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잔치 / 최영숙

2010.06.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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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 전 쯤, 한국에서 방송인이며 여류 수필가이셨던 임 선생님의 수필 교실에 나가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의 회갑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우리 교실에 전해졌다. 그동안 키워 내신 선생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축하를 해드리고 싶다는 의사가 받아들여져서, 오십여 명 정도의 글 제자들이 한 곳에 모이기로 했다. 선생님 편에서 압구정동에 정해놓은 연회장소를 알려왔고, 우리들은 그날, 모두 한복을 입고 가기로 했다. 회갑연을 한 주 앞에 두고 있던 날이었다. 강의 시간 말미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요지인즉, 그 날, 당신은 품위 있게 멋진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무엇보다도 수필을 쓰는 사람들인 만큼 격조 높게 해 줄 거라고 믿어요. 난, 빨간 윗옷에 까만 바지를 입는 여자도 싫어하지만, 한복 입고 디스코인지 고고 춤인지, 그런 춤추는 사람들은 더 질색이에요!” 선생님은 꼭꼭 힘주어 말하셨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러보니 사실 그럴만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 교실에서는 국립 극장에도 섰던 문우가 살풀이춤을 추기로 했고, 반장이 사은시를 써서 낭독하기로 했다. 우리 교실에 있는 십여 명의 아줌마 학생들은 선생님의 막내 제자들이었으므로, 우리는 외부의 다른 선배들 앞에서 선생님의 명예와 우리들의 자존심을 걸고 한판 승부에 들어갈 것을 다짐했다. 회갑연 장소에 가보니, 백장미를 메인 콘셉트로 한 데커레이션도 역시 선생님의 성품대로 깔끔하고 세련돼 보였다. 가족은 물론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도 여러 분 있었고, 안쪽에는 실내악 사중주단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먼저 선생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고, 다른 분들의 간단한 축사가 있은 다음에, 사은시가 낭독되었다. 반장은 목이 메어 시를 낭독하였다. 감동적이었다. 앞 순서가 지나가고 나서 실내악이 조용히 연주 되는 가운데, 우리는 모두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어머, 저 분, 누구 아니야? 평소 같았으면 호들갑을 떨어야 할 판임에도 우리들은 소곤소곤 말했다. <중략> 홀의 중앙은 신명난 한복 춤꾼들로 야단법석이었다. 한참 신이 나서, 으쌰으쌰 들어가고, 나가고, 림보 림보 까지 하면서 나름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반장 선배가 그만해, 그만해! 소리를 지르며 우리들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리에서 빠져 나와 보니 선생님은 이미 안색이 변해서 얼굴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요청도 안 한 밴드는, 아마 연회장 측에서 제공한 서비스 패키지였던 모양이다. 누구야? 누구? 누가 먼저 시작했어? 반장이 톤을 낮추고 눈을 홉뜨며 질책을 해댔다. 하지만 향이 선배는, 뭐 어때요? 이런 날은 이렇게 놀아야지, 이런다고 품격이 떨어지남? 하면서 시종 당당하기만 했다. 그 후로, 꼭꼭 부탁을 했음에도 한복 막춤의 원조가 되어버린 우리 앞에서, 선생님은 그 날의 이야기는 종내 꺼내지 않았다. “요새 누가 환갑잔치를 해? 여행이나 가.” 주변의 친지들이 한결 같이 말한다. 앞으로 몇 년 뒤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래도 이 환갑잔치가 큰 이벤트로 남아있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니 앞질러 고민 중이다. 나는 환갑잔치를 하고 싶다. 생일도 내게는 특별한데, 환갑이라니 또 얼마나 특별한가. 친구들, 친지들 모아놓고 우아하게, 격조 높게 나도 그러고 싶다. 축가도 부르고, 시도 낭송하고, 실내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조용조용 말하며, 품위 있게 음식도 먹고 싶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그건 잔치 같지가 않다. 잔치에는 신명이 있어야 하는데. 우아한 격조와 신명이 함께하는 회갑연. 좋은 방법이 없을까......왜들 환갑잔치를 하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아! 환갑잔치,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