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소설가님 강의록 (문학캠프 2011년)

2011.09.12 12:05

서용덕 조회 수:493 추천:38



박범신 소설가님 • 1946년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서 태어났고, 강경읍 체산동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황복초교, 강경중, 남성고교, 전주교대, 원광대학교, 교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 단편 ‘여름의 잔해’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1973). • 첫 창작집 ‘토끼와 잠수함’ 출간(1978). 중앙일보에 ‘풀잎처럼 눕다’ 연재(1979)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출간. • 동아일보에 ‘불의 나라’ . ‘물의 나라’ 연재(1984). • 2000년 박범신 문학선집 출간. •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잠』. 『불의 나라』. 『킬리만자로의 눈꽃등이』등. •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등 • 연작소설 『흉』. 『흰소가 끄는 수레』등 • 수상: 대한민국문학상(1981),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 한무숙문학상(2005), 대산문학상(2009)등을 수상했고, 그 외에도 자랑스런 충남인 상, <충남> 올해의 최우수예술가 상. <예술평론가협의회>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예술부문(환경재단)수상. • 활동: 사회 안에서는 문화일보 객원논설위원, 방송개혁위원,KBS이사,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연희문학촌운영 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장, 명지대학교 교수 등 많은 비상근 직책을 역임했고 소설 외에도 시집 『산은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을 펴냈으며, 희곡 <그래도 우리는 볍씨를 뿌린다>를 써서 대한민국연ㄱ극제에 참여했다. 오태석 연출로 한국과 일본에서 무대에 올린 <불의 나라>, 방태수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겨울 강 하늬바람>을 직접 각색했고, 몇 편의 노래가사를 써 KBS연말 가사대상을 수상한 바도 있다. KBS에서 방영한 <아프리카 6부작>. <희망통신 희말리야>. <지금 중국은> SBS스페셜 <유라시아 10만 틸로 대장정>. <티베트 종주 2부작>. 스카이 TV <터키 종주> 등 수 많은 타큐메터리 제작에 리포터로 참여했으며, <비우니 향기롭다>라는 무용대본을 써 무대에 올렸고, 미완성으로 끝났으나 <읍네떡빙이>등 두 편의 시나리오를 썼고,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소망대로 그는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는 현재진행형 작가’ 이며 ‘뜨거운 작가’이다. • 현재 명지대문예창작과 교수. ------------------------------------------- 이제 오로지 작가로 살아갈 새날을 내다보며 박범신 (작가. 명지대 교수) 어머니는 마흔한 살에 나를 낳았습니다. 이미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밝혔듯이, 마흔한 살이었지만 어머니는 지금의 팔십대와 다름없는 피폐한 육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젖은 늘어질 대로 늘어졌고, 젖꼭지는 마치 물먹은 한지 끝에 매달려 있는 고약과 같았습니다. 나는 아무리 빨아도 젖이 별로 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빈 젖’에 매달려 암죽과 동냥젖도 함께 먹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로 태어난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주셨지만, 나를 배불리 먹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집안은 늘 싸움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물론 네 명이나 되는 누나들 사이엔 이유 없는 ‘불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더 큰 이유는 좁은 집에서 희망 없이 부대끼며 살았던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고, 장돌뱅이로 떠돌아야 했던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었을것입니다. 아버지는 오일장마다 겨우 하루씩만 집에 와서 잠만 자고 떠났습니다. 가장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전근대의 문화 구조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매우 심각한 폐해를 끼쳤습니다. 어떤 구심력도 없는, 난파된 일엽편주 같은 가정이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선천적으로 예민하게 태어난 나는 몸과 마음이 늘 위태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너무 허약해 경기(驚氣)로 자주 죽어 넘어지고 했으므로, 어머니는 나를 동네 무당에게 수양아들로 들였습니다. 바로 옆집이 무당집이어서 어머니의 품을 실제 떠나 살진 않았으나, 이로써 신탁을 받은 새로운 어머니에게로 나는 ‘내쳐진’ 셈이 되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나를 포기하고 무당에게 ‘내쳐버린’것입니다. 절대빈곤의 시대, 일제로부터 독립은 됐으나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민족 전체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세계사적 광기에 내 맡겨져 있던 해방공간에서의 일입니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가 광기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으며, 어떻게 해도 그 세계로 편입될 수 없고 그 세계로 길을 낼 수 없다는 절망과 분노에 가득 차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자살 미수를 두 번이나 저지른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그렇습니다.아무리 빨아도 배부르지 않은 어머니의 ‘빈 젖’과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불화’ 그리고 몸이 약해 어머니로부터 당한 ‘내쳐진’ 것은 내 세계 인식의 원체험이 됐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평생을 관통하면서, 삶에 대한 나의 태도, 나의 문학, 나의 외롭고 먼 갈망의 근원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1973년에 작가로 데뷰했습니다. 처음 5년여는 1년에 단편 한 두편을 겨우 발표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때 쓴 소설들을 주로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계급갈등을 다룬 소설로서 지금 생각하면 광기의 세계에 대한 반항심을 앞세운 ‘운동문학류’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체주의적 산업화가 불러오는 세계의 광기는 까딱없었지만, 젊은 작가로서 나는 감히 내 진정성에 따른 나홀로 ‘혁명’을 꿈꾸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과 80년에 쓴 『풀잎처럼 눕다』가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나는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이른바 ‘인기작가’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엄혹했던 80년대에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도도했던 민족문학적 흐름에 좋은 표적이 됐습니다. 한편에선 수많은 독자들이 내게 ‘찬미미사’를 집전하고, 다른 한편에선 민족문학 진영으로부터 대중적 작가로 간주되어 자주 ‘인민재판’을 받던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나는 때로 당황 했고, 때로 상처 받고, 때로 그 상황에 분노해 일부러 상업적 출판사들만 골라 거래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내가 가장 당황했던 것은 나를 공격하는 ‘적’들을 나는 계속 ‘동지’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기작가로 불리웠던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내가, 나의 작품들이, 나를 공격했던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가까웠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동지’라고 여겼던 그들이 나를 ‘적’ 으로 간주하여 ‘표창’을 날려대니, 참으로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설 써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 자체에 때로는 치욕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학이 깊어 안양에 살 땐 동맥을 자르고 더러운 안양천변에 누어 있기도 했었지요. 아내가 나를 살렸지만요. 그러나 그 모두 혼자 치루는 내적분열의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감옥까지 가면서 어두운 시대의 전면에서 희생 무릅쓰고 앞장서 갔던 이들이 존경스럽고, 또 그들에게 부끄럽ㄱ기도 하고 했으나, 그렇다고 그 당시 쓴 나의 작품들에 대해, 지금도 나를 공격했던 일부 운동문학가들 앞에 ‘쪽팔린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대중들이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고통받고 유린되는지, 그 당시에도 나의 ‘문학순정주의’를 대해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불의 나라』를 쓸 땐 잠깐 대공과 수사관들의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나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하소연 한마디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 죄는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팔리기를 바란 것도 물론 사실입니다. 젊었으므로 나는 어쩠든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며, 물려받은 것 없는 전업작가로서 가족들을 글 써서 먹여야 했으니까요. 1993년부터 3년간은 아시다시피 전혀 글을 쓰지 않던 이른바 절필의 시기였습니다. 나는 그 시절 용인의 외딴집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처음 1년은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안에서 독기가 빠져나가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혼자 유배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로서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영혼의 독기를 빼고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하는데는 사람보다 자연이 훨씬 낫다는 것 깨닫기도 했습니다. ‘인기작가’ 시절의 내 문학을 버리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민족문학, 혹은 본격문학판으로 내가 편입하고자 했던 시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그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 엉터리 농사꾼으로 혼자 살던 그 시기에, 내가 자나 깨나 만난 질문은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는 좌도 우도, 문학 자체조차 차선의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사십대 후반으로서 삶의 유한성으로 집약되는 강력하고도 잔인한 실존의 문제와 직면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내면화의 길을 힘들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객관과 주관, 영원성과 찰나, 초월적인 꿈과 세속적인 실존 사이에 아슬아슬 끼여 있던 시기였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실존에 대한 해답을 명백히 얻을 수만 있다면 세속의 모든 걸 버리고 싶었으며, 중이 되거나 시베리아 유형이라도 가고 싶었고,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어서 나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시간의 도화지 위에 단지 얼룩만을 만들ㄹ면서 시종한건 아닌가 하는 회의에 깊이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소설들, 내가 유지해온 가정, 자식들, 선생으로서의 내 행적들이 다 얼룩 같았습니다. 용인 북부와 광주군 사이, 산속을 밤새워 헤메면서, 가시 덩쿨에 빠져 온몸을 할퀸 일도, 벼랑 끝 어둔 동굴에서 울면서 밤을 지샌 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혼하지도 못했고 나쁜 아버지, 나쁜 선생도 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문학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질문은 계속 나를 단근질하는데, 살아 견뎌내야 하는 근원적 실존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 약한 자여, 하면서 나는 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나를 비판했던 일부 운동 문학가들에게 나는 진실로 쪽팔리지 않았으나, 나의 인생, 내 실존 앞에서 아무런 핻답도 찾아낼 수 없었던 나는, 나의 실존이 정말 ‘더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선험적이라고 느낄 만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인정주의’가 내게 너무 깊이 깃들어 있다는 걸 먼저 깨달았으며, 이어 내 속에서 계속 생성되고 불탁고 역동적으로 달려가려는 인정주의적 관성을 내가 스스로 끝끝내 뿌리치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나의 인정주의 또한 알고 보면 습관이 아니라, 내 속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사랑에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한편에선 절망으로 울었고, 한편에선 나의 살을 견인해 갈 수 있는 에너자가 내 안애 뜨겁게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잠깐씩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산으로 가 중이 될 수도, 용감하게 걸어서 나의 별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산이 될 수도 없었으며, 허공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용인 시절은 내가 초월적인 근원의 꿈을 버릴 수 없으나, 내가 계속 지상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지상의 존재’라는 걸 아프도록 일깨움 받은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ㄱ결국 작가로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오늘 출판기념회를 하는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작가 생활 39년째, 장편소설로 39번째 소설입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광기의 폭력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과, 그러므로 이 광기의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욕칠정의 감정을 가급적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싸가지’ 없는 결론에 도달한 소설입니다. 쓰면서 여러번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여전히 ‘탄생 이전으로부터 부여 받은 슬픔’이 있으며, 이 슬픔을 견디어 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곧잘 ‘갈망의 시기’로 회잗되는 절ㄹ필 이후 나의 문학은 바로 그것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초월적인 꿈을 버릴 수 없으면서, 그러나 지상의 삶을 견뎌내야 하는 나의, 우리의 운명에 대한 우회적 발언들이었지요.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초월적 꿈과 물집투성이 지상의 삶은 우주적 편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존재한다는 것은 나, ‘작가 박범신’에겐 여전히 단독자로서 벼랑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 벼랑길을 가는 데 힘이 되는 유용한 도구로서 soork 가진 유일한 무기는 현재까지 글쓰기뿐입니다. 가능하면 이 길에서 순직하고 싶은 지금의 내 꿈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계속 안고가야 되는 본질적 질문에서 놓여나는 건 아닙니다. 젊을 때는 나이가 육십대쯤 되면 최소한 나는 누구야, 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꿈꾸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나는 누구야, 그 말을 준비하는 지난한 도정이 아닐까 늘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가장 고통스런 당면ㄱ과제는 그것입니다. 어쩌면 공적인 사회생활로 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감회 깊은 자리에서, 나이가 65세 됐으면서, 나는 누구라고, 나의 본원은 이것이며, 나의 지향은 이것이라고 명백히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오늘을 기다리면서, 나는 나를 많이 미워했으며 부끄러워했고 많이 슬퍼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렇다고 나를 따라준 많은 제자 작가들 앞에서 ‘나는 나를 모르겠다’ 하고 쓸쓸하고 비겁하게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평생 동안 일관되게 혐오하고 반대해온 것을 밝히면 그것들의 조합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 조금은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하구요. 우선 하나, 나는 집단이 싫습니다. 무리가, 떼가, 떼가 만드는 조직이 싫습니다. 우리는 전체주의가 되므로 싫습니다. 무리는 때로 개인의 희생을 무릅써야 한다고 말하게 되므로 싫습니다. 무리는 너 하나 희생하면 백 명 천 명이 살 수 있다고 말하므로 싫습니다. 무리는 공평하게 회비를 걷으니 싫고, 무리는 악에서든 선에서든 우리라고, 우리가 남인가, 라고 말하므로 싫습니다. 무리는 대장이나 캡틴이나 지도부가 있으므로 싫습니다. 무리는 푹탄주를 공평하게 돌려 마시므로 싫고, 무리는 필연적으로 낙오자를 만드니까 싫습니다. 어떤 무리도, 떼를 지어 집단화하면 반드시 ‘집단의 죄’를 동반한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무리가 싫습니다. 또 하나, 나는 정파가 싫습니다.한국식 좌파도 한국식 우파도 혐오합니다. 구태어 말하자면 나는 정파와 정파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있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물론 문학이란 어쨌든 상처, 소외, 결핍을 뿌리칠 수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상처, 소외, 결핍을 편들어야 하는 운명을 비켜가진 않겟지만, 아니 작가로 살아가는 한 영원히 우리 사회, 우리 이웃들이 고통스러베 감당해 가는 결핍된 자의 편에 서 있겠지만, 그러나 자본주의적 욕망이나 정치적 전략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편 가르기에 따른, 어떤 정파에도 나는 진실로 소속되더나 굴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문파도 싫습니다. 나는 평생 어느 문파에 소속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창비파’도 아니고 ‘문지파’도 아닙니다. 어떤 문학지 사장은 일찍이 나에게 작가로서 ‘너무 전략이 없다’고 충고한 적이 있는데, 사실입니다. 나는 전략이 없습니다. 나의 전략은 단독자로서 사람들의 오욕칠정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개인의 그것과 전체의 그것 사이를 재고 미학적으로 기록함으로써, 내가 섬기고자 하는 휴머니즘을 나다운 문학 순정주의 노선으로 지켜가는 것뿐입니다. 어떤 정파도 인간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이며, 내 안에 있는 어떤 다른 욕망도 오로지 문장 하나로 세계와 맞서고 싶은 좋은 문학에 대한 나의 열망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속되어야 한다면 작가로서 나는 죽을 때까지 ‘박범신파’에 소속돼 살겠습니다. 또 하나, 나는 우리의 비뚜러진 엘리트주의를 혐오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의 엘리트주의는 이미 폐기처분된 조선 사대부의 전통과, 자본주의 천박한 욕망을 정 치, 사회, 문화적 명분으로 덮으려드는 가증스러운 학벌중심의 서열구조와, 변절된 서구식 인문주의가 병합되어 매우 비정상이고 분건강한 이중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도 엘리트요 망하게 하는 것도 지식인이지요. 더 많은 ‘엘리트’들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악의 구조에 발붙어 오늘도 온갖 그럴듯한 명분을 지어내면서 개인적 욕망에 따른 과실을 착복하기 위해 좋은 학벌과 축적된 지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전혀 반성하지도 않는다는 게 나의 소견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갈등과 분열의 핵심적 당론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누가 생산하고 유포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제일 먼저 엘리트, 또는 지식인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물론 나도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 또한 지은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내 안에 깃든 ‘지식인’도 혐오합니다. 또 하나, 나는 계몽주의를 혐오합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의미주의적 태도를 혐오합니다. 백남준은 “예술이란 익은 밥 먹고 하는 설익은 짓”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쓴 많은 소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게몽주의적 담론, 계몽주의적 문장, 계몽주의적 서사구조를 은연중 따르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계몽주의 사고는 한국식 교육풍토와 시회구조로부터 이미 너무도 깊이 내게 전이되어 있으므로 언제나 뿌리치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내가 더 자유로운 예인(藝人)의 길을 걷지 못한 것은 주입된 계몽주의가 너무도 강력하게 나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그것과 더욱 힘든 싸움을 해야 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건데, 내 안에 축적된 그것들과 싸움을 멍추지는 않겠습니다. 세계로부터 주입된 계몽성이 나의 예민한 직관들을 훼손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나는 허세에 따른 권위주의가 싫습니다. 예의는 형식이 아니라 인간주의적 진실에서 비롯된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허위의식은 자기세계가 없는 약한 자가 취하는 가면입니다. 나는 가급적 나의 문장에서 인용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나의 언행에서, 나의 행위에서, 오욕칠정을 감추는 거짓말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39년전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때 당선 소감에서 이렇게 썼던게 생각납니다. “호사스런 빛깔과 새로운 디자인의 외투를 탐내지도 않고, 다섯 개의 단추로 문장하지 않아도 좋을 이 조그만 자유. 그게 그래도 밑천이지, 한밤을 깨어 있고 싶은 자에겐 그게 그래도 밑천이지”라고요. 그 생각이 39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내가 작가로 사는 특ㄱ권은 바로 그것, 헤세로 무장한 가짜 권위주의를 내팽개치고, 부식되지 않는 생생한 영혼으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입니다. 이상, 내가 평생 일관되게 혐오하면서, 그 덫에 몽땅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몇 가지 점을 요약해 말했습니다. 혐오하는 것이 그뿐만은 아니지만 더 열거해봤자 큰 틀로 봐선 모두 이 다섯 가지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안에 내가, 나의 문학이 놓여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에게 나의 노선을 따라오라는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나이가 됐을 때, 제자들이 세상에 대고 이것이 바로, 오로지 나의 참이며, 이것이 오로지 나의 문학이라고, 바로 오로지 이것 때문에 나는 문학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의 길을 걸어가라고 당부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의 증조부는 본래 경상북도 김천군 능소면에서 살았습니다. 밀양 박씨 중에서 국당파, 난계파, 이오당파는 본디 한 핏줄로 그중 막내였던 이오당 선생은 형들이 벼슬길에 올라 한양으로 나아갈 때 혼자 고향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선생은 훌륭한문장가였으나 형들 때문에 출사를 포기하고 향리에 남아 당신의 ‘뿌리’를 지켰습니다. 때로는 그 일이 자랑스럽습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형들에게 밀려 고향에 머물ㄹ러 있다는 자책으로 씁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의 중시조가 그분 이오당 선생입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의 고향인 김천군 능소면은 바로 이 세파가 더불어 형제로 살던 집성촌이었습니다. 대대로 그들은 한 뿌리, 한 핏줄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들어서고 외래문물이 마구 밀어닥치면서 인심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파를 가르기 시작한 거지요. 그곳에 살던 다수의 국당파는 국당 선생이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후광을 앞세우고 숫자가 많다는 걸 무기 삼아 소수의 이오당파를 핍박했습니다. 선산의 묘 자리를 선택하는 권리의 독점도 핍박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대대로 공평히 나누어 쓰던 선산의 권리를 다수으 국당파가 소수의 이오당파에게만 부당하게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지바른, 이른 바 좋은 묘 터는 국당파만이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나의 증조부는 그런 다수의 횡포에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부당하다고 항의도 하고 싸움질질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심한 팝박, 더 심한 경멸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던 증조부는 어느 날 빚까지 내어 그 돈으로 ‘남사당패’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당시의 사당패 공연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최고의 구경거리였지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당패 공연이 열리는 공터로 모여들었습니다. 증조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들과 함께 선산에서 남은 최고의 명당 터에 당신의 부친, 그러니까 저의 고조부 산소를 옮겨 썼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한번 쓴 묘는 파낼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사당패 공연이 끝났을 때 증조부는 이미 산소를 완전히 이장한 다음이었습니다. 이제 ‘배째라”하면 된다고 증조부는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뒤늦게 증조부의 ‘반역’을 알아차린 다수의 국당파는, 법이 무서워 이미 쓴 묘를 마음대로 파내지는 못했으나 증조부의 ‘반역’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묘를 파내라 증조부와 젊은 조부를 을러댔으며 갖은 방법으로소수의 이오당파 사람들을 괄시하고 혐오하고 단근질을 해댔습니다. 이오당파 살람들은 견딜 수가 없엇습니다. 때론 목숨까지 위협받는 처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대와 핍박의 고통이 극에 이르자 고조부의 산소를 그들의 요구대로 다시 옮기든지, 아니면 마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조부는 알아차렸습니다. 증조부께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가재도구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야반도주로 결국 고향을 떠난 거지요. 청년기에 접어든 두 아들을 앞세우고 고향을 떠난 증조부는 그들에게 붙잡힐따봐 충청남도에 접어든 다음 일부러 한양을 등지고 전라도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내가 태어난 논산시 연무읍 봉동리 두화부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전라북도 익산군이엇습니다. 충청도의 경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증조부와 그 식솔들을 짐을 풀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설고 물선 곳이었지만, 더 도망칠 여력도 없는데다가 동네가 크고 들 가운데 있는지라 남의 머슴을 하더라도 입에 풀칠할 수는 있겠다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나의 할아버지가 스무 살 때쯤의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증조부와 할아버지는 유림의 끝물이었으나 연고가 전혀 없는 익산군의 들 동네에서 온갖 험한 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집단에 대한 ‘반역’에 의해 짊어져야 했던 형벌은 가혹했습니다. 할아버지만 해도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지, 당신은 유려한 필체로 직접 족보를 기록해 남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자식에겐 단 한글자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나의 부친에겐 평생 한이었습니다. 이미 파탄 나고 만 광기의 세계에서 당신이 배우고 익혀온 진리가 송두리째 ‘허위’라는 것을, 현실에서 지식은 오히려 삶의 훼방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명백히 알아차렸던 것이고, 그 가혹한 자학적 형벌의 희생자는 고스란히 내 아버지의 몫이 됐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오래된 하나의 풍경을 보고 있습니다. 어둡고 칙칙한 풍경입니다. 그 어둠의 중심부에 어린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 보입니다. 옛날 시골집은 굴뚝이 골목길로 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소년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채 골목길로 난 굴뚝 가운데, 그을음이 잔뜩 낀 흙단 위에 쭈그려 앉아 있습니다. 소년의 집에서는 식구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악다군 쓰는 소리가 들립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당신의 울화를 참지 못하고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거품을 물고 경련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가난 속으로 내팽개쳐진 가족들의 불화는 그들의 증조부가 다수에 의해 고향에서 내쫒긴 이후에 생겼으며, 그로 인한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통제불능 상태에서 깊어지고만, 자학의 질병이었습니다. 소년은 어두워진 다음에도 집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합니다. 불 밝은 건너편 친구의 집 창호지 문엔 온가족이 도래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쳐듭니다. 하루 겪어던 일들에 대해 서로 도란거리는 소리,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치는 소리, 가끔은 함께 웃는 소리도 납니다. 그것은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창호지에 아른거리는 하나의 의미지로서, 버림받은 소년의 상상력이 보태져 비로소 완성되는 환상적인 그림입니다. 그와 달리 등 뒤에 있는 그의 집은 불도 켜지 않은 캄캄절벽 속에 꺼져 있으며, 낮은 한숨 소리, 숨죽인 울음소리 같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소년은 집 안의 모든 정경을 너무도 완전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늘 “골이 쏟아지려고 한다”면서 대님 끈으로 이마를 동이고 살았던 어머니는 아랫방에 누워 밭은 기침을 쏟아내고 있을 것이고, 불화로 상처받은 누나 네 명은 웃방에 병자처럼 포개져 누워 있을 것입니다. 두 평밖에 안 되는 흙담집 방입니다. 그나마 웃방은 곡식은 넣은 통가리까지 있어 누나 네 명은 나란히 누울 수도 없을 만큼 비좁습니다. 그들이 싸우고 다치는 것은 그들 탓아 아니라 ‘동지나 형제’라고 여겼던 무리에 의해 고향에서 내팽겨쳐진 이후, 대를 물리면서 그들이 핍박했던 절대빈곤 시절의 광기에 가득 찬 세계 때문이지만, 소년도 다른 가족들도, 도대체 왜,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할퀴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소년은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꼼짝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세계는 건너편 창호지 불빛에 감싸인 화해의 세계이고, 하나의 세계는 불화가 가득한 어둠 속 세계입니다. 그는 그가 소속된 곳으로도 갈 수 없고 그가 가고 싶은 그리운 세계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는 화해의 단란한 건너편 불빛을 판타지처럼 이미지로 보고, 그가 소속된 등 뒤의 한숨 소리 가득한 자신의 집 안 풍경은 잔혹한 사실성으로 봅니다. 그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으며, 가깝고도 먼 상반된 두 개의 세계를 오직 다른 층위의 눈으로 숨어서 볼 뿐입니다. 그곳은 세계로부터 버려진 곳이지만 두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지점이고, 그리운 ‘저기’와 오욕으로 가득한 ‘여기’ 사이이며, 안과 밖, 세속과 초월, 단독자와 전체의 고독한 경계에 있는 ‘알집’입니다. 바로 내 문학의 ‘알집’이고, 내가 저 미친 세상과 맞서는 ‘알집’입니다. 이제 나는 아프게 깨닫습니다. 6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랑과 회귀’를 끝없이 반복하며 흘려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어둑신한 굴뚝 한가운데, 그 경계의 고독한 알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써온 문장, 내가 해온 말들이 사실은 그 ‘알집’으로부터 한발작도 더 걸어가지 못한 지점에서 본 것과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는 일은, 자연인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렇지만 예인藝人, 혹은 작가로 살아가는 나에겐 동시에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힘 있는 상상력은 모두 그 피 흘리는 내적분열의 알집에서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시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환경에 의해서도 완전히 마모되거나 훼손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나이 들지 않는 이상하고 이상한 ‘짐승’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시시때때 확인하는 것도 내가 여전히 그 ‘알집’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고백한 것처럼, 나는 고향집 그 굴뚝에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소년이었던 오래전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문장이라는, 어쩌면 낡은, 어쩌면 보잘것 없는, 그러나 유일하기 때문에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창을 하나 비켜들고 있습니다. 나는 예인이고 작가입니다. 나는 내 안에 도사린 ‘짐승’의 신탁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것은 이제 나에게 있어 유일한 권위이고, 유일한 감미이며,유일한 유혹, 유일한 생존전략이 됐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젊은 제자들이 나처럼 살기는 바라지 않지만, 내가 38년 전 작가로 데뷔할 무렵 일찍이 말했던 것처럼 문학을 가리켜 ‘목 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말하면서 고단하게 살기를 바라진 않지만, 최소한 늙어갈 때 그 무엇이 됐던, 이것은 나의 유일한 권위, 감미, 유혹이라고 말하는 ‘ 그 무엇’을 찾아갖기 바란다. 그것이 계몽된 것에서 벗어나 어떤 고유성을 가진 문학이라면 나로선 더욱 반가울 것입니다. 스승이 아니라, 앞서 살아온 나이든 친구로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의 인생은 고단하게 걸어오느라 생긴 수많은 ‘물집’들과 ‘얼룩’조차 ‘살아 있는 유산균’ 처럼 단번에 생생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생생하다면 고단했든 상처뿐이든, 인생 전체가 한꺼번에 다 ‘연애’가 되는 것이지요. ‘존재의 나팔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정파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높이 있으나 문학이, 근원적으로 ‘인생’보다 더 높을 수 없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로써 유한성으로 핍박받는 실존의 강을, 우리가 부여받은 ‘탄생 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을 이기는 길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한 가지만 더 첨언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나보고 많이 썼다고들 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아직 도스토엡스키보다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그이보다 잘 쓰지도 못했는데 그이보다 많이 쓰지도 못한 셈입니다. 게다가 나는 그이처럼 도박에 빠져본 적도 없고 마누라를 바꿔본 적도 없습니다. 왜 농노인 아버지를 두지 못했으며, 왜 시베리아 유형도 가지 못했을까, 하고 나를 원망한 적도 많습니다. 유형은 커녕 굴절된 시대를 살면서 감옥 한 번 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이보다 무려 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많이 썼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문학을 잊고, 나의 존재 증명에 대한 귀한 임무를 잊고, 해찰한 적도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선생 노릇’ ‘아버지 노릇’을 핑계대면서 최선이 아닌 ‘차선의 길’을 따라 왔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 뜨겁게 살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비겁하게도 ‘안전’을 도모하느라 모든 일에서 늘 차선의 길을 선택해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눈물겨운 회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언재나 세속적인 삶에 대해 세계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불안’을 이겨내고 본원적으로서의 주체가 가르키는최선의 선택으로 인생을 경영한다면 단언하건대,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이제 ‘작가노릇’ 한 가지만 남았으니, 이루지 못할지라도, 나는 감히 최선의 길을 가는 작가로 나머지 시간을 살고 싶습니다. 작가로서, 나는 요즈음 내가 사믓 무르익었다고 느낍니다. 교만하다고 질책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온갖 테크닉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쓸 거리도 여전히 넘칩니다. 별다른 취미도 없으며, 소설 쓰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오로지 소설 쓰면서 푸는 사람입니다. 소설 쓰느라 고통스러울 때 또 소설을 쓰면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가끔 경이로운 정서적 오르가슴도 느낍니다. 내가 요즘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나의 문학, 나의 세계가 지금보다 더 깊어지는 일입니다. 더 깊어진다면 생이 끝나기 전에 달의 이면에 해당하는 어둠의 숙주에 이르기까지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에밀 졸라식 환경 결정론에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엔 환경이나, 기타 합리적 추론으로 절대 해석되지 않는 미지량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비의에 가득 찬 생의 미지량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의 마지막 화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밤 깊어 홀로 깨어 있을 때 나는 내게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통 크게,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거지. 괜찮아, 잘해왔고. 까짓거, 지금까지 쓴 것은 연습이라고 쳐!”. 요컨대 제자이자 어느듯 후배작가가 된 여러분이 나의 라이벌이라는 결기에 찬 선언입니다. 학점을 줄 권리는 이제 갖고 있지 않지만, 동료작가로 계속해서 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직 ‘영원한 청년작가’를 시작할 생각이 없습니다. 시간에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선배작가로서 후배작가인 여러분과 글쓰기로 계속 맞장 뜰 생각을 하면 가슴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내가 글쓰기에 미쳤다는 식으로 속단하지 마십시오. 고백하거니와, 나의 마지막 꿈은 문학에서가 아니라 인생, 그것 자체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실존의 어두운 혼돈을 이기고, 유한한 시간의 감옥을 벗어나서 내 영혼이 마침내 참된 자유에 도달, 그야말로 훨훨,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날을 맞이하는 것이 나의 은밀하고도 최종적인 지향입니다.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랬동안 나는 내가 왜 우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압니다. 모든 존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가든지, ‘탄생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을 갖고 있고, 나 또한 ‘탄생 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 때문에 평생 고통 받고 있으며, 시시때때 운다는 것을요. ‘탄생 이전으로부터 부여받은 슬픔’ 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문학이 됐든 무엇이 됐든, 나의 고독과 눈물과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내게 하나의 방법이고 도정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인격과 지성보다 오욕칠정을 앞세워 가르쳐온 결함 많은 선생을 지금까지 사랑으로 받아준 여러분께 진실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빈말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합니다. 명지대에서 꼭 2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돌아보면 인용부호로 묶어야 할 지식과 형식으로 포장한 인격이 아니라 정직성을 최선의 정책으로 삼은 ‘오욕칠정’으로 나는 여러분을 가르쳤다고 느낍니다. ‘오욕칠정 교수법’으로 명명해도 좋을 ‘날것’의 파토스에 가까운 그 방식에서, 거짓 권위의 망토를 걸치거나 암기해둔 지적논리로 헤세를 부리는 일방통행만은 최소한 없었다고 자부합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모두 나의 연인이자 친구였고, 또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6월 끝자락에 엎디어. 명지대 교수직을 내려놓은 작가 박범신 쓰다. <출처: 2011년 문학캠프 강의록에서 옮김/ 서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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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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