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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참된 진보는 위대하다

2018.02.27 04:10

라만섭 조회 수:7

참된 진보는 위대 하다

 

참된 진보의 본질은 말이 아닌 행동에 있다. 진정한 진보는 인류애 정신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진보에게는 핍박 받는 선량한 약자를 위하여 오래된 구악을 타파 해나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사고는 합리적 이어야 하며 옳지 않은 구습에 안주 하는 것을 거부하고 보다 나은 새 질서 확립을 위한 지속적인 열정이 요구 된다.

 

낡은 질곡에 갇힌 채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구질서에 순종해 나가는 것이 미덕은 아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의구심을 가지는 태도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 왔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기존질서에 안주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진취적이고 자유사고를 즐기다보니, 부정과 불의에 예민하게 반응 한다. 흔히 행복도(幸福度) 에서도 뒤진다. 그들은 기존의 환경을 보다 좋게 바꾸어 사회적 약자를 도우려 한다. 그러다 보니 기득권 세력의 비판과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상인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험난한 길도 마다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역사속의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이상을 실현한 사람들은 대개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죠지. 와싱톤, 모두가 당연시 하던 노예제도를 철폐하는데 앞장선 에이브라함. 링컨이 그랬다. 그들은 당대의 온갖 비판을 무릅쓰고 세상을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다.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의 당원들 그리고 당시 부패한 구질서에 분연히 항거하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 가톨릭의 오랜 부패에 맞서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루터등 모두 역사가 기록하는 진보적 인물들 이다. 그밖에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진보적인 인물은 수없이 많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계몽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했던 선각자 도산 안창호의 숭고한 애국정신 역시 참된 진보의 본보기라고 하겠다.

진보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모든 진보가 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을 본다. 국기(國旗)를 불태우는 일을 예로 들어 본다. 우선 미국이나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보면--국가를 모독할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닌 이상--국기를 소각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것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헌법을 해석하는 사법부의 시각인 것이다. 인격체도 아닌 국기를 모독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모양이다. 국가 원수 모독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은, 국기나 국가를 초월 하는 자유중의 자유로 인식 되고 있다. 지난날 권위주의 체재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개념을 소화 하는데 익숙치 못한 점이 있다. 국기 모독죄나 국가 모독죄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민주적 유물로 전락하고 현실의 법체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만일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면 대통령 개인 자격으로 고발할 일이지 거기에 공권력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 이며, 그것이 사회정의라는 개념과 어떻게 조율 되어야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곧 사회 정의라는 등식의 성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 하는 기성세대의 보수적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다.

 

여기서 잠간 예수의 진보성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신약성서에서 보는 대로, 바리세인 들의 형식주의를 강하게 비판 하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곧 다가올 하늘나라(Kingdom of God)를 역설한 예수는 분명히 진보주의자 이었다. 예수는 전통과 율법에만 매달리는 유태인들에 대항 하여 싸웠으며 유태교를 혁신 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자만심 그리고 권위 의식을 비판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한 장사꾼들을 내 쫓으며 기득권자들에게 희생된 진보주의자 이었다. 겸손과 사랑을 실천 하며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목숨을 바친 예수는 진정한 진보의 영원한 스승 이라고 생각 한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이 같은 표현이 혹 신성 모독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참된 진보성은, 역사상의 다른 성인들 에게 서도 똑같이 엿 볼 수 있는 것으로 나는 믿는다).

 

하지만 불행 하게도 오늘의 진보에서는 이 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의 사이비 진보에게서는 도덕성, 정의감, 인류애 정신, 합리성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나 스스로를 순수한 진보파로 자처해 오는 필자로서, 가끔 허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참된 진보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다수가 하지 못하는 옳은 말을 서슴치 않는다. 진보를 지탱하는 세력이 소수에 머무를지라도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을 이루기까지 그들 앞에는 길고도 험한 길이 가로놓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 길을 택한 진보는 정녕 정의롭다고 하겠다. 참된 진보는 위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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