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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양화가 갈곳은 어디인가

2018.03.30 07:06

라만섭 조회 수:7304

양화가 갈 곳은 어디인가

 

솔직히 말해 요즘은 온갖 사이비 현상과 역설적 표현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그 속에서 매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1949년 영국의 작가 죠지. 오웰(George Orwell), 그로부터 35년 후의 완전 통제된 전체주의 사회를 상정한 소설 ‘1984’를 발표 했다. 이책은 출간되자마자 영국과 미국에서 큰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1984’에서 개인의 자유가 통제 되는 큰 정부(Big Brother)의 가공할 역할을 부각 시킨다. ‘전쟁이 평화 이다. 자유는 예속 이다. 무지가 힘 이다. (War is Peace. Freedom is Slavery. Ignorance is Strength.)'등 그의 역설적 표현은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이비와 부조리가, 진실과 상식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역설적인 표현이 나올 만도 하다. 잔인한 친절(Cruel Kindness), 달콤한 슬픔(Sweet Sorrow), 우뢰 같은 고요(Thunderous Silence), 믿지 못할 신뢰(Faith Unfaithful), 거짓된 진실(Falsely Truth), 참된 거짓(True False)등은 그 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경제학 이론에 잘 알려진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라는 것이 있다. 16세기 영국의 토마스 그레샴 경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영국 사회의 현황을 설명 하면서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예를 들어 당시의 금본위제도하에서, 20온스를 금1온스와 맞바꾸도록 정해 놓았는데, 시장에서는 은15온스가 금1온스와 맞교환 되고 있다 고할 때, (양화)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은(악화)이 판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과대평가된 돈(악화)이 과소평가된 돈(양화)을 몰아낸다는 설이다.

 

그레샴의 법칙은 비단 경제 현상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현상을 설명 하는데 에도 원용되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선과 악을 일목요연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준을 어떻게 설정 하느냐에 따른 문제가 있다. 그 기준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주관적인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가치관을 객관화 하려고 시도 하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영구불변의 절대적인 기준을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가치체계는 과연 무엇에 기준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는 자연

이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은 선악을 떠나 중립적인 입장에 있다.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을 수용 하는 모성을 지니고 있다. 차별하고 강제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굳이 선과 악을 구분 하는 기준을 찾는다면 자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악의 편일 테고 자연에 순응 하는 태도는 선의 편이 될 것이다.

 

여기 자기부모를 잘 돌보지 않는 자식이 있다고 할 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를 악인 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선악의 개념은 상대적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은 강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에 효도하는 행위는 선행이 된다. 선행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 이라고 믿는다.

 

공자님도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진짜 같아 보이는데 실제로 알고 보면 가짜인 경우가 많다. 얼핏 보아서는 분간하기 어렵다. 거짓이 진실을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한 예로 설탕은 포화지방과 더불어 심장병 유발의 주된 요인이 되는 것인데도, 설탕 업계의 집요한 로비로 진실은 왜곡돼, 포화지방만을 부각 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혈압 약에 대한 진실 공방도 거대 제약회사와 의학계에 의해 과장 되고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때로는 사실을 폭로하고 일반에게 경고성 메세지를 보내는 일부 의사들의 양심선언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당황할 때가 많다. 이런 일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에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세상은 믿을 곳이 못되고, 진실이 아닌 거짓이 지배 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든다. 기복신앙을 앞세우며 기득권보호에 여념이 없는 일부 사이비종교집단은 영혼을 부식 시킨다. 그러기에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며 영혼의 정화를 꾀하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지옥은 비어 있다. 모든 악이 지상으로 몰려있다. (Hell is empty. All the devils are here.)’ 라고 한 셱스피어의 풍자가 떠오른다.

 

인간이 존재 하는 곳에는 언제나 양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화가 있으면 악화도 있게 마련이다. 항상 윤리도덕 개념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은 상식이 통하는 곳이어야 한다. 법에 호소하기에 앞서 먼저 상식이 우선하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악화에게 쫓겨난 양화가 발붙일 곳은 어디란 말인가. 갈 곳 없는 양화를 저장해둘 마음의 창고를 미리 마련해둠이 어떨는지.

 

 

 

2016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