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편지

2009.12.16 14:44

서용덕 조회 수:658 추천:101

12월의 편지


  해마다 이맘때면‘벌써’하고 놀랄 일만 아닌, 아쉬운 일들이 눈앞에서 실감하지요. 엊그제 같이 느끼는 봄인가 싶더니 가을이고, 가을인가 싶더니 달랑 한 장 매달린 달력마져 삼백 예순날을 까 먹어버린 빈 껍질로 비워져 가고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한해를 잊으려 망년잔치를 즐기는데, 하늘에서는 무슨 뜻으로 온 대지를 하얀색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비워버리고 덮어버리는 것이 해마다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질 못 하고 응어리진 말을 하려 합니다.    

  미국 본토에서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아주 먼 곳으로 도망쳐 온 것 같이, 연어 떼들이 모천으로 올라 차는 키나이(Kenai) 강가에서 우리의 첫 인연은 늦은 여름밤의 백야였지요. 그 때 서로의 놀라움은 마음 바닥으로 주저 앉은 기억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선입감을 가지고도, 지나는 세월 속에 띄엄띄엄 어울려 보았습니다. 그 날은 그 누구보다도 다정다감하게 특별하게도 진지하게 하셨던 말씀, 우리 함께‘도반’으로 같은 길을 걸어 보자는 ‘동병상련’의 숱한 삶의 흔적을 읽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낯서른 타국 땅에서 잘 살아 보겠다고, 불철주야로 진땀 흘리며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서로가 좋아서도 싫어서도 만나면 웃고 지내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지난 세월이듯 사반세기 동안 그 흔한 드라마 한편 제대로 볼 틈 없이 지내다가, 지난달부터 밀린 숙제 같은 인기 드라마를 찾아보며 깊은 명상 중에 있습니다.

  그 많은 드라마를 맥 빠지게 보고 있노라니, 가까이 보지 못했던 조국의 생활상과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것을 피부로 통감하면서, 천의 얼굴로 만 가지 재주를 하는 배우들과 메가폰을 잡은 연출부터 놀라운 일이 아닌,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는 허와 실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감정으로 흠뻑 젖어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나마 그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보면서 이민 생활을 지치게 했던 것들을, 아주 냉정히 알래스카 북극의 얼음장 같이 차갑게 차갑게 이성을 식히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일상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 눈물샘으로 긴장감을 증폭 자극시키며, 누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이야기들 같았지만, 드라마의 출연 배우들만이 천의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도, 또 한 번의 깊은 잠(깨달음)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내 인생수업에 장애물 같은 걸림돌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면서 새로운 각오와 출발로 시작 합니다.이것은 이미 피부로 체험해 보고 얻어진 결과로 영혼의 깊은 깨달음에서 깨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도 나이 값 모르는 인생 수업은 암흑에서 잠자는 그런 세상에 어울릴 필요도 없거니와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모르던 천의 얼굴(가면)은 드라마 속에서 찾았지만, 더러운 천의 얼굴과 얄팍한 잔머리를 가져야만 부귀공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는 나에게도 꼭 필요한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도 이제 할 수 있다면, 부귀공명을 위해서 천의 얼굴 속으로 감추는 진실과 진심은 보이지 않게 숨겨 놓겠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소박하고 순수한 짓이라면, 누군가 바라는 진실과 진심은,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잘났다고 우기고 떠들며 어울려 지내는 무리들로 활개하지요. 그렇게 상대를 짓밟아 일어서서 얻었다는게 무엇이며, 무엇인지 모르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다 있는데, 긍정적보다는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현실이 어둡기만 합니다. 그래서 장점 같은데 단점이고, 단점 같은데 장점 같은 인격자들이 콘서트의 유명 음악가의 음악을 안다고 하지만, 풀잎 끝에 매만지는 바람소리 하나 느끼지 못하는 가면을 쓴 얼굴들로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까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사람하나 잘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그 간단한 메시지에 사람하나 잘 만나고 못 만나는 인연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람 하나 잘 만나면 그 사람 뒤에 천사람, 만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하나 잘 못 만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시간 문제였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무언가 화려한 색으로 드러내는 얼굴들이 있다면, 그 얼굴을 피하지 않으려고 내가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면이 무엇이었던가 생각할 때, 이민생활 천직으로 중국요리 20년을 요리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어떤 요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패하고, 어떤 요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구수한 맛이 깃들지요. 그래서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반세기 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뜻으로 마음에 담아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세속에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려 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숱한 인생길로 여기까지 찾아온 삶이‘고름’인지‘살’인지 모르고 있다가 고름이 생살 되지 않는 것을 깨달게 된 것은,‘용서’와‘화해’이런 것으로 더불어 묻어버리라고 하지요. 하지만 상처의 아픔은 흉터로 남은 것이 우리가 말하는 용서’라고 하지요.‘용서’를 위해서 상처를 받아야 하는 것들이, 임금의 궁궐이 화려하면 곳곳에 감방이 넘치고, 임금(주인)이 소박하면 감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누군가 화려하면 누군가는 초라한 것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감방에 갇혀 있으면 세상은 죽고사는 전쟁터인데, 꼭 싸워서 이기려고 혈안이 되어있지요. 그렇지만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현명하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것보다. 상처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지요.

이렇게 겉사람이 화려하면 속사람은 온갖 감방이고 쓰레기장이었습니다.
그 감방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죄수들을 가두어 두는 곳이기 보다는, 겪어보지 않으면 상처받게 되었던 지난날들이 자기는 잘나고 똑똑하다는 합리적이고 합리화 시키면서, 상대는 오직 죽일 놈이고 잘못된 놈이 되어야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그 많은 상처의 아픔은‘안 보아도 비디오’인데 문제는 신뢰입니다. 신뢰가 깨져버리면 가는 길이 다르게 됩니다.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게 되지요. 그 가면을 얼른 알아볼 수 없다는 게 우리 인간의 약한 문제점이죠. 그 가면을 빨리 알아보는 것은, 함께 겪어 보는, 한 솥밥 먹어보는 방법이지만. 우리는 멀리서 띄엄띄엄 지켜보는 것으로 서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간다’는 모토를 가지고.
오직‘홀로서기’이며‘홀로 가는’것으로 정리하고 있지요.
이제는 삶이 무엇인가’는‘왜’를 생각하게 되었고‘어떻게’하는 방법이 아닌, 바람처럼 구름처럼 강물처럼 꽃사슴이나 들소같이 아니 까마귀같이 집도 (계)절도 없는 방랑자로 세상이 멍추지 않는 목숨을 맡기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생수업’은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꼴이 되었기에 이 나이로 밀린 숙제만큼 남은 인생이며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남아 있은 인생도 살다 보면, 세상이 훤하게 넓게 보일 때가 있겠지요. 그런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길에 가끔은 두 갈래 길이 나오지요.
그럴 때는 자신이 믿는 쪽으로 선택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바라는 이상이 신뢰하는 쪽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길로 끝까지 가는 길이지만 실수도 아니고 후회도 아닐 것입니다.
언재나 두 갈레 길에서 선택한 행복이나 불행은 잘못 알고 찾아 갈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 내 맘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람을 더욱 가까이 하려면, 멀리서 보려고  떠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흠이지만, 그 방법으로 세속을 벗어납니다. 세속을 벗어나면 날마다 면벽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오늘도 세상을 벽으로 바라보는 면벽하려 합니다. 그 벽에 그려지는 세상사의 그림들이 모두가 무색이 되도록 명상 일뿐입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화려한 총천연색이라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총천연색을 좋아 하지만, 나는 날마다 무색을 만들어 무심으로 찾아 가는 길뿐입니다.
이렇게 가면을 벗어 놓고 무색으로 잊어가는 명상을 하면서, 12월에 띄우는 편지로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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