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치의 시집 [연기속... 해설 /문덕수

2007.12.10 06:16

서용덕 조회 수:562 추천:23

문효치 시인

1943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바람 앞에서」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산색」

시집

『煙氣 속에 서서』(신아출판사)『武寧王의 나무새』(1983년 청산사)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198년 홍익출판사)
『백제 가는 길』(1999년 문학예술)
『바다의 문』(1993년 인문당)『선유도를 바라보며』(2000년 문학아카데미)
『남내리 엽서』(2001년 문학아카데미)

저서 -『시가 있는 길』(문학아카데미)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문학아카데미)

동국문학상 시문학상 평화문학상 시예술상 펜문학상

『신년대』동인『진단시』 창립 동인
월간 [문학과 창작] 주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에 출강.

       시집:
            제1시집『煙氣 속에 서서』
            제2시집『武寧王의 나무새』
            제3시집『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
            제4시집『백제 가는 길』
            제5시집『바다의 문』
            제6시집『선유도를 바라보며』(문학아카데미)
            제7시집『남내리 엽서(문학아카데미)*2001년 문예진흥원 우수도서
            시선집 『백제시집』(문학아카데미)*2004년 올해의 청소년도서
     저서:
           『시가 있는 길』(문학아카데미)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문학아카데미)
        
      수상:
            동국문학상
            시문학상
            평화문학상
            시예술상
            펜문학상
      경력;
            배재중학교 등에서 오래 교직생활
           『신년대』동인
           『진단시』 창립 동인
            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역임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계간 [문학과창작] 주간
            계간 [문예운동] 주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
            <세월> 동인회장 역임, 강남문인회장
            동국대, 동덕여대, 대전대 출강 주성대 겸임교수
            (현)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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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 문효치
사랑법 1 / 문효치
사랑이여 흐르다가 / 문효치
다시 또 달빛에 대하여 / 문효치
바람 앞에서
서동의 기쁨 /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 문효치  
비천(飛天) / 문효치
원촌의 저녁 / 문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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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 / 문효치  

뒤안에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서있는데
허연 수염을 나부끼며 한 그루 서 있는데
잔기침 쿨쿨거리며 한 그루 서 있는데,

세어보면 천개 만개도 넘을 가지를 뻗어
세어보면 천개 만개도 넘을 감을 매달고
보채는 어린 가지와 감을 키우기 위해
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서 있는데,

푸른 산 둘러리 삼고
높은 하늘 배경 삼고
침묵으로 버티어 서 있는데,

내가 어쩌다 시골집에 들르면
빈 집을 지키고 서 있는데.

------------시집  - 백제 가는 길 ( 1999년 문학예술)

사랑법1 / 문효치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 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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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흐르다가 / 문효치  

사랑이여 흐르다가
물처럼 흐르다가

여울이 되어 소리도 내며 흐르다가
파도가 되어 몸살처럼 부딪다가

사랑이여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다가
맑고 곱게 흐르다가

때로는 얼음처럼 꽁꽁 막히다가
다시 터져
속시원히 터져서 흐르거라
어허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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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달빛에 대하여 / 문효치

양수리 어디께 와서
달빛 한 마리 건져 올렸다.

아가미에 슨
검은 녹을 닦아내고
갈대들, 더운 입김으로
꽃을 만들어 올렸지만
피어오르는 것은
연기에 그슬린 검덩이었다.

저만치 언덕 기슭에
미국자리공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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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앞에서 / 문효치

해 어스름, 구름 뜨는 언덕에
너를 기다려 서겠노라.
잎 트는 산가(山家), 옹달샘 퍼내가는 바람아,

알록알록 색실 내어
앞산 바위나 친친감고
댓가지 풀잎에 피리 부는 바람아,

꿈꾸는 이파리의 아우성을
하늘에 대어 불어놓고
보일 듯 말 듯 그림 그리어
강물에 들어가는 색(色)바람아,

감기어라 바람아, 끝의 한 오라기까지와
기다리며 굳은 모가지에 휘감겨
네 부는 가락에 핏자죽을 쏟아 놓아라

허물리는 살빛을
색(色) 바람아 감고 돌아
네 빛 중(中) 진한 빛의
뜨는 달의 눈물을 그려봐라.

너를 기다려 어두움에 서겠노라.
어디선가 맴도는 색(色)바람의 울음아,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서동의 기쁨 /  문효치

두꺼운 구름을 떠밀고
나, 그대의 나라에 숨어들 때
선화여, 내 앞길에
하염없이 떠다니는 그대의 얼굴,

돌 같은 감자, 감자 같은 돌의 팔매질에
견고한 성벽도
물엿으로 녹아내리고
단내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 나오시는 선화여.

전생의 질긴 인연이 옥빛으로 살아나
흘러들어오는 강물에
무수히 꽃피어 흐르는 그대의 얼굴.

그대의 알몸을 안고
내 마을로 들 때
감자밭은 황금의 동굴이 되고,

숲에서 바다에서
일제히 머리 들고 일어서는 빛,
풍장 치며 날으는 빛.

새롭게 열리는 하늘에서
땀을 닦느니.      
--------------------------------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 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

비천(飛天) / 문효치

어젯밤 내 꿈 속에 들어오신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 있는
내 꿈의 문을 살며시 열고서
황새의 날개 밑에 고여 있는
따뜻한 바람 같은 고운 옷을 입고

비어있는 방 같은 내 꿈 속에
스며들어 오신 그분이 아니신가요?

달빛 한 가닥 잘라 피리 만들고
하늘 한 자락 도려 현금을 만들던

그리하여 금빛 선율로 가득 채우면서

돌아보고 웃고 또 보고 웃고 하던
여인이 아니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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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의 저녁 / 문효치

저 너머 세상에서
건너 오고 있었다.

새들은 깃털에 붙어 있는
해 조각을 떼어 내어
감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다시 날아오르곤 했다.

나무는
저녁의 옆구리를 무너뜨리고 서서
한 송이 불꽃으로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날아오르기와 내려앉기로
새들은
감나무를 몹시 흔들고 있었다.
화석처럼 굳어 있던
허무가 소리내며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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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孝治의 詩世界 시집[연기속에서서]  해설 /문덕수

文德守


오늘날 시를 쓴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時期임은 詩를 실제로 쓰고 있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 詩는 삶이나 목숨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社交의 方便이나 破閑•自慰•娛樂 등과 같은 次元을 넘어선 곳에 詩는 비로소 存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社交•破閑•自慰•娛樂 등도 인간 삶의 한 行爲이긴 하지만, 詩와 삶이 共存하는 자리는 그런 安易한 次元을 넘어서,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根源的 문제의 世界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어려운 것과 같이 詩를 쓴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것이다.

물론 詩를 인간의 삶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詩自體를 삶에서 分離시켜, 詩自體의 孤立的 상태에서 본 價値, 詩의 배후적 조건인 社會와 떼어서 본 詩史的 문제 등도 충분히 考慮될 수 있다. 흔히 詩와 人間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확대하여 詩에서 실제의 삶이나 그 환경적인 조건인 時代와 社會를 완전히 捨象하여 버리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詩와 그 詩人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고, 詩의 效用이나 本質 등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詩도 삶의 한 行爲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삶과 密着되어 있는, 아니 삶 그 自體라고 할 수 있는 詩는, 우리의 삶 자체가 복잡한 構造를 가지고 있고 多樣한 側面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복잡한 構造와 多樣한 側面을 지니고 있다. 어느 側面을 照明하여 우리의 視線을 集中시킬 것인가는 各者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어느 側面이든 詩는 正直한 一面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이를테면, 詩는 文明, 社會, 宗敎, 道德, 歷史 등의 어느 側面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이와 같이 詩는 다양한 側面을 가지고 있으나, 詩를 쓰는 主體와 그 환경적 조건인 社會와의 관계는 가장 밀접한 것이다. 詩를 쓴다는 것은 社會에 있어서의 삶의 行爲요, 그 認識이다. 우리는 社會에 대한 水平的•垂直的인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社會는 어떤 普遍的 價値로서 우리의 삶의 환경적 條件이 되는 것보다 오히려 變化와 衝擊, 混亂과 無秩序로서 그 조건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정한 價値觀이 확립되어 사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安定되어 있으면 우리의 삶의 順應은 容易할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런 社會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自身의 삶과 存在에 대한 모든 責任은 自身이 전적으로 떠맡아야 하고, 시인의 詩作行爲는 언제나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원적 質問을 바탕으로 해서만이 可能한 것이다.

文孝治씨의 詩는 自身의 삶의 行爲의 결과이다. 그는 自身의 삶의 責任을 전적으로 自身이 떠맡고 있고, 그의 詩作行爲는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質問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마 우리 詩壇에서 文孝治씨만큼 자기의 存在意識 또는 存在條件에 투철한 詩人도 드물 것이다. 그는 實驗者도 아니요, 修辭學者도 아니요,

또 테크니생도 아니지만―그의 關心이 이런 데에 있지 않음은 너무도 당연하다.―그는 實驗•修辭•技巧보다는 삶이나 存在의 문제에 더 큰 關心을 가지고 있고, 이 문제를 더 重視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에는 自然을 題材로 다룬 것이 많이 있는데, 그 自然을 단지 美的인 대상으로 국한하지 않고 바로 自己의 삶이나 存在로 보고 있다. 이를 테면 새, 바람, 꽃 등이 그러한 自然存在로 描寫하는 데서 나아가 自己의 삶의 行爲나 存在自體로 同化 내지 一體化하고 있다.

새는 어디론지 날아가/ 한줌 흙으로 잠자는데//
울음 소리는/ 아직도 가지에 빨갛게 달려서/ 더욱 큰 소리로 울고 있다.
―「감나무」에서

새는 죽고, 그 새의 울음소리만이 가지에 빨갛게 달려서 더욱 큰 소리로 울고 있다는 視覺的•聽覺的 이미지 보다는 그 울음소리 자체의 아픔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즉 그 울음소리의 運命的 悲劇의 意味야말로 더욱 근원적인 문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아프고 감당하기 어려운 悲劇的 象徵은 바로 詩人 自身 人間條件이기도 하다.

그대는 새떼같은 졸개를 거느리고 쳐들어온다. 黃山벌 옛 싸움터처럼 칼과 창을 휘두르며 喊聲을 치고 쳐들어온다. ……바람이여, 暴雨와 海溢을 이끌고 나에게 上陸하는 바람이여, 내 可憐한 어머니와 愛人과 겨레를 잡아 먹고 아직 비린내 나는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온다.
―「바람(Ⅵ)」에서

그에게 있어서, 바람은 敵意 또는 殺意를 지닌 敵對的 存在로 엄습해 오는 것이다. 창과 칼을 휘두르고 喊聲을 치면서 쳐들어오고, 폭풍과 海溢을 거느리고 上陸해 오는 이 바람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威脅과 恐怖의 대상이다.

自身의 삶이나 存在를 완전히 抹殺하려는 모든 敵對的 存在의 象徵이다. 삶을 威脅하고 存在를 否定하려는 이 條件은, 이 작품의 끄트머리의 「또는 내 살 속에도 뼛 속에도 너는 있긴 있었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自身의 內部에도 깊숙히 浸透되어 있다. 自己의 안팎으로 共存하고 있는 이 反生命的•反存在的 요소는 삶과 存在의 근원적 조건으로서 어떠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떨쳐 버릴 수 없다. 뛰어 넘을 수도, 克服할 수도 없는, 말하자면 내 삶과 存在 자체가 안고 있는 矛盾이요, 不條理이다.

꼬리를 물고 와서는/ 花瓣을 벙긋거려/ 個別의 言語를 지껄이다가
내 앞에 아스라한 洞穴을 파놓고/ 날아가 버리는 꽃.
―「어느날」에서

어느날 午後, 혼자 「無病의 깊은 病」을 앓다가 문득 본 「꽃」도 微笑의 言語보다는 아스라한 洞穴을 파놓고 날아가 버린다. 自己에게 오래 머물러 주지 않는 이 꽃도 自己와 同化되거나 一體가 될 수 없는 對立者다.

그러기에 自己 앞에 깊은 洞穴을 파놓고 가버리는 것이다. 洞穴은 奈落이요, 죽음이다. 꽃도 珍賞의 대상이거나 仙境 내지 美的 理想이 아니라, 自己의 삶이나 存在를 拒否하는 條件이다.
微笑의 言語와 아스라할 洞穴 ―이것은 꽃 자체의 矛盾이요, 不條理다. 꽃과의 對面은 이러한 二律背反의 뼈아픈 삶의 認識뿐이다.

와서 살을 헤집고/ 내 머리통 속에 뚫린/ 까아만 허궁에 들어가/ 잠시 한 초롱 불을 켜고/ 新接의 이삿짐도 들이고/ 뚝딱거리며 집도 짓다가 //
그대여, 갑자기/ 불을 끄고/ 집도 헐고 //
다시 香氣와 빛깔을 거두어/ 가버리는 그대여
―「꽃(Ⅰ)」에서

香氣와 빛깔을 거느리고 와서 잠시 불을 켜고 집을 짓기도 하는 꽃이지만, 이내 그 불도 끄고 집도 헐고 香氣와 빛을 거두어 가버린다. 꽃은 自身의 삶이나 存在의 영원한 빛이 될 수 없다. 孤獨의 伴侶者도, 病者의 慰安도 될 수 없다. 오히려 自身의 삶과 存在를 拒否하는 것이다.


病者는 외롭고 살고자 하는 意慾이 강하다. 현대 문명 속에 있는 사람은 조금씩 앓고 있다고 하거니와 文孝治는 원인도 모르는 病으로 呻吟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無病의 病」을 앓고 있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앓고 있다.//
로―마의 暴君/ 그의 미친 하루의 祝祭를 위해 기르던/ 毒한 猛獸의 우리처럼/ 咆哮하는 倉庫에 갇혀 있다.
―「病中(Ⅰ)」에서

孤獨이 울부짖는 倉庫 속에 갇혀 원인도 處方도 모를 病을 앓고 있다. 그 病은 영원히 治療될 수 없는 근원적인 삶과 存在의 조건이다. 누가 이 病을 전염시켰는지, 病菌이 무엇인지, 病名이 무엇인지, 그 處方이 무엇인지―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重病 속에서, 그는 부단히 죽음을 意識하고 죽음의 威脅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데서나 오고가는 죽음의 소란한 발자국 소리에 지쳐 自身의 白骨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차라리 잠을 請하지만 잠도 오지 않는다. 잠을 請하여 一時的 忘却으로 이 重病을 잠시 克服하려고 試圖해 보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영원히 超克할 수 없는 限界條件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죽음과 삶의 二重構造로 이루어져 있다. 강렬한 죽음의 意識은 강렬한 생명 意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죽음의 意識에 부대끼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의 條件을 인식하고 그것을 克服해 보려는 삶의 근원적인 몸부림일 것이다. 사람이란 生理的으로나 心理的으로 有限한 존재이며, 人間存在의 限界性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 限界를 超克하려고 하는 것은 삶의 本然的인 모습이다.

칼이여, 쇠여, 네가 아직은 나를 죽이지는 못하였구나. 검은 기름에 젖어 닳아지는 불, 닳아지는 손. 소나기처럼, 태풍처럼 까끌까끌한 騷音을 몰아 쳐들어 오는 번쩍거리는 쇠여. 배속에 가득 찬 소화불량의 찌꺼기. 誘惑의 혓바닥을 거느리고 날카로운 凶器의 날을 갈아대는, 그리하여 칙칙한 대숲의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의 陰凶한 手足처럼 넘쳐 오면서 오, 그러나 살의, 살 속에 사는 인간의 잔뿌리, 뿌리에 서려 있는 질긴 생명을 아직은 무찌르지 못하였구나 閃光의 쇠여.
―「閃光의 쇠여」의 全文

칼이나 쇠는 文明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삶과 存在를 위협하는 否定者 또는 反生命的•反存在的인 條件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직 一回뿐인 生命을 노리는 이 否定的 條件은 閃光을 번쩍이면서 부단히 쳐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살 속에 사는 잔뿌리, 뿌리에 서려 있는 질긴 생명」을 강렬하게 의식한다. 칼과 쇠의 부단한 浸透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찔리지 않는 강인하고 執拗한 生命―그는 이 生命을 믿고 의지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喪失하고도 이것만은 끝내 喪失되지 않고 무찔리지도 않는 것으로 굳게 믿고 確認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의 導體가 밝혀지듯이, 죽음의 切迫한 狀況 속에서 생명의 純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詩는 생명의 근원적이며 순수한 모습의 確認行爲이다.


그는 그의 孤獨, 病, 죽음 등을 人間의 어쩔 수 없는 條件으로 確認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姿勢를 示唆한다. 人間條件의 確認行爲는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의 生理的 年齒로 보아 이를 克服하려는 知慧 같은 것의 示唆는 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精神的 年齒는 함부로 斷定할 수 없는 것이므로, 人間條件을 극복하려는 試圖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약, 反生命的•反存在的 조건에 얽매여 여기서 한 발걸음도 헤어날 수 없는 막다른 境地에 끝내 갇혀 있다면 그 結末은 悲劇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自身의 虛無한 長期旅行을 알고 있다. 그는 漁獲高도 없는 漁夫의 生涯를 알고 있다. 사랑이 끝난 뒤의 아픈 울음, 모든 喪失한 者의 몸뚱아리에 감겨 스며오르는 지난 날의 脈博도 짚어 보고 있다. 삶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가를 조금씩은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虛無한 긴 旅行을 되풀이하면서도 이를 굳이 回避하지 않으며 잡히는 것이 없으면서도 노를 젓고 投網을 계속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重患에 시달리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대체로 確認하고 있고, 죽음이 또한 어떤 것임을 認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條件들을 언제나 두려워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의 知慧의 飛躍이 가능하다.

사랑이 끝나고, 사랑이 끝난 뒤의 그 喪失과 終末의 아픔을 겪은 뒤에, 다시 텅 빈 肉身의 한 구석구석에서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랑을 볼 줄 안다. 그러기에,텅 빈 肉身의 한 구석/ 저 혼자 텅텅 내리치는 가슴의 고동에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랑아, 너를 잊고 있었구나.
―「煙氣 속에 서서」에서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孤獨한 病室의 訪問을 拒否하는 그는 重患에 부대끼면서도 그 重患이 무엇인가의 새로운 誕生의 母胎가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붉게 터져/ 죽음을 헤집고 솟아오르는
새 살을 지켜보는 것은/ 다만 혼자서 즐기는 復活일세.
―「病中(Ⅱ)」에서

우리는 「復活」의 밑바닥에 어떤 信仰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여기서 섣불리 단정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가 復活의 信仰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그가 깨달은 것은 지난날 수없이 죽음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삶의 行爲는 죽음의 反復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反復이지, 오직 一回의 終末이 아니다. 이제 그의 삶의 眞相이, 삶의 근본적 構造가 어렴풋이 밝혀진 셈이다.

나는 죽었었을 것이다./ 天安 열차 충돌 사고 現場에서/ 물렁물렁한 머리를 기관차에 부딪고/ 서울에의 여행길에서/ 벼란간 죽었었거나
―「삶」에서

이같이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그는 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한 번이 아니고 몇 천 몇 만 번을 죽어서, 人口와 經濟, 核武器와 전쟁이 논의되는 몇 천 몇 만 번째의 저승에 와서 마치 한 번도 죽어본 일이 없는 것처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계간 미네르바 카페에서 ------------
계간 미네르바 작가 동인 서용덕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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