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이 되고저 / 노기제

2010.08.24 10:23

미문이 조회 수:820 추천:1

비우자. 비운다. 많이도 쓰던 말입니다. 어느 순간 정말 비어 있나 들여다 보았더니, 웬걸요. 말로 표현 한 만큼, 정말로 비우기를 원했건만 실제로 비우기는 커녕 점점 더 꽉 찬 현상은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나, 그, 어느 누구도 다 똑같은 말들을 합니다. 욕심 없다. 욕심을 버린다. 쉽게 말했더랬죠. 그랬건만 어느 순간, 엄청나게 커다란 욕심덩어리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착각 했다는 변명이 이해 안 되는 현상입니다. 아직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부심과는, 모양새가 다른, 착각인지 욕심인지가 나를 짓누릅니다. 답답합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다 꺼내 버리고 가벼워 지고 싶습니다. 이민 3 년차 되던 해 였습니다. 결혼 할 때, 이민 올 때, 그냥 친정에 두고 온 잘났던 흔적들. 반장 임명장들, 수석합격 표창장, 육상선수 생활 동안에 받았던 상장들, 대충 뭐 그런것들입니다. 까맣게 잊고 살던 그 보따리를 미국 방문하신 친정 엄마가 싸들고 오셨던 겁니다. 그런걸 뭐하러 갖고 오셨냐니까, 어차피 내것 아닌 네것이니 주인이 보관하라는 말씀이셨구요.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티격태격 말싸움 끝에 남편이 대뜸 나더러 잘난척 한다는 단어를 썼습니다. 된통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에 잠잠히 생각 해 봤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잘난척 할 수 있는 그 뭔가가 있는가를. 이리 따져 보고, 저리 따져 봐도 어느 것 한 가지 내가 남편보다 잘난 건, 한 가지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담 바로 엄마가 싸 갖고 오신 그 종이장들이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싸우다 말고 그 뭉치를 남편 앞에 펼쳤습니다. 한 장 한 장 찢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놀란 표정으로 그걸 왜 찢느냐 했습니다. 만약 내가 잘난척을 했다면, 이것들이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될 터이니 아예 흔적조차 없이 하겠다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잘난척이라니? 내가 뭐가 잘난 구석이 있어 감히 남편 앞에 잘난척을 하겠습니까. 이건 하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겸손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도 누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흔적이 무슨 소용입니까? 과거에 금송아지 못 가져 본 이민자 있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미래가 중요하단 생각입니다. 과거에 매달려 살고 싶은 맘 없었거든요. 말문이 막힌 남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면서 내 진심을 알아 주길 원했습니다. 그 후론 남편의 입에서 잘난척 한다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몽땅 찢어 버린 거,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내 자신을 칭찬했습니다. 살다보니 잘난척 할 근거가 또 생겼습니다. 문단에 등단하고 상패와 상장이 생기고, 공로패들이 생겼습니다. 주욱 진열 해 놓고 흐뭇해 하며 십여년 흘렀습니다. 비록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있어도 웬지 자랑스러운 마음은 사실입니다. 스르르 미소가 지어지면서 흐믓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어떤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등단 한 문인도 아닙니다. 나처럼 자기 얘기를 쓴 수필도 아닙니다. 자신의 삶 속에 녹아 든 사람들과의 이야깁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잡아 주고, 몇 푼 안되는 돈이지만 그들에게 나누어 쓰는 분, 내 눈에 비친 천사였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 머리가 빠져가는 중늙은이라는 본인의 표현도 결국 천사만이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손님 창작방에 올라오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뇌진탕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자각입니다. 읽어서 감동 되고, 가슴이 뜨거워 져 눈물을 쏟을 수 있는 글 입니다. 지금까지 쓴 내 글들을 박박 다 찢고 싶어졌읍니다. 부끄럼이 밀려 옵니다. 무엇을 위한 글이었나 다시 읽어봅니다.역시 잘난척이라 말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틀린 글을 써 왔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보잘것 없는 글들로 계속 상도 타고 싶다는 욕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다는 허영심, 인정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등등의 쓰레기들로 가득 찬 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기적 삶을 살면서 어찌 남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의 글을 쓸 수가 있겠습까. 역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천사들을 만나는 경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감이 없으니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는 건 당연했습니다. 바로 붓을 꺾고 싶어집니다. 부끄러워 숨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우선 눈에 보이는 쓰잘데 없는 것들을 쓸어 버렸습니다. 상장, 상패, 등단패,…………… 그런것 하나도 없는 분들이 생활 속에서 얻은 천사들과의 생활이야기를 감명 깊게 써서 읽게 하십니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십니다. 부끄러워 숨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붓을 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상을 받아야 한다는 망상을 지우기로 했습니다. 여러사람에게 잘 알려 진 이름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허영도 버리고자 노력 할겁니다. 우선은 내 생활 속에서 천사의 모습을 닮은 어느 한 구석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러러면 지금까지 채워 진 대부분의 것들을 다 끄집어 내야겠습니다. 버려야겠습니다. 비워야겠습니다. 반드시 비워야겠습니다. 혼자선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도와 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조금씩, 끝내는 텅 비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