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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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어느 노문학도의 독백

2019.11.22 16:15

라만섭 조회 수:28

어느 노 문학도의 독백

 

고국을 떠난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머니 품에서 익히고 배운 모국어에는 마치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동질감이 묻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모국어로 듣고 말하는 것이 편하듯, 모국어로 쓰는 것 또한 부담 없이 자연스럽다. 이민 1세로서 영어구사 면에서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한둘이 아님을 자인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화해 가는 모국어에 대해서도 일정한 한계성을 느끼게 된다.

 

말과 마찬가지로, 글도 쓰고자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좋은 표현이 아니듯, 쓰여진 모든 글이 다 좋은 표현이라는 보장은 없다. 잘 쓰여진 아름다운 글도 있겠고 그렇지 못한 글도 있다. 따라서 모든 글에서 문학적 가치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민중서관이 발행한 국어사전은, 문학을 상상의 힘을 빌려서 문자로 나타낸 예술 및 그 작품이라고 풀이 한다. 한편 웹스터 사전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또는 비판적 성격을 지닌 산문이나 시, 소설 같은 모든 작품(Writings), 그 우수성(Excellence) 여부를 떠나서 다 문학이다’ ‘단지 과학 논문이나 뉴스 보도 등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신인 발굴에 있어, 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출판사의 검증을 통과하고 시장(서점)에 나온 신인 작가의 작품은, 다시 일반 독자의 심사를 받게 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장 원리가 작용 되고 있다고 하겠다. 신문사의 신춘문예 공모나 잡지사의 신인상 공모 등은 찾아 불 수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문학 동인들이 자비로 동인지를 발행하여 문학 관련 단체에 무료로 기증하고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등단이라는 특유의 제도가 관례화되어 신인발굴에 기여를 해오고 있다. 하지만 한편 진정으로 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의 눈에는, 문학에 관한 그 어떤 형태의 기득권적 배타의식도 추하게 비쳐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온다.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자연도태(Natural Selection)라는 기능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문단은 아마추어 문인을 포함한 전체 문인들에게 열려 있어야할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 늘그막(2009)에 글쓰기 대열에 새치기로 끼어들 만용을 부린 나는 자칭 문학노년이다. 건강 상실에서 오는 실의를 달래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껴오던 이런 저런 일들을 산문 형태의 글로 옮긴 말년의 내 모습을 담아 손자들에게 남기려는 동기에서 시작한 것인데, 그후 알게 모르게 글쓰기가 습관이 돼버렸다. 어쩌다가 얼마동안 글을 못쓰는 일이 생기든가 하면 마치 중요한 일과라도 빠트린 듯, 보완 삼리가 작용하여 이내 글쓰기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매너리즘(Mannerism)에 젖은 나의 글을 읽노라면, 어쩐지 딱딱한 인상을 풍기는 삼류 칼럼 같아서 내심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 한계를 스스로 느껴오는 터이다.

 

내 주위에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후에 자서전이나 수필집을 엮어서 책으로 출간한 사람이 여럿 있다. 그들은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신선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한글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서툰지라 많이 힘들었다. 컴퓨터에 한글 자판을 깔고 한글타자를 익히는 일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겨서 완성된 글을 프린트하고 나니, 한글 타자에 어느 정도의 자신이 생겼다.

 

그럭저럭해서 쌓인 수필이 60여 편에 이르다보니 이번에는 또 다른 만용을 부리게 되었다. 에쎄이 집을 내기로 한 것이다. 경험 부족에서 오는 졸속 결정으로 적지 않은 착오를 편집 과정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1, 교정은 최소한 3번 이상 한다. 2, 정오표(Erratum)을 준비한다. 3, 가능하면 현지 출판소를 이용한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불평할 데가 따로 없다. 그 이후에 100여 편이 또 쌓였다.

 

글쓰기는 더 이상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한국 경상북도의 칠곡에 사는 70~90대 할머니 84명이 출간한 시집 시가 뭐고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뒤늦게 글을 배운 그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담은 시집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던 모양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할머니 작가들의 문학 활동이 누부시다. 63세의 여성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이, 일본의 최고 권위 문학상(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지난해 일본의 베스트쎌러 1위는, 백만 부가 넘게 팔린 95세 할머니의 작품 ‘90, 뭐가 경사라고가 차지했다고 한다. 105세 할머니의 작품 ‘103세가 돼서 비로소 알게 된것50만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는 것이다. 백세 전후 할머니들이 서점 가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나이가 많아서 글을 못 쓴다는 말은, 한낱 핑계에 지나지 않게 됐다.

 

이미 밝혔듯이 나의 글쓰기는 처음부터 아마추어 영역에 머물러 있다. 굳이 거기서 벗어날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쓴다는 자체로 만족하고 있다. 이 같은 심리의 저변에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한계를 나 스스로 인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나은 다른 작가의 훌륭한 글에 공감하고 흥분을 맛보기를 기대하는 심리를 대리 만족이라 한다면, 혹시 내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때로 수수께끼 문제를 풀듯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접할 때면,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다. 비록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알기 쉬운 말로 쓰고 싶다.

 

글쓰기란 나에게 있어, 노후를 받쳐주는 귀중한 취미 생활의 일부로서, 마치 잃어버렸다가 뒤늦게 되찾은 소중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올림픽 경기는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나도 이 같은 올림픽 정신으로 글쓰기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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