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먹으면서

2008.11.28 09:44

정찬열 조회 수:1059 추천:107

  
  아내가 고구마를 내왔다. 껍질이 노릇노릇한 제법 맛있어 보이는 군고구마다. 달착지근하게 입에 척 달라붙는 맛이 한국고구마임에 틀림이 없다. 아내가 마켓에 들렀더니 맛있어 보이는 한국산이 보이기에 사왔다고 했다.
  길고 긴 겨울 밤, 만만한 주전부리라곤 고구마 밖에 없던 시골에서, 입에 넣고 쪼옥 빨면 딸려 들어오던 물고구마의 그 단맛이 혀끝에 되살아난다. 맛있기로는 어릴 적 어머니가 밥 위에 얹어 쪄 주시던 고구마 맛을 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밥물이 들어서인지 그 고구마는 유난히도 맛이 있었다.
   7남매 장남인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바쁜 어머니를 도와 부엌에서 불을 때곤 했다. 지금이야 시골도 가스로 취사를 한다니 불을 때어 밥을 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겠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 다른 나무에 비해 갈퀴나무는 연기도 적었고 불이 타는 힘이 좋았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면서 부지깽이로 부삽을 두드리며 구구단을 외우던 때가 떠오른다. 겨울 한 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때는 장단을 맞춰가며 천자문을 외웠다. 중학 입학을 앞두고는 영어단어를 외웠다. 불똥이 튀어 바지에 구멍을 내기도 했지만, 그렇게 외우며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하게 보였던지, 어머니는 고구마를 꺼내 나를 먼저 먹이곤 했다. 밥풀이 묻은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그 때의 그 맛이라니.
   중학을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지었다. 우리 시골에서는 설을 쇤 다음 딸막딸막 고구마 농사를 시작했다. 커다란 항아리에다 황토와 거름을 섞은 다음 씨고구마를 묻었다. 밖에 두면 얼 새라 방 윗목에 두어 싹을 틔웠다. 정월이 지나 날이 풀리면 뾰쪽뾰쪽 싹이 튼 씨고구마를 텃밭에 옮겨 심어 본격적으로 고구마 순을 길렀다.
  보리밭이 바람 따라 물결로 출렁일 무렵이면, 고구마 넝쿨도 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자랐다. 보리타작이 끝나갈 때면 감자나 밀 등도 얼추 수확이 끝났다. 빈 밭을 쟁기로 갈아엎어 고랑과 두둑을 만들고 비가 올 성 싶은 날, 때로는 비를 맞으며 고구마 순을 두 세 마디씩 잘라 두둑에 심었다. 심은 순이 뿌리를 내려야 했다. 어느 해는 비가 내리지 않아 물지게로 밭까지 물을 날라 그 많던 고구마 순에 일일이 물을 준 적도 있다.  
  가을이 오면 곡간이 그득했다. 곡간이 넘치면 마당가운데 임시 곡간격인 볏짚 어리통을 만들어 잠시 나락을 보관하기도 했다. 수수, 콩, 깨 등, 밭에서 수확한 곡물들은 올망졸망 곡간이나 광 구석구석을 차지했다. 고구마는 얼지 않도록 방에 저장했다. 수수깡이나 대나무를 엮어 둥그렇게 어리통을 만들어 방 구석진 곳에 세워 그 안에 저장했다. 그리고도 고구마가 넘쳐났다. 저장할 장소가 더 필요했다.
   마루 밑에 고구마 굴을 팠다. 단단한 황토 흙을 파내어 내 키보다 훨씬 깊고 넓은 굴을 만들었다. 굴은 방보다 고구마를 더 신선하게 저장할 수 있어서 이듬해 늦은 봄 까지 사근사근한 고구마를 먹을 수 있었다.  
  여름철에는 고구마굴이 텅 비었다. 그런데 그 굴이 뜻밖의 일에 요긴하게 쓰였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 이장 집으로 배달되어 온, 당시 농촌에 많이 보급되던 ‘농원’잡지에서 고등학교졸업자격 검정고시 준비 통신강좌 광고를 보았다. 책을 주문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 공부를 했다. 이런저런 보고 싶은 책도 많았는데, 친구들이 찾아오면 함께 어울려야만 했다.
  고구마굴에 들어가 공부하기로 했다. 여름 굴속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촛불 한 자루면 굴 안을 충분히 밝힐 수 있었다. 극성스럽던 모기도 굴 속까지 들어 오지는 못했다. 책을 펴면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작은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던 그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고구마는 이듬해 보리가 나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이었다. 하루 세끼를 고구마로 때우는 집도 있었다. 학교에 점심으로 밥을 가져오지 못하고 고구마를 싸 온 친구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집이 많지 않았다. 봄이 되면 송쿠라고 부르던, 어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던 시절이었으니까.
고구마는 농가의 만만찮은 수입원이기도 했다. 고구마를 잘게 잘라 말린 절간고구마는 주정 원료로 쓰였다. 고구마를 판 돈으로 아이들 연필이나 공책을 사 주고, 농사비용도 보탰다.  
   웰빙 식품인 고구마를 많이 먹으라는 선전 문구를 보았다. 혈압이나 당뇨 등, 성인병 예방 효과가 크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많이도 먹었던 고구마가 몸에 좋은 웰빙 식품이었다니, 그래서 고구마만 먹고도 모두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나 보다.
   쌀밥을 줄이고 고구마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아내는 자주 고구마를 사 온다.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먹으며, 가난했던 시절 고픈 시절 배를 채워 주던 고마운 고구마를 생각하게 된다.

           < 에세이 '21. 2008년 봄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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