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가마우지 / 박봉진

2011.06.20 14:25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361 추천:4

그해 오월 한 날은 덤으로 호사를 누렸다. 일정대로라면 이스탄불공항을 이륙한 뉴욕 행 ‘콘티넨탈’여객기는 대서양상공 어디쯤에 떠있어야 할 시각이다. 그러나 이륙했던 비행기바퀴가 접혀들지 않아 곧장 회항했다. 부랴부랴 이튿날의 ‘에어프랑스’에 인계될 때까지 우리 일행은 그 항공사 승무원 전용호텔에서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촘촘했던 17일 투어동안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그리스-터키 등 5나라를 강행 순방하느라 정신이 헛갈리곤 했다. 머리를 좀 정리할 여유가 생겼으니 되레 다행이지 싶었다. 호텔은 마르마라해협 동안(東岸) 이스탄불의 아시아 쪽 언덕바지에 있었다. 그러니까 터키는 국토의 97%가 아시아 쪽에 있으면서도, 유럽 쪽 3% 영토를 내세워 서구국가라고 자임하는 양 대륙 국가다. 터키 제1도시 이스탄불 역시 지중해에 맞닿은 에게해와 북쪽 흑해간의 중간을 가르는 마르마라해협과 700m폭의 흑해출입구 보스포러스해협을 도시의 안방 같은 내해로 여긴다. 그래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양 해안(海岸) 땅을 다 포함하고 있는 세계 유일 도시다.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언덕길을 산책하거나 호텔 안에서 수영을 즐겼지만, 나는 마르마라해안 바위축대위에 나앉아 유럽 쪽을 건너다보거나 흑해로 들어갈 수속을 기다리는 듯 내해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들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문득 클로즈업되는 영상, 어제 선상에서 본 보스포러스해협 양 언덕 요새에서 좁은 해협을 노려보고 있던 성채의 위용. 그러했겠구나. 14세기 오스만터키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최후 목줄을 죄기 위해 흑해 쪽에서 들어오는 식료며 각종물자, 인력을 잔악하게 통제했다고 했다. 그 후 여세를 몰아 지중해연안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했던 대제국을 세웠으니. 그 후예가 지정학적 요지를 놓으려했겠는가. 지금도 동서세력 간 힘겨루기, 서구권과 이슬람권의 평행 대를 틀어쥐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1차 세계대전 때 터키는 독일과 한편이었다가 패전 후, 중동지역 여러 속주와 일부지역을 내주었다. 또 그리스와 혈전 끝의 로잔협약에서 수많은 인접 섬들을 그리스에 양보한 대신, 유럽대륙 일부 영토는 끝까지 붙잡았는가 보다. 터키는 그들 국부로 추앙하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개혁이후 이슬람체계에서 급속히 현대화되고 있다. 현재 나토가입국가가 되어있기도 하다. 여행 테마가 성지순례다.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그 많은 자료들을 정리해본다고는 하지만, 어디서부터 헝클린 역사의 실타래 양끝을 찾아내랴. 벌써 늦은 오후 해 그림자가 바닥에 깔렸다. 해변 높다란 돌기둥위에 가마우지 두 마리가 날아와 하염없이 앉아있다. 에게해와 인접 해협은 석회질암반이 바닷물에 잠겼기 때문에 플랑크톤이나 해초가 없어 바닷물고기가 없다고 했다. 가마우지는 어째 먹을 게 없는 이 해변에 와있는지. 콘스탄티노플의 거대 지하 저수궁전에 가보기나 했을까. 철옹성이 포위당할 때를 대비해서 만들었다는 엄청난 규모의 저수량과 시설이라니. 336개 돌기둥 밑동을 장식했던 도리아식 조각품들이 무색할 정도로 색색 잉어 떼가 헤엄치고 있던데. 저수 궁전이 대제국을 지켜내지 못했듯 그 물고기도 가마우지에겐 소용없지 않겠는가. 오늘은 나그네의 시름이나 좀 풀어주면 좋으련만. 순간 스쳤던 섬광. 한 도시를 두고 그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뀐 것에 생각이 머물렀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비잔티움이었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로마황제 콘스탄틴대제는 4세기 초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그리고 재건한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고토 로마에는 로마교황권이 남아 나중 열국으로 분화됐으나 그 제국은 1100여 년간 존속,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동로마제국이다. 비잔틴제국으로도 불린다. 세계의 문화유산 성 소피아사원도 그때의 건축물이다. 같은 뿌리 종교였지만, 오늘날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바티칸의 로마 캐토릭 본산과 동구권 및 러시아로 퍼져 독특하게 발전한 그리스 정교의 분기점을 여기서 불 줄이야. 그러나 이슬람권이 그들 전성기 17세기 초, 사원 내벽의 보물인 성화를 회칠로 뒤덮었다. 그리고 근처에 이슬람사원 블루모스크를 축조했다. 그 때 동로마제국의 또 다른 걸작 중앙광장 히포드럼의 많은 돌기둥과 석재를 뜯어와 썼다니, 이런 반달이즘에 종교의 순기능이 어찌 보일까. 중앙광장에는 이집트신전에서 옮겨다 놓은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그대로 있다. 그리스 텔피의 고대 유물 ‘뱀 기둥’은 부러져나간 채로, 콘스탄틴대제의 거대 돌기둥 기념비는 바깥을 둘렀던 놋쇠 부조물이 다 벗겨나간 속살로 서있지만 오늘 날도 터키의 노다지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다. 성지 5나라 여행기간, 후반 6일간은 터키의 남부 지중해와 서부연안 이른바 아나톨리아에 집중됐다. 현재도 터키의 인구밀집지역이다. 계시록의 7교회 유적들이 모두 이 지역에 산재해있기도 하다. 특히 사도바울의 족적이 찍혀있을 옛 소아시아 수도 에베소유적지에는 현존하는 그 시대의 어느 건물보다 컸다는 대 건물 잔해가 늘려있다. 거기서 머지않은 곳에 사도요한이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만연을 보냈다는 곳에 요한교회와 마리아교회가 있었다. 막연한 전승인지 사실이었는지는 알길 없으나 구약시대 주 무대가 이스라엘임에 반해 신약시대 주 무대는 소아시아로 불렸던 이 지역 터키임을 간과할 순 없으리라. 우리는 터키의 중남부 하이웨이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끝이 뵈지 않는 올리브농장과 과수농장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렇다. 협소한 이스라엘 일부지역을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라고 한 것은 표현이 좀 과한 듯싶었다. 여호와가 당초 이곳에 선민을 정착시키지 안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신약초기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사람들의 지하 동네며 바위 속 교회 그리고 기묘한 버섯바위 골짝 가파도기아를 뒤로하고 터키국내선 비행기로 이스탄불에 왔다. 이스탄불은 1100년 비잔틴제국(동로마)과 600년 오스만터키제국 수도였다. 한 도시인데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터키시대 이후 이스탄불로 불리고 있다. 그 도시 이름에는 동서세력의 판세와 요동쳤던 세계역사가 스며있다. 로마제국과 그리스 등 서구제국은 동진을, 동방제국 터키는 서진을 꾀했다. 그 거점도시가 이스탄불이었던 것을-. 그 결정판 십자군전쟁도 역사를 되돌리진 못했다. 예루살렘의 다윗성전 터에 이슬람사원이 들어앉아있는 것과 신약시대 주 무대 소아시아와 성도 콘스탄티노플은 언제 회칠이 벗겨지려나. 가마우지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나도 가야지. 호텔에 걸려있는 터키국기, 혈전의 상징이라는 붉은 색 바탕이 해협의 노을에 젖어 더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