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사랑 / 백남규

2011.07.17 14:12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211 추천:4

5년전 나는 마흔살이었다. 이혼한 지 2년이 조금 더 지났다. 늘 새벽까지 깨어 있었고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정신은 말짱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남미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패니쉬 유행가 소리로 하루 종일 시끄러웠고 지저분했다. 2층은 주로 독신자들이 살았다. 길다란 복도끝의 문을 열면 바로 세븐 일레븐 주차장이 나왔다. 나는 늘 거기서 말보로담배와 버드와이저를 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이어서 언제든지 밤 늦게라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냉장고 안에는 시어터진 김치와 한국마켓에서 사온 밑반찬이 곰팡이가 슨 채 썩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는 부엌뿐이 아니라 침대와 소파 심지어 라디오 속에서도 기어나왔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유백색 알이 소복히 쌓여있었다. 식탁에는 며칠 전에 산 바나나가 검은 반점을 무수히 내뱉으며 누워 있었다. 오늘은 청소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밤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민와서 처음 배운 것이 세탁일이라 나는 세탁소에 다녔었다. 내가 하는 일은 기계적인 일이다. 주머니를 검사하여 볼펜이나 이물질을 꺼내고 얼룩이나 때를 뺀 다음 드라이 클리닝 기계속에 옷을 집어 넣고 ‘삐’소리가 나면 꺼내어 행거에 건다. 기계속에서 옷이 빨아지는 동안 또 한 무더기의 옷을 준비한다.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아무 감흥없이 일을 한다는 건 참 고역이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 주인이 바뀌자 손님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한 손님은 형광등 불빛에 얼룩을 찿기 힘들자 바깥으로 옷을 들고 나가서 햇빛에 비쳐 보았다.실크 옷은 색깔이 변했고 소매길이가 짧아지기도 했다. 흰 색이 분홍빛이 되었다는 손님의 불평에 새 옷값을 물어주느라 아내와 나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내와 헤어진 후 세탁소를 팔고 집근처의 노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보일러를 켜고 물이 끓는 동안 청소하고 옆 도우넛가게에서 커피와 머핀을 사와서 먹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으면 적막한 방안공기가 나를 외로움에 떨게 했다. 식탁은 아침에 집을 나갈 때의 어지러운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뻣뻣하게 말라 비틀어진 생선토막, 물기가 날라가서 겉잎이 쪼그라진 김치, 여기 저기 튀어 지저분하게 말라붙어 있는 밥풀이 폐허처럼 적막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담배를 피우며 벽에 기대앉아 냉장고에서 꺼내온 소주를 들이킨다. 답답했다. 미칠 것 같았다. 깊은 밤 인적 없는 15번 도로를 밤새도록 쉬지 않고 라스베가스로 달려가 하얗게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했었다. 텅 빈 사막에 검불만 찬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여자가 그리웠다. 살이 그리웠다. 아내와 헤어지자 욕망은 더욱 세차게 끓어올랐다. 머릿속은 온통 여자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꽉 차 있었다. 자정이 지나 누드바에 간 적이 있었다. 어둡고 시끄러운 실내엔 홀랑 벗은 백인 여자들이 훼션모델처럼 왔다, 갔다 하거나 기다란 기둥을 잡고 돌거나 다리를 꼬거나 앉았다.일어 섰다 했다. 맥주를 마시며 여자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욕망은 오히려 사그라졌다. 옷 벗은 바비인형 같은 여자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그만둔 수음을 다시 시작했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살까 했지만 사랑없는 섹스는 한순간의 배고픔은 면하겠지만 일을 치른 후에 더욱 허탈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중략> 그날 산타바바라에서 LA로 돌아오면서 그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핸드백에서 비퍼소리가 났다.번호를 확인한 명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 남편한테 연락이 온 모양이다. 명혜의 남편은 건축업을 했다. 사건이 터진 건 3년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마셨고 그것 때문에 여자와 자주 다투었다. 그날도 술이 취해 들어온 그는 여자와 심하게 다투었고 화가 나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새벽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은 그날 과속으로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 척추를 못쓰게 되지도 다리를 절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 남편은 누워서 세월을 보내고 있어요. 퀭한 두 눈을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가끔 쓸쓸한 얼굴이 되던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다보면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실직,이혼,사고,병마-지뢰밭같은 인생을 견디려면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울어도 한 번 떠나간 여자와 잘라진 다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는 발목을 잡혀버렸다. 잦은 음주로 이미 가정은 풍지박산 일보 직전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떠날 수도 없게 된 여자가 가여웠다. 잘못된 부부사이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다. 빼려고 하니 아프고 그냥 두어도 살은 썩어갈 것이니까. “참 주착이지요.”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지요.” 나는 그녀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가슴 속의 멍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위로 받고 싶어서다. 타인에게 다가가려면 우리는 달걀이나 뭐 그런 것으로 타인의 멍을 엷게 해주어야한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움칠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나는 몸을 진저리치듯 한 번 떨며 여자의 어깨를 와락 당겨 안았다. 파도소리가 들린다. 허연 포말을 만들면서 해안을 적셨다가 급하게 뒤로 빠지는 바닷물을 보았다. 창세 이후 지금까지 저 파도는 지금 저 모습대로 하얀 포말을 만들고 사라지고 했을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파도는 굉음을 내면서 포효해 보기도 하지만 끝내는 허연 포말로 꺼져 가야하는 것. 그녀와 이렇게 해변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감싸고 바다를 바라보니 우리가 아주 예전부터 연인사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순간적으로 타인의 영혼속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여자는 이제 나에게 타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모래를 털고 일어나자 쏟아지는 햇볕에 잠시 어지러웠다. “남는 시간은 뭐하세요?” 불쑥 여자가 물었다. “뭐, 별로” 나는 여자생각만 한다고 할 수는 없어서 머뭇거렸다. “요즘은 당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실 여자와 아무 무심히 벌거벗고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느끼는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사회는 인간에게 ‘생각’을 심어준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어떤 규범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낌을 억눌러야한다. 울고 싶을 때 마음놓고 울지도 못한다. 아이가 계속 울게되면 부모들이 매를 든다. 느낌은 억압되고 억눌려진다.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행동하도록 길들여진다. 우리 윗세대들은 여자가 너무 밝히면 안된다는 유교적인 교육을 어릴때부터 받아 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욕구를 안으로 삭이는 수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명혜씨” 여자는 말없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늘 제 생일입니다. 집에서 저녁식사하고 가세요.” “좋아요.” 여자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나에게 기대어 잠시 쉬겠다고 했다. 따뜻하고 촉촉한 숨소리가 내 귓바퀴에 와 닿았다. 운전하는 내내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내 몸이 향긋하게 되어 뭔가 고귀한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의 유배지에 귀한 손님이 왔다. 바퀴벌레가 들끓던 방에 구원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나에게 눈을 뜨고 자기를 똑바로 보라고 했다. 나는 여자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여자의 눈은 맑았다.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비육체적인 부분이 눈이다. 맑은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의 눈빛에 나를 향한 부드럽고 따뜻한 무엇이 느껴졌다.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몸속의 부드러운 관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는지 희고 고운 손으로 내 몸을 어루만졌다. 내가 정신없이 그녀의 젖가슴을 키스하자 명혜는 몸을 꿈틀거리며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고독과 적막이 일순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행복했다. 그녀의 불같이 뜨거워진 몸 속으로 나는 깊이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의 몸과 마음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름답고 새로운 나라의 문을 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