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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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평화약국 뒷집 (단편 소설)

2008.07.23 07:40

최영숙 조회 수:1853 추천:275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우리 집은 다섯 번째 이사를 했다. 학교는 네 번째였다. 첫 번째는 고향 정남에서 수원으로 옮겨갔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일기책의 주인공 윤복이가 전 국민을 아프게 했던 그 해 겨울에는 서울 삼청동으로 갔다. 그리고 삼청국민학교는 겨우 십오 일을 다니고 끝이 났다. 바로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고 방학 중에 우리는 또 포천으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백마부대 용사가 되어 월남으로 떠난 막내 당숙이,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꽁까이와 찍은 사진을 보내왔던 그 여름에는 용인으로, 그리고는 일 년 만에 용인을 떠나 다시 수원으로 오게 되었다.

때마다 타고 간 이삿짐 차들의 종류가 다양했던 만큼이나 사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들도 그랬다.
북문 사거리 아래에 있는 평화약국 뒷집이 우리가 살 곳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큰 길에서 들어와 베이비 원기소, 강력 원기소와 통통한 갓난아이 둘이 발가벗고 앉아서 비오비타를 선전하는 광고지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약국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자 아버지 말대로 조선 기와집들이 여러 채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삿짐을 실은 용달차가 세 번째 한옥의 대문 앞에서 쿨커덩 소리를 내며 멎었다. 어른들은 어림짐작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 집은 약국의 뒷집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국의 뒷동네였다.

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남자 아이 둘이 뛰어나왔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며 차 안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운전사 아저씨가 재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조수석에서 내려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짐칸을 기웃거리고 있는 남자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멀 봐? 씨양년아."
그 집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간에서 내가 들은 첫마디였다.

"야아, 지지배야, 째려봄 어쩔래? 이거 우리 집이다!"
나보다 두 어 살 어려 보이는 작은아이가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 가슴에서는 후딱 불이 일었지만 딸자식 셋을 데리고 셋방살이로 나앉은 신세를 아직 면치 못하고 있는 어머니의 훈계조항을 잊지 않고 있던 나는 신고 있는 납작 고무신의 리본만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치졸하게 어른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잔 돌멩이를 내게 톡톡 던졌다. 하지만 나는 뾰족한 턱에 째진 눈을 가진 아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 집, 평화약국 뒷집의 첫 날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구당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당 조직부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는 당의 지시에 따라 조직이 필요한 지역으로 자주 옮겨 다녀야만 했다. 그 덕분에 나는 학교 친구들과 정이 들을 만하면 전학을 했다. 어디로 가는지 친구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버지 사무실에서 형편대로 내어주는 트럭에 실려 낯선 지역에 이삿짐과 함께 떨어지면 그 곳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집에 적응하는 것 못지않게 전학도 언제나 새로운 결심을 요구했다.

낯선 아이들에게 먼저 파고들어 가야할 것인가, 아님 기다려야 하는가를 결정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쉬는 시간에는 외톨이가 되었고 점심시간이면 끝내 혼자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도시에서는 촌뜨기로 불리다가 다시 시골로 가면 서울까치로 별명이 바뀌기도 했다. 고무줄놀이나 가이생, 사방치기에 끼워주지 않아서 혼자 빙빙 돌 때, 그 때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다. 아무튼 그것은 늘 혼자 치러 내야 하는 신고식이었고 버거운 갈등이었다.
기역자집의 건넌방 쪽에 내어달은 두 칸짜리 방에는 여덟 살, 세 살짜리 동생 둘과 어머니, 아버지 우리 다섯 식구가 살았다. 무엇보다도 장독대가 가까워서 어머니는 편하다고 말했는데, 햇볕 좋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놓은 장항아리에서 간장, 된장이 졸아드는 냄새가 방안에까지 스며들어 오는 방이었다.

안채 부엌, 문간 쪽에 붙은 한 칸짜리 방에는 미란이네가 살았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청춘 배우 오영일이를 닮았다는 미란이 아버지는 인근 남자 중학교 수학선생이었다.
주인집 여자는 머리숱이 적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가 성깃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런지 늘 후까시 머리를 하고 다녔다. 큰아들, 형곤이와 똑같이 생긴 주인 남자는 지방 공무원이라 주말에나 집에 돌아왔다.
그 집 아들, 형곤이와 재곤이는 밖에서 놀다 들어오라는 명령에 따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눈이 퀭하도록 북수문 개천가를 휘젓다 돌아오고는 했다. 어느 날, 나는 해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는 시간에 재곤이가 대문 앞의 시멘트 쓰레기통에 몸을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앞을 모른 척 지나가려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애와 마주쳤다.

"야, 울 엄마 집에 있냐?"
나는 재곤이를 향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른다는 표시였는데 재곤이는 없다는 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뒤따라 들어 온 재곤이는 마루턱에 걸터앉아 미란이 엄마하고 수다를 떨고 있던 제 엄마를 발견하고 흠칫 놀랬다. 예상했던 대로 일찍 돌아온 대가로 불벼락이 떨어지면서 고무신 한 짝이 직선으로 날아왔다. 재곤이는 잽싸게 피했다. 재곤이는 잔뜩 골이 나서 나를 도끼눈으로 째려보며 대문을 튀어 나갔다. 다음 날, 나는 재곤이가 던진 돌멩이로 뒤통수를 아프게 맞아야만 했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아버지가 일하는 사무실에 놀러가거나 때로는 늦은 점심 배달을 갔다. 시장 입구, 이층 목조 건물 사무실에는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온 어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땀내 나는 청년들로 웅성거리기도 했다. 사무실은 대체적으로 시끌벅적 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이리저리 다루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큰딸인 것과 할아버지의 장손녀이며 증조할아버지의 더할 수 없이 사랑 받는 증손녀임을 뿌듯하게 느끼는 때는, 사무실에 찾아온 누군가가 할아버지의 이름을 대거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대면서 내 상고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방문객이 없는 날은 사무실 한 쪽, 창문을 뒤로 하고 앉아서 아버지는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와 씨름을 했다. 둥근 벽시계 외에 이렇다 할 장식이 없는 사무실 벽에는 태극기 액자와 대통령 사진만이 달랑 걸려 있었다. 그의 약간 튀어 나온 입매며 그래서인지 비뚤어져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의 키가 작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발돋움을 하고 사진을 찍은 듯이 빳빳하게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는 내게 아버지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면서, 야, 임마, 이 아부지가 말야, 경회루에서 당원들이 다아 모인 데에서, 앞에 불려 나가 각하하고 이 손으로 악수했단 말이야, 하고 말했다. 나는 치이, 아부지, 경회루가 어딘데, 중국집? 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아버지가 가진 세상은 내게 우주와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 사무실은 우주 기지였고 아버지는 우주 조종사였다. 언젠가는 멋지고, 아름답고, 넓은 세계로 나를 데려가 줄 그런 조종사였던 것이다. 재곤이에게 욕을 먹고 돌멩이로 얻어맞아도 내 속에는 차돌멩이 같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은 고추장에 찔러 넣은 마늘쫑처럼 갈수록 질기게 여물어가는 꿈이었다.

오른쪽 앞발을 슬쩍 쳐들고 있는 황소 깃발 옆에서, 아버지가 분홍색 나일론 보자기를 풀고 찬합 속의 오뎅조림과 계란말이로 점심을 먹는 동안에, 나는 목제 의자를 창가로 끌어당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내려가 그들 속에 섞여 보면 나른한 일상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그곳을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는 분리된 다른 공간에서 별다른 일을 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래 골목은 시장 통이었다. 사무실 맞은편에는 만나 찐빵집이 있었고 그 옆은 북문 국밥집, 다른 편 옆으로는 사라 단추가게가 있었다. 가끔, 어머니가 대바늘로 떠놓은 스웨터에 맞춤한 단추를 사기 위해 단추가게를 들르기도 했다. 실은 단추가게 여자가 골라주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어머니는 대체적으로 내가 골라간 단추를 맘에 들어 했다. 단추 집 미닫이 유리문은 조심스럽게 열어도 늘 드르륵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을 다 열기도 전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걸어나왔다. 그녀가 단추를 찾기 위해 상자를 집어 올릴 때마다 차륵차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침침한 가게의 공기를 잠시 들었다가 휘저어 놓았다. 나는 색색의 단추가 들어 있는 손바닥만한 뿔 상자를 들어서 딴에는 조용하게 삼 삼칠 장단에 맞춰 흔들어 보기도 했다. 단추들이 부딪치며 흐르는 그 소리는 아이들이 모여서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에 맞춘 리듬 같기도 했다. 나는 흐뭇해서 슬며시 웃었다.
그녀는, 스웨터가 무슨 색이니? 하고 묻고는 내 단추 놀음을 모르는 척하면서, 여러 모양의 단추를 자신의 블라우스에 대어보고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느라 답답하리 만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내 눈에 띈 투명한 노란 색 단추, 그 속에는 나비 모양의 하얀 리본이 들어 있었는데 내게는 그게 불가사의처럼 느껴졌다.

뒤집어보고 흔들어봐도 속에 들어 있는 리본이 움직이지 않는 채 똑같은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결국 포기하고 상자 속에 되돌려 놓자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그 단추를 집어 들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
조그맣고 하얀 얼굴이었다. 햇빛에 나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핏기 없는 얼굴이, 천정 낮은 가게 안에 동그랗게 떠 있었다.

"얘, 이리 좀 와 봐라, 여기 이 단추 좀 볼래?"
그녀가 내 눈 앞에 들이민 단추는 연보라색이었다. 안에는 은빛 단풍잎이 들어있고 가운데에 자줏빛 반짝이가 소복이 박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은목걸이에 단추를 갖다대면서 내게 물었다.
"어때, 예쁘지 않니? 공주님 목걸이 같지?"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서른도 훨씬 넘어 보이는 그녀가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며 장난스럽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의 웃음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어머니의 주문에 따라 골라 놓은 은장식 테두리의 빨간 단추 다섯 개와 함께 노란 색, 보라색 두개의 단추를 덤으로 봉투 속에 담아 주었다. 단추를 건네받고 나서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애?할 말 있어?"
"....저어, 가게 이름에.... 사라는 뭐예요?"
전부터 궁금하던 일이었다. 단추를 사라는 건지, 뭔지.
"으응, 그건 내 이름이야.... 사라, 멋있지?"
그녀의 눈이 보라색 단추처럼 반짝였다. 집에 돌아와서 두 개의 단추를 꺼내, 어머니 앞에서 그녀가 하던 대로 목에 갖다 대고 목소리까지 흉내를 내자 어머니가 갑자기 단추를 잡아채며 미쳤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 그 서슬에 뒤로 넘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옴머머, 이젠 거기다시 가지마라! 징그럽다, 쪼꾸만 앨 데리구선...."
그녀는 가겟방에서 양장점을 하는 여자와 부부처럼 산다는 말이었다.
"약국 건너편 현대 양장점 , 그래, 금보당 옆에 있는 거. 거기 주인이 남장을 한 여자야. 단추가게 여잔 여자구 양장점 여자는 남자 노릇을 한다니까”
난 그 여자의 하얗고 조그맣던 얼굴을 떠 올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자가 하는 남자 노릇, 여자와 여자가 하는 부부 노릇이란 어떤 것일까. 심심하고 나른해 보이던 그녀의 모습. 난 노란 단추 속처럼 도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공주님 목걸이 같은 단추조차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낯선 세계였다. 지금은 내게 멀리 있는 그곳이었지만 언젠가는 밀어낼 수 없이 다가와 내가 들어서야할 세계가 한쪽 켠을 슬며시 열어 내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어머니가 늦은 밥상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 단추가게 여자 얘기를 꺼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 얘기를 다시 꺼내는가 해서 짜증이 일어나는 참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근데 .... 미란이 아버지 말예요, 요기 우리 집 문간방 수학선생.... 그 여자 가겔 드나든다는 말이 돌아요... 사란지 뭔지 그 여자가 어딘지 문 희 눈매를 닮은 데가 있긴 하지만.... 여적지 미란 엄만 모르는 눈치예요....."
아버지는 밥을 뜨다 말고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돼? 내 눈으로 본 것만 얘기해, 본 것만!"

북문 시장, 국밥집 앞에는 긴 나무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내 눈에는 마치 시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리어카 꾼이나 지게꾼들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어느 새, 푸성귀나 곡식 한 됫박씩을 바닥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살피고 있던 아줌마들과 장보러 나온 중절모 어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국밥을 먹으면서 길바닥에 콧물을 핑핑 풀어댔다. 그 앞에는 국수사리를 올려놓은 채반과 가마솥 하나가 화덕 위에 걸려 있었다. 가마솥에서는 쉬지 않고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그들은 수증기가 쉭쉭 솟아오르는 가마솥 앞에 앉아서 뚝배기에 얼굴을 들이박고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었다. 저만큼에 놓여 있는 지게도 리어카도 푸성귀도 안중에 없는 듯이 국밥을 퍼먹다가도 누군가가 그 근처를 기웃거리기만 해도 바지춤을 추키면서 벌떡 일어서던 사람들. 그것은 눈물겹지만 생동감 있는 무성영화 한편이었다.
국밥집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학교 가는 길이 나타났다. 그 길 어귀에 내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만화경 아저씨였다. 필름을 골라서 만화경 속에 넣고 두 눈을 딱 붙이고 난 뒤, 옆에 붙어 있는 고리를 누르면 찰칵 소리를 내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얄밉게도 찰칵 소리 몇 번에 필름이 끝나 버린다.

그 날, 내가 연거푸 같은 필름을 들여다보자 만화경 사장님이 내 만화경을 빼앗으며 말했다.
"뭔데 그려?... 어엉, 이거 서반아구먼, 이건 투우고, 자아 보자, 뒤에는 탱고 춤이란 거여”
"....서반아가 얼마큼 멀어요?"
"거기? 거기는 우리나라 반대편이여, 원체 멀어서 가 본 사람덜이 멫 되지 않을 걸.... 근데, 소들이 원래는 빨간 색만 보면 휙 돈대여. 그르니까, 너두 조심해라. 당최 빨간 옷 입구서 소 앞에서 왔다갔다 하질 마라!"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는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을 수도 있다. 반대쪽은 언제나 다르니까. 아무튼 우리와 다른 건 잘못된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눈썹이 짙은 남자가 황금색 투우 복을 입고 뿔난 소 앞에 도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사르륵 한숨이 새어나왔다. 투우사의 옆얼굴에서 이제부터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의 진지함과 단호함이 그의 남성과 함께 배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 어쩜 소에 받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칼에 찔린 소는 잡아먹었을까.... 맛도 없이 생겼던데. 곰곰이 생각하면서 사거리에 있는 교회의 종탑 앞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슴이 푸욱 파인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탱고 춤을 추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남자의 무릎 위에 허리를 얹고 온몸을 뒤로 젖힌 몸짓이 애처로우면서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요상한 춤이 있다니.... 그나저나 여기서 얼마를 가야만 그곳에 가 닿을 수 있는 걸까.... 이 지구는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생각할수록 반대편 나라라는 개념은 왼쪽 오른쪽 신발을 바꿔 신은 것처럼 엉뚱하고 불편한 것일 뿐, 그나마도 몽상 속에서나 가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지구의 반대쪽에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너무 벅찼던 것이다. 북문이 저만치 보이면서 낯익은 평화약국 간판이 보이자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뒤에 있는 조선 기와집 골목, 그리고 장독대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배가 고팠다. 나는 두 칸짜리 우리 방을 향해 달음박질하였다. 웬일인지 상당히 고단한 하루였다.
평소 뜨악하게 지내던 어머니와 미란이 엄마가 단짝이 되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은 세 가구가 어울려 사는 집 같지 않게 적막하곤 했다. 미란엄마와 어머니는 물론, 재곤엄마도 그 즘에는 연일 집을 비웠다. 그 때는 해가 한참 기울어서야 느지막이 문간을 들어서는 재곤엄마를 종종 보게 되었다. 후카시 머리가 주저앉은 채 긴 치마를 휩싸 안으며 문지방을 넘어서는 그녀는, 신발짝을 들어서 악다구니를 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눈가가 풀어져서 아이들을 향해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어느 때는 자장면을 시켜서 아이들을 먹이기도 했다. 덕분에 형곤이와 재곤이도 집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면서 놀 수 있었다. 대신에 저들의 놀이터인 마당을 가로질러 우물가를 드나들어야만 하는 나와 내 동생은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재곤이에게 가당치도 않은 욕을 듣거나 잔 돌멩이로 등판을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것은 오히려 나은 편이었다. 나이롱 빤쓰, 라고 하면서 동생의 치마를 들치기도 했으니까.

그즈음, 재곤엄마가 전축을 사들였다. 미제 고물이라고는 했지만 성능에는 문제가 없는지 맘보, 차차차 곡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을 흔들어 댔다. 그 후부터는 미란엄마와 어머니가 재곤이네 안방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만나기만 하면 어머니는, 미란엄마, 나 좀 봐줘,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면서 쌀바가지를 우물 둑에 내려놓고 스텝 연습을 하였다.
"난 룸바가 잘 안 돼, 한 바퀴 돌고 나서... 그 때 바로 스텝이 안 되네... 박자가 안 맞아”
어머니가 미란이 엄마 앞에서 오른 발을 옆으로 옮기면서 엉덩이를 틀었다.
"형님은.... 뱃살이 많아서 그렇지이....여기 살 좀 빼셔엉”
미란엄마가 깔깔 거리면서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의 배를 쿡 찔렀다.

"이렇게 셋 둘 셋 넷..."
"미란엄만 금방 배우대”
"울 남편이 춤도사 아니우, 아마 수학선생 안 했으면 춤선생 했을 꺼야”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실력은 별 진전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미란이네와 우리 집 방문은 이래저래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날이 허다해졌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나면 절뚝이 선생집을 찾아가 동생들을 데려와야만 했다. 학교 선생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퇴직한 그녀를 아이들은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는 어른들도 암만암만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절뚝이 선생은 동네 여자들을 끌어들여 자기 집에서 나이롱 뽕 판을 벌였다. 어머니는 그저 반찬값 만드는 재미라고 말했지만, 그런 재미치고는 지나쳐서 하루를 다 보내고 저녁밥을 지을 때서야 미란엄마와 함께 얼굴이 거뭇해서 돌아오곤 했다. 학교가 나보다 일찍 끝나는 동생은 아예 집을 들르지 않고 그곳에 가 머물러 있기 일쑤였다.

집에 혼자 있기 싫어, 동생은 눈을 흘기는 내게 어깨를 흔들어 대며 심통을 부렸다. 그 집 마당에는 제 어머니를 따라온 아이들이 같이 엉크러져 엎어지고, 자빠지고, 울기도 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생각 난 듯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카키색 군용 담요 화투판 아래에 깔려있는 지폐가 누구 앞에 제일 많이 몰려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행운을 잡은 아이는 마당으로 뛰어 나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울 엄마가 일등이야!

절뚝이 선생 집 대문에는 시늉뿐인 빗장이 걸려 있었다. 삐걱 소리를 내는 문은 말로만 대문이었지 실은 판자 쪽을 얼기설기 이어 놓은 문짝이었다. 그나마 낮은 울타리 너머로 집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마당 한쪽은 온통 쑥부쟁이나 강아지풀 같은 잡초와 지난 해 씨가 떨어져 저절로 솟아난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그리고 들깨까지도 범벅이 되어 밭을 이루었다. 한번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뱀을 보았다. 돌멩이를 던져서 쫓아버리긴 했지만 방안에 있던 어른들은 화투장을 움켜쥐고 앉아서 뱀이라는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독사 같애요, 그 소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거기까지 기어들어가 흙 범벅이 되어 뒹굴고는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재곤이 집에 삼촌이라 불리는 청년이 미제 물건 보따리를 들고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재곤이 엄마가 아이들한테 삼촌이라 부르라고 야단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냥 삼춘이면 삼춘이지 양키삼춘이 뭐야! 지 아부지 닮아서 머리가안 돌아요, 안 돌아..... 엄마 외가 쪽으로 동생뻘 된다고 멫 뻔이나 말해야 돼냣! 담부턴 삼추운 그렇게 불러, 알았어?"
재곤이가 입을 댓발 내밀고 방문을 콰당 소리가 나게 닫으며 나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안방을 향해 주먹질을 해댔다. 형곤이가 재곤이 뒤통수를 한 대 쳤다. 평소에는 금방 대거리를 붙었는데 그 날은 웬일인지 재곤이가 한 풀 꺾인 모양이었다. 형곤이를 옆으로 꼬나보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양키삼촌이 찾아온 어느 날, 동생들을 데리러 가야하는 나는 그날따라 공연히 미적 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누님, 안녕하쇼 ?어휴, 여름도 아직 안 되었는데 벌써 더워..."
그는 언제나 같은 복장이었다. 곱슬머리가 이마까지 덮여 있는데다 피부마저 까무잡잡한 그는, 파란 색 셔츠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대문을 들어서면서, 늘 하듯이 공군 장교 선글라스를 처억 들어 올려 머리에 얹었다.
"근데 오늘은 조용하네, 애들이 다 나갔나보네..."
"내쫓았어,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믄 말썽이나 부리지, 머. 근데 동생은 아침에 좀 오시지, 꼭 요맘때 오시까아.... "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어깨를 들썩이며 춤추듯이 걸어 들어왔다. 저 걸음걸이 좀 봐, 건달 중의 상건달 같애, 어머니가 그를 처음 본 날 내게 소곤거렸다. 나는 그에게 우리나라가 몇 년도에 해방되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확실히 답을 못하고 어물쩍 넘어갈 것만 같았다. 너, 나 은근히 무시한다, 응? 양키 삼촌이 어찌 알고 내게 말을 던졌을 때 나는 놀라서 하마터면 어떻게 알았어요, 하고 되물을 뻔했다.

콩콩 마룻바닥 소리를 내며 재곤엄마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양키삼촌이 수선스런 걸음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전축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잠시 후, 알 수 없는 정적이 방안에서 창호지 문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심심하던 오후였다. 기어가는 개미라도 반가운 시간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맘으로 마루 끝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윽고 안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양키 삼촌이 헛기침을 해댔다. 안채 마루와 우리 마루 사이에 칸막이 겸 장식용으로 놓여 있는 찬장 틈새로, 재곤이 엄마가 후카시 머리를 연신 끌어 올리면서 양키삼촌 뒤를 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재곤이 엄마가 양키삼촌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그가 뒤로 넘어질 듯이 휘청거렸다. 잠깐만, 이리 와 봐아… 재곤엄마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어! 양키 삼촌이 막을 새도 없이 재곤 엄마가 그의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허리를 틀며 재곤엄마의 손을 빼냈다..
"빽바지 좀 고만 입어! 손목 부러지겠네."
재곤엄마가 아프다는 듯이 손목을 흔들어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씨이... 진짜 오늘은 고만해...."
양키삼촌이 선글라스를 눈 위에 걸치면서 재곤엄마에게 힘주어 말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얼른 마루 위로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기어가 호마이카 찬장 앞에 웅크리고 앉으며 몸을 숨겼다.
어머니는 양키삼촌이 가져오는 미제 물건 중에 오렌지 탱가루를 제일 좋아했다. 탱가루를 얼음물에 타먹는 날은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오렌지 조각이 그려져 있는 유리잔에 덩어리 얼음을 깨어서 집어넣은 다음 목이 긴 수저로 탱가루를 살살 저으며 내게 건네주는 어머니의 표정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병뚜껑을 열었을 때, 그 때에 올라오던 새콤하며 달콤한 냄새와 알갱이들이 갖고 있는 선명한 오렌지색이 훨씬 유혹적이었다.

바다 건너 어딘가에 있다는 미국이란 그렇게 새콤달콤한, 그렇게 낯설면서 유혹적인 오렌지 맛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탱가루 같은 건 다시 안 먹을 작정이었다. 그 오렌지 색, 그 맛이 음침하고 습습한 곰팡내를 풍기며 내게로 다가왔다. 다시는 안 먹을 꺼야....
그 해 6월에는 국회위원 선거가 있었다. 그 일을 위해 아버지는 자주 출장 중이었다. 가끔 나타날 때는 까만색 지프를 타고 있었는데 차 위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영양 상태가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동행하곤 했다. 어머니는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는 그 여자를 김 여사님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공손하다 못해 쩔쩔매기까지 하였다.

늘 까만 깡통 치마를 입고 있던 김 여사의 피부는 경이적인 흰색이었다. 거기에 비해 어머니의 얼굴은 기미 때문에 검푸르슴해 보일 지경이었다.
엄마, 목욕탕에서 좀 쎄게 밀어봐, 졸라대는 내 말에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얘는, 그게 다 니덜 낳고 생긴 거야, 딸만 내리 셋 낳았다고 할아버지가 언짢아하시지 않든... 걱정 마, 낙시마로 닦고 있어, 하면서 양키삼촌에게서 거금을 주고 사들인 파란색 미제 화장품 통을 가리켰다. 아무튼 아버지가 이런 흰 피부의 여자와 같이 어울려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적이 언짢았기 때문에 곱송거리는 어머니 대신 고개를 바싹 쳐들고 김 여사를 노려보곤 하였다.

"옴머, 미스터 박. 얘 눈 좀 봐, 똘망똘망 하고만”
김 여사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바람에 기세가 꺾이기는 했으나 왜 그런지 썩 맘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아버지를 태운 지프가 재곤이 집 앞 에서부터 사이렌 소리를 내며 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차 뒤를 따라 갔다. 골목을 벗어나면서 차 위에 올려놓은 스피커에서 큰소리가 퍼져 나왔다.

"여러분의 명랑한 생활과 보다 편리한 살림을 위해 공화당은 황소처럼 힘차게 일하겠습니다아”
김 여사의 낭창낭창한 목소리였다.
"인물이지... 한자리 할 여자라니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김 여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자존심도 없는지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세상에 난 여자네요,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작대기 여섯 개, 6번”어머니가 5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 사무실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키 작은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아버지는 한 달 뒤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책상 앞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대신 나무 도시락을 산더미처럼 싸들고 스피커를 매어 단 지프와 함께 사라졌다가 며칠 만에 빨래더미와 함께 돌아오곤 했다.

"야당이 쎈 데 아닌가, 여기가..."
어쩌다가 들르는 할아버지 말에 아버지는 이번에도 염려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다음 일요일에는 뻐쓰 두 대로 갑니다.
아버지는 청년들을 버스로 실어와 할아버지 집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돼지를 잡는 요란한 소리와 시내 양조장에서 배달해 온 막걸리의 시큼한 냄새, 지짐이 기름 냄새가 동네에 가득 차 올라왔다. 나는 동네 입구에서부터 가슴이 뛰었다. 바깥마당에는 차일이 쳐지고 그 아래에는 멍석이 깔렸다. 온 동네 교자상이 동원되고 사람들이 모여와 부산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날랐다.
이 많은 청년들이 어디서 다 왔대여. 그러게 말여. 연신 묻고 같은 말로 대답하면서 아줌마들은 부엌과 우물가를 들락거렸다. 이번에 한 번 더 이겨야 한다던데.... 이 참에 지면 이집도 거덜나는 거 아닌지 몰겄어... 지난번에도 그 판에다 덤벌미 논배미 다 올려붙였다던데...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때 이겼어도 논배미가 돌아왔는가, 그러게 말여. 동네 어른들이 할아버지 뒤에서 수군거렸다.

바깥마당 끝 두엄더미 앞에 할아버지가 혼자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리랑 담뱃갑에서 마지막 한 개비를 뽑아들고는 빈 갑을 손에 쥐었다. 하얀 담뱃갑이 할아버지 손에서 구겨져 두엄더미에 맥없이 던져졌다. 할아버지는 리키다 소나무가 울창한 앞산을 바라보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왜놈덜이 다 심어놓았지. 그러곤 솔가리도 못 긁어가게 산림순사가 지켰어. 걔덜이 여기서 천년만년 살줄로 알았던 거지 뭐여, 시방은 국유림이 되어서 들어가 나무하믄 벌금 내야 되여....그려, 허긴 법이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시상이다만..... "
주변의 산들이 다 헐벗었는데도 유독 나무가 울창한 앞산을 보고 왜 저기 저산에는 사람들이 나무하러 안들어가느냐고 내가 물어봤을 때 할아버지가 해준 답이었다.
술에 취한 청년들이 두엄더미에다 소변을 보려는지 바지춤을 움켜잡고 웅기중기 몰려들자 할아버지는 피다 만 담배를 그곳에다 냅다 던지고는 안채로 사라졌다.
야당이 세다는 지역에서 여당 후보가 재당선 되었다.

그 젊고 통통한 의원님의 벽보에도 황소 한마리가 있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났어도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질 않았다. 벽보가 아이들 손에 의해 수염이 그려지고 눈동자가 해체되고 안경을 쓰기도 하면서 뜨거운 볕에 바래가고 있는 동안에 할아버지는 우리 집 두 칸 방에 들어 앉아 줄창 담배만 피워댔다. 할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담배 심부름이었다. 어머니는 수척해 갔다. 이제는 룸바 스텝에도 지장이 없을 만큼 살은 내려갔지만 얼굴의 기미는 낙시마 크림으로 아무리 문질러대도 눈언저리만을 남긴 채 온 얼굴을 점령해 갔다.

" 가셔서.....애비 얼굴은 보셨어요?"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 어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 사무실에선 손을 안 쓴대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일이 커졌대여…누구라도 한 두 사람은 필시 들어 갈 것 같어...도당에서도 책임을 이쪽에다 죄다 떠다미는가 보더라...그 김 여산가 당 위원인가 하는 여잔 징역샐이 피하질 못할 것 같구. 원체 앞장을 서 놓아서.... 아범은 알고 있기는 했어도 직접 관련은 없다든데 아즉 몰러, 기다려 봐야 혀...."
어머니는 파리하게 얼굴이 질려갔다.
할아버지가 눈길을 돌려 대문께를 응시하면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무리 법이 멀리 있다구 해두 시상에 어디라고 무효표를 맹글어? 그건 못써! 원,말 들어보니 나라도 금세 알아보겠더구먼. 남이 투표한 데다 손도장을 찍었대든가, 동글뱅이 하날 더 찍었대나, 아니믄 남이 제대로 찍어 놓은 걸 손으로 아예 문질러 버렸대잖어. 그쪽덜이 다 빙신이여?그게 글쎄 으떠케 넘어갈 꺼라고 생각핸 거여.... 쯧쯧, 걔는 그 정치판엔 왜 끼어들어 가지고.... 내, 그르케 말렸다만....."

할아버지의 말대로 김 여사와의원님이 구속되고 재검표를 통해살아 난 야당 후보가 처음의 개표 결과를 뒤집고 당선되었다. 아버지는 근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얼굴이 하얘진 아버지를 위해 한약을 달여 댔고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낯선 사람들이 연신 찾아왔다. 나와 동생은 손님이 올 때마다 밖에 나가 있어야만 했다. 아이들한테는 숨겨진 일이 많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알아서 안 되는 일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수군댔다. 아이들이 알아서 안 되는 일이란 대부분 음험하고 불순하고 조악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7월, 새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다.
".....오늘로 시작되는 국정의 새 출발을 위해서.....6.8 선거로 빚어진 정쟁 분위기를 냉각시키고 사리와 당리를 초월한 국가의 대의와 국리 만복의 증진을 생각해야겠습니다.......6.8 부정선거가 유감스럽게도 입후보자들의 과열된 경합으로 그 분위기가 혼탁하게 되었고 또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선거의 부정은 급기야 총선 전체를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인상주고 말았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민주 시민의 큰 실망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법을 어긴 자에게는 법으로 다스리고, 민주주의 과정에서 일어난 과오는 민주주의 방식에 의하여 시정함이 민주사회에 있어서 최선의 방책임을 우리는 명심해야겠습니다....."

라디오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대통령의 취임사를 듣고 난 아버지가 끄응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오후 늦게 일어난 아버지가 다락에서 붉은 색 죠니워커 술병을 꺼냈다. 어머니가 어렵사리 장만해 손님 접대용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해가 졌을 때는 술병의 술이 반이나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의 발작은 바로 그날 밤에 시작되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또옹 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아~ "

해병대 영화 속의 군가를 부르면서 아버지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마루로 뛰쳐나갔다. 어이없게도 아버지는 마루에서 비틀거리며 찬장을 올라타려고 헛발질을 계속 해대고 있었다. 엄머,엄머! 어머니를 비롯해 안방, 문간방의 세 여자들이 뛰어나와 아버지를 말렸지만 괴력으로 그들을 밀쳐낸 아버지는 계속 찬장을 타고 넘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가 발을 올리고 용을 쓸 때마다 찬장이 엎어질 듯 말듯 흔들거렸다.

아버지의 고성방가는 이절 삼절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호마이카 찬장에 붙어 있는 아버지의 다리를 떼어 놓느라고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절뚝이 선생 집에 모이는 사람들끼리 차단스 계를 들어서 장만한 살림이었다. 봉황새 무늬가 새겨진 연한 갈색의 반들반들한 이단짜리 찬장은 어머니에게 사실 제일 큰 재산이었다.
아버지 셔츠의 등판을 잡아당기며 용을 쓰던 재곤엄마는 아버지가 내두른 팔에 얼굴을 얻어맞아 밀려난 채로 분합문을 붙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안 돼, 안 돼! 재곤 엄마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간절하게 말렸다. 찬장이 쓰러지면 마룻바닥이 주저앉는 것은 물론 잘못하다가는 분합문의 유리까지 깨질 판이었다.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피가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노래는 사절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노래가 아니고 발악이었다. 마침 진학반 과외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미란아버지가 기겁을 하고 달려왔다. 키가 큰 그가 아버지의 허리를 뒤에서 부둥켜안고 나동그라져서야 발작이 멈췄다.
"어이, 동지, 나랑 한 잔하시지!"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누운 채로 미란아버지에게 어린애처럼 칭얼대었다. 미란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면서 웃는 얼굴로 그럽시다, 하고 말하자마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매섭게 그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오영일이를 닮은 미란아버지가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마당에는 정적이 흘렀다.

"...어쭈, 너도 웃으며 거짓말 하는 거지? 동지 좋아하네! 니가 내 동지냐? ...진짜 동지들은 삼팔선에서 다 죽었어. 임마, 웃지 마, 이 기생 오래비야!"
어머니와 미란엄마가 동시에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비명을 질렀다. 미쳤어요? 왜 이래욧?
어머니가 악을 쓰며 아버지 가슴팍을 떠밀고 미란엄마는, 아니 누가 기생 오래비예욧? 하면서 남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무더운 밤이었다. 온통 끈적한 밤의 열기가 재곤네 마당 안에 가득 차 올라왔다. 아버지가 디디고 선 땅은 내게 더 이상 우주 공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잡고 있던 조종간을 놓고 있었다. 이제는 내 우주선이 박살나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으로 수많은 유성들이 흘러갔다. 동생이 내게 반 울음으로 말했다, 언니 손 아퍼. 나는 그제야 동생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놓아주며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자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형곤이와 재곤이가 대문 앞에 멀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내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뭘 봐, 이 새끼야! 재곤이가 흠칫하며 한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넌 또 왜 그러니?그 와중에도 무슨 정신인지 어머니가 날 향해 총알같이 쏘아댔다.

평화약국 안에는 갈색의 털에 푹 파묻혀 있는 개 한마리가 있다. 크레졸 냄새가 나는 약국 안에 사람이 들어서면 그 개는 그저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린다. 한 번도 짖는 법이 없다. 귀족적인 얼굴을 한, 그 늙은 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주인이 던져 주는 먹이 뿐이다. 래시! 주인이 먹이를 들고 이름을 부르면 그것도 아주 굼뜨게 움직여 다가간다. 그래도 그 때는 살아 있는 것 같은 래시. 잘생긴 턱도 어깨도 쓸모없이 되어 버린, 야성을 다 잃은 개는 가죽 끈에 묶인 걸 아는지 모르는 지,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설마 아버지가... 하면서도 후덥지근한 밤, 내 상상의 끝은 결국 평화약국 안에서 정물이 되어버린 래시에게 가서 닿았다.
그 후로도 술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영락없이 마루로 뛰쳐나가 찬장을 타고 넘으려 했다. 아니 이 차단스가 무슨 죄가 있다구 이래여, 도대체 이걸 넘어서 어딜 가고 싶다는 거여? 어머니가 때마다 악을 써댔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호마이카 찬장은 어머니의 한숨과 함께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부엌 구석으로 밀려 나갔다.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찬장은 반들거리던 표면을 이리저리 긁힌 채 부엌 먼지를 뒤집어 써가는 운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어느 날, 아버지가 전축을 사들였다. 시끄러워서 숙제 못 하겠어, 아부지.... 하지만 차차차, 탱고 음악 소리는 방안에서 점점 커져갔다. 너도 만화책 보러 다니지 않어, 나도 이게 취미야, 취미, 짜슥아....아버지는 내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았다. 때로는 쌍 독수리 행진곡이나 언덕 위의 포장마차가 쿵쾅 울려 나오기도 했다.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행진곡 나팔소리에 놀라 아침 밥상에서 아래가 좁은 일본식 밥공기를 들러 엎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곡조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아버지 입에서 혹시라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다는 노래가 튀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전축을 들여온 후로는 웬일인지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두 전축이 낫다, 찬장 타고 넘어가는 것보다, 안 그러니?"
음악 소리를 피해 공책을 들고 마루로 나가는 나에게 두레반을 펴주며 어머니가 말했다.
"....잃어 버리인 그 사라앙을 아쉬이워 하아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어글피 찾아 왔다아 울고 가는 삼가악지~~~~"
레코드가 돌아가면 경음악에 맞춰 아버지가 노래 가사를 불러댔다.
아부진 미국 노래 몰라? 신나는 거. 내가 물으면, 왜 몰라, 임마.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다 알지, 그럼 일본 노래는? 그것도 다 안다. 월남노래는?... 그건 아직 모르지이.
아버지는 그래도 여전히 구슬픈 노래만 따라 불렀다.

우리 방에는 아버지가 없는 시간에 맞춰 어머니의 화투 친구들이 이차로 참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취미생활 덕분에 우리 방에는 월남치마 부대들로 붐벼대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수난은 단지 우리 자매들에게만 떨어진 일이었다. 방구석에 물러나 앉아 있던 나와 동생들은 아줌마들의 치마폭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을 맞아야만 했다. 밤이 되면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미닫이 창호 문에 그림자 한 떼가 빙빙 돌면서 몰려왔다 몰려가고는 했다. 그림자는 그 속에서도 깔깔거리며 머리를 흔들어대고 웃었다. 진출해야지, 맨날 방구석에서 여자들끼리만 끌어안고 뱅뱅 돌 꺼야? 곱돌 바닥 한번 휩쓸어 봐야 하는 거 아냐!

너울거리는 그림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졸음이 왔다. 졸린 눈을 비비고 나면 그림자들은 실제보다 길게 늘어져서 문짝 위에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래를 좋아하던 일 학년짜리 동생이 용케 차차차 음악의 리듬을 알아듣고는 음악이 끝날 때마다 차차차! 소리를 내며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쳐댔다. 나는 기겁을 해서 동생의 손을 끌어내렸다. 안 돼! 이건 어른들 노래야!

어머니는 우물가에서도 슬로우 슬로우 퀵퀵, 두 발 모으고, 걷고를 반복하면서 움직였다. 박자가 어려운 룸바는 대충 넘어가고 부르스에 열중하고 있는 어머니는 여전히 솜씨가 늘지를 않는 모양이었다.
그즈음, 어머니 얼굴에서 안경을 쓴 것 같았던 기미가 서서히 벗어져 나갔다. 낙시마 덕분이라고 어머니가 열심히 선전하는 바람에 양키삼촌까지 행복해졌다. 그 후로 생긴 낙시마 단골손님들을 위해 전용 가방을 준비해야 했으니까.

여전히 어머니가 절뚝이 선생 집으로 출근했던 어느 날, 마당 안 아이들한테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양장점에 딸린 가게 방에서 단추가게 여자, 사라가 죽어 나왔다는 것이었다. 사라는 병원차가 와서 실어가고 양장점 여자가 살인죄로 경찰에 잡혀 갔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단추가게 여자, 사라가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마른 바람에 연탄재가 날리는 대문 앞 골목에서 수런거리는 동네 아줌마들의 이야기 가운데, 뱃속의 아기가 칼에 찔린 채 같이 죽었다는 둥, 그게 아니라 엄마가 죽은 뒤 뱃속에서 나온 아기도 죽어서 따로 보자기에 싸인 채로 실려 갔다는 둥, 별스런 소식들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그러고 나서 더 별스런 일은 우리 집 문간방에서 일어났다. 저녁 무렵 경찰이 와서, 막 퇴근을 하고 와 구두끈을 풀고 있던 미란아버지를 데려 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라가 갖고 있던 아기의 아버지가문간방 수학 선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카바레에서 만났대며, 얼굴 값하고 노네... 우리 방에 모이는 아줌마들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아들 볼라고 그랬대매, 아이고, 그게 다 핑계여, 무슨 아들 타령.... 어쨌든 미란엄마가 안됐어.. 쯧쯧.

미란아버지가 조사를 받고 돌아온 다음 날, 미란네는 세간을 그대로 놓아둔 채 온 식구가 야밤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트럭이 와서 짐을 실어가고 문간방은 곧 비어졌다.
나는 그 이후로 단추가게를 피해서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그곳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오싹했다. 얼굴이 조그맣고 하얗던 사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침한 구석방에서 나를 향해 걸어 나오며 웃던 얼굴이 확 달려들면서 그녀가 손가락을 내 목덜미에 처억 걸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핏덩어리 아기까지 내 뒷덜미를 잡아 당겨댔다. 얼마 뒤에 단추 상점이 내복 가게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다시는 그 길로 들어서질 않았다. 골목을 하나 더 지나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그 여자의 단추가게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죽음 직전의 사람과 면대해 본 이 사건은 오랫동안 날 괴롭혀댔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은 지나가고 초등학교 3학년, 초겨울이 닥쳐왔다. 절뚝이선생 집 마당에서 놀기에도, 북수문 냇가에서 놀기에도 쌀쌀했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햇살이 따스한 담벼락에 붙어서 말 타기를 하거나 만화가게를 기웃거리는 일로 남는 시간을 보내던 그즈음, 그 날은 웬일인지 토요일이 아닌데도 재곤이 아버지가 집에 와 있었다. 재곤이, 형곤이는 가방을 들러멘 채 마루 앞에 서성이고, 재곤이 아버지는 허름한 점퍼 차림의 남자와 함께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며 잔뜩 인상을 써대고 있었다. 어머니가 부엌 문 앞에서 그 쪽을 기웃거리다가 대문을 들어 선 날 보자 급히 손짓을 해댔다. 어머니는 소리 죽여 쏜살같이 말했다.

"빨리 들어와!얘, 거기 가지마아. 쉬이, 목소리 낮춰. 형사래, 경찰서에서 나왔대, 재곤 아부지 친구란다. 재곤네 집에 도둑 들었대.... 돈이 없어졌댄다......"
무슨 돈? 부엌 문짝에 기대어 묻는 내 말에 어머니는 속삭이는 소리로 답했다. 곗돈 탄 거....
얼마나? 얘는, 아주 많으니까 저 난리지...근데 이젠 우리가 일 났다. 보나마나 방세 올리겠지, 머.
어머니는 앞치마 밑으로 손을 찔러 넣으며 부엌 안으로 사라졌다. 형사가 입을 쩝쩝 거리다가 벌떡 일어섰다.
"일단, 곗돈 탄 걸 아는 사람이 누군가, 그거부터 알려주고.... 너 계수씨, 너무 족치지 마, 그러다 생병 나겠다."
형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방안에서 갑자기 앙칼진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 같은 년 하나 죽음 되지이! 나 죽음 갖다 파묻음 되잖어어! "
재곤엄마의 쇠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마루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안방 쪽으로 돌렸다. 씨발, 재곤이가 침을 찌익 뱉으며 뇌까리자 재곤 아버지가 이 짜아식이, 하면서 재곤이 머리통을 냅다 후려쳤다. 머리통을 휩싸 안고 흰자위 가득한 눈으로 힐끗 제 아버지를 쏘아보던 재곤이는 형사가 있는 것을 의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그 어깨 위로 제 엄마를 닮은 재곤이의 찢어진 두 눈, 숱 적고 노르스름한 머리카락이 보이고 쇳소리를 내며 목을 넘어오는 욕지거리가 귀에 쟁쟁 들려왔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재곤이가 던진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 호되게 아팠던 일.... 어떻든 그 후로는 재곤이가 있으면 마당에도 제대로 못나갔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재곤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리자 예전 미란이네 방문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가 보였다. 거기에 겹쳐서 단추가게 여자, 사라의 하얗던 얼굴이 떠올랐고, 치마폭을 날리며 스텝을 밟던 사람들과 그네들의 지절거림이 들려왔다. 나와 내 동생들은 작아서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았지. 절뚝이 선생 집의 화투판이던 카키 색 담요, 이매조, 홍싸리, 사꾸라, 비, ... 알록달록한 화투장이 보이고 마당 잡초 숲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뱀 한 마리. 슬로우 슬로우 퀵퀵, 부엌으로 내밀린 호마이카 찬장. 할아버지가 두엄더미에 내던진 아리랑 담뱃갑.... 그리고는..... 아주 불행하게도 양키삼촌의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던 재곤엄마의 노오랗게 뜬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심호흡을 하였다. 가슴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형사는 이제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나는 발을 떼었다. 서너 발자국 형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잠깐만요! .....제가 봤어요.... 누가 안방에서 나오는 거요”
형사가 후다닥 걸음을 멈추었고 재곤 아버지가 마루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재곤이가 나를 향해 홱 몸을 돌리고 형곤이는 둥그레진 눈으로 가방 끈을 고쳐 매었다. 안방에서는 재곤엄마의 청승맞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마당 안, 쌀쌀한 공기가 코끝에 맵게 닿아왔다.
".....저어, 남잔데요,머리는 곱슬이고 색안경 끼고 .... 까만 가방 갖고 있었어요. "

재곤이가 소리를 질렀다.
"어! 씨이발, 양키삼춘이네에!"
그러자 방안에서 울음소리가 딱 그쳤다. 눈이 크게 열린 어머니가 엎어질 듯이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엄머, 엄머, 얘가 미쳤나봐, 넌 지금 왔잖어? 니가 은제 봤다고 그래애?"
형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꺾으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퉁방울 같은 그의 눈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그으래? 아는 사람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알아요, 양키삼춘이에요”
어머니는 내 입을 틀어막으며 부엌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아이고오! 얘 말 믿지 마세요, 만활 너무 봐서 그짓말하는 거예요, 그 시간엔 집에도 없었에요! 너 증말 미쳤니? 엉?"
어머니는 내 등짝을 퍽퍽 두드려 팼다. 나는 머리를 마구 흔들어 대며 악을 썼다.
"왜 때려? 알지도 못하면서! 엄만 암 것도 모르면서 왜 때려어!"
"어머, 어머머머!이 지지배, 눈 좀 봐아!아주 눈에서 불이 나네, 불이 나!"

재곤 엄마는 파주 친정집으로 쫓겨났다. 안양에 사는 재곤이 할머니가 내려와 아이들 건사를 해주면서, 며느리년이 서방질을 하는 바람에 얼굴 들고 살지 못하겠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곗돈을 찾았는지는 내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열 살이 끝나 가려는 그 즈음에 나는 이미 세상이 그렇게 만화처럼,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가려져 있지만 앞으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세계가, 꿀벌이 인동초 덩굴에 날아다니며 잉잉거리고, 장미향이 풍겨 나오는 모슬린 잠옷을 입고 레이스가 길게 드리워진 침대에서 게으른 아침을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무지갯빛 꿈같은 것들,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소나무 숲에서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품에 안겨 잠들고.....그것이 인생의 모두인 양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애를 쓰고 있지만 그것들도 모두가 연극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 일상은 다 허상이라는 것, 그저 어머니처럼, 미란이, 재곤이 엄마처럼, 황급히 밀려오는 세상 앞에서 어리둥절하다가 부딪치고 깨어지며 그렇게 흘러가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런 논리를 끌어낼 수 없었지만 다가오는 나의 삶에 대한 은근한 불안과 한숨이, 그 그늘이 무엇인가를 열 살, 초겨울에 나는 이미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도 곧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긴가민가해서 찾아온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청포도 과수원에 대한 자료를 방바닥에 늘어놓고 설명을 했다.
"청포도오?"
할아버지가 뜨악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예에, 진흥청에서 자세히 알아봤어요. 이 나이아가라 청포도가 토질에도 맞고 추위에도 강하다니까 한번 해보려구요”
"그러믄 보리밭 배추밭을 다 갈아엎으란 말여?"
"보리는 수익성이 떨어지잖아요, 배추야 우리 먹을 거만 심으면 되구요. 농사도 이제는 수익성이 높은 고급 작물로 돌아서야 해요”
"그건 그려어, 그르치만 파란 포돌 누가 사먹겄어? 안 익은 줄 알고 안 사먹음 으떠켜? 그거 보담야....하우스 나이롱 채미가 낫잖어? 그걸로 재미덜 많이 봤다든데…"
마땅찮아 하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는 결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과목은 얼마라도 준다고 했어요. 더 추워지기 전에 우선 지력부터 높여야겠어요."
그동안 열심히 발품을 팔던 아버지가 일으킨 꿈은 신작로 옆에 있는 보리밭을 청포도 농장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시어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 파란 포도가 껍질도 얇고 달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 후, 영사기를 싣고 다니던 당사무실 트럭이 이삿짐을 실으러 대문간에 도착했다. 나는 차 소리를 듣자마자 뛰어나갔다. 아침녘에는 눈이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려 있더니 점심때가 가까워지면서 개어가는 중이었다. 문 앞에 서있는 흰색 트럭은 위에 덮개가 있고 뒷문에는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나는 가만히 차를 쓰다듬었다. 이제 여섯 번째 이사였다.

할아부지, 나 여기, 이 집 싫어, 맨날 욕만 먹어. 장에 나왔다가 들러가는 할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면 할아버지는 그러믄 못써!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담배 연기가 구수하게 풍겨오는 할아버지 옷소매를 붙잡고 나 할아버지랑 갈래, 하고 강짜를 부리면 십 원짜리 종이돈 한 장을 쥐어 주고 할아버지는 야속하게 돌아서곤 했다. 어쨌든 나는 이 트럭을 타고 돌아가 증조할아버지의 증손녀, 그리고 할아버지의 장손녀 자리를 회복할 것이다.
열매를 떨군 대추나무 그림자가 툇마루에 와 닿는 사랑방에서 장화홍련전을 읽으며 할아버지와 함께 , 그까짓 탱가루 같은 것 말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식혜를 마실 꺼야, 열자 깊이 우물에 집어넣은 붕어가 이무기가 되었다는 해묵은 얘기를 질리도록 다시 들을 테다.... 가마 솥 뚜껑을 솥 안에 끼워 넣은 집 도깨비랑 맞장을 떠서 내쫓았다는 증조할아버지 얘기도 이젠 다 믿을 거니까....나는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아무튼 이제 나는 돌아간다. 아침이면 밥 짓는 냄새, 들기름에 굽는 김 냄새가 가득 차오르는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트럭의 뒷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부엌에서 끌려 나온 호마이카 찬장이 들어갔다. 전축을 버티고 있던 나무다리 네 개가 보자기에 싸여 방안에서 나온 다음, 이불에 둘둘 말린 전축 몸통과 함께 차에 실리고, 윗목에 있던 보라색 철제 캐비닛이 들려 나왔다. 곧, 자잘한 짐들이 실리고 는 내내 아버지의 책들을 옮기는 일이 남았다. 마지막 작업으로, 아직도 절절 끓는 연탄불을 재곤이네 부엌 아궁이에 옮겨 놓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대문을 나섰다. 골목 바람이 몰려왔다. 누구네 집에선가 담북장이 연탄불에 끓어 넘친 모양이었다.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바람에 묻어왔다.

하릴없이 담장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재곤이가 눈꼬리에 힘이 빠진 기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돌멩이를 툭툭 차댔다. 나는 양손을 고리땡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꼿꼿이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재곤이가 흘낏 내 눈치를 보았다. 나중에는 등판을 담장에 붙이고 게 걸음으로 슬슬 피해갔다. 주머니 속, 내 손 안에는 아침부터 밀크캐러멜 두 개가 붙들려 있었다. 아끼고 아껴 먹던 미루꾸였다. 손 안에서 노골해진 캐러멜을 입안에 톡 털어 넣고 싶었지만 이삿짐 트럭 안에서 참참이 먹으려고 남겨 놓은 것이었다.

"야!"
내가 부르는 소리에 재곤이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이 몸을 움찔했다.
"....이거 먹어, 미루꾸!"
재곤이는 못 알아들은 듯이 멍하니 나를 바라 보았다.
"야! 미루꾸, 안먹어?"
다시 한 번 재촉을 하고 나서야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재곤이는 미루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빨리 받어, 손 시려!"
재곤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애의 손바닥에 미루꾸 두 개를 내려놓았다. 재곤이가 씨익 웃었다. 나도 웃었다. 뒤에서 트럭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아버지가 조수석에서 내려와 차 뒷문을 열어줬다. 차에 올라탄 다음, 전축 주변에 바리케이드처럼 둘러놓은 이불더미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동생 곁으로 갔다. 전축의 문짝 편에 등을 기대자 뒷문 유리창으로 밖이 내다보였다. 뿌연 유리창 탓인지 골목이 부옇게 흐려 보였다.

흐릿한 골목, 그 자리에 상고머리, 납작 고무신 차림의 작은 내가 서 있었다.
재곤이는 트럭의 꽁무니를 바라보고 서서 뾰족한 턱을 열심히 움직이며 미루꾸를 씹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렇게 나쁘지 만도 않았어." 내가 말했다.
"뭐가?" 동생이 물었다.
트럭은 골목 언덕을 빠져 나오느라고 뒤뚱거렸다. 그럴 때마다 한옥들이 주욱 늘어선 골목이 같이 흔들렸다.

                                        
<2008년 미주문학 가을호에 발표>