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 김영강

2012.02.14 10:37

관리자_미문이 조회 수:118 추천:2

조용한 아침나절이다. 미동도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던 하영은 무심결에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초침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아홉 시 반이었다. 홀로 앉은 시간이 한나절을 훌쩍 지나버린 것 같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여느 때 같으면 회사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바짝 긴장하고 있을 시간이다. 시간이 후딱후딱 초침처럼 지나가버려 점심때도 잊고 살았다. “하영, 런치 타임. 런치 타임.” 하고 동료들이 사무실 창을 톡톡 두드려야만 ‘아, 벌써 열두 시구나.’ 하고는 시계를 쳐다보곤 했다. 지금은 휴가 중이다. 며칠 동안 컴퓨터는 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다. 가슴이 파르르 떨리며 아스스한 느낌이 쏴 하고 전신에 퍼진다. 사느라고 바빠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쉴 새 없이 밀려오며 그녀는 지금 혼란에 빠져 있다. 외로움이 산더미만한 파도가 되어 온 집안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갑자기 정적을 깨며 전화기가 자지러질 듯이 울어댔다. 동시에 남편 얼굴이 확 떠올랐다. 가슴이 철커덩 천길만길 내려앉는 충격 속에 쿵쿵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수화기를 들었다. 남편이 아닌 동생의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데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지금 언니 집으로 가는 중이니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에 하영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동생은 어찌 지냈느냐는 안부는커녕, 이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완전히 명령조로 말했다. ‘혹시 그 일을 알아버렸나?’ 남편이 별거선언을 하고 집을 나간 지가 보름이 넘었다. 하영은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소문은 빨랐다. 현관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동생은 다그쳤다. “언니, 형부가 집 나갔다는데, 정말이야? 정말 맞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생겼지. 그렇지?” 바짝 약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하영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이혼하재. 그래서 시간을 두고 좀 생각해 보자니까 별거선언하고는 보따리 싸가지고 자기 발로 걸어나갔어.”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은 게 누구 덕인데 이혼을 하재? 근데 언니, 형부 서울 간 거 알아? 집 나와서 바로 서울 갔대.” 동생은 하영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똑똑 끊어지는 차가운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형부한테 여자 생겼지? 그렇지? 서울 있는 여자지?” 가정의 모든 경제는 하영이 걸머지고, 남편은 빌빌거리며 골프나 치면서 무역을 한답시고 서울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던 동생이다. 남편이 사업관계로 두어 달씩 한국에 머무른다고 하면, 혹시 여자가 생겼는지도 모르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러나 하영은 동생의 말을 대수롭잖게 여겼었다. “여자 감춰놓은 지가 벌써 육 년이나 됐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았으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와.” “뭐야, 육 년이나 됐어? 한데 그렇게 눈치를 못 챘단 말야? 내가 뭐랬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언니한테 너무 서운해. 왜 내가 언니 별거사실을 남한테서 들어야 해? 뻔하지 뭐. 내가 걱정할까 봐 날 위해서 말 안했다 이거지.” 하영의 대답까지 다 해버리며 동생은 서운한 마음부터 털어놓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너한테 말했으면 네가 가만히 있었겠니? 당장 이혼하라고 그랬을 건 뻔한 노릇 아니니?” 하영의 남편은 미국에 유학 와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직장생활이 적성에 안 맞는다면서 회사에 붙어 있질 못했다. 결국은 무역업에 손을 댔고, 그 규모는 보따리 장사나 다를 바 없어 집에다 사무실을 차려놓고 침실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과의 비즈니스라 밤중에도 전화가 걸려와 그들은 자연스레 각방을 쓰게 되었다. 하영은 각방을 쓰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하루는 한밤중에 갑자기 잠이 깼다.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랐다. 냉수를 마시려고 부엌을 향하는데 남편의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사업상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하고 반가워서 방문을 열려는 찰나, 이어지는 남편의 목소리는 예리한 둔기가 되어 그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왜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몰라? 날 하루 이틀 겪었어? 벌써 육 년이야 육 년. 그런데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계약이 성립됐으니까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어. 내가 곧 서울 가니까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하자고.” 잠깐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중략 &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