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연가 / 최영숙

2011.12.12 06:50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569

근 이년 만에 막내 당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숙이래야 나하고는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어릴 적에는 내가 맞먹고 기어오르기도 하던 사이였다. 마지막 연락은 당숙이 오하이오 주에서 새 살림을 차렸다는 전갈이었고, 그 후로도 오하이오에서 이곳 메릴랜드가 그다지 멀지 않았음에도 일절 소식이 없는 것을 나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중이었다. 당숙의 목소리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이 여전히 칼칼했다. “김 서방은 잘 있냐?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야지, 그 사람도 이제 나이 육십을 넘었는데....서현이는? 아직 결혼 안했어? 걔 결혼 때는 꼭 연락해라. 걔 언니 때는 사정이 그래서 못 갔지만 서현이 때는 내가 꼭 가야지. 걔 이름을 내가 지어줬는데 안 그러냐?” 당숙은 그렇게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 난 다음 헛기침을 하면서 내게 물었다. “너, 혹시...아무르 강이 어디 있는지 아니?” 당숙이 아무르 강을 한강이나 섬진강 이름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그 강이 우리나라에 있는 동강이나 회야강처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강 이름 중의 하나인 줄로만 알고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아무르 강이 중국에서는 헤이룽 강이라고 불린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무르 강이요?.... 그거 중국인가 러시아인가 그 쪽 어딘 것 같은데... 그리고 몽골까지 해서 세 나라를 지나간다든가...아마 그럴 걸요. 근데 그건 왜요?” “아무르 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시가 있다는데, 그것도 알고 있어?” “아! 박정대 시요... 아무르 강가에서 라는 시집이 있어요. 그거 .... 내가 갖고 있을 거예요. 근데 그건 또 왜요?” “그 시집, 나한테 빌려 줄 수 있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갑자기 그 시집이 필요해요? 시 쓰셔?” 막내 당숙이 시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를 그야말로 죽지 못해 다니고 있던 당숙이 책이라면 뚜껑도 들춰보기 싫다면서 졸업을 하자마자 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통째 태워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당숙을 아무도 고등학교에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너, 나 놀리냐? 시는 무슨 놈의 시야... 다른 일로 좀 필요해서 그래.” “그럼, 뭐? 아하! 또 여자 꼬시려고? 그 보담은 가시리 가시리잇고...그게 낫잖우?” 중학생이던 당숙이 “가시리” 가사를 외우는 숙제를 하다하다 못해 나를 불러 앉혀 놓고 국어교과서를 손에 쥐어 준 적이 있었다. 당숙이 가사를 두 줄 외우면 나는 자동으로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고 장단을 맞추어 읽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느 줄에는 “나는”이란 말을 붙이고, 어디에는 또 그 단어를 빼어버리는 데 있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이라고 읊는 당숙의 뒤를 따라 내가 얼른 “위 증즐가 태평성대” 라고 후렴을 읽어주면 당숙은 영락없이 “날러는 어찌 살라 하고 나는....”이라고 받고 나왔다. “거긴 ‘나는’이 없는데...” 하고 내가 말하면 당숙은 그것이 나의 실수인양 나를 향해 눈을 치켜뜨고 성질을 부렸다. 결국에는 내가 어깨 장단에 맞추어 “가시리”를 먼저 외우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당숙은 국어 선생에게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매를 맞아가며 그 앞에서 간신히 외우고 나서야 해가 뉘엿뉘엿할 때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야아, 그 놈의 가시리 얘기는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 막내 당숙은 헛헛하게 웃었다. 당숙은 웃음 끝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집을 보낼 집주소를 불러 주었다. 의외로 당숙의 주소지는 오하이오가 아니고 캘리포니아였다. <중략> 시간이 약이었다. 그렇게 골머리를 끓이던 당숙의 일이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해지기 시작했다. 내게 소식도 없이 사라진 일은 섭섭했지만 늘 하던 버릇대로 당숙의 존재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국에서 날아온 두툼한 봉투를 받게 되었다. 뜻밖에도 당숙에게서 온 책과 편지였다. 내가 보내 주었던 “아무르 강가에서”라는 시집을 돌려보낸 것이었다. “이 시집을 원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인데, 말하자면 그 시를 달달 외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당숙은 편지 머리에 적고 있었다. “가시리”를 외우지 못해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얻어맞았던 사람이 짧지 않은 시 한편을 전부 외웠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외운 목적이 여자 때문이었다면 그것은 이제 필요가 없어진 과거 시제의 일 아닌가. 여자가 죽은 지금 시점에 까지 아무르 강가에서 머물 일은 아니었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넌, 내가 그 여자를 어쩌거나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소식도 없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절대 그런 거는 아니다. 의사말로는 그래도 예상보다는 오래 버텼다고 하더라. 나는 여자를 하늘로 올려 보낸 그 날로 집을 나와 버렸다. 그 와중에도 오빤가 뭔가 하는 작자가 하도 붙들고 늘어져서 사인하나 해주고 몇 푼 받기는 했어. 그리고 화장한 여자의 유골 재를 가져왔다. 생각나지? 그 여자가 좋아하던 시, ‘아무르 강가에서’ 말이야. 할 수 있으면 내 손으로 거기에다 뿌려주고 싶어서. 아침에 방에 올라가 보니까 그 사람이 말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어. 자는 얼굴을 보니 표정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일을 아주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깨끗해 보이기도 하고. 근데말야, 이상한 일은.... 그 얼굴이 울 엄니 같기도 하고 우리 여정이 같기도 하고 그런 거야. 그리고 그 때 내 가슴 속에 불던 찬바람이 쑤욱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 그게 뭐냐 하면, 으음...잘 표현을 못하겠는데... 너 같음 이런 걸 뭐라고 말하겠냐...언제부턴지 가슴 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것 같고, 시리고, 아리고 뭐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늘 그랬어... 그런데 그 날, 갑자기 그런 기운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니까... 근데 평소에는 내가 문고리만 비틀어도 깨어나던 사람이 그 날은 내가 다가가도 그런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는 거야. 그제서야 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았지. 흔들어 깨웠더니 숨은 쉬고 있었지만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어....그렇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가 버렸지....산거와 죽은 거 차이가 종이 한 장이더라. 숨 한 번 끊어지면 모든 게 끝이라니....근데 이상한 일은 그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 난 뒤에도 내 가슴 속에는 옛날과는 다른 딴 기운이 가득 차 있는 거야. 그래 그런지 쓸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덤덤한 것도 아니고....이런 게 뭔지 나도 처음 겪어서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난 아무르 강가에 서 있을 지도 몰라. 거기 하바로프스크까지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 반 정도면 된다고 하는구나. 아무르 강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강인 줄 몰랐다. 그게 흑룡강 줄기라며? 그래도 흑룡강이란 말보다는 아무르 강이란 말이 더 그럴 듯 하구만. 그나저나 한 번 그 사람이랑 같이 가볼 걸 그랬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는데....자기가 그럴 수만 있다면 거기 아무르 강가에 사는 유목민의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댔거든. 그게 무슨 뜻인지 낸들 알겠냐만....하긴, 뭐든지 멀리서 바라볼 때가 좋은 거 아니냐. 좋다는 델 가 봐도 다 거기서 거기고, 사람도 가까이서 겪어보면 그놈이 그 놈이고, 그렇지 않드냐?” 그 후로 당숙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한국에서도 당숙의 거취를 아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당숙은 가슴에 가득 차있는 그 여자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아무르 강변의 유목민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던 가슴 속 자리에 대신 들어찬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던 당숙은, 언젠가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잠 못 들며 애타게 하고, 황홀하게 불타오르고, 그래서 우리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게 하기도 하고 또 죽게 하는 일인가를, 지난 추억마저도 왜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는 가를,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환생하고 싶어 하고, 또 영원히 살게 되기를 소망하는 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