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살 설날을 생각하며

2003.03.28 09:52

정찬열 조회 수:172 추천:18

해마다 설이 오면, 스물 한 살 설날을 생각하게 된다. 그 해 설은 참으로 추웠다. 온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혔고, 눈이 많이 내리면 포근하던 여늬때와 달리 바람 끝이 유난히도 찼다. 저수지는 꽝꽝 얼어붙고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도 쇳소리를 냈다.
그날 밤, 무릎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지며 나는 산 속을 혼자서 한없이 걸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장승처럼 서 있는 나무를 붙들고 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을 어찌해야 하는가 나무에게 묻고 또 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잎파리를 엎었다 뒤집었다 팔랑거리며 살아보라 살아보라고 나를 향해 온몸을 흔들어 댔다. 끝간데 없이 넓은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서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면 메아리조차 없었다. 허지만 흐르는 강물이 몸을 뒤틀어 나즉히 들려주는 그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썰물 따라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냈던 뻘등도 밀물이 밀려오자 다시금 질펀한 강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살을 애는 찬바람을 맞으며 거기서 그렇게 한 밤을 꼬박 새웠다. 어둠이 가고 뿌옇게 먼동이 터 올 무렵,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 이제라도 학교에 가자." 스물 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내가 학생이 되다니! 가슴이 뛰었다. 이 순간부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자. 내 앞에 펼쳐질 새 길을 생각하며 두근거림과 가슴 벅찬 설레임을 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젊은 날의 방황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 때가 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그러나 스물 한 살 늙은(?) 고등학생이 된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렀던 머리를 박박깎고 한참 아래 후배들과 함께 배워야 하는 것쯤이야 각오한 일이었지만, 녹슨 머리를 되돌려놓는 것과 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인생이란 절대 호락호락 하거나 만만한 것이 아님을 하나씩 배워가기 시작했다.
더디지만 한 걸음씩 나는 내가 정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숨차게 내달아 마침내 가파른 언덕 하나를 올라섰고, 다시금 산을 넘고 파도를 건너 내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방향이 중요한 것이지 출발이 몇 해 더 빠르고 늦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내 길을 내가 걸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도록 고비 고비에서 나를 도와준 분들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역사 하신다는 말을 배우면서 나는 비로소 지난날들이 그 분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그 순간 내 앞에 나타났던 분들이 나의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어떤 이가 바로 하느님일 수도 있고,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을 대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감히 해 보게되었다.
스물 한 살 설날을 떠올리면, 고향이 저절로 따라온다. 흰 눈이 소복소복 많이도 쌓였던 고향의 산천과, 살을 베는 칼바람을 맞으며 고뇌했던 30년 전의 그 젊은 날을. 나무들과 얘기를 나누고 바람한테 의견을 구했던 그 날을. 그리고 마침내 길을 찾아 집을 나서든 날의 내 모습을 반추해 본다. 그 한 밤이 나에게 항상 기둥이 되고 힘이 되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스물 한 살, 그 때의 기백과 두근거림과 설레임으로 올 한 해를 살아가야겠다. 아침에 뜨는 해를 감사와 감격으로 맞이하는 매일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nambuschool@yahoo.co.kr
<2003년 2월 5일 음력설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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