 달관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어록이 매호 보석처럼 박혀있다. 놓친 전편들이 아까워 웹사이트 검색을 해 보았다. '국수의 신 중앙일보'라고 쳤더니 작가 박인권, 만화를 그린 지 37년, 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국수의 신' 탄생 인기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대물' '쩐의 전쟁'의 원작자 등등…. 관련자료가 좌악 떠올랐다. 지난 호를 볼 수 있는 블로그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앱도 있다. 무엇보다 "스토리의 승부는 인간으로 귀결된다. '국수의 신'도 결국 국수를 만드는 인간의 얘기다"라는 작가의 말이 내내 마음을 적신다.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 정신과 탄탄하게 쌓아올린 작가의 내공이 만화라는 장르를 업그레이드 시킨 것 같다. 실력이 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