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막걸리 설천 서용덕 -이민 1세들이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으로 술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가고 있다.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이 40이후로 술과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친구들과 담소를 하면서 마시게 되는 브랜디 위스키 한잔도 사약을 쳐다보는 것보다 힘이 든다. 하지만 간혹 막걸리는 한 잔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막걸리를 생각하면 어릴 때의 향수에 젖어 들 수 있기에 그럴 것이리라. -어릴 때 보았던 밀주 과정은 누비 담요로 술단지를 둘러싸서 아랫목에 두는 것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께서는 일주일을 아랫목에 묵힌다음 거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술 찌꺼기를 얻어먹은 아련한 기억이 있다. 아마 그 때가 10살 이었을 게다. -술 찌꺼기를 먹고 난 후 온 몸이 진저리가 뒤틀려 옴을 느꼈다. 처음으로 입에 댄 맛은 구린내와 신맛이었는데, 어른들은 무슨 맛으로 마시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부터는 동네 어른들이 한 잔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닦는 모습, 풋고추에 고추장 듬뿍 발라 찍어 먹던 모습, 통마늘도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매운맛도 없이 맛나게 마시는 것은 어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내가 먹걸리로 인해 큰 낭패를 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벼농사 준비로 못자리판을 한창 만들 때,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집 노인이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초상이 나면 친인척에 알리는 부고장은 등사기로 밀어 당일로 직접 배달하는 때였다. 동네 경조사는 누구나 할 것없이 상부상조하는 일인 만큼, 나 또한 부고 한 장을 들고 이른 새벽길을 나섰다. 새벽밥이라도 먹고 갈 형편이 안 되는 집안이라 빈속으로 논둑길 20리 길을 뛰다시피 해가 뜨기 전에 도착했다. 부고장을 전했다. 그러면서 어린 마음 속으로 따뜻한 아침밥이라도 대접 받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고인의 일가집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뱃가죽이 등에 딱 붙어 시장기에 속이 쓰리고 고통스러웠다. -이미 집에 가는 길은 아득히 천리나 멀어 보이고, 다리는 맥이 탁 풀어져 버렸다. 한기까지 찾아왔다. 이럴 때 맹물이라도 한 사발 마시고 헛배라도 채워야 하는데, “물이라도 좀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먼길을 새벽같이 총총걸음으로 이곳까지 왔기에 그 말은 “밥 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만 하고 뒤돌아섰다. 고인의 일가인 아주머니가 눈물을 훌쩍거리며도 그냥 보내기는 미안했던지 뒤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개점도 하지 않은 구멍가게로 나를 앞세워 안내를 한다. 그녀는 돈이 없었는지 아니면 아침부터 첫 거래를 외상으로 할 수 없는지, 주막집에서도 안절부절 못하면서 대포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철철 넘치는 막걸리잔을 나에게 넘겨주며 마시라고 했다. 배가 고픈 탓도 있었지만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물 대신 꿀꺼굴꺽 단숨에 마시고는 한 잔을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또 한 잔을 마셨다. 돌아가려는 논둑길에 해는 이제 막 산위로 올라오고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눈이 부셨다. -몇 분이 흘렀을까, 오던 길로 되돌아 걷는데 취기가 올랐다.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다리는 붕붕 뜨는 것 같았다. 길이 움푹 들어가 있는 것 같고, 한 계단 높이 있는 것 같아 발걸음이 절름거리는 모양으로 변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 놈이 어린애가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니 멀리서 쟁기질하는 소가 헉헉대며 비웃는 것 같았다. 어떻게 집까지 도착했는지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했던가. 그 후로는 빈속에 마신 막걸리로 인해 취해 본 경험이 있기에 막걸리는 언재라도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 들판을 휘졌고 마셔 본 그 맛을 잊지 못해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한참 흘렀다. 이제는 늦은 봄철 보리베기와 모내기 한 철, 가을걷이 한 철에는 막걸리를 물마시듯이 했다. 농촌에서는 논밭에서 일을 할 때 막걸리는 배고픔을 잊게 해 주기도 한다. 그보다도는 먼저 텁텁한 맛이 짜르르하게 얼큰한 취기가 오르는 게 좋다. 막걸리 한 사발이면 헛 배 부르듯이 든든하고, 두 사발이면 코가 살짝 비틀어지게 되는 기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얼마 전, 고향친구들과 함께 친구의 식당 앞의 풀 덤불을 깍아내는데, 코냑과 브랜디 위스키에 얼음을 띄운 잔이 우리 앞으로 왔다. 다 들 논두렁에서 마셔보는 막걸리만 못하다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친구는 큰소리를 쳤다. “이 친구들 술 마실 줄 모르는 구먼!” 우리도 다 함께 맞받아쳤다. “야! 이게 무슨 맛인가! 땅콩이나 과자 부스러기 맛이냐!” -고향에서 소박하게 마실 때는 김치를 똑딱 썰고, 돼지고기도 허연 비곗살이 많은 것으로 듬직하게 썰어 두부 한 모 넣고, 고춧가루를 찻잔으로 두어 번 풀어 매운탕으로 지글지글 끓여놓고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코가 비틀어질 때까지 밤새도록 마셨다. 기억이 새롭다. -지금 고향에는 그 흔한 막걸리 인심마저 바닥으로 메말라 버렸을까! 이민으로 고향 떠나 온지 20년이 훨씬 지났건만, 막걸기에 목 말라던 타국생활에 고향이 그리운 것인지 막걸리가 그리운 것인지…. -그리하여 막걸리를 담아 먹기로 하고 한국마켓에서 누룩 3봉지를 사왔다. 누룩 포장지에는 막걸리의 주조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기도 했지만, 농번기 때나 큰 집안 잔치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막걸리를 만드는 어머니의 손길을 쭉 보아왔기에 자신이 있었다. -이민생활 만큼이나 지쳐 누렇게 뜬 누룩 4온스를 가지고 쌀 10파운드 술 밥을 하여 버무렸다. 그리고 물 4갤론(한 말 반)에 앉혀 온도가 따뜻한 보일러실에 놓아두었다. 마음이 급했던지 하루가 지나 열어보고 이틀이 지나 열어보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참지 못했다. 성격 탓일 게다. 결국 느긋이 기다리지 못하고 부글부글 숙성하기도 전에 막걸리를 뽑아 놓았다. 3갈론(한 말)이나 넉넉하게면서도 텁텁하게 나왔다. 한 잔을 마셔 보았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었다. 너무 빨리 막걸리를 걸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색깔로나 냄새로는 확실한 막걸리였다. 반 갈론(한 되반)을 마셨을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리적 신호가 왔다. 소변이 줄기차게 좍 뽑아져 나오니 ‘거 참,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술이라고 화장실을 뒤돌아서는데 머리가 피잉 돌며 어지러워졌다. 다리가 휘청 거리고 입에서 비릿한 풋콩내가 나는 것이, 어릴 때 이 십리길 들판을 휘졌고 마셨던 그 막걸리 맛과 고향이 눈앞에서 아롱거렸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벌겋게 익어있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잠시나마 막걸리에 취해 고향 어귀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끝) 05/30/07 ---------------------------------------- -뽑고나서- '간절한 체험의 유연한 구성 돋보여' 서용덕 님의 수필 <고향 막걸리>외 1편, 정초에 모처럼 해외에서 건너온 작품을 만나 반가웠다. 서용덕 님의 두편의 수필은 대체로 알찬 작품이었다. 일상의 간절한 체험을 유연한 구성과 살아 있는 언어로 엮어내어 분위기가 읽기에 매우 좋았다. 그럼에도 한편, 고국의 향수에 치우친 감정이 다소 짙게 배어난 점이 아쉽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환경에서 비롯된 만큼 흉일 수만은 없고, 앞으로 서용덕 님의 오랫동안 갈고 닦은 역량으로 충분히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수필은 다른 어느 장르 못지않게 문장이 잘 다듬어져야 하고, 따라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마음이 글 속에 진솔하게 담겨져야 한다. 이 두편의 수필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줘서 든든하다. 서용덕 님의 작가의 길에 큰 축복을 보낸다. <심사위원> 김진희. 탁춘근 ---------------------------------------------------------------- 입상소감 -농촌에서 내 또래들은 반듯한 모자에다 검정 학생복으로책가방을 들고 있는데 나는 지개바작이나 짊어진 신세를 한탄하며주경야독을 한다고독한 마음 가지고 저녁이면호롱불 밑에 졸리는 눈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가면서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 홀로서기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일기쓰는 일마저 잠시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나도 모르게 글을 쓰는 버릇은 생활이 힘들고 지치면 몸으로 굳은 살 만큼이나 굳어버린 응어리진 마음을 녹여 넉두리한 분노와 고뇌를 글로 써가며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이렇게 글쓰는 것이 소위 말하는 문학이라하는 것도 모르면서 글을 써 보았다는 것이 이제 문학의 길로 입문한 수필가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는 입상소식이 부끄럽기도 하고,한편으로는 내가 무슨 재주로 이렇게 큰 영광을 받았는지 어리둥절하면서 기쁘기가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르고 미친듯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다 . -무엇 보다도 부족한 글을 입상으로 뽑아주신 것은 더욱 노력하라는 채찍이란 상으로 가슴깊이 새기면서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여 문학도로 올곧게 정진할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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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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