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아리 (20) / 김영강

2011.05.31 16:16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342 추천:2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한창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민우가 들른다고 해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올림픽 마켓엘 갔었다. 거기서 우연히 애경을 만났다. 애경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누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하고 생선부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주 화려한 차림새였다. 진분홍 실크 블라우스에 같은 감의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고는 하늘하늘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살도 꽤 찐 편이라 화려한 차림새가 더 눈에 띄었다. 내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나는 누군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 강애경이야. 중 2때 너랑 짝했잖아.”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어릴 때는 키가 나랑 비슷했기에, 내가 몰라볼 만도 했다. 그리고 얼굴도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경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몰라보겠지? 나 말야. 눈 코 입, 다 뜯어고쳤어. 그래서 옛날 사람들, 나 아무도 못 알아봐.” 나는 “키도 고쳤어?” 하고 물었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것이 이해가 안 돼 무심결에 뱉은 말인데, 말을 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애경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래. 그냥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막 먹어댔더니 키도 크고 살도 찌고 그러더라. 그런데 넌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배짝 말라서 그런지 더 작아진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말랐니? 어디 아픈 사람 같아. 너 어릴 적엔 무지 이뻤는데. 지금은 야, 얼굴이 그게 뭐냐? 그냥 팍 늙어버렸다 야아.” 애경은 상대방의 기분 같은 건 염두에도 없는 듯이 하고 싶은 말들을 탁탁 뱉어냈다. 그녀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모든 것이 다 휘청거리며 내 눈을 어지럽히던 때이니 내 몰골은 내가 봐도 유해주가 아니었다. 그때 애경은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앞에 나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쓰러졌었다. 자기는 미국 가기 싫은데 부모한테 끌려간다면서 막 울다가 쓰러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목청을 한껏 돋우고 말을 하다가 기절을 한 것이었다. 몇 가닥 앞으로 내린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이마에 풀처럼 붙어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애경은 나를 보고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왠지 좀 서먹서먹했다. 그녀의 차림새에 비해 내 꼴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팔짝팔짝 뛰면서 내 손을 잡아끌고 마켓 옆 빵집으로 들어갔다. (중략) 닥터 윌헴은 나보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허지만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어마마 기가 막혀. 너 왜 다 거꾸로 말하니?” 하고 얘길 하는데도 애경은 내게 단 일 초의 순간도 못 주겠다는 듯이 내 말을 덮치며 계속 애길 이었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닥터 윌헴의 동정을 사기에 급급했다. “뭐가 거꾸로니? 맞잖아. 너 이민우하고 살았잖아? 그리고 배신을 당했고.” 어질어질했다. “선생님, 그 배신한 남자가 바로 우리 언니랑 결혼을 했어요. 제 형부가 됐다고요.” 계속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주 차분하게, 그녀는 내 과거를 실타래 뽑듯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남자한테 배신당하고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것이 안됐고, 그리고 그 남자가 우리 언니랑 결혼을 했기에 미안한 마음도 들고 또 너무 불쌍했어요.” 애경은 정말 불쌍해 죽겠다는 듯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울었다. “그래서 만날 시장 봐주고 돈도 주고 그랬는데, 어떻게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할 수가 있니? 여행 갈 때도 내가 비용 다 대주면서 데리고 가고, 너한테 쏟아 부운 돈이 얼만데... 돈은 그렇다고 쳐. 돈보다 더 큰 게 정신적인 배신이야.” 여느 때는 저속한 단어들을 마구 쓰면서 두서없이 말을 뱉어내는 그녀가 닥터 윌헴 앞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계속 고상한 척 할 수 있는지 그 인내가 대단했다. 눈앞이 뿌예지면서 사방의 벽이 흔들렸다. “네가 여행 가자고 하는 걸 내가 한 번도 안 갔는데, 뭐라고?” 하며 입을 달싹거리고 있는데 애경의 음성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저 거짓말 하는 것 좀 봐. 여행 가서 이것저것 선물도 내가 다 사주고 그랬는데 시침 떼는 거 좀 봐. 선생님, 얘 믿지 마세요. 무슨 목적을 갖고 이 병원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얘 믿었다간 큰일 나요.” “나가 있어라는데 왜 그러고 서 있지.” 나는 할 수 없이 닥터 윌헴에게 떠밀려 문밖으로 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울먹거리는 애경의 음성이 복도까지 새 나왔다. 다시 진료실 들어가 따지고 싶었으나 온몸이 떨려 문을 열 기력도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겨우 발걸음을 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대기실은 한산했다. 애경의 엉엉 우는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그날, 애경이가 명함을 놓고 갔으나 그 사람으로부터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폴이라는 남자와 헤어진 것도 몰랐다. 시야가 몽롱해져 눈을 감고 있는데 병원이 떠나갈 듯한 애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그녀의 본성이 발동을 한 것 같았다. “너 영주권 없이 여기서 일하는 거, 불법인 거 잘 알지?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이 병원도 문 닫아. 날 무시하고 내 앞길을 가로막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 똑똑히 보여줄게.” 번쩍 눈을 뜨니 닥터 윌헴과 주차요원이 애경이를 부축하고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민우와의 일은 닥터 윌헴도 알고 있다. 이렇게 애경으로부터 밝혀질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한 체, 나는 내 입으로 슬픔과 고통에서 헤매던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