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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나의 폼페이 기행

2019.03.31 13:40

라만섭 조회 수:53

나의 폼페이 기행

 

대체로 여행을 다녀온 다음 며칠 동안은 여행 중에 겪었던 이런 저런 일들로 머릿속이 산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리되어 가게 마련이다. 여행에 함께한 사람들이나 현지에서의 경험들도 점점 희미한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여태까지 네 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는 폼페이(Pompei)에 두 번 들른 적이 있다. 한번은 2010년에 서울 대학교 총동창회가 주선한 서지중해 유역 크르즈 여행 팀에 합류한 일이었고, 다음은 그보다 앞서 1980년에 여행단의 일원으로 이탈리아를 일주하면서 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폼페이를 들먹이는 이유는, 2천 년 전 그곳에 살았던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 역사적 현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 목격한 여러 가지의 역사적 사실(유적)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알려진 대로 폼페이는 나폴리 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20여 킬로 쯤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는 활화산 베스비으스(Mt.Vesuvius)근처에 세워진 고대 도시이다. 폼페이는 2천년 전 화려한 생활을 즐기던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79824일 오전 11시에 베스비으스 화산(높이 1,220 미터)의 분화구에서 갑자기 미증유의 대폭발이 일어나 폼페이를 포함한 인근의 세 마을을 한순간에 삼켜버렸다.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유독 깨스및 용암 등의 분출물 아래로 폼페이는 순식간에 매몰되어 1,700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힌 채 인류역사에서 잊혀 져 갔던 것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약 2천명은,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산재와 돌맹이와 고온 깨스 때문에 질식사하거나 화상을 입은 채 생매장 됐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 전체 인구의 약10%에 해당되는 사람이 순식간에 죽어간 것이다. 그 보다 10여 년 전에도 폼페이는 지진을 겪은 후에 곧 재건된 일이 있었으나, 그로부터 16년 뒤인 서기 79년도에는 도시전체가 매몰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됐던 것이다. 당시의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어서, 도시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 거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폼페이가 다시 세인의 기억에 살아나게 된 계기는 서기 1592년 수로 공사 중에 지하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면서 부터 라고 한다. 부근을 통과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지하에서 고건물의 잔해와 많은 미술품들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1748년에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 왕실(프랑스 혁명 전 부르봉 왕조)은 모자이크제품이나 값진 벽화 등의 귀중품을 프랑스로 반출해 가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2천 년 전 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폼페이의 수많은 유적들은 살아있는 유일한 역사적 자료로서의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바둑판 모양의 거리는 옛 로마의 거리처럼 큰 돌로 포장 되었으며 중심에는 광장이 있고 호텔의 흔적도 보인다. 목욕탕(Stabian Bath), 원형 극장 등이 발굴 되면서 폼페이의 옛 모습이 차차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61년에 이탈리아가 통일 되고 난 후 부터이다. 그밖에 세탁소, 시장, 방앗간, 술집, 식당 등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지금도 콘서트나 기타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또한 폼페이는 포도의 생산지로도 알려져 왔는데 발글 된 많은 와인 항아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행해진 것도 통일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유적 발군 단은 빈 공간에 석고를 집어넣는 방법을 동원하여 당시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해 보고자 노력 했는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얼싸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 고통스러워 하는 개의 모습 등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잘 정비된 상하수도 시설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지금 현재 옛 모습의 4/5 정도가 들어난 상태이며 출토품들은 나폴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201011월의 폭우로 검투사의 집이 붕괴됐지만 발굴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고 들었다. 작업이 완료되면 고대 로마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큐피드 벽화’ ‘춤추는 폰의 동상같은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공개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빈부를 떠나서 폼페이에 있는 대부분의 집의 벽은 여러 가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성교 행위를 묘사한 것도 있다. 일반 가정집의 부엌 상태, 식탁위에 놓여 있는 빵과 각종 그릇, 빵 굽는 시설등도 보이며 매춘부들의 사창가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객님, 저희는 부엌에 닭고기, 생선, 돼지, 공작 등을 준비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진 한 주점의 메뉴판의 내용이다.

기록에 의하면 철도가 없던 시절인 1770년에, 14살의 악성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따라 15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가운데, 화산재에 덮여있던 고대 도시 폼페이를 찾은 적이 있다. 발굴 작업이 간혈적으로 이루어지던 당시의 폼페이는 아직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이다. 이 때의 경험이 후에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잘 모른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도 이탈리아는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유적과 루네쌍스의 발상지로서 독특한 위치에 놓여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도 1786년에 18개월 동안이나 이탈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가 30대 후반에 썼다는 이탈리아 여행기는 당시 이탈리아 여행 안내서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여행 시점은 폼페이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한 뒤의 일인데도, 문화사적 유물과 관련된 그들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이전인 18세기 만 하드라도, 유적 발굴이 아직 활성화 되지 못한데다가 열악한 도로 사정과 기타 사회 안전망 탓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교통 시설을 비롯해 각종 인프라(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힘입어 20~21세기의 여행 문화는 구조적인 변화를 맞았다. 미디어의 광고 면은 갖가지 여행 상품으로 넘쳐나고, 꾸어서라도 돈이 생기면 너도 나도 어디론가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 됐다. 18세기 유럽의 귀족들이교양을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해오던 고전적 형태의 여행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 이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사진 찍기에 바쁜 재미 위주의 여행으로 탈바꿈 했다.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는 현장 체험으로서의 여행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미 여러 해를 넘긴 일이긴 하지만, 나의 폼페이 여행은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 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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