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준 숙제를 풀며 - 조옥동

2014.11.1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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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가을이 준 숙제를 풀며/한국 <에세이21>2014,겨울호 가을이 준 숙제를 풀며 조옥동 趙玉東 oakdjo@gmail.com 최 선생님 가을입니다. 집밖엔 어느새 가을이 색색의 선물을 싣고 도착했습니다. 금세 짐을 부릴 태세입니다. 더 이상 지고 업고 기다리기 어렵다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어요. 푸름과 초록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가을은 아주 다른 옷을 입고 슬그머니 우리 마음속을 점령합니다. 가을 바다가 보고 싶어 산 너머 싼타모니까 해변을 찾았습니다. 여름동안 다녀간 숱한 발자국들이 파도에 씻겨 간 해변엔 여인의 피부처럼 매끈한 모래벌판만 한가롭게 누워있었습니다. 한없이 펼쳐진 바다는 수없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물결로 맑은 가을 햇살을 애잔하게 흔들고 있었지요. 흔한 갈매기도 날개를 접고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만 내려 보고 있었어요. 모처럼 수평선 위의 낙조를 보려던 생각을 접고 울컥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을 싸 안고 돌아왔습니다. 가을의 스산한 바람은 걸음걸이를 재촉하고 옷깃을 꼭 여미게 하지만 한편 창문을 두드리며 지나는 바람은 사색의 뒤안길로 우리를 유혹하며 묻어 둔 생각을 끌어내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지난여름 캐나다 로키 산맥 여행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소중한 인연입니다. 몇 마디 많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선생님 의식의 커서는 가슴속 디스켓에 저장하여 감춰둔 제 마음의 행간과 행간을 빠르게 움직이며 정확히 읽어 내렸습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음성 속에서 모처럼 위로와 평안의 말들이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거칠어지고 메마른 마음의 골들을 다독였습니다. 영혼에 살을 올려 주는 언어들을 발견했다고 할까요. 그러한 언어들을 찾아내고 즐겨 쓰는 수고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연구실에서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고, 보통 품종을 우량품종으로 바꾸는데 세포막을 열고 유익한 유전인자를 흡인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병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를 건강한 상태로 변환시키는 이 최첨단 의학과 과학기술처럼 선생님이 사용하시는 언어들이 학생들의 깨끗한 영혼의 표피를 터트리는 불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언어들이 영혼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 갈 때 병들고 목말라 갈증으로 훼손된 영혼이 치유될 수 있다면 그 언어들은 얼마나 고귀할까요. 사랑이란 콩고물이 고루 묻어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이 가을은 그러한 언어를 찾아 나서라고 합니다. 닫혀 진 마음에 높이 걸린 빗장을 내리고 바람에 흔들려도 억세게 뿌리내려 견딜 수 있는 심지를 붓 돋아 줄 언어들 말입니다. 빗속을 헤엄쳐도 찬란한 햇빛이 무지개를 펼치고 밝아 옴을 일깨울 수 있다면 그 언어들은 생명력이 있어 주위환경을 변화시키고 생동하게 만들겠지요. 선생님은 젊은 학생들을 카운슬링 하실 때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를 우선으로 하고 참으며 말을 아끼신다고요. 그 태도가 카운슬러의 기본자세임은 확실하나 시간과 싸우며 안타까움의 장막을 뚫고 나가려면 얼마를 참고 견뎌야 합니까. 깊은 겨울, 낮게 엎드린 지붕 위의 소담스럽게 쌓인 눈덩이를 털어 내며 산마을을 지나던 막차의 아련한 기적소리조차 영영 들을 길 없는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는 하루 24시간이 출발시간이자 또한 종료시간으로 시작과 끝이 맞물려 돌아가는 혼돈의 시대로 이웃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긴 상실의 시대가 아닙니까. 마주보고 웃기도 울기도하며 기쁨이나 슬픔을 서로 나누던 일은 옛날 풍경이 될 것 같은 지나친 염려를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계절, 가을은 나에게는 폭력의 계절입니다. 깊은 상념의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갖가지 아픔들이 바늘 끝의 예리함으로 온 몸 감각에 침을 놓습니다. 갈잎이 쓸려 가는 가을 길, 허전한 꿈의 한 자락을 발끝에 감고 걸어가는 발길은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단풍은 머지않아 뿔뿔이 헤어질 날을 알고 있는 나무의 슬픈 웃음입니다. 추수후의 빈 들판에서 늦은 빗속에 홀로 남겨진 앙상한 허수아비의 외로움은 어떤가요. 우리도 세상이란 들판에 서 있는 하나의 허수아비가 아닌가요. 각가지 색깔로 우리의 눈을 미혹하며 다가서는 자연의 마음은 무슨 안경을 써야 읽을 수 있는지요. 선생님, 나는 더위와 추위에 약하듯 계절의 변화에도 허약해 가을이란 병을 앓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기왕이면 아주 호되게 앓고 싶습니다. 사랑의 결핍증을 앓는 모습은 아름답다 했나요. 이 가을, 고독한 중병을 앓는 사람끼리 가슴에 맑게 고여 올 사랑의 언어를 나누고 싶습니다. 맑은 바람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리고 별빛의 은성한 속삭임을 영혼의 음반에 담으려 합니다. 봄부터 햇살과 별빛과 이슬과 소나기, 구름과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천지의 숨결을 마시고 나면 나이라는 둥근 나이테 하나 두른다지요. 가을이 준 숙제를 풀며 겨울 편지를 준비하렵니다. IP Address : 99.45.253.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