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디 맨

2004.06.14 05:46

조정희 조회 수:1582 추천:200

단편
핸디 맨
                                                                          조 정희

  샘은 아파트를 나와 지하에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 가 밴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밴 에서  덜렁 덜렁 뭔가 구르고, 못이나 부속품들이 연장들과 서로 부딪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매일 듣는 그 소음은 귀에 익어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으나, 덜 덜 떠는 낡은 엔진 소리에는 차가 혹시나 금방 서버릴까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언제 멈춰 버릴지 모르는 차를 불안한 마음으로 어르듯 살살 몰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빨리 속도를 낼 수 없기에 가운데 차선으로 들어가지 않고 제일 가역에서 운전을 하면서  차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그의 벌이로는 돈을 저축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아파트 월세 내고 식료품 대 떼 놓고 나면 조금의 여유도 없는데 만약 새 차를 산다면 계약금 걸 목돈도 필요하고 월 불입금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보험료까지 계산하면 샘의 수입으로는 새 차의 꿈은 어림도 없는  일 이었다.
  아내는 매 주 건네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어내어 아기 목욕통, 유모차 또는 차에 앉히는 의자 등을 사 놓았다. 아직 아기 침대는 못 산 것을 보면 이 번 주엔  그 돈부터 아내에게 마련해줘야 할 것 같았다. 돈은 벌리기 전에 쓸 일부터 자꾸 떠오르는 게 고민이었다.
" 우리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로 옮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 가득 불어놓은 풍선을 넣은 듯한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 아내를 향해 샘은 말했다.
" 좀 기다려 봐. 점점 수입이 나아지고 있으니까. 당장 방 두 개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아기가  세상에 나와서도 한 동안은 우리와 한 방을 쓸 수 있으니 형편 봐서 하자. 응?" 하며 아내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녀는 기미낀 얼굴에 메마른 웃음을 띄며 물었다.
"요즘, 일 감 많아?"
"오늘은 딱 한 곳에서 주문 왔어. 어제 까진 꽤 바빴는데. 오늘 가는 일은 벽돌 쌓는 일인데.. 처음 맡는 거라서 잘 할지 모르겠어."
"주의해요. 경험 없는 일 잘못 했다가 큰 일 당하지 말고."
"알았어."
  무거운 몸을 힘든 내색도 않고 도리어 남편을 걱정해주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며 샘은 액셀레이터 위에 있는 발에 힘을 주었다. 차는 118번 서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샘은 주소를 적은 쪽지를 펴 들었다.
<푸리웨이에서 내리면 좌회전을 해서 산을 끼고 언덕을 올라오세요. 그 길에 주택들이 없으니까, 길 잘못 들었나 생각지 말고 계속 한 3마일 가량 오시면 호프 길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회전해서 325번지를 찾아오면 돼요.>
  여자가 전화에서 말 해 준대로 따라갔다. 여자의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은 그녀의 말처럼 꽤 길었다. 집이 하나도 없는 숲길을 올라가자니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 호젓한 산행을 하고있는 것 같았다. 가로수로 줄지어 서있는 배나무들이 눈 꽃 같은 하얀 꽃잎들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배꽃 향기가 코를 스쳤다. 언덕을 몇 번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동안, 완만하게 숲을 이룬 동산 위에는 희귀한 선인장들이 보라색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가끔 산토끼, 다람쥐들이 찻길로 튀어나오는 것도 샘이 사는 동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엘에이 K 타운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데 이렇게 조용한 전원적인 동네가 있는가 싶었다. 샘이 핸디 맨이 된 후로 이런 부촌에 일하러 가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여자의 집은 야트막하게 스페인 스타일로 지어진 좋은 저택이었다. 길에서 집 현관까지 들어가는 드라이브 웨이가 길면서도 둥글게  커브 진 것이 외부와 차단된 깊은 비밀을 간직한 집처럼 보였다. 특색 있고 부자 집 같아 보이기는 하나 왠지 쓸쓸한 감이 들었다.
  집 앞 바로 중앙에 쇠로 만든 우체통이 밑 부분이 잘라진 채 잔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샘은 차에서 내려 그 우체통을 이리 저리 들쳐보고 있는데 주인 여자가 안에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쓰러진 우체통 다시 세워달라고 전화 주셨죠? 제가 샘 김입니다."
  샘은 주인 여자에게 자기 명함을 내 밀었다.
  여자는 명함을 드려다 보고는 샘을 향해 말했다.
"  핸디 맨의 '행복 팔기'? 특이한 광고 문안이군요. 전화로는 나이가 좀 드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아주 젊은 분이네. 역시 젊어서 광고도 눈에 확 띠게 튀는 방법으로 했군요. 하여간 광고가 마음에 들었어요. 누가 그랬는지 우체통을 쓰러트렸어요. 전에도 한 번 쓰러져서 다시 새것으로 고친 경험이 있어서, 이 번엔 아주 벽돌로 쌓으려고 해요. 보기 좋은 메일 박스를 사서 안에 넣고 주변으로 벽돌을 쌓아주세요. 그러면 쓰러트리지 못하겠지요.
할 수 있겠어요? 벽돌을 쌓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 얘요. 바로 집 앞에 놓이는 것이라 집의 얼굴 같은 것이니 보기 좋게 잘해야 되요."
"그럼요. 핸디 맨이 이 일 저 일 가리는 것 봤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잘 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얼마나 들겠어요?"
"재료값에 수고 비 일 백 오십 달러만 쳐주십시오.
"재료값은 얼마인대요?
"그건 재료 상에 가봐야 알 것 같아요. 나중에 영수증 첨부하겠습니다."
"그럼, 빨리 사서 시작하세요.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오늘 오후면 끝낼 수 있습니다. "
"빨라서 좋군요. 미국 사람들은 일을 아주 늦게 하던데...."
  여자는 말끝을 흘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샘은 즉시 돌아서서 홈 디포(집수리에 필요한 재료 도매상) 로 향했다. 벽돌 쌓는 일은 처음 해보는 일인데 왜 그가 전에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행하고 장담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촌인 동네에 걸맞을 우체통을 만들어야겠는데 생각하니 좀 걱정이 됐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보니 벽돌로 우체통을 만들어놓은 집이 꽤 여러 채 됐다. 샘은 예쁘게 잘 쌓아 놓은 집 앞에 내려 벽돌의 수를 세어보고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양도 각가지였다. 그렇지만 제일 단순하고 쉽게 보이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을 굳혔다.
  홈 디포에 오긴 왔는데, 벽돌 하나 만도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고 접착제도 확실히 어떤 것을 써야하는지 도무지 감이 들어오질 않았다. 우선 흰색으로 만든 알루미늄 메일박스는 사 놓고 시멘트나 접착제를 파는 코너로 가서 적혀진 레이블을 세세하게 살피기로 했다. 아무리 드려다 봐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어서 판매원을 붙잡고 손짓 발짓 하며 물었으나 그는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만 할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샘은 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윤은 샘이 핸디 맨(수리공) 일을 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윤은 샘과 한 아파트에 살고있다. 샘의 아파트 2호실 바로 위층에서 그가 살고 있어서 윤 부부의 딸애가 위에서 너무 쿵쿵 뛰어다녀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러 와 서로 통성명을 했다. 그 후로 아내는 미세스 윤이 아이를 먼저  낳아 키웠기 때문에 대화하면 자신이 많은 것을 배운다고 가깝게 지내다 하루는 이런 얘기를 샘에게 했다.
" 그 집도 남편 혼자서 버는데,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아요. 2베드룸 아파트에 자기네 돈으로 에어콘 시설도 했던데.. 그래서 애 아빠는 뭐 하느냐고 물었지요. 핸디 맨이래요. 언제 틈 나면 당신 그 사람하고 한 번 얘기 해봐. "
   당시에 샘이 하던 일은 세탁소 공장에서 세탁물을 걷어다 대리점에 날라다 주는 일이었는데 몇 곳을 뛰고 나면 몸은 파김치가 되도록 고되고 운전 량이 많다보니 개스 값도 만만치 않았다. 그에 비해 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공장에서 잘못돼 나온 세탁물의 실책을 대리점에서는 그에게 잘못을 추궁하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수입이 좋으면 몸이 고되고 힘든 것쯤은 견딜 수 있으나 그 일은 그렇지 못했다.
  벌이도 좋지 않은 일을 힘겹게 할 때마다 기회 많은 나라에 와서 잘 살아보겠다고 이민 왔는데 이렇게 지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나 하는 회의가 자꾸 들곤 했다. 그렇다고 아내마저 노동판에 내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샘이 그 날도 하루 종일 차에 세탁물을 가득 싣고 거의 3백 마일이나 돌아다닌 덕에
지칠 대로 지쳐서 집에 들어오던 시간에 주차장에서 윤과 마주쳤다.
"윤형, 제가 직업을  바꾸고 싶은데, 개인적인 질문 좀 해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럽게 하기 어려운 말을 건네는 샘의 심정을 읽었는지 윤은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방으로 갑시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뜻밖에 선선히 답해주고 친밀감을 내 비치는 바람에 윤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샘은 자기 형편을 솔직하게 말하고, 윤이 하고 있는 직업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싶었던 모든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이 직업이요, 신체 건강하고 손재주와 눈썰미 좋으면 해 볼만하죠. 음 체격은 좋군요. 건강한 편이죠? 생각 있으면 당분간 날 따라다니면서 조수로 일 해 보겠오?"
"그러고 싶지만,  지금 하는 일 당장 그만두면 아파트 세와 생활 비 마련은 어떻게 합니까?  그 날 벌어 그 날 먹는 인생인 걸요."
"이 번에 30유닛 아파트 건물과 식당 수리를 맡아서 도와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날 도와 함께 일한다면 월, 2천 달러는 지불할 수 있어요."
  샘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평균 얼마나 법니까?"
"대중없어요. 많을 때 많고... 적을 때도 있지만 지금 미스터 김이 버는 것만큼은 넉넉히 벌어요. 빨리 벌어서 좋은 동네에 집을 사고 이사가야 딸애 좋은 학교 보내지요."
  윤은 이 일만 하면 돈 버는 것은 보장된 듯이 자신 있고 신념에 찬 태도로 말했다.
"헌데 이런 일은 라이선스 있어야 하지 않나요?" 샘이 의구심 가득한 눈길로 다시 물었다.
"플러밍(납공, 수도 배수관 연결 수리)이나 건축 일만 하자면 당연히 그에 해당된 면허가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전반적인 수리 일을 하면서 500달러가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을 맡으면 핸디 맨의 쟙으로 라이선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린 주로 한인들을 많이 상대하니까 잘한다고 소문만 나면 500달러 넘는 일도 많이 맡게돼요. 왜냐하면 면허 있는 플러머(수도 배수관을 연결하는 사람)를 부를 경우 노임을 시간당 계산하는데 엄청 비싸니까, 대게는 손쉽고 저렴한 값으로 일을 맡길 수 있는 핸디 맨을 찾거든요."
  윤의 확실하고도 스스럼없는 제안에 샘은 다음 날부터 그를 따라나섰다. 한 3개월을 윤을 도와서 샘은 일을 배우며 솜씨 좋고 능력을 인정받는 핸디 맨이 되어보고자 결심하면서 기술을 습득했다.
  목수 일이 많았다. 나무를 재단하고 캐비닛을 만들고 하는 일들은 샘이 총각 시절에도 즐겨했던 일이기에 책장이나 신발 장 같은 것을 짜 놓으면 식구들 모두가 좋아하며 재주 있다고 칭찬하곤 했다. 윤과 함께 했던 일들은 샘이 좋아하는 일이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놓으면 윤은 퍽 만족스러워 했다. 간혹 전기 일에 속하는 일도 조금씩 했다. 오래된 라이트를 새로운 모델로 바꾼다든지, 전기 연결한 선에 이상이 생긴 것을 고치는 일도 윤을 통해서 방법을 배웠다.
" 미스터 김은 타고난 핸디 맨이야. 힘도 좋고, 재주도 좋아. 이젠 자신의 연장과 도구를 마련하도록 해. 중고 깡통 밴을 하나 사. 아, 지금 쓰고 있는 밴을 사용하면 되겠네.
독립해도 되겠어. 신문에 광고를 내서 고객을 불러모으라고. 만약 손님이 없어 수입이 모자라는 달엔 내게 말해, 부족한 면 채워 줄 일거리는 줄 테니......"
  샘이  자기보다 세 살이나 아래임을 알고 나서는 윤은 말도 놓으며 동생 대하듯 세세하게 일러주고, 필요한 도구들을 마련하는데 일일이 따라다니며 도움을 주었다.
  친형이라도 이렇게 친절하고 따듯하게 살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샘은 윤을 가까이 알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맙고 다행으로 여겨졌다. 독립하느니, 그냥 윤을 형처럼 따라다니며 더 일을 배우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기술을 습득하여 직업으로 입지를 굳히기 위함 보다 윤이 베풀어주는 인간적인 정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미국에 샘의 친동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남들 형제가 의좋게 왔다갔다하는 집을 보면 참으로 부러웠다. 또 살아가다 답답한 일이 생길 때 의논 대상이 그리웠는데, 윤은 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다.
  샘은 단신으로 아내를 쫓아 미국에 왔다. 아내의 언니가 미국으로 시집을 와 시민권이 있던 터라 시민권자의  부모형제는 이민 수속의 일 순위였던 아내의 덕을 입고 올 수 있었다.
미국에 올 수 있었던 동기조차도 샘 자신의 주관과 미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고 무작정 여자를 쫓아 왔기에, 미국 땅에 자리잡는 것이 더 힘들었다.
  공부를 잘 해서 더 낳은 교육을 위해 유학 온 것도 아니고, 학벌이 없는 탓이라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한국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가족들로부터는  내쳐진 신세나 다름없이 왔기에 고향이나 식구들의 그리움 같은 것들은 가능한 한 지워버리고 살려고 노력했다.
  친척이라곤 오직 처형 네 식구들뿐인데, 그들도 샘을 능력 없어 자기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혹시나 자기들에게 부담이나 주지 않을까  해서 가까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내도 남편을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처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국서 맞벌이는 흔히 있는 부부의 양상이고 생활 수준도 확실히 혼자 버는 것에 비해서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샘은 아내를 일터로 내보내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라서 직장이라면 바느질 공장이나 단순 노동 같은 일이었지만 그는 아내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노동을 하든 장사를 하든 안식구는 가장이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게 샘의 평소 생각이었다.
' 나도 무슨 일이든 해 볼까? 남들은 다 둘이 벌어서 그런지 자리들을 빨리 잡는데...' 아내가 한 때 직업을 찾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샘의 생각은 달랐다. 어쨌거나 남편의 하는 일이 고정 수입을 드려올 수 있는 것이어야지. 아내는 이제 곧 아이도 낳아야하고 집안 살림에 재미 드려야한다면서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뭔가 좀 더 나은 일거리를 찾던 중에 윤의 도움을 받아 핸디 맨 쟙을 잡게 된 것이다. 혼자 일을 맡아 독립해보라는 윤의 권고에 그는 신문에 낼 광고 문안을 고안해봤다. < 만사 해결. 맡겨보세요. 행복 팔기의 핸디 맨 >으로 신문과 동네 잡지에 실었다.
  샘이 자기가 하는 일을 행복 팔기의 일종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여자들이 집에서  부엌의 싱크에 물이 잘 안 내려가거나, 또는 목욕실에서 생기는 고장을 아주 귀찮아하고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기나 개스 랜지 혹은 세탁기 등의 자질구레한 고장들을 말끔히 수리해주면 상상외로 기뻐하고 후련한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착상을 해 그런 문안을 만들어 보았다.
   <행복 팔기의 핸디 맨  샘 김>
   처음엔 좀 유치하고 너무 튀는 게 아닌가 했으나, 그 문안 덕분인지 광고 나가자 일감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미처 다 주문을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을 고르는데도 윤은 이렇게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전화가 왔다고 무조건 일을 받지 말아. 잘 선택해야 해. 어떤 사람은 못도 하나 박지 못해서 핸디 맨을 부르는 거야. 그러면 30분이나 한 시간 걸려 찾아가서 못 하나 박아 놓고 얼마를 받느냐 말이야. 시간 드려 찾아가야 할 일과 가봤자 별 소득이 없는 일들은 구분해서 거절할 건 일이 너무 많이 밀렸다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하는 법도 알아야 한단 말이야."
  그랬다. 그 여자에게서 주문 온 일감도 사절했어야 했다. 처음 맡아보는 일인데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데 비해서 별 소득이 없는 일임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헌데 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실수를 할 때는 자칫 하는 순간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 같았다.
  "광고 문장이 마음에 들어 전화를 걸었어요. 어떤 일이 전문이세요? 우리 집 일은 벽돌쌓기인데,  광고를 낸 솜씨를 보니 특이한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아요. 해 줄 수 있겠죠?"
  목소리가 낭랑하고 맑았다. 여자의 음성으로 봐서는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어쩌면 그 맑은 음성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벽돌쌓기라 해도 처음 해 보는 일인데, 겁 없이 해 보리란 결정을 내렸던 것 같다. 아니면 보지도 않고 샘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그 여자의 말투에 끌려서 전화를 받는 순간 벌써 마음을 정했던 것 같다. 그녀의 호감 가는 어투에 끌려서건, 우체통을 한 번  만들어 보고싶다는 생각에서건 우선 보고 결정할 일이라 생각하고 주소를 받았던 것이다.
  전화 목소리로 나이나 생김을 추측할 수 없었지만 젊고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를 상상하며 이 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여자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못 생긴 편도 아니었다. 교양이나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부인인데 부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일 해놓은 후 돈 받는데는 별 문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홈 디포에 재료를 사러 샘 혼자서 오는 일도 처음이었다. 그 동안은 늘 윤을 따라다녔으며, 그가 사는 물건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무거우면 좀 거들어주는 정도였다. 레이블을 읽어보고 물건을 택하는 일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혼자서 벽돌을 쌓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사려고 보니 어디서 마땅한 물건을 골라야 하는지 조차 막막했다.
  홈 디포에 와서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메일 박스만 샀지 다른 물건은 고르지도 못했다. 이러다 시간만 다 보내겠구나 싶어 어쩔 수 없이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 일하고 있을 그를 귀찮게 하는 일이라 미안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화 받자마자 윤은 아니, 그런 일은 왜 맡았어? 그게 쉬워 보여도 꽤 까다로운 일인데.. 큰일 났네. 샘 혼자서는 못할텐데.... 쯧쯧 혀까지 차면서 안타까워했다. 괜찮아요. 내 혼자 힘으로 해 볼 테니까요. 정확하게 뭘 얼마큼 사야하는지 만 알려주십시오.
  샘이 벽돌을 비롯해서 몰탈 접착제 등 모든 것들을 사서 부인의 집으로 왔을 때는 오후 3시가 벌써 넘어서고 있었다. 해가 짧은 때라서 이제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샘은 주인 여자에게 오늘 중으로 끝 낼 거라고 약속을 했는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전에 해보지 않던 일이라 그런지, 벽돌을 똑바로 올려놓기도 쉽지 않았다. 윤이 가르쳐 준대로 줄을 이용해서 선으로 사용하고 벽돌을 쌓았지만, 생각대로 잘 붙어주지도 않았다. 또 구석에 완전한 벽돌 한 개로는 너무 크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사이즈로 잘라내는 일도 매끈하고 똑 바르게 되지 않았다. 잘 못 잘라서 못 쓰게 된 벽돌들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아직 반도 쌓지 않았는데, 주변은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컴컴해서 외등을 밝힌 불빛의 도움 받아 계속 벽돌을 올려놓고 있는데  주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 해 봤다더니, 처음인가 봐요. 많이 서툴군요."
  샘은 얼굴이 후끈거리고 등골에 땀이 죽 흘렀다. 아무 대꾸도 못하고 다시 새 벽돌 한 개를 집었다.
"오늘은 어차피 일 끝내기는 글렀어요. 내일 와서 마저 끝내도록 하고 안에 들어와 드링크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이걸 일이라고 했냐?, 모조리 부스고 다시 쌓아라. 경험도 없으면서 해봤다고 거짓말했느냐? 앙칼진 꾸중의 말들을 퍼부을 줄 알았다. 그리고 들을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고 동정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샘은 도리어 이러다 더 큰 벌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가 싶어 가슴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사실로 말하면, 브릭을 쌓는 일을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근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해봤다고 말씀드렸어요. 내일 와서 허물어버리고 다시 쌓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요. 우리 우체통 하나 만들자고 연 이틀을 공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내일 와서 그 위에  마저 쌓고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세요. 자, 들어와요."
  샘의 바지는 흙이 많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진종일 밴 몸의 땀 냄새와 얼굴의 먼지, 옷에 묻은 벽돌 가루가 주인의 집안을 더럽힐 것만 같아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갔다, 내일 아침 일찍 오겠습니다."
"내 말 들어요. 들어와서 얼굴과 손을 씻고 따듯한 차 한잔하면 훨씬 피곤이 풀릴 거 에요. 그 후에 집에 가면 되잖아요?"
  샘은 갑자기 주인 여자가 누님처럼 따사롭게 느껴졌다.
  여자의 집안은 밖에서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아기자기 하고 아늑하게 꾸며놓았다. 집 외면은 웅장하고 근사한 느낌만 줄뿐 안의 이런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파스테일 톤의 은은한 벽의 색깔이 안정감을 주었으며 컨츄리식 전통 가구들을 배치 해놓아 안의 분위기는 부유한 사람이 누리는 풍부함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파우더 룸(객을 위한 화장실)에선 레몬 향기가 났다. 손을 씻다 보니 벽돌을 자르면서 찢긴 상처가 쓰라렸다. 팔뚝에 굵은 힘줄이 드러났다.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하루종일 헛고생만 한 힘 좋은 근육질의 사내가 넋빠진 듯이 눈에 초점을 잃고 있었다. 샘, 너, 하루종일 헛일했구나. 좀, 똑똑히 굴어라.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야, 이 병신 아'.
소리지르고 싶었다.
"무슨 손을 그렇게 오래 씻어요?"
  여자의 질문은 오랫동안 친숙한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어감이 서려있었다. 주종 관계에 있는 수리공과 주인 여자와의 사이에서 오고 갈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아유, 손을 다치셨군요. 확실히 숙련공은 아니네요. 여기, 네오스포린 연고와 밴데이드 있으니 바르세요. 커피? 아니면 맥주 괜찮아요?"
  여자의 친절은 샘이 누구의 집에 초대받아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친절이 부담스럽거나 싫지 않았다.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공간이 여자의 상냥한 호의와 잘 배합이 되어 샘으로 하여금 오래 전부터 왔던 곳, 아주 오고 싶었던 곳을 찾아 온 것 같은 평안과 즐거움이 생겼다. 그런 마음의 평안함은 샘의 긴장감과 일을 실패한 것에 대한 불안을 많이 완화시켰다. 마치 퇴근 후 집에 와서 샤워를 한 후 편히 티브이 앞에 앉아있는 그런 기분과 똑 같았다.
"맥주 주십시오. 이렇게 넓은 집에 식구가 별로 없으신가 봅니다."
"나, 혼자 살아요."
  샘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다 말고, 여자를 쳐다보느라 사레들을 뻔했다. 혼자서 이런 집을 쓰고 있다니. 이 여자는 과부인가? 이혼녀인가? 어느 편이든 상속을 많이 받은 것임엔
틀림없다.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한 사 십쯤. 많이 먹었어야 한, 두 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혼자라니. 순식간에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돈 많은 사람의 내연의 처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특색이 없고 매력이 없다.
허기야 매력은 처음 봐서 알 수 없는 일이지. 사귀어 볼수록 끌릴 수도 있고, 반대로 정이 뚝 떨어질 수도 있는 게 인간 관계이니까.
"집이 너무 커서 혼자 살기에는 무섭겠어요."
"이젠 오래 되어서 별로 그런 줄 몰라요. 무섭다기보다 외롭지요. 미스터 김, 결혼했어요?"
"예, 했습니다. 아내가 지금 임신중입니다."
"그래요? 행복하겠어요. 참, 미스터 김은 행복을 판다고 했죠? 오늘 저녁, 내게 그 행복을 파세요. 값은 후하게 치를 테니까"
"예-?"
  샘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치켜 떴다. 여자는 정염에 불타는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여자의 농익은 눈길과 음성 속에서도 처음에 그는 '행복을 팔라'는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샘과 여자가 생각한 행복의 의미는 차원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는 여자의 욕정을 눈치채지 못한 남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여자의 배후를 알지 못하는 샘으로선 솟구치는 남자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피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샘의 굵은 근육의 팔을 붙잡고 거실의 소파로 끌고 가서 반 눕는 자세를 취했는데도 그는 남과 여의 만남에 불을 지필 수가 없었다. 샘은 두렵고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 표정을 지은 채 꿔다놓은 보리자루 같은 소극적인 태도로 자꾸 움츠릴 뿐이었다. 여자는 샘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나는 사생활을 점검 당할 남편도 없고, 임신할 가능성도 없는 여자 에요. 그리고 나 절대로 미스터 김의 결혼생활 훼방놓을 맘 없어요. 단지, 때로 강한 남성이 필요할 뿐이니까, 그 때마다 내게 행복을 팔면 돼요."
  여자의 말은 샘의 행동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개스 선이 다 들어와 있는 벽난로에 성냥을 갖다댄 듯 불길이 활활 올라붙었다. 그의 눈빛은 먹음직스런 먹이를 앞에 둔 들 짐승 같아 보였고 헐떡이는 몸짓은 태풍 만난 파도로 변했다.
" 얼마치를 팔면 되지요?"
  숨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묻던 샘은 여자의 아랫도리를 몽땅 벗겼다. 옷을 벗길 때 그의 둔탁하고 껄껄한 손이 여자의 살갗을 스칠 적마다 그녀는 온 몸을 전율하면서 야릇한 기성을 냈는데. 그것은 분명 행복을 삼키는 신음의 소리였다. 여자는 사내의 목을 두 팔로 휘어 감으며 자기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 더 사기 원합니까?"
  사내는 무섭게 성이 나있는 성기를 촉촉하게 젖어있는 여자의 질 속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아! 이 흡인력이라니!' 오직 자기와 여자만 존재하는 동떨어진 천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자유로운 쾌적함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얼마나 많은 행복을 사고 팔았는지, 샘이 그 여자의 집을 나설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오늘 너무 많은 행복을 팔았죠? 혹시 이젠 더 이상 팔 행복이 없는 건 아닌지?"
"그렇지 않아요. 나도 행복을 샀기 때문에 아직 많이 남아있어요."
"그럼, 내일도 팔 수 있어요?"
  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체통을 끝내야 하기도 하지만 연 이틀을 벌이 하나도 없이 공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보다 더 겁이 나는 것은 사내를 마구 잡아끄는 그 여자의 테크닉이었다. 그것에 맛들여지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무에 걸려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아서였다.
"자, 이건 오늘의 행복 값. 내일 치는 내일 계산하기로 하고..."
  여자는 차를 타는 샘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샘은 동네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신호등 앞에 섰을 때 궁금증을 못 이겨 봉투를 열어보았다. 일 백 달러 짜리 지폐가 다섯 장 들어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지났을 때라 샘은 조심스레 주차를 했다. 모두들 잠이 든 시간이어서 낡아빠진 차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엔진을 끄자 급작스런 정적이 차고 안을 메웠다.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서 샘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코까지 골았다. 침대 위에 네 활개를 피고 누워있는 아내의 배가 숨차 보이도록 올라와 있었다.
  아내 옆으로 슬쩍 누워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들지 않아 여러 번 뒤척거렸다.
  꿈속이었는지 아니면 반수면 상태였는지, 계속 여자의 가쁜 숨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샘의 몸에 와 닿았던  그녀의 감촉이 머릿속을 뱅뱅 돌다가 아침이 밝아버렸다.
  샘은 그 날 여자의 집에 가지 않았다. 여자에게서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삼분의 일쯤 쌓아올린 우체통은 누가 봐도 아마튜어의 솜씨로 알아차릴 만큼 서툴고 삐뚤었다. 주인 여자의 말대로 그 위에 마저 벽돌을 쌓아 끝을 내어버릴 수는 없었다. 우체통은 매일 우편 배달부가 보고 만질 것이며,  이 집의 면상과 다름없는 물건인 것을 그냥 실패작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샘은 여자와 나의 관계가 공정하게 맺어지기 위해서도 이 우체통은 다시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우체통을 볼 때마다 실패작을 만든 핸디 맨 샘으로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이층에 있는 윤을 찾아가 다시 자문을 구했다. 자세하게 물어서 어떻게 쌓아야 좋은 모양이 나올 수 있는지 정확한 방법을 알아낸 후 적당량의 벽돌과 접착제 등의 재료를 새로 구입하기로 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우체통 쌓기 위해 길을 나섰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벽돌을 허물기는 어렵지 않았다. 모조리 부수고 나서 말끔히 바닥을 쓸고 메일 박스의 기반이 들어갈 자리를 만든 다음 시멘트를 섞어 밑 부분 가장자리로 부었다. 그리고 주위로 돌아가면서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 안으로 흰색에 금빛 테를 두른 알루미늄 메일 박스를 들여놓고, 위에는 얇은 쇠판을 둥글게 휘어 아치 모양을 낸 후에 벽돌을 옆으로 세워 붙였다. 그가 보기에도 아주 훌륭한 우체통이 되었다. 벽돌도 처음에 샀던 그냥 붉은 색이 아니라, 약간 희끗희끗 바랜 듯한 색깔을 썼기 때문에 훨씬 운치가 있고 고전적인 우체통이 되었다. .
  샘이 이 일을 끝냈을 때는 짧은 해가 기울기 시작한 5시 무렵이었다. 오전에 와서 한 낮의 따가운 빛을 종일 받고 우체통과 씨름을 한 탓에 이마와 등, 온 몸에 땀이 배었고 나른한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는 만족스럽게 만들어진 우체통을 보면서 후련한 성취감을 느꼈다.
"샘, 고집도 어지간하네요. 그냥 하라고 했는데, 그걸 다시 허물고 새로 만든 것을 보면... 하여간 보기는 좋군요. 수고 많이 했어요."
"이제, 마음에 드십니까?"
"정말, 잘 만들었어요. 자, 여기 재료값과 수고 비 있어요."
"아닙니다. 그저께 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샘은 손을 좌우로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주인 여자는 돈 봉투를 억지로 샘에게 안겨주며 시선을  자기 발 밑에 둔 채 말했다.
"들어가지 않고 그냥 갈래요? 오늘은 행복 안 팔아요?"
"죄송합니다. 목수 일이 전문이니, 뭐든 나무로 만들 일이 있으면 앞으로 전화 주십시오"
여자가 묻는 말에 합당치 않은 동문서답을 하면서 샘은 쫓기는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삐 차에 올랐다.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가 언덕으로 올라
서자  백 미러 속의 쓸쓸한 저택 앞의 여자의 모습도 사라졌다.
  흐드러지게 핀 배나무 꽃들이 저물어 가는 남은 빛에 곱게 물이 들어 분홍빛을 띄우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산 중턱에 검푸른 띠를 두르고 있고 언덕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엘에이 시에도 황혼 빛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푸리웨이 입구 사인이 보이는 길목에서 샘은 갑자기 차를 돌려 여자의 집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는 이틀 동안 자신이 땀 흘려 만들어놓은 우체통에 여자가 억지로 맡기듯 쥐어준 돈 봉투를 깊숙이 집어넣고 돌아섰다.


2004년 February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다시 읽는 명작 조정희 2013.09.02 450
27 아니, 벌써 2월. 조정희 2010.02.20 1509
26 사슴에 가슴이 있다면 조정희 2009.08.31 1902
25 소설가, 김훈씨와 함께 조정희 2008.02.01 1899
24 그녀가 찾는 동네 조정희 2008.01.25 2134
23 그 이름 조정희 2008.01.25 2243
22 어떤 목소리(꽁트) 조정희 2008.01.22 2316
21 미친 여자 G嬉(꽁트) 조정희 2008.01.21 1946
20 시인의 봄날 조정희 2007.02.17 1485
19 두 목숨 조정희 2007.02.17 1391
18 인연 조정희 2007.01.27 1417
17 까치가 온다면 조정희 2007.01.20 1425
16 새해님을 향해 조정희 2007.01.20 1091
15 공연 리뷰 '레미제라블' 조정희 2005.01.17 1522
14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조정희 2004.09.25 1245
13 베니스 해안에서 조정희 2004.06.28 1259
12 새벽을 이렇게 조정희 2004.06.14 1386
» 핸디 맨 조정희 2004.06.14 1582
10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 조정희 2004.05.26 1269
9 30년만의 겨울 조정희 2004.02.04 1316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16,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